투사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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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작배경
3. 광주시민과 함께
4. 의의
5. 원문
5.1. 투사회보 제1호
5.2. 투사회보 제2호[1]
5.3. 투사회보 제3호
5.4. 투사회보 제4호
5.5. 투사회보 제5호[2]
5.6. 투사회보 제6호[3]
5.7. 투사회보 제7호[4]
5.8. 투사회보 제8호
5.9. 민주시민회보 제9호[5]
5.10. 민주시민회보 제10호
6. 참고자료


1. 개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윤상원과 들불야학이 중심이 되어 만든 저항언론이자 대안언론.

2. 제작배경


5.18 민주화운동 당시 언론은 완전히 광주의 진실을 외면했다. 그것은 5.17 쿠데타로 인해 권력을 잡은 신군부의 탄압이 두려워서였다. 광주 일원의 언론조차도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리하여 기자들이 단체로 사표를 내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윤상원와 들불야학 강학들은 녹두서점[6]에 모이게 된다. 그곳에서 윤상원은 일행들에게 '''투쟁의 열기를 끌어올리고 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투사회보'를 제작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민들에게 받은 지원금이 있는지라 이것을 토대로 갱지와 등사기를 구매했다. 그리고 모인 강학들을 팀을 나누어 제작에 들어갔다.
'''투사회보 제작팀'''[7]
문안 작성
윤상원, 전용호
등사
김성섭, 나명관, 서대석, 이영주
필경
박용준, 동근식
물자보급
김경국, 정재호, 신병관
배포
들불야학 강학들, 광주 학생들
취사
노영란, 양숙경 등 야학 출신 여성들
작업실
야학 근처 빈집 ⇒ YWCA[8]

3. 광주시민과 함께


투사회보 제작팀은 3대의 등사기로 밤새도록 등사를 해 하루에 5~6천 장을 제작하여 시내에 배포했다. 들불야학 강학들, 광주의 학생들, 여성노동자 등이 제작한 회보를 숨겨가지고 몰래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강학들과 학생들도 밖으로 나가 계엄군의 동향, 시위와 집회의 전개, 시민들의 모습 등의 정보들을 수집하였다. 그리하여 21일에 첫 1호를 배포한 이래로, 25일까지 8호까지 제작, 등사, 배포하였다.[9]
25일 항쟁지도부가 개편되면서 투사회보의 제작장소는 YWCA로 바뀌었다. 그 동안 야학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몰래 인쇄를 해야 했던 제작팀은 더 좋은 환경에서 투사회보를 만들 수 있었다. YWCA 안에는 수동윤전기가 있었는데 등사기에 비하면 훨씬 더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 찍던 부수의 7~8배나 되는 양을 찍어낼 수 있었다. 투사회보의 이름도 바뀌어 26일부터 배포된 유인물은 '민주시민회보'라는 제목으로 찍혔다. 다만 투사회보를 잇는 것이었으므로 호수는 그대로 갔다.
한편 투사회보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는 꽤 긍정적이었다. 시민들은 투사회보를 자신들이 접할 수 없는 정보를 전해주고 행동강령을 정해주는 알리미라고 여겼다. 그래서 투사회보가 배포되면 사람들은 서로 읽어주거나 다른 이에게 전해주곤 했다.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 호의나 금전적 지원을 베풀기도 했다.

26일 낮에 경비근무를 서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 한 분이 YWCA 앞에서 계속 서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아저씨 뭐요?" 라고 물었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러분들이 아주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쌀을 조금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날 저녁식사는 모처럼 포식을 할 수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동참하고 도와줬지만 소리없이 뒤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고맙고 가슴 뿌듯했다.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절대 옳은 행위라고 확고한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했던 김성섭의 증언

하지만 광주항쟁이 진압당하면서 투사회보도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27일 새벽 계엄군의 공략장소에는 YWCA가 포함되어 있었다. YWCA에서도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고, 이곳에서 투사회보를 제작하던 박용준이 사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리고 배포를 준비 중이던 '민주시민회보 10호'는 계엄군에 의해 전량 압수당하고 만다. 또 5.18 진압 이후에는 투사회보를 제작한 활동가들과 녹두서점에서 활동한 운동가들이 잡혀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4. 의의


[image][10]

야, 이 자식아. 유인물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총칼 들고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흥분해 가지고 총든 시민들 통제할 수 있겠어? 감정만 앞서 가지고 계엄군을 이길 수 있겠냐구. 우리가 할 일이 없어서 이 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아? 시민군을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서 선전선동은 생명과 같은 거야. '''투쟁열기를 높이고 투쟁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할 일임을 명심해! 총이 거리에 쏟아지면서 겁먹고 피신한 시민들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어. 그 사람들에게 공수놈들의 학살만행을 고발하는 게 우리의 임무야! 다시 싸울 수 있게 알리고 또 알려야 된단 말이야! '''전두환이는 총칼보다 투사회보 한 장을 더 무서워해.''' 알았어?[11]

항쟁기간 동안에 진행된 민중언론의 창설과 선전조의 운영은 민중의 목소리를 반영하면서 시민들의 행동통일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제도언론마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격문이나 플래카드, 가두방송이 지니는 일시적인 성격, 부분적인 약점을 극복한 활자로서의 지속성, 논리성, 변두리 지역까지 보급될 수 있었던 전면성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선전활동이었다. - 황석영

첫째, '''5.18의 유인물과 홍보 체계를 통일하였다.''' 사실 투사회보가 5.18 때 뿌려진 최초의 유인물은 아니었다. 5월 18일부터 계엄군의 폭력진압을 규탄하고 시민들의 단결을 외치는 유인물들이 뿌려지고 있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그러했고, 광주지역 문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운동가들도 그러했다. 들불야학의 강학들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유인물을 제작해 유포하기도 했었다. 다만 이런 유인물 활동은 통일되지 못하고 난잡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 것을 윤상원의 주도로 '투사회보'에 유인물 제작을 통일한 것이다.[12]
둘째, '''주류 언론이 무력한 상태에서 언론의 기능을 해주었다.''' 광주지역에서는 기자들의 집단 사표 제출이 있던 20일 이래로 신문이 발행되지 못했다. 또한 통신도 두절되어 소식을 듣거나 알릴 방법이 없었다. 어쩌다 접하게 되는 주류 언론이나 방송의 소식은 5.18을 폭동으로 왜곡하는 것들뿐이었다. 이에 시민들은 올바른 언론매체를 원하고 있었는데 투사회보는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전문적인 기자들을 모아서 제작하는 신문에 비하면 조잡한 소식지에 불과했으나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했던 광주시민들에게는 투사회보의 가치는 분명 큰 것이었다. 실제로 조선일보의 (한 때는 미공개였던) 취재자료에 따르면 "정부 및 계엄당국과 당국이 비행기를 통해 살포하는 전단과, 투사회보 등 시위주동자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유인물만이 대향으로 나돌아 유일한 보도매체 구실을 맡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5.18을 온 몸으로 직접 겪은 시민들이 둘 중 무엇을 더 믿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5. 원문



5.1. 투사회보 제1호


1980년 5월 21일 발행된 「전남민주회보」가 투사회보 제1호일 것으로 추측된다.


5.2. 투사회보 제2호[13]


민주투사들이여! 더욱 힘을 내자!!

승리의 날은 오고야 만다.

광주 시민의 민주 봉기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각지에서 민주의 성전에 동참해 오고 있다.

21일에는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제 승리의 날은 머지 않았다.

'''승리의 날까지 전시민이 단결하여 싸우자! 이기자! 민주의 만세를 부르자!'''

KBS방송국을 접수하여 방송을 통해 각지에 이 참상을 알리자.

.외곽도로 차단(서울 목포 화순 송정 남평 기타)

.차량임무분담을 표시하자(지휘부, 연락부, 보급, 구급, 기타)

.인근 지역에 나가 투사를 규합하자.

.전시민은 지역방어와 보급품을 제공하자.

- 21일 소식 -

1. 오후 6시경 공수부대 금남로에서 조대로 이동

2. 오후 7시경 공원 주위 시민들이 무장완료, 중심지역 무장 조편성 근무 완료

3. 오후 8시경 무등경기장에서 무기 지역별 공급과 조편성 실시완료

4. 오후 23시 공수부대 180명 정도 매곡동 부근(31사단)에 투입

1980년 5월 22일


5.3. 투사회보 제3호


─ 민주 승리의 날이 드디어 오다! ─

민주투사들이여! 승리의 날이 우리 눈앞에 오고 있다. 힘을 내어 더욱 분발하자.

*KBS 방송국을 접수하라

*전 예비군과 경찰이 앞에 서서 전투를 지휘합시다.

*외곽도로 차단을 계속하자

*효천 연탄공장 앞에 공수특전단들이 집결하고 있다.

*공격 목표 없는 발포로 실탄을 소비하지 말자.

*전 차량에 임무 분답 표시를 하자.

대형차 = 수송 보급 무기 및 실탄, 소형차 = 구급 홍보 연락 지휘

*소형차에 스피커를 설치하라.

*전 시민은 조기를 부착하고 동별로 플래카드를 준비하여 도청 앞에 집결하라.

*전 총기는 어른들에게 넘기고 지휘자의 명령 없이는 발포를 엄금한다.

*전 시민은 투사들에게 물자를 공급해주자.

*21일 밤 15명 사망 수싮 명 부상, 각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9시 국무총리 서리가 내관할 예정이다. 감언이설에 속지 말자.

*전 세계의 매스컴이 광주로 집결하여 참상을 보도하고 있다.

투사들이여 힘을 내자!

1980년 5월 22일

광주시민민주투쟁협의회


5.4. 투사회보 제4호


투사회보 4호는 제작되었다는 투사회보 제작팀원의 증언이 있으나 그 원문은 현재 발견되지 않았다.

5.5. 투사회보 제5호[14]


─ 광주 지도급 인사 시국 수습차 계엄사령부 방문 ─

재야·종교계·학계 등 광주 지도급 인사들이 현시국을 수습키위해 5월 22일 오후 3시 계엄사를 방문하였다.

광주 애국 시민여러분! 민주 쟁취의 그날까지 무장을 더욱 강화합시다.

'''민주쟁취 시민 궐기대회'''

5월 23일 오후 1시<도청앞 광장>

광주 시민은 각 동별로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도청앞 광장으로 집결할 것.

각 학교는 학교별로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금남로로 집결할 것.

중고등학생 무기소지 엄금

중고생 여러분은 무기를 어른들께 인계하여 오발사고를 방지합시다. 총기 오발사고로 여러분의 동료가 죽어갑니다.

우리의 구호

'''최규하 정부는 즉각 물러가라.'''

'''전두환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라.'''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구속중인 학생과 모든 민주 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

구국 민주 과도정부를 즉각 구성하라.

광주 시내에 배치된 계엄군은 즉각 철수하라.

민주구국투쟁위원회의 결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투사들이여! 끝까지 투쟁하자.'''

1980년 5월 23일


5.6. 투사회보 제6호[15]


광주시민의 민주화 투쟁

드디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다.

광주시민은 하나로 뭉쳐 더욱 힘을 내어 싸웁시다!

계엄당국의 끊임없는 억압과 허위사실 날조에도 불구하고 민주화투쟁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남도민은 분연히 일어섰다

민주화투쟁은 광주, 목포, 담양, 장성, 나주, 보성 등 16개 시군으로 확산되어 유신잔당의 반민주 억압에 항거 더욱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세계각지의 언론기관은 광주사태의 진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며 한국기자협의회의 기자들은 광주에 잠입하여 진상취재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의 행동강령◎

첫째, 광주시민은 최규하정부가 총사퇴할 때까지 끝까지 싸운다.

둘째, 광주시민은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무장을 강화한다.

셋째, 중고등학생의 무기소지를 금한다.

넷째,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은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

다섯째, 광주시민은 대학생들의 질서있는 투쟁에 전적으로 협력한다.

'''민주시민들이여! 서로 힘을 합(合)합시다.'''

광주시민 민주투쟁 협의회


5.7. 투사회보 제7호[16]


─ 드디어 제1차 전남도민 시국궐기대회를 가지다! ─

5월 23일(금) 오후 4시 도청앞 광장에서 2만여도민(시민·학생·노동자·농민)이 참석한 가운데 시국에 관한 각계의 입장을 밝히고 구체적인 결의를 다짐.

결의사항

'''흉악무도한 전두환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라.'''

'''불법 비상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현 최규하 과도정부는 물러나라.'''

민주인사 구국내각을 구성하라.

신고하지 않은 무기소지자는 시민군의 무기회수에 반드시 따르라.

보라! 그동안의 참혹한 만행을!

사망 확인·미확인자수 600여명

중경상자수 무려 2,000여명

※광주 시민이여! 모두 참가합시다.

5월 24일 오전 11시 도청앞 광장에서 제2차 궐기대회 개최

동별로 프랑카드를 들고 전시민이 참가합시다.

1980년 5월 24일

광주시민 민주투쟁협의회


5.8. 투사회보 제8호


1980년 5월 25일에 발행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 발행되지는 않았다.

5.9. 민주시민회보 제9호[17]


<우리 다같이 애도합시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우다 가신 영령들, 시민 여러분께서는 대문에 조기를, 가슴에 검은 리본으로 모두 애도합시다.

<다같이 분향합시다.>

도청앞 상무관에 분향소를 설치했사오니 다같이 분향합시다.

<계엄 당국과 협상 중>

계엄 당국의 일방적 요구가 아닌 우리의 뜻과 이번 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선에서 대등한 협상이 되도록 우리 모두 수습위원회를 믿읍시다.

<당국 허수아비의 기만 방송에 현혹되지 맙시다>

광주 시민 의거를 왜곡 보도 허위날조하고 있는 라디오, TV방송, 언론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이들은 우리를 폭도로 몰고 있는 자들입니다.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시민군은 우리 시민의 안정을 위해 불철주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일부 시민군에 대한 오해와 모함은 계엄 당국과 언론의 과대 선전에 의한 것이며,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서만 이런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매일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됩니다.모두 참여합시다.

●행방불명자를 찾고 있습니다. 행불자가 있으신 가정은 홍보차나 동사무소에 신고 바랍니다.

●고교생과 대학생은 질서유지를 위해 YWCA로 모입시다.

●밤 8시 이후로는 치안 유지상 거리를 통행하지 맙시다.

●질서 회복에 다같이 참여합시다.

①각 동별로 매일 오전 10시 동사무소로 집결, 거리 청소와 파손 건물 복구, 상가수리, 시장은 문을 엽시다.

②각 운수기간 차량운행,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평상생활로 복귀합시다. 각 동별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생필품 확보에 적극 협조합시다.

<피해상황>

확인된 사망자 : 102구

부상자 : 중상자 500명 이상

그외 경상자 숫자 확인불능 2,000여명

연행자 : 18일부터 무차별 젊은이 연행 2,000여명 이상(당국에서 발표한 967명은 허위이며 석방자도 애매한 기준에 의하여 석방하고 있다.

'''모든 시민의 이름으로 계엄 당국을 규탄한다.'''

모든 국민이 다 알다시피 광주의 5.18투쟁은 연 일주일째 접어들고 있다. 또한 그간에 있어서 모든 시민과 학생들은 끝까지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투쟁을 전개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계엄 당국은 진지하고도 순수한 데모대열에 무차별한 사격을 가하며 600여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부상자 및 연행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모든 시민들은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때로는 무장하고 때로는 헌신적으로 보급품 공급에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국과 정부는 광주 시민의 민주 의사를 묵살함은 물론 라디오, TV 등 매스콤을 이용, 사태의 왜곡 보도와 다양한 흑백선전으로 민주 투사들을 소수 난동자 폭도로 몰고 있다. 이에 우리 광주시민은 전국민과 더불어서 모든 정부의 언행을 믿지 않을 것이다.

1980년 5월 26일(월)

광주시민일동


5.10. 민주시민회보 제10호


(앞면)[18]

'''광주시민 장송곡'''[19]

무진벌의 백성들이 횃불을 들었다.

손에 손을 맞잡으니 피끓는 형제여!

조국 위해 바친 몸이 무슨 죄란 말인가!

독재자의 총칼 앞에 수천이 죽다니.

피에 젖은 민주 함성 끝까지 지키리니.

설운 눈물 거두시고 고이 잠드소서.

붉은 피만 낭자쿠나 도청앞 분수대

서러워서 못 견디는 풀잎 피리소리

가슴 펴고 외치노라 평화와 자유를

민주 혼은 살아 있다 무진벌 골짜기

자랑스런 민주투사 젊은 영들이여

정결한 피 최후의 날 우리 승리하리라.

삼천만의 동포들아 정의의 칼을 들라

젊은 영들 목쉰 절규 어찌 잊으랴

용기있게 나가리라 민주의 봉우리

최후의 순간까지 겨레를 위하여

자랑스런 민주투사 젊은 영들이여

정결한 피 최후의 날 우리 승리하리라.

(뒷면)[20]

-무등산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1. 우리는 명분 없는 비상계엄의 해제와, 반민족적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유신세력의 일소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 이는 민족사의 요청이다.

2. '''우리는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득세하는 현 정부당국을 국민의 정부로서 인정할 수 없다.'''

3. 온 국민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고 자립경제를 이룩하고 복된 사회를 건설코자 납입한 피와 땀(세금)으로 페퍼포그, 최루탄 및 총기를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가르고 가슴에 총을 쏘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광주시민은 이들 유신 미치광이들을 위한 세금이요 방위성금이라면 단 한 푼이라도 납입하기를 거부한다.

4. 광주의거에 관한 계엄사의 발표 일체가 거짓임을 밝힌다. 또한 이를 신뢰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사상자 천 명 이상 - 수습대책위 통계).

5. 우리 80만 광주시민은 앞면의 '광주시민 장송곡'을 누구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회보를 입수하신 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보급 및 전파에 최대의 힘을 역주하여야 할 것이다.

6. '''군인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대답하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온 국민의 희망을 저버리고 사리사욕에 광분하는 전두환 일당을 위해서인가? 우리가 지난날 국토방위 임무에 충실했던 국군이었듯, 그대들도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간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당신 일개인의 반기가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길임을 명심하라!

1980년 5월 26일

광주시민학생구국위원회(구 수습대책위원회)


6. 참고자료


들불7열사 ① 박기순, 들불야학의 창시자
들불7열사 ② 윤상원, 5·18의 대변인
들불7열사 ③ 박용준, 5·18 투사회보의 작성자
들불7열사 ④ 박관현, 5·18 전남대 총학생회장
들불7열사 ⑤ 신영일, 오월의 사회운동가
들불7열사 ⑥ 김영철, 5·18 시민군 기획실장
들불7열사 ⑦ 박효선, 오월을 노래한 문화운동가

[1]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34쪽#[2]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41쪽#[3]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42쪽#[4]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48쪽#[5]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79쪽#[6] 광주의 문화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장소로 이곳에서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7] <윤상원>, 윤동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142~143쪽[8] 1980년 5월 25일부터[9] 투사회보의 제작과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증언들을 참고하라.##[10] 민중화가 홍성담(그 역시 당시 광주에서 사태를 직접 겪었으며, 시민군 일원이었다)이 제작한 5.18 판화 중 일부, 제목은 '오월 투사회보2'이다.[11] 1980년 5월 21일, 들불야학 강학 중 한 명이였던 서대식이 공수부대가 발포를 하는데 이런 것을 만들어서 뭐하느냐고 따지자 윤상원이 한 말[12] 이 투사회보 제작팀에는 들불야학은 물론이고 전남대 <대학의 소리> 발행팀과 광주지역 문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문화팀 '광대.'가 합류했다. 투사회보는 5.18 초기에 난잡하던 선전을 효율적으로 제기할 수 있었다.[13]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34쪽#[14]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41쪽#[15]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42쪽#[16]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48쪽#[17]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79쪽#[18]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83쪽#[19] 이 가사는 나중에 1985년 발매된 테이프인 '광주여 오월이여'에서 가락이 붙어져 불러졌다. 다만 가사는 원래의 것과 차이가 있다. 듣기[20]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