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10·26 사태'''
十二六事態
Assassination of Park Chung-hee

[image]}}}{{{-1 체포된 김재규가 사건 현장을 재현하는 모습.[1]
'''일시'''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
'''장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원인'''
후술
'''결과'''
'''박정희 대통령 사망 및 유신 체제 붕괴'''
'''영향'''
12·12 군사반란 발발, 서울의 봄 이후 신군부의 집권
1. 개요
2. 사건 당시 정치·사회 상황
3. 사건 전개
3.1. 밤하늘을 가른 총격
3.2. 후속조치
3.3. 취조
3.4. 결과
4. 사건의 원인 주장
4.1.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다
4.2. 차지철과의 갈등 때문이다
4.3. 미국의 사주다
4.4. 민주화 열망 및 미국의 묵인이 있었다
4.5.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에 대한 대한 이견
4.6. 분노에 의한 우발적 암살
4.7. 중앙정보부 부장이라는 위치의 위험성
4.8. 장준하-김재규 밀약설
4.9. 김영삼 지지설
4.10. 건강 이상설
4.11. 최태민의 존재
4.11.1. 그 후
4.12. 권력을 노린 정변이다
5. 여담
6. 어록
7. 사진
8. 창작물
9. 관련 인물
9.1. 가해자
9.2. 사망자
9.3. 생존자
9.4. 후속 조치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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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건 관련 TBC의 라디오 뉴스 보도[2].

2005년 5월 29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방영했던 '10.26 궁정동 사람들' 편

1993년 10월 31일, KBS 다큐멘터리극장 - 유신시대 7부, 유고

1. 개요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쯤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3]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등을 사살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퍼진 표현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으로, 이 당시 성인이었을 현재의 노년층은 이 사건을 '궁정동 사건'으로 많이들 알고 있다.
한국 전쟁을 '육-이오'라고 하듯이 이를 '십-이륙'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4] 10.26은 '십-이십륙'이라고 읽으면 12.16으로 혼동될 여지도 있고...

2. 사건 당시 정치·사회 상황


1972년에 시작된 유신 체제는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경제적으로 누적된 성장 드라이브 정책의 후유증과[5] 제2차 석유 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에 직면하였다. 1차 석유 파동과 달리[6] 2차 석유 파동은 국내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1차 석유 파동 때와 달리 이를 타개할 만한 뚜렷한 전략도 국가가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노동자, 서민의 반발이 심해졌고, 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감소로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는 1인 장기집권에 의한 병영국가식 통치,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불화 등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78년 총선에서 김영삼의 신민당이 집권여당을 총 득표수에서 이기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는 김영삼으로 하여금 박정희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는 YH여공 사건에서 신민당이 YH여공들과 연계하여 박정희 정권에 '감히' 반기를 들도록 만들었다. 또한 부마항쟁에서 대규모 민중이 박정희 정권에 반기를 든 사건 역시 정치적으로 박정희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과의 불화가 심해지고 있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이라는 기치 아래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이 로비스트 박동선을 이용해 이런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계획하게 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외적 정당성이 감소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내적, 대외적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김재규와 같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들은 '혹시' 하는 불순한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박정희가 정권 초기나 70년대 초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리 김재규라 하더라도 그의 분노를 함부로 표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79년의 상황은 김재규가 분노를 조절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었다.
유신 정권 말기의 강권 통치 역시 오히려 박정희 정권을 몰락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개 통치자들은 강권 통치를 통해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강권 통치는 통치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하지 그것이 일상화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일상화를 넘어 극에 달릴 때 역사상 많은 독재자들은 곧 물러나게 되었다. 강권 통치를 해도 사람은 폭력이나 공포에도 익숙해진다. 그러면 지금까지 강권 통치 수준으로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어렵고 강도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람들은 또 반발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은 가할 수 있는 강권의 한계가 찾아온다. 그리고 이 한계 수준의 강권 통치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할 경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이상 가려면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이 나라가 망가질 걸 각오하고 대숙청을 진행해야 한다. 괜히 이후에 전두환이 유화적으로 나온 게 아니였다.
거기에 박정희는 부마 민주 항쟁을 두고 본인이 직접 유혈 진압을 지시하고 거기에 킬링필드 운운하는 초강경파 차지철을 두둔하는 등 강경 대응을 천명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외교적 상황은 일본은 김대중 납치와 문세광 암살 미수로, 미국은 코리아 게이트와 핵 개발로 매우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혈 진압을 하겠다는 행동은 정권 주변인, 특히 김재규 같이 정보기관 인물로서는 전형적인 남베트남 같은 파멸 행보로 밖에 읽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김영삼은 1979년 9월 12일,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박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라고 발언하였고 이 발언을 빌미로 10월 4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10월 13일 야당 신민당민주통일당 의원 전원은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며, 10월 16일 "유신철폐", "김영삼 의원 제명 철회"의 기치를 내건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큰 위기와 맞닥뜨리게 됐다.
그리고 이 부마민주항쟁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방식을 놓고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더욱 커지던 와중에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을 PPK 권총으로 저격하였는데, 그 과정과 원인에 대해서는 이하 문단에서 후술한다.

3. 사건 전개


[image]
[10·26 40주년]① 궁정동의 총소리…엇갈리는 평가
[10·26 40주년]②국내외 문건·증언으로 재구성한 10·26(1)
[10·26 40주년]③국내외 문건·증언으로 재구성한 10·26(2)
김재규등 피고인 8명에 대한 대통령시해사건 공소장 전문
김계원(金桂元) 전 청와대 비서실장 생전 인터뷰
[image]
1979년 10월 26일 오전, 삽교천 완공식에 참석한 박정희.[7]
1979년 10월 26일 아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날 박정희충청남도 당진군에서 열린 삽교천 완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는데, 이 중 당진 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던 보안 시설[8]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수장인 자신도 박정희와 같이 두 개의 완공식에 참석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9]중정부장까지 서울을 비우면 어쩌란 말입니까? 김 부장은 참석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세요."''' 라고 면박을 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안 그래도 차지철을 증오하다시피 했던 김재규는 차지철의 이런 면박에 틀림없이 모욕감과 다시 한 번 차지철에 대한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한편 당시 박정희는 김영삼의 국회 제명부마민주항쟁 등 일련의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던 상황이었지만, 이날 아침에는 평소 즐기던 농촌 시찰을 앞둬서인지 옷을 갈아 입으면서 어깨를 들썩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고 한다. 정장을 챙겨입은 박정희는 청와대 본관 2층 침실 옆의 식당에서 두 딸 박근혜, 박근령과 아침 식사를 한 뒤 1층 집무실로 내려가면서 '''"나 오늘 삽교천에...(갔다 올 거야)"''' 라는 말을 남겼고, 박근혜와 박근령은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것이 아버지와 두 딸의 생전 마지막 대화였다.
오전 8시,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후 민정수석비서관 박승규를 따로 불러 "내일 각하께 부마사건 보고 시에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간의 불화에 대해 보고하고, 차 실장의 월권 행위도 말씀드리시오." 라고 지시했다. 사실 김계원은 며칠 전 박정희에게 차지철의 월권이 심하다고 건의했지만, 박정희는 "차 실장이 국회의원도 해 봐서 정치를 잘 안다." 라고 말하며 김계원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래서 김계원은 자신이 같은 내용을 다시 박정희에게 보고하기 뭐해서 박승규 민정수석이 대신 한 번 더 말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이 무렵 김계원은 두 사람의 불협화음을 해결하려고 김재규를 경호실장, 차지철을 중정부장으로 보직을 맞바꾸자는 안을 박정희에게 건의하려 했다고 한다.
삽교천으로 출발하기 직전 김계원은 차지철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차지철은 마치 그가 들으라는 듯 "비서실장도 자리를 비우는데 중정부장이란 자도 행사에 참석하겠다니... 이런 상황일 수록 자리를 지켜야지"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김계원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30분 경 김계원, 차지철과 함께 헬리콥터에 탑승하여 청와대를 출발한 박정희는 11시 경 삽교천 행사에 도착하여 약 8분 분량의 방조제 완공에 대한 경축사를 낭독했는데, 이때 주변에 있던 일부 장관과 경호원들은 '''"오늘따라 각하 목소리에 힘이 없다"''' 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경축사를 마친 후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니 이 동네 최고령 어르신을 모시고 오라." 라고 지시했고, 경호원 손에 이끌려 온 83세의 이길순 노인[10]과 같이 테이프를 커팅하고 방조제 갑문 개방 버튼을 누른 후 "올해 농사는 잘 지으셨는가. 건강하시라." 라며 이 노인을 격려했다.
그 다음 KBS 당진송신소로 이동하여 완공식 치사를 한 박정희는 송신소 응접실 의자에 털썩 앉더니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김 장관이 가져온 물컵을 단숨에 들이킨 후 축 늘어졌다. 이를 본 김성진은 겨우 몇 시간 남짓한 행사에 박정희가 이렇게 지치는 걸 보고 안쓰러워 했다고 한다. 그 후 박정희는 도고호텔에서 부처 장관, 지역 유지들과 점심을 같이 한 후 오후 2시 반 경에 청와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날 마치 박정희의 운명을 암시라도 하듯이 삽교천과 당진송신소 행사 도중 몇 가지 크고 작은 불길한 조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삽교천 완공기념 담수비를 제막할 때에는 강한 바람에 천이 비석을 휘감아 버려 박정희가 아무리 줄을 당겨도 벗겨지지 않는 통에 결국 경호원들이 올라가 직접 천을 벗겨내야 했고, 당진송신소에서 점심 장소인 도고호텔로 이동할 때에는 박정희 일행을 태운 헬리콥터 1호기는 이상 없이 이륙했지만 2호기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 긴급 정비로 30분 정도 주저앉아야 했다. 게다가 1호기가 도고호텔에 착륙할 때 호텔 사육장에서 키우던 사슴들이 헬기의 소음과 강풍에 놀라 이리저리 날뛰다가 새끼를 밴 암사슴 한 마리가 기둥에 머리를 들이받고 피를 흘리며 즉사하는 괴변도 있었다. 이러한 사고들까지 박정희에게 일일이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행사를 마친 후 청와대로 돌아와 경호실장실에서 경호실 차장 이재전 육군 중장과 삽교천 준공식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차지철은 오후 4시 경 박정희로부터 이날 저녁 안가 행사를 준비하라는 인터폰을 받았다. 무슨 일이냐는 이재전의 말에 차지철은 "별 일 아닙니다. 오늘 특별한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이 장군은 먼저 퇴근하시오." 라고 답했는데, 이때 차지철은 "오늘은 좀 쉬시지..." 라면서 약간 짜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궁정동 안전가옥은 담장이 드높은 청와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담장 밖에 별도로 위치한 집이었으며, 주로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이 식사 모임이나 작은 연회가 열렸을 때 사용되었다. 안가는 박정희와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중앙정보부의 관계자 일부만 아는 극비 보안 시설이라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나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도 암살 사건 수사를 개시하고서야 그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특히 전두환은 10.26 사건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76년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도 안가의 존재를 몰랐다니 보안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요" 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궁정동으로 이동하여 안가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정승화에게 전화로 "오늘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면서 조용히 시국 얘기 좀 나눕시다." 라며 그를 초대한 뒤,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국내담당) 김정섭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정승화는 이날 저녁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11]를 대었기에, 대신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과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12]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한편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라고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에야 나타났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계원은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야."라며 차지철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 해치워 버릴까요?"

  • 김재규와 김계원이 친밀한 관계가 된 사연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재직할 때 신임 총장으로 김계원이 취임했고, 그 무렵 마산시에서 해군 장교들과 회식 후에 부대로 복귀하던 김재규의 지프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김계원은 벼랑 밑에서 중상을 입은 김재규를 직접 업고 올라와 병원으로 후송시켰고, 이 일을 계기로 둘은 호형호제 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이후 김계원은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뒤 1969년 10월 김형욱의 후임으로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취임했으나, 불과 1년 2개월 만인 1970년 12월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선거 운동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며[13] 경질되었다. 후임 중정부장은 이후락으로 교체되었고, 이후 김계원은 수 년간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한 뒤 귀국하여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자 김재규가 그를 김정렴의 후임 비서실장으로 천거했다고 한다. 이때 김계원은 박정희에게 "저는 (비서)실장 그릇이 못 됩니다."라며 고사했지만, 박정희는 "실장 일은 안 해도 돼. 나랑 말동무나 해 주면 좋겠네."라고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할 만큼 집권 말기의 박정희는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는 점을 시사할 만한 일화인 것이다.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여 이에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이 고개를 끄덕하여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의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된다.
저녁 6시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당시 안가 요리사였던 이정오는 이날 식사로 비빔밥, 떡만둣국, 칼국수를, 술안주로 잡곡무침, 전복무침, 송이버섯 구이, 장어구이, 불갈비를 준비했다. 그 밖에도 에 재운 인삼도라지나물, 전, 생채, 편육 등으로 한 상에 30접시 정도가 놓인 호화상이 차려졌다고 한다. 요리 재료는 당일 오후 5시경 중정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방석상, 이광철이 동대문시장 등을 돌며 약 6만원 어치를 샀다고 한다.[14]
술은 막걸리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 현장을 검증한 장경삼 당시 검찰관은, 박정희는 국산 양주[15]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는데 사건 현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던 기자들이 병 모양의 모습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시바스 리갈로 착각해 그대로 보도해 잘못된 사실로 굳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계원이 재판 중 시바스 리갈을 마셨다고 진술하였기 때문에 장경삼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안가 요리사였던 김일선은 "(박정희는) 콩나물밥을 좋아했고, 대가리 뗀 멸치를 참기름에 볶은 것을 술안주로 즐겨먹었다"라고 회상하였다.[16]
당시 언론에서 말했던 사치스러웠던 연회장은 아직 개장을 하지 못했던 연회장으로, 실제 연회와 암살이 벌어진 나관의 시설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하였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은[17]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재규는 "공화당에서 신민당 의원들이 제출한 사표를 일괄 반려하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18] 당직에서 사표를 내겠다던 (신민당)의원들이 전부 강경하게 돌아서면서 다 틀렸습니다. 아무래도 신민당 주류들이 강하게 나와서 당분간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차지철은 "신민당 놈들 중에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어요.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그까짓 놈들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야 합니다."라는 살벌한 말을 뱉었고, 박정희는 "오늘 삽교천은 공해도 없고 공기도 깨끗하던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인가?"라며 혀를 찼다. 이어서 김재규는 "신민당은 주류 중심으로 강경하게 전환되었고 정운갑은 비주류가 밀고 있는데 국민들이 신민당 비주류를 사쿠라로 보고 있어서 힘이 없습니다. 주류의 협조 없이는 정운갑 대행체제 출범은 불가능합니다."라고 설명했지만, 차지철은 또 다시 "그깟 새끼들 싹 밀어버리겠다."라며 과격한 소리만 되풀이했고 한 술 더 떠서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비아냥거리면서 김재규를 계속 코너로 몰고 갔다. 김계원은 이런 살벌한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평소 칵테일을 좀 할 줄 아는 김재규에게 위스키로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하고 오늘 삽교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등의 말을 하며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차지철이 수시로 김재규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바람에 상황을 전환시키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저녁 6시 30분쯤 차지철은 "깔아 뭉개 버리겠다."라는 말을 던져 놓고 옆 대기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신재순과 심수봉을 데리고 들어왔다. 박정희 오른쪽에는 신재순이, 왼쪽에는 심수봉이 앉았고, 심수봉은 그녀의 기타를 옆 문갑에 기대어 세워 놓았다.
그렇게 술잔이 돌고 잡담이 오가는 등 술자리 분위기는 익어가고 만찬을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7시 뉴스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김재규는 정승화가 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찬장을 빠져나와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50m 가량 떨어진 본관(김재규 집무실) 1층 식당 문을 열었다. 정승화는 오후 6시 35분에 안가 별채에 도착하여 김정섭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취기가 오른 박정희는 김계원을 도승지, 김재규를 포도대장이라 부르면서 술을 따라 주었고 신재순과 심수봉에게 "김(재규)부장은 술이 아주 세니까 많이 권해주게." 라며 농담을 던지는 등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김재규는 차지철 때문에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김정섭과 저녁 식사 중이던 정승화에게 가서 "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 차장이 국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와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라고 해명을 한 후,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를 궁정동 안전가옥 마당으로 불러내어 아래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김재규 : (호주머니의 권총을 보이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일이 잘못되면 자네들이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오늘 저녁, 내가(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해라. 지금 본관에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2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되어 있지?

박선호 : 부장님,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 그래.

박선호 : 오늘은 경호원이 '''7명'''[19]

이나 와 있고 날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날을 고르시죠.

김재규 : 안 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20]

똑똑한 녀석 세 놈만 골라 나를 지원해라. 다 해치워 버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 :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장님,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재규 : 30분은 너무 길다.

박선호 :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김재규 : 알았다.

그리고 김재규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리고는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치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은 처음엔 크게 놀랐을 테지만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그리고 도와줄 사람을 세 명만 더 포섭하라던 김재규의 명령과는 달리 박선호는 같은 해병대 출신으로 자기가 신임하던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 예비역 해군 보병 하사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이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21] 그리고 나중에 동원된 안가 경비원 김태원은 이기주를 따라다니며 차지철과 운전수,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만 맡았다.
현장에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세워둔 의전과장 차량인 제미니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다. 한편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처치할 준비를 했지만,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 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려볼 속셈이었다. 특히 정인형은 박선호의 해병 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궁정동 안전가옥에는 정인형과 안재송 외의 차지철의 청와대 경호실 소속 수행원으로 김용태 특수차량 운행계장[22],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이 있었다. 이들은 평소의 관례대로 박정희의 경호는 중정 경비원들에게 맡긴 채 나동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과 안재송은 경호원 대기실에서 별도로 저녁식사를 한 후 AFKN TV 방송[23]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 당시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행사가 있으면 박정희 경호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안전가옥 경비원들이 담당하고 청와대 경호실 소속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24] 그렇지만 비록 김재규와 차지철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대는 사이였다고는 해도, 원래 그쪽 세계가 다 그렇듯 그 밑의 대통령 경호관들과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거의 다 친구들이었다. 당장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과 정인형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은 해병 동기로 친형제보다 더 친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또 박선호는 경호부처장 안재송과도 해병 선후배로 절친한 사이였다. 중앙정보부 부장 비서 박흥주 육군 대령도 경호실 사람들과 친했다. 즉 10.26 사건은 친한 사람들끼리의 총질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청와대 경호실 내에서 경호원들이 사실상 무장 해제 당하는 안전 가옥의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고, 이런 안전 가옥의 특성이 박정희의 죽음을 초래한 요인일 수도 있다.
김재규는 주머니에 권총을 숨기고 만찬장으로 돌아왔다. 7시가 가까워지자 박정희는 자주 시계를 보았고, 그 모습을 본 차지철은 "각하, 시간이 되면 TV를 켜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박정희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자동 스위치로 TV를 켜서 KBS를 시청했다.
TV에서는 삽교천 제방 준공식 장면이 나온후 김영삼과 미국 대사가 만난다는 뉴스가 나왔는데, 이 뉴스에 박정희는 심기가 상한 듯 "총재도 아닌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했다. 8군 뉴스를 보면서 지미 카터 대통령 이야기도 했는데, "헬기를 타고 오면서 보니까 한강에 다리가 많더라."라는 말도 했다. 이때 김재규가 들어와 TV를 끄자고 제의해서 차지철이 TV를 껐다.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깡패, 똘마니들만 찍은 사진 말고 제대로 된 부마사태 사진을 하나 만들어 보라고 하자 김재규는 짧게 "예."라고 대답했다. 또한 박정희는 "김 부장이 술을 좋아하니 많이 권하라."라고 했지만, 김재규의 얼굴은 시종 굳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박정희가 "노래나 한 곡 들어볼까."라고 하자, 심수봉이 기타를 연주하면서 '그때 그 사람'[25]을 불렀고 앙코르를 요청하자 추가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후 차지철을 지명했다. 차지철은 '도라지 타령'과 '나그네 설움'을 부르고 신재순을 지명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지배인 남효주에게 "(김)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라는 지시를 내렸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을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김재규가 부속실로 들어가니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 준비되었는가?

박선호: 완료됐습니다.


3.1. 밤하늘을 가른 총격


[image]
김계원이 그린 사건 발발 당시의 약도이다.
저녁 7시 38분 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신재순은 심수봉의 기타 반주로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고, 박정희는 간간히 흥얼거리며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바로 이때 김재규가 권총을 하의 주머니에 넣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신재순이 중간에 한 번 틀려서 다시 부르던 중, 김재규는 신재순이 1절 후렴을 막 시작하려는 차에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어 노래를 끊으며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26]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야, 너도 죽어봐!"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 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허파에 관통상을 입었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에 한 발언은 위에서 언급한 "너 건방져!"가 아니라는 설이 존재했다.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라고 충고한 후 박정희에게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면서 발사를 했다는 게 2000년대까지의 다수설이었다. 이 발언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인데, 2011년 중앙일보의 기사에서 신재순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측의 강압에 못 이겨 위증한 것이라고 밝혔다.[27] 이는 이 사건을 우발적인, 혹은 개인적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둔갑시키려는 목적이었던 듯하다. 이 증언 차이는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과 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이때 당시에 김재규가 "이미 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시키면 국민들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거라고 인식할 겁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라는 말을 했다는 설도 있으나, 심수봉은 자신의 회고록 '사랑밖에 난 몰라'를 출간하면서 김재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심수봉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나 "버러지 같은 놈" 같은 김재규가 했다고 알려진 발언들에 대해서 "김재규가 그런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총쏘는데 급했지 여유를 부리면서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것.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제3발을 쏘려 했으나 권총이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그 틈을 타 연회장 안의 화장실로 도망갔다.[28] 그리고 김계원은 연회장을 박차고 복도로 뛰쳐나와 취기와 공포심에 벽을 붙든 채 벌벌 떨고 있었다.[29]
한편 대기 중이었던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 일행은 총성이 나자 주방으로 달려가 식사 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고,[30] 그 과정에서 안가 요리사 이정오는 허리에,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은 어깨에 총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 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계장 박상범은 총 4발을 맞았는데, 두 발은 옷만 뚫었고 한 발은 허리띠에 차고 있던 예비 실탄에 맞고 튕겨나갔고, 나머지 한 발은 허리 관통상을 입혔다. 그런데 박상범은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총상도 뼈나 내장은 상하지 않은 채 살만 관통하여 자연 지혈되면서 출혈도 적었으며, 나중에 안가 경비원인 김태원의 확인 사살 시 박상범 옆에 안가 직원 김용남이 부상을 입고 누워있어 잘못 맞을까 봐 사격을 포기한 행운도 따르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 안주를 먹으며 TV 방송을 보고 있던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같이 있었는데, 총성을 듣고 정인형과 안재송이 뛰어나가려 하는 것을 박선호가 S&W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31]를 먼저 뽑아들어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 라고 애원하며 막아섰다. 그러나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쐈고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쏘고 말았다.[32][33] 박선호가 권총을 겨누자 안재송은 반격을 하기 위해서 일어서면서 권총을 뽑았지만, 이미 총을 빼 겨누고 있었던 박선호의 선제 사격에 흉부관통상을 입고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나중에 시체 검안 결과에 따르면 안재송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상황에서 총탄을 맞았다고 한다.[34] 대한민국 제일의 속사권총 명인도 상대방이 먼저 총을 겨눈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선호가 안재송, 정인형을 사살하던 시점에서 느닷없이 안전가옥 나동 전체의 조명이 나갔는데, 이는 지하 보일러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안가 영선[35] 담당 강무홍이 총성을 전기 합선으로 착각하고[36] 차단기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계속 이어지는 총소리와 고함 소리에 합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강무홍은 다시 차단기를 올린 후 보일러실 문을 잠근 채 몸을 숨겼다고 한다. 만약 불이 조금 일찍 꺼졌더라면 박선호는 오히려 정인형과 안재송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편 김재규는 총상을 입은 차지철과 박정희를 확인 사살하려고 했지만, 그의 권총이 기능 고장으로 인하여 끝내 발포가 되지 않자 다른 총으로 일을 끝내려고 연회장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로부터 S&W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때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렸다. 차지철은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지만,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완전히 거꾸러뜨린 후 김재규는 여성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던[37] 박정희에게 다가가 우측 관자놀이를 향하여 마지막 탄환을 발사하였다.# 당시에 심수봉과 신재순은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했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마지막 탄을 발사하러 들어오는 순간 박정희의 등 뒤에서 나오는 피를 막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 김재규가 들어오자 신재순은 화장실로, 심수봉은 부속실로 피했다. 이 마지막 탄은 박정희의 오른쪽 귀 바로 윗부분을 뚫고 들어가 지주막을 뚫고 뇌를 관통한 뒤 왼쪽 광대뼈에서 멈췄다.[38]
박정희의 최후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은 끝까지 옆에 있었던 신재순과 심수봉이었는데 신재순은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 사람의 눈과 마주쳤을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그가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 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 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대통령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 하고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그리고 심수봉은 그 순간을 이렇게 진술했다.

가슴에 총을 맞은 각하를 보니 호흡이 이상하여 ‘각하 괜찮으십니까’하고 묻자 ‘응, 괜찮아’하셨지만 등에서는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상체를 부축하고 있었고, 신재순 양은 손으로 피를 막고 있었다. 내가 무릎 가까이 각하를 부축하고 있을 때 김재규 부장이 각하 뒤로 와서 총을 더 쏘고 나갔다. 공포에 질린 두 사람은 무서워서 마루로 나와 관리인 사무실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그 동안 밖에서는 총소리가 5-6발 정도 더 났다.


3.2. 후속조치


[image]
이송되는 김재규.
만찬장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마루에 서 있는 김계원과 아주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김재규: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유지하십시오.

김계원: 뭐라고 하지?

김재규: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던지 적당히 하십시오.

김계원: 하여튼 알았소.

이 대화에서 김재규가 자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김계원에게 확고한 결의를 보여주고 믿음을 주기 위해 했던 말인 것으로 짐작된다. 김계원으로부터 협조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김재규는 현장수습을 김계원에 맡기고 맨발로 정승화에게 달려갔다.

불과 50m의 거리를 달려가는 데는 불과 몇 초 정도만 걸렸을 것이다. 그의 와이셔츠 자락은 밖으로 나와 있었고, 와이셔츠의 허리와 목 부분 여기저기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허리에 찔러진 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김재규는 본관 1층의 식당으로 뛰어들자마자 비서에게 "물, 물!"을 외쳤고, 비서가 컵과 물주전자를 가져오자 주전자 채로 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고는“차량 차량, 손님 나오라고 해” 이렇게 외쳤다.

이 순간을 정승화는 1979년 12월 15일에 이렇게 묘사했다.

19시 45분경 김정섭과 본인은 총소리를 듣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김재규의 비서가 급히 식당 안으로 들어와 그 옆에 있는 주방에서 물을 가지고 나가서 김정섭도 따라 나가므로 본인도 궁금하여 따라 나가니 식당 문 앞에 있는 복도에 김재규가 숨을 헐떡이며 물을 마시고 당황한 표정으로 본인을 보고 본인의 팔을 붙들고 ‘총장 큰일 났습니다.’ 라고 3회 가량 되풀이 하므로 본인은 무슨 일입니까? 라고 수차 물었으나 김재규는 거기에는 답변치 않고 빨리 차에 타고 차안에서 이야기 합시다 라고 하여 본인은 만찬회 장소에서 무슨 긴박한 사태가 발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우선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하고 19시 50분경 현관 앞에 대기한 김재규 차에 타자 우측에 있는 김정섭에게 김재규가 차에 타라고 하여 김정섭이가 좌측으로 탐으로서 우측에는 김재규 중간에 본인이, 앞 운전석 옆에는 김재규의 비서인 박흥주 대령이 타고 차가 출발하였다. 그리고 차안에서 김재규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갈지 용산 육군본부[39]

로 갈지 우왕좌왕 하고 있었는데 이때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병력동원 차원에서 육군본부로 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이 의견에 박흥주도 찬성했고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육본으로 차를 돌렸다.'''[40]

한편, 박정희는 김계원에 의해 만찬장 근처의 미국인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우선 옮겨졌다. 비서실장은 심폐소생술을 실시하였으나 박정희는 소생하지 않았고 병원 도착 5분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비밀해제된 미국자료에 의해 밝혀졌다.[41] 후에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다. 박정희가 타고 온 슈퍼살롱 운전사 김용태는 총격으로 숨진 상태라 유성옥이 대신 운전대를 잡았고, 박정희의 시신을 차로 옮긴 안가 경비원 서영준도 같이 병원으로 이동했다.
김재규가 궁정동을 떠난 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재규가 시킨 대로 뒤처리를 했다. 7시 55분,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신을 보안사 영내에 있는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옮기고, 당직군의관에게 용태를 물어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신은 중정 요원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날 김재규의 판단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실책'''이었다고 아직도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자신의 거점인 중앙정보부로 가서 사건 수습과 뒷공작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차지철과 박정희가 죽고 없는 시점에서 제 3의 실권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대놓고 반대할 사람도 없고, 박정희 암살 사건에 간첩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대공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정보부가 조사를 전담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우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차지철이 박정희를 쐈기 때문에 내가 차지철을 사살했다'고 둘러대는 것도 가능했다. 사건을 목격한 생존자라고 해봐야 김재규 자신과 암살 공범인 정보부 요원들을 제외하면 연회장의 김계원과 신재순, 심수봉 그리고 안전가옥에 있던 일부 청와대 경호원과 안전가옥 직원들이 고작이었다.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한참 밀린 데다 차지철에 대한 반감은 김재규와 마찬가지였으며, 신재순과 심수봉은 일개 대학생과 가수였고 나머지 직원과 경호원들도 이미 부상을 입거나 제압당한 상황에서 김재규와 중앙정보부가 이들을 입막음하는 것 정도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차지철은 평소 행적 때문에 박정희 암살 혐의를 뒤집어 씌우더라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상황이었다. 차지철은 월권 행위에 박정희를 제외한 고위층, 심지어 김계원이나 김재규를 비롯한 장성 출신들에 대해 오만불손한 태도를 일삼았고, 권력 문제에도 마구 개입하며 김재규뿐 아니라 차지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례로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수상이 방한하여 박정희와 일부 고위 인사들과 함께 골프를 치러 갔는데, 라운딩이 끝난 후 백두진 유신정우회 의장이 먼저 클럽 하우스의 샤워실로 들어간 뒤 시간이 지체되자 차지철이 샤워실 문을 두들기며 '''"왜 이렇게 늦는 거요? 각하 기다리시는데 빨리 나오시오! 이 늙은이가 뭘 이리 우물대는가.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실제로 박정희 암살 직후에도 고위층 대부분은 차지철을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정승화는 김재규에게 박정희가 죽었다는 얘기를 접하자 처음에는 차지철이 암살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가 청와대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까지 시도한다고 생각하여 당시 수경사령관인 '''전성각''' 육군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수경사 병력을 장악하고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출처: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42] 그리고 이날 긴급 소집령을 받고 육군본부로 온 김치열 법무장관의 경우, 박정희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차지철) '''그 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라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분통을 터뜨렸고, 대부분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 법무장관과 같은 인식을 가질 정도였다. 정부 고위 인사들의 차지철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즉 '''김재규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차지철에게 박정희 암살 혐의를 뒤집어 씌울 명분이 있다 못해 넘치는 상황이었다.''' 차지철이 평범한 인물이어도 중앙정보부의 공작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이렇게 평소 명분을 알아서 쌓아줬으니...
이처럼 김재규는 사건을 조작할 만한 능력도, 명분도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의 본거지인 중앙정보부도, 간첩 사건 등으로 인맥이 있었을 법한 대한민국 검찰청이나 치안본부도 아닌, 자신과 그다지 연관성이 없는 육군본부로 향했다.
정승화는 훗날 "육본으로 가자"는 자신의 말에 김재규의 부관인 박흥주 대령이 찬성한 이유를 이렇게 추정했다.#

‘나중에 추측건대, 그 부관(박흥주)은 남산으로 갔다가 충성심 강한 경호실 요원들이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을 죽인 걸 알고 몰려 들어오면 고스란히 앉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군 병력이 있는 육군본부로 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을 터이고 게다가 내가 김재규와 함께 사건 현장 가까이에서 저녁 약속을 하고 함께 있었으니 모든 일을 나와 공모한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담으로 김재규와 정승화가 육군본부 정문에 도착했을 때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정승화 장군이 자신이 (육군참모)총장이라고 밝히자 육본 위병소의 헌병이 "총장님? 어느 대학 총장님이십니까?" 하며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당시 정승화는 옷차림이 군복이 아닌 사복 정장이었고, 타고 온 차도 자신의 관용 차량이 아니라 김재규의 차였다. 이후 다른 장교가 정승화의 신분을 알아채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박정희 암살 사건이라는 중대한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어서 10.26을 다루는 매체에선 이 에피소드 또한 넣는 편. 이 에피소드는 정승화의 회고록에도 나오는 실제 이야기다.
박정희 사망을 확인한 김계원은 곧바로 청와대에 돌아와 비상소집을 했다. 최규하 국무총리, 장관들, 경호실이 그 대상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각하께서 유고이십니다. 속히 청와대로 와 주십시오”

김계원 비서실장의 비상소집에 따라 고관들이 속속 도착했다. 오후 8시 25분부터 8시 40분 사이에 최광수, 고건, 유혁인 등이 나왔고, 이어서 다른 수석비서관들이 줄을 이었다. 8시40분, 최규하 국무총리가 나오자 김계원은 다른 사람들을 부속실로 내보낸 후, 총리에게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에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최규하를 물렁하게 보고 하는 말이었다. 행여 최규하의 입에서 조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봐 미리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며 입막음을 한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최규하 총리는 박정희와 차지철이 함께 김재규의 총에 사살됐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국무총리는 대통령 유고시에 자동적으로 권한을 대행한다. 그런데도 최규하는 김계원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고, 조사를 시키지도 않았다. 박정희와 경호실장이 중정부장의 총에 살해되고, 이를 김계원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김계원과 김재규가 한 통속이 되어 새 세상을 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를 직감했기에 최규하는 입을 닫은 것이다.
같은 시각인 오후 8시 40분경, 일찍 퇴근하여 집에서 책을 읽고 있던 경호실 차장 이재전 육군 중장이 연락을 받고 비서실장실로 달려 왔다. 김계원이 이재전 차장에게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각하가 지금 유고입니다. 지구병원에 모셔놓고 오는 길이오. 차지철 실장은 지금 경호실을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 장군이 경호실장 직무 대행으로 경호실을 장악하시오. 이 사실을 외부에 절대 알리지 말고 경거망동 하지 마시오. 경호실 병력 출동은 절대 금하시오.

박정희와 차지철이 사고를 당했다면 이재전 장군은 당연히 청와대 경호비상 제1호인 “호랑이1호”를 발령하여 경호실 병력을 사고현장으로 출동시켜 박정희와 차지철의 신원을 확보해야 했다. 이런 입장에 있었던 그가 김계원으로부터 “경거망동하지 말고 병력출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는 “나도 관련돼 있으니 너는 더 이상 알려하지 말고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이었다. 이재전은 8시 40분, 제22특경대에게 안가접근을 금지시켰고, 이에 따라 안가로 출동하던 태양요원들이 즉시 발길을 돌려 되돌아 왔다. 여기까지의 행위로 인해 김계원은 10월 29일 구속됐고, 12월 20일 계엄보통 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날 재판장은 사형선고를 일곱 번이나 내렸다.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 종사 미수죄였다. 그러나 며칠 뒤 김계원의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경호실 병력의 출동을 금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경호실 병력이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것을 방해하고,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계엄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쿠데타 또는 혁명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초비상조치인 것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이런 김계원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김계원이 쿠데타의 중심축에 서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이재전 경호실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출동금지”를 지시한 것은 김계원만 취한 조치가 아니었다. 8시 5분경에 육군 B-2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 역시 거의 같은 시각에 이재전에게 전화를 걸어 경호병력 출동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때 정승화는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제거한 줄은 모르고, 오히려 차지철이 (계획적이던 우발적이던) 사고를 일으켰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따라서 경호실 병력이 차지철에 의해 동원되지 않도록 장악을 지시한 것이다. 이재전 경호실 차장은 경호실 직제에서는 차지철의 아랫사람이었지만 민간인이 아닌 현역 육군 장군 신분이었으며,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차지철의 까마득한 군 선배이다. 차지철의 오만한 행위가 이미 도를 넘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승화가 이쯤 명령을 내렸다면 차지철이 나타났더라도 그의 뜻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후 9시5분, 구자춘 내무부장관,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각하가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김계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김계원은 “간신배를 제거한다는 것이 각하가 다치셨다”라고만 말했다. 법무장관이 “차지철이 그 새끼 무엇을 했어”하고 흥분하자 김계원은 “죽었을지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여기까지 김계원이 한 발언들을 통해 그 자리에 있었던 국무총리, 장관들 그리고 청와대 수석들은 박정희와 차지철이 동시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쏘았고, 그 사실을 김계원이 알고 있다는 것까지 안 것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직감적으로 김재규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지철은 이들 누구나 싫어했고, 김계원도 싫어했으며, 특히 김재규와 차지철과는 앙숙관계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김계원이 사고에 관련되지 않았다면 김계원은 누구보다도 흥분하며 진상을 밝히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계원은 사고의 공론화를 막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에서 나오는 무성의 언어는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했을 것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동시에 암살됐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각료들이라면 김계원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하게도 이들 중에 이를 채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각료들이 침묵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김계원이 박정희 암살 사건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김계원은 김재규가 요청한 바와 같이 비밀을 지키며, 박정희 시신을 수도병원에 옮겨 사망했음을 확인한 후 비서실장실로 돌아와 계엄선포를 위한 비상국무회의를 준비하고, 국무총리에게는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경호실 차장에게는 경호실 병력이 암살 현장으로 출동하지 못하도록 지시하는 등 뒷일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이 정도의 뒷일은 김계원이 충분히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마지막 실탄을 발사하자마자 대기 중이던 정승화에게로 달려갔을 것이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8시 5분에 B-2 벙커에 도착한 이후 체포될 때까지 ‘살해사실을 숨긴 상태에서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국무위원들은 국방장관실에 모여 국무회의를 하자면서도 회의의 목적을 “계엄선포”를 위한 것으로 했다. 그 많은 장관들 중에 “사건의 진상부터 따지고 조사해야 한다” “누가 살해했느냐”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살아있는 박정희 앞에서는 충성을 보였을 장관들일 테지만, 일단 사망하고 보니 진상을 캐기보다는 권력이 누구에게 가는가에 대한 눈치부터 본 것이다. 최규하 총리부터 이러했으니 다른 국무위원들이야 오죽 눈치를 보았겠는가? 그 많은 국무위원들 가운데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차기권력이 어찌될지에만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이다. 권력의 태양은 서서히 저문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셔터처럼 한순간에 낙하한 것이다.
후에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다. 당직 군의관이던 송계용 육군 군의소령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박정희 주치의인 병원장 김병수 장군이 시체를 검안하는 과정에서 하복부의 피부병 자국에 의해 시체가 바로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서영준이 총으로 위협하는 와중에 보안사 참모장인 육군 준장 우국일 장군의 전화를 받은 김병수 장군은 아래와 같이 박정희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김병수: 예 병원장입니다.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입니다. 지금 그쪽 상황이 많이 곤란하지요?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으니 제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답하시오.

김병수: 예.

우국일: 죽었습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경호)실장입니까?

김병수: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옆의 경비원을 의식하여 일부러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국일: 코드 원(대통령)입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알겠소,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오후 8시께 육본 벙커에 도착한 김재규는 청와대에 있던 김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최규하 총리를 데리고 오라고 요청했다. 최규하 총리와 김계원을 필두로 신현확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구자춘 내무부 장관, 김치열 법무부 장관, 유혁인 정무 1 수석 비서관 등이 속속 벙커에 도착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각 군 참모총장들까지 모이면서 장소가 비좁아지자 이들은 밤 11시께 국방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최 총리는 노 장관에게서 대통령 서거 사실을 보고 받은 뒤 김재규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그는 "대통령 유고다. 보안을 유지하고 각의를 열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어 김재규는 10시 25분 김계원을 화장실로 데리고 가 계엄령을 선포해 계엄사 간판을 군사혁명 위원회로 바꿔 달자며 국무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이에 김계원은 최 총리에게 계엄령 선포를 위한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했고 최 총리가 수락했다. 아래는 당시 김재규와 김계원이 최규하와 나눈 대화내용이다.

김계원: (최규하에게)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면 국무회의를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규하: 물론이지요. 계엄 사유를 무엇으로 할까요, 유고로 할까요, 서거로 할까요?

김계원: 대통령 각하 유고로 인하여 27일 00:00부로 계엄을 선포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최규하: 유고만 가지고 납득하겠습니까? 무언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무위원들도 내용을 알아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지요.

김재규: 유고는 안 됩니다. 국내치안이 좋지 않아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최규하: 국내에 데모가 난 것도 아니고, 계엄이 선포돼 있는 부산도 조용한데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대통령 유고를 어떻게 국민에 안 알리겠습니까? 계속 보안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우선은 국무위원들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김재규: 왜 안 됩니까? 소련은 1주일 이상이나 브레즈네프의 행적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는데 2-3일 동안 왜 보안유지가 안 됩니까?

최규하: 그러면 김 부장이 국무회의에서 사유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김재규: 예, 하지요.

김치열: 비상계엄과 국장문제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김재규: 지금 보안을 지켜야지 국장 문제를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김성진: 비상계엄의 사유를 명백히 해야 합니다.

김재규: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1주일간이나 그 '''행적'''을[43]

보안유지 했는데 우리는 왜 며칠간 보안유지를 못합니까?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계엄선포 한다 하면 되지 사유를 자세히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후 국방장관실에는 사건 관련자인 김재규(중앙정보부장), 김계원(대통령비서실장), 정승화(육군참모총장) 이외에도 최규하(국무총리), 신현확(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노재현(국방부장관), 구자춘(내무부장관), 박동진(외무부장관), 김치열(법무부장관), 김성진(문화공보부장관), 김종환(함동참모의장), 서종철(안보특별보좌관), 류혁인(정무1수석) 등이 있었다.
육본 대회의실에서 열린 긴급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숨기고 "각하가 지금 유고 상태이다. 이 사실을 최소 48시간 동안 보안에 붙이고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난다"라고 길길이 뛰었다. 그러나 김재규의 예상과 달리 이 자리에서 신현학 부총리를 포함한 국무위원들이 반발을 했다. 법무장관 김치열이 "이런 중대한 사태를 이유 없이 48시간이나 보안으로 숨길 수 없다. 미국에도 이 사실은 알려야 한다"며 반박했고, 뒤늦게 육본에 도착한 부총리 신현확이 김재규에게 '''"밑도 끝도 없이 계엄령이 말이 되느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말을 밝히라"'''며 반발했다.[44] 신현확이 육본에 도착하기 전, 다른 장관들은 김재규의 기세에 밀려 전전긍긍하고 있던 상태였지만 국무위원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대통령 시해 사실을 숨긴 채,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던 김재규의 의도가 좌절됐다.
급기야 김성진 문공부 장관 등이 반발하며 정회를 요구했고 국무회의는 중단됐다. 전두환 회고록은 이 시점을 "김재규에게 치명적인 순간"으로 묘사했다.

'''"김재규와 김계원은 계엄령 선포 의결을 앞둔 시점에서 상황이 그렇게 반전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중략)...김계원 실장이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을 정한 것은 이때였다. 비상 국무회의가 좌초되자 김재규의 쿠데타 기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 김계원은 국무위원들이 반발하는 것을 보면서 김재규 배후에 아무것도 없고, 예비해둔 특별한 계획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한 후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11:40분은 역사적인 시간이었다. 김계원은 회의가 중단되자 슬며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옆방으로 가 국방부 장관 보좌관에게 노재현 장관과 정승화 총장을 급히 불러오라고 요청했고,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동조세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을 내놓으면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그에게 권총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45] 이에 노재현 국방장관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했다. 노재현은 정승화와 체포 계획을 논의했고 수사는 보안사가 해야 된다고 결정했다.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를 벙커로 불러 상당히 구체적으로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지만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는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46][47] 이에 전두환은 육군본부 보안대장 오일랑 중령에게 전화를 했다.

전두환: “자네 김재규 얼굴 아나?”

오일랑: “네”

전두환: “김재규는 네 얼굴 아나?”

오일랑: “모를 겁니다”

전두환: "지금 헌병복으로 갈아입고 애들 데리고 국방부에 와서 김재규 체포해“

이처럼 자정 무렵 정 총장에게서 '신병 확보' 지시를 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 군사정보과장 오일랑 중령에게 육본 헌병 대장 복장을 하도록 했다.
국방부 장관실에서 최 총리와 국무위원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김재규를 밖으로 유인하는 일은 정 총장의 비서실장으로 위장한 김진기 헌병감이 맡았다. 김진기 헌병감은 그에 앞서 헌병 기동타격대 1개 소대를 후문에 배치시킨 상태였다. 그가 평소 친분이 있던 조약래 국방부 장관 보좌관을 보내 정 총장이 만나고자 한다는 전갈을 하자 김재규는 순순히 따라 나왔다.
김진기와 오일랑이 국방부 지하 계단 쪽으로 김재규를 데리고 가자 박흥주가 따라붙었으나 헌병들에게 제지됐다. 대기하던 차량 앞에 온 오일랑은 뒷문을 열고 "부장님, 타시죠."라며 김재규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김재규가 체념한 듯 저항하지 않자 뒷좌석 왼쪽에 밀착해 앉아 김재규의 권총을 빼앗았다. 체포작전을 지휘하던 김진기 준장이 "압송해!"라며 명령을 내렸다. 27일 0시 30분의 일이다.
체포되어 정동 안가로 연행된 김재규는 허화평 대령의 안내로 2층 응접실로 가더니 "전 사령관 좀 오라고 해. 지시하거나 상의할 일도 있다"고 했고 "(내가) 여기 잡혀 있는 사실을 알면 부하들이 쳐들어올 거야"라고 말하거나. 누가 묻지 않았는데도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협력하라.” “내가 박정희를 살해했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뀐다”라는 발언을 일삼자 수사관들은 김재규의 언행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 살해범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는 즉시 전두환에게 보고됐다.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대통령 살해범은 김재규입니다. 구속해야 합니다” 라고 주장하자, 정승화는 전두환의 말에 동의해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전두환이 새벽 1:30분에 김재규를 체포시키고, 동행자였던 박흥주 대령까지 도주하면서 쿠데타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내막을 알아챈 김정섭 차장보가 자신의 부하들로 안가를 습격해 이기주 등 안가의 중정 요원들을 습격, 체포했으며,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도 그 다음 날 전부 체포되어 김재규와 함께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었다.
한편 문공부 장관 건의로 10분간 정회한 비상 국무회의는 이튿날 새벽 두 시에 다시 열렸다. 김계원의 실토로 대통령 서거 사실을 알게 된 최 총리와 신 부총리 등 국무위원들은 대통령 유해가 안치된 사실 확인을 위해 국군서울지구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27일 새벽 3시 국무회의를 마쳤고 4시10분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사령관에는 정승화 육참총장이 임명됐으나 국무위원 중 누구도 그가 김재규의 요청으로 사건 현장 인근에 있었던 사실은 알지 못했다.

3.3. 취조


조갑제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로 가던 김재규를 태운 호송차가 잠수교에서 전복 사고를 일으켰는데, 차가 뒤집어질 때 기절한 육군 수사관 신동기 헌병 준위가 정신을 차려보니 김재규가 엉덩이로 신동기의 머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고. 김재규가 "아이고 내가 신 선생을 깔고 앉았구먼. 미안하오." 라며 비켜주자 수갑이나 포승줄이 없어서 김재규가 도주하지 못하게 바지춤을 잡고 있던 신동기는 "부장님 어디 도망가시면 안돼요" 라며 손을 놓았고, 김재규도 "내가 어딜 도망가나. 빨리 (전복된) 차나 세우시오" 라면서 조용히 호송에 응했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를 태운 버스가 전복사고를 수습한 뒤 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 30분 쯤 이었고 김재규는 피의자 복장으로 갈아입었다.[48]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각하를 살해했다. 이제 세상은 다 끝났다. 수사관 자네들도 살 궁리를 찾아야 돼.'

김재규는 또 정승화도 사건현장에 있었고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왔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니 수사관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으며 내일 아침이면 우리가 반혁명분자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온 김재규를 처음엔 군과의 밀약을 통한 쿠데타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수사관들이 쉽사리 심문하지 못했다. 보안사는 방첩기관이지 전문 전투부대, 방어부대가 아니라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상황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전투부대라도 들이닥친다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49] 애초에 보안사가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이송한 것도 대장이 끌려간 것을 알면 중앙정보부가 기습을 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이때 이학봉 수사과장이 나서서 수사관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이학봉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손에 지금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다. 목숨을 걸고 수사를 철저히 하여 빨리 김재규의 공모자를 색출해야 한다.'

그러나 김재규는 과거 보안사령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서 다들 전관예우로 쩔쩔맸다고 한다. 심지어 취조실로 들어와서는 '부장님, 부장님'이라고 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수사관도 있었다. 그러자 이학봉은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로 호송해온 신동기 준위를 불렀다.

'당신이 데리고 왔으니 책임지고 조사하시오.'

키는 작지만 온갖 무술에 능하고 간이 큰 신동기 준위는 이왕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보아야 할 상황이라서 취조를 무식하게 밀어붙였다. 김재규를 호송해 온 신동기 준위는 한 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에서 6개월 과정 정보교육 수료 시 성적 우수자로 부장인 김재규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고, 김재규를 정동 분실[50]에서 서빙고 분실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정도 들었는지라, 김재규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김재규와 공모한 반란 부대를 알아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수사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자백을 빨리 받아내는 방법은 고문이었다. 신동기는 안면을 몰수하고 이때부터 한 30분간 김재규를 '거칠게' 다루었다.

신동기 : '어이, 김재규, 솔직히 이야기하자. 어느 군부대를 몰고올 거야. 우리도 알아야 손들고 항복할 것 아닌가. 어느 부대랑 결탁했어?'

김재규 : '없습니다. 단독으로 시해했습니다.'

신동기 : '미국과 손잡았나.'

김재규 : '아닙니다.'

이 때 김재규는 쇠로 만든 의자에 앉았다가 두들겨 맞고 바닥에 나뒹굴 때마다 스스로 의자를 바로 세운 뒤 자세를 딱 바로잡고 앉아서 다음 타격을 기다리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학봉 중령은 김재규가 동원한 부대가 없다고 판단했던지 신동기에게 '그만하고 나오라'고 했다. 그 뒤로는 정식 신문이 시작되었다. 심문 도중 김재규는 신동기 준위의 주먹에 맞아 눈 밑에 피멍이 들기도 했는데, 위 현장 검증 사진을 보면 김재규의 오른쪽 눈 밑에 거무스름한 상처가 눈에 띈다. 고문을 심하게 당한 김재규는 피하출혈이 생겨 멍이 들자 신동기 준위는 이를 보고했고,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일단 고문을 중단시켰다. 이후 김병수 장군을 불러 김재규에게 응급치료를 하게 하였다. 김병수 장군이 서빙고의 심문실에 들어가니 김재규는 반가워했으며, 진찰해 보니 위험한 정도는 아니였고 간이 나쁜 사람들이 보이는 증상이었고 한다. #
27일 새벽1시 직전에 육군본부 벙커에 육군 헌병감 김진기 장군이 총장실로 오더니 김재규 체포완료 보고를 했다. 정승화는 국방부장관실에 있는 김계원 실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승화는 한참 있다가 국무회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국방부로 가던 중 복도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났다. 전두환은 쪽지에 쓴 메모를 보여주면서 '김재규가 압송차 안에서 횡설수설한 걸로 보아서 범인이 틀림이 없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세상에 중정부장이 각하를 시해했다니...'라고 말하면서 어이없어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으로부터 수사계획을 보고받은 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갔다. “김계원 실장이 각하 시해장소에 김재규와 같이 있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연행을 해서 조사를 해야겠습니다”라고 하니 장관도 동의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연행지시를 했다. 그 직후에 김계원 실장이 장관실로 들어왔다.
그러나 정승화는 그의 모습을 보니 도망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전두환에게 '연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정승화 총장의 1979년 11월 1일자 참고인 진술서. 김계원은 이틀 뒤인 29일에 연행되어 구속된다).
이학봉은 27일날 아침 김재규에 대한 1차 심문결과를 수사관들로부터 보고받았다. 수사관들은 시해현장에는 김계원 실장뿐 아니라 정승화 총장도 있었다고 보고하면서 두 사람을 연행해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날 오전 11시 이학봉 수사과장은 오희명 과장과 함께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에게 수사보고를 했다. 이학봉 중령은 김계원, 정승화 두 사람을 구속하여 수사해야겠다고 건의했다.

"처음엔 (전두환 사령관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막 문쪽으로 걸어가는데 다시 부르더니 '김계원 실장은 구속 수사하라. 그러나 정승화는 어제 계엄사령관이 됐으니 함부로 할 수 없다. 지금부터 극비리에 내사를 더 해봐라'는 취지로 지시했지요." (5·18사건공판기록)

이학봉 중령이 전두환 소장에게 정승화 총장에 대한 수사필요성의 이유로 적시한 내용은 이러했다.

'육군총장이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시신수습과 범인색출을 한 흔적이 없다, 청와대를 포위시켰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5·18사건공판기록)

이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이렇게 생각했다.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공모한 조직적인 내란이다. 완전한 혁명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정 총장을 구속하면 배후세력에 의해서 또 다른 내란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5·18사건공판기록).

이때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시해사건 현장 부근에 김재규의 초대로 와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김재규가 단독범인지 여부가 불투명한 시점에서 전두환 소장과 합수부 수사관들은 일단 정승화를 공범 용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불과 7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전두환과 합동수사본부에 이런 의심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전두환이 정권탈취에 대한 야심을 가졌다고 보기 힘든 시점에서 그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권력자로 등장한 계엄사령관을 구속해야할 조사대상자로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12.12 사태로 가는 길은 이미 열리고 있었다.

3.4. 결과


이 사건의 전말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수사 보고에 의해 10월 28일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재판을 통해 주모자인 김재규, 그리고 암살에 참여한 박선호와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안가 경비원으로 이날 살아있을지도 모를 피해자들에게 의도적으로 M16 소총으로 재차 사격하여 살해한 혐의로 체포 80도306) 1980년 5월 24일 이전에 총살된 박흥주[51]와 감형된 김계원[52]을 제외한 5명은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국내외에서 김재규의 구명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으나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또한 당시 대통령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 중장은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으나 직무유기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정승화 참모총장의 만류로 풀려나서 예편했다.

'''김재규의 말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은 철옹성 같던 유신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이가 바로 하나회라는 군부 사조직을 등에 업은 전두환이었다. 그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혐의로 체포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최규하를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육군본부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든 이후, 1980년 5월의 5.17 내란과 그 다음날부터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거치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의 꼭짓점에 서는 데 성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재규의 행위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독재 정권 수립에 일조한 것이다.

한편,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생전에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던 많은 사업들이 거의 중단되었다. 대표적으로 수도권 집중을 크게 완화하는 국토이용의 효율성, 특히 물류의 편의를 극대화하는 국토개조가 핵심인「가로림 프로젝트」(공식명칭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와 함께 20만t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항만을 만들어 자유경제특구(FTS)를 건설해 제2의 싱가포르로 만들겠다는 가로림만 계획이 좌절되었다. 박정희는 충청 해안을 중심으로 대규모 중화학 공단과 무역항 사업을 현 공주시로의 수도 이전을 전제로 추진하였는데, 10.26 사건 직전 고인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던 삽교천 행사 또한 이 일환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수도 이전 계획도 같이 영영 중단되었다. 다음은 박정희가 구상한 프로젝트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기사들이다. #, #, #, #, # 그러면서 수도 관련 계획과 해안 공단사업을 받기로 한 충청도, 특히 충남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모든 계획이 엎어지고 이후 경상도, 전라도에 편중된 집중개발로 가장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나마 최근에 세종시 계획 하나를 받았지만 정말 이거 하나가 끝이다. 한편 고고학적 성과를 민족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신라왕릉, 석굴암 등을 발굴, 정비하는 것도 박정희 생전에 그 쪽으로 관심이 많아 많은 예산이 투입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지원이 뚝 떨어졌다.[53]
반면에 10.26 이후 1979년 12월 7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12월 7일~8일 사이에 문익환 등 구속된 민주화 인사들이 석방되고 김대중에 대한 연금이 풀리기도 하였다. 조갑제는 김재규의 총성이 가져온 변화는 불과 두 달 전에만 해도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였고, 유신 체제를 해체시킨 것 이라고 평가하였다.
1979년 10월 27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한 마음으로 국민에게 애국심과 지혜와 단결을 호소합니다. 민족중흥의 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졸지에 서거하신데 대해 그 충격과 애통심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이 국가비상시국에 결연히 지혜로 극복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군은 이 비상시국에 국가수호의 막중한 책임을 다해 북괴 공산집단의 동향을 주시하며 철통같은 방위 태세에 임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모든 공무원도 소임을 위해 국가비상사태 극복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일사불란하게 책임을 완수하고 상호협력해 국가 안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맹방인 미국 정부는 이번 우리 정부에 대해 즉각 협조할 것을 명백히 했습니다. 대외에 있어 우방국과 우호 협력 관계도 아무 변동이 없다는 정부의 방침을 천명합니다. 국민들은 모두 다 같이 굳데 뭉쳐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겠습니다.

이어서 계엄포고 제1호가 발령됐다.
①일체의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하며 시위등단체활동을 금한다.
②언론·출판·보도는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한다.
③야간통행금지는 22시부터 다음날 새벽4시까지로한다.
④정당한 사유없이 직장이탈및 태업행위를 금한다.
⑤유언비어날조및 유포행위를 금한다.
⑥항만및 공항의 출입은 검열을 받아야한다.
⑦전문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은 별명이 있을때까지 휴교조치한다.
⑧일체의 집단적난동·소요및 기타 범법행위를 금한다.
⑨주한외국인의 활동은 이를 보장한다.
상기포고를 위반한자는 영장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처단한다.戒嚴司令官(계엄사령관) 鄭陸參(정육창)총장 全國(전국)에 非常戒嚴(비상계엄) 선포
김재규는 10.26 사태 이후 전국으로 비상계엄령 확대를 서둘렀고(출처), 1980년 신군부가 추진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5.18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던 것처럼, 전국으로의 계엄령 확대는 전국적인 저항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당시 대법원은 김재규가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입법, 사법, 행정권을 총괄하는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강제로 정리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이었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출처 1,출처 2) 그러나 김재규 본인은 이에 대해서 사리사욕을 채울 생각 없이 유신의 잔재를 청소하기 위함이라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유신 정권의 일원들은 물론 신민당과 민주화 세력들 또한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낮은 계획이긴 했다.
김종필은 10.26 직후 민주공화당의 총재로 추대되었고 당원으로부터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순간 유신 체제는 종말되었으니 나는 그러한 체제에서 대통령을 할 생각이 없으며, 헌법 개정 이후의 새로운 시대에서 대선에 출마하여 대통령이 되고 싶다"며 출마를 거부하였다. 사실 그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시절 김종필이 대권을 넘보고 있다며 김재규에 의해 청구동 가택수색까지 당한터라[54] 김재규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거기다 10.26 이후 김종필이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개헌과 민주 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갔던 행보로 미루어보았을 때, 김재규의 구상에 따랐을지도 의문이 존재한다.##
김재규 개인의 행위로 인해 유신 체제가 붕괴된 것은 단견이며, 유신 체제는 이미 내부 권력의 모순과 사회 구조적으로 붕괴의 전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김재규 한 개인의 행위는 민주화 운동의 큰 흐름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과 이를 부정하는 주장이 대립하기도 한다.

4. 사건의 원인 주장



'동반자'였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은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특히 피격 직후 김재규가 자신의 근거지인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본으로 달려간 것을 볼 때 이 사건을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워낙 다른 증언도 상반되기 때문에 단순 우발적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 야사이지만 차지철이 부마 항쟁을 탱크로 쓸어버리겠다고 할 때 박정희가 "하지 마라" 한마디만 했다면 죽이지 않았을 거라 한다.

본인(김재규)이 부산 사태(부마민주항쟁) 직후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읍니다. 김계원 실장과 차지철 실장과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읍니다. 부산사태는 체제 반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항에 조세 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안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

김재규. 79고군형항제550호(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후) 항소이유보충서[55]

10.26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고려대학교 임혁백 교수의 논문 '박정희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를 참고하여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10.26 사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 미국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다는 견해가 세간에서 많이 떠돈다. 미국의 사주라는 견해는 공산 진영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의 비정상적 상황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떨어진다. 또 김재규가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정황 역시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한편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이라는 설과 최근에 김종필의 회고록에서 제기된 김재규가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설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10.26 사태가 김재규의 분노로 인한 우발적 행동으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이전에 국내 정치와 국외 정치의 상황을 고려하여야 한다. 단순히 김재규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는 것은 10.26이 가진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 요인에만 의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그 행동이 나타나기까지 많은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 10.26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유신 후반기의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4.1.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다


법정에서 김재규 본인이 한 주장.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항상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염증을 느껴서 독재 종식을 위해서 박정희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 바로 부마항쟁이 일어나서 김재규가 사건의 진상을 파해치러 부산, 마산 지역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큰 충격을 받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이 정권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국민에게 약속하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 역시도 김재규 개인의 주장이다. 김재규 자신도 유세 현장에서 자신이 건의했던 내용을 말하면서 박정희를 믿었다고. 그러나 약속을 어기고 유신 헌법이 선포되었고, 김재규는 부하들 앞에서 박정희가 다 망쳤다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유신이 선포된 이후, 당시 3군단 연대작전 오순춘 참모는 김재규 군단장이 실제 박정희를 연금하려 모의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3군단에 순시하러 왔을 때 박정희를 연금하여 하야 성명을 내도록 강제하려 준비했다는 것. 또,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은 유신 정권체제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대화를 하면서 박정희를 환자에까지 비유를 하는 표현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청와대에 들어와서 박정희에게 조언해달라고 하면서 유신 체제를 바꾸는 제3의 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당시 사회적 상황들은 김재규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박정희의 폭주를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할만한 정황들이 있는데, 김재규는 전역 후 본격적인 활동을 74년 9월 건설부 장관부터 시작했는데 김재규의 건설부 장관시절에 남베트남이 멸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김재규는 당시 남베트남에 파견된 해외건설사[56] 들을 수습하느라 뛰어다녔고 그 과정에서 남베트남의 패망과정을 매우 자세히 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 직후에는 76년부터 중앙정보부장으로 활동하는데 이시기는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로 공산화의 공포가 극대화되던 시절이었고 이런시기에 중앙정보부장으로 공산화되는 국가들의 정보를 수집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산화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공통점은 원래 지배층의 독재로 엄청난 소요사태와 내전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 공산당들이 봉기해 공산정권이 들어섰다는 점었는데, 때마침 박정희가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었고 그 시기 전국적으로는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터져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런상황에서 김재규의 머릿속에 '박정희=남베트남'라는 공식이 충분히 떠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고 순수한 민주화 요구가 아니더라도 이기적으로 자신과 자신 주변인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박정희를 죽여야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재규가 과연 정말로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즉흥적으로 외친 것인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진행 중이다. 다만 김재규를 다룬 재판이 전두환의 압력을 받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감안하면 김재규의 목적은 명확하게 규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가 받은 재판으로 목적이 명백히 규명되었다고 한다면 숱한 사법살인도 옹호될 것이다. 이것 외에도 김재규의 집안에서 '자유 민주', '대의' 등을 적은 붓글씨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를 근거로 그가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부정하는 견해도 많기 때문에 지속적인 논쟁이 진행 중이다.

4.2. 차지철과의 갈등 때문이다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권력 투쟁과 갈등 속에서 10.26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주변 인사들에 의해서 주로 증언되고 있고 드라마 제4공화국, 제5공화국 등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역시도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차지철과의 갈등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전두환도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하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해서 이에 대해서 격분했고, 이것이 10.26의 발단이 되었다는 주변인물들의 증언이 있다.출처. 김재규가 교사 시절 아끼던 제자였고 가깝게 지냈던 이만섭 국회의장 역시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가 사건의 발단이 된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방송이나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도 했다.출처.

특히 유신 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 국군보안사령부 간에 상호 견제와 갈등이 상존하고 있었다.출처. 김재규의 지위는 언뜻 탄탄한 듯 보였지만,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대두로 위협받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부마민주항쟁의 수습 과정에서 갈등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당시 김재규의 진술에서 김재규 자신은 온건 대응을 주장했지만 차지철은 300만을 들먹이며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김재규를 깠고, 박정희도 이에 동의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왔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 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 문제와 부마 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 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하게 되고 10.26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출처. 박정희는 2인자를 여러 명 두고 서로 충성경쟁을 시키는 방법으로 그동안 권력기반을 유지해왔다. 한 쪽이 올라오면 다른 쪽을 밀어주는 식으로...이러한 용인술은 절대1인자가 될수 없는 2인자들이 그의 권력기반을 탄탄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나, 왜인지 말년에 들어 그런 긴장감을 유지시키는데 실패하여 차지철 쪽에 너무 무게를 실어주어 결국 갈등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부마 항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 박정희를 만난 김재규가 스스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기에, 그가 권력에서 밀려나는 상황을 우려하여 10.26을 일으켰다는 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출처.

4.3. 미국의 사주다


당시 박정희와 지미 카터 대통령의 관계가 좋지 못했으므로,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해서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 어르신들 중에 이 설을 진지하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다. 특히 이 시기에 군문에 몸 담았던 사람(간부), 군과 관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설을 정설로 여기고 있다. 남재희 전 장관의 증언.
김재규가 사실은 CIA 요원이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부터, 미국에 포섭된 주변 인물들이 그를 그렇게 몰아갔다는 버전까지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다. 그럼 왜 미국이 김재규의 손을 빌려 박정희를 죽였냐는 질문에는 “박정희가 미국의 의사를 거스르며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기 때문에 제거했다”는 대답이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 주장도 당시 미국 상황을 보면 이런 초대형 사건을 계획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불과 4년 전에 쿠데타로 휘청거리던 남베트남이 완전히 공산화가 되어버렸고, 중동의 최대 친미 정권이었던 이란팔레비 왕조가 79년 초 혁명으로 무너졌고, 여름에는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된 니카라과가 공산화되었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CIA가 대단히 바쁠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암살은 뒷수습도 뒷수습이며, 암살로 인한 독재 권력의 공백은 쿠데타의 완벽한 배경이 될 수 있고, 이런 혼란 상황은 베트남 공화국의 재현과 한반도 공산화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위험한 선택이였다. 그리고 이런 제의를 위해선 대통령 암살 이후의 계획 또한 제공되어야 하는데, 쿠데타 이후의 행적이 일관성과 계획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담으로 김진명의 소설 '1026'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견제하기 위해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김진명 소설이 늘 그렇듯이, 애초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부담스러워할 만한 이유도 없고, 미국이 완전한 악역 수준으로 한국을 견제하려 했다고 보여지지 않기에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낮다. 이 경우는 박정희가 미국을 무시하고 핵을 개발하려고 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하여 박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김진명의 불쏘시개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말에서, 사실 '야수(Brute)'가 아니라 '브루투스[57]'라고 써놓고 미국이 대본을 준 건데, 김재규 일당이 해석을 잘못해서 브루투스의 심정이 졸지에 야수의 심정으로 바뀐 거라는 그럴싸한 농담도 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4.4. 민주화 열망 및 미국의 묵인이 있었다


3번(민주화)이 2번(미국)과 결합한 가설도 있다. 일단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이기만 하면, 그 다음은 미국이 어떻게든 알아서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추측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이 명시적으로 김재규를 사주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책임을 져줄 것처럼 잘못된 사인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가 사인을 잘못 읽었거나. 이 이론은 암살 이전의 치밀한 계획 + 암살 이후의 우왕좌왕을 설명해주는 가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1979년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는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대부분의 대화 내용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 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10.26의 주모자가 김재규라는 것을 몰랐기에 글라이스틴이 박정희 암살을 권유하거나 지시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글라이스틴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을 김재규가 암살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원래 외교적 수사라는 게 그런 식이니까.
미국의 영향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암살 묵인'과 '사후 추인'을 구두 승인했을 가능성이다. 김재규의 공작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가정해보자면, "박정희는 암살되고, 새롭게 정부가 구성된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여기서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이 박정희 암살과 민주화를 일종의 "반역죄"로 보고 승인을 하지 않을 것인가, 일종의 "혁명"으로 보고 승인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김재규의 암살로 만들어질 "새로운 민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다.
현실적으로 일국의 국가 지도자를 암살하는 것은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정치적 부담이 큰 일이다. 뭐 대놓고 쳐들어가서 체포도 한 적 있지만 그러나 김재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암살 사건을 저지른 다음,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민주화를 하고, 미국은 사후에 승인을 하는 형식이라면 정치적 부담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의 신변은 미국에서 미국의 압력에 따라 민주화 정부에서 단순살인죄에 대한 '사면' 혹은 미국이나 제3국으로 '망명'하는 형식으로 '신변 보장'을 할 수도 있다.

4.5.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에 대한 대한 이견


민주화와 권력 다툼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김재규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을 놓고 박정희, 차지철과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암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유신의 심장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지만 '''실제 부마항쟁 이후 김재규는 정권이 전복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인 경상도에서 이러한 항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통치 전략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해석되기도 한다.[58] 이를 관리하는 방식에 있어 박정희와 차지철의 강경일변도 노선에 상당히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김영삼 체포 등의 야당 탄압, 민주화 요구 묵살 등에 대해서 김재규가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박정희와 차지철은 끝까지 강경 일변도의 진압을 주장하였고,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1~200만명 정도 못 죽일 것 없지 않겠냐"'''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고 김재규는 법정에서 진술했다.[59]# 정리하자면 김재규가 민주화를 원했다기보다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들에 대한 관리 방식을 가지고 충돌이 일어나 이것이 암살까지 갔다는 의견이다. 자신들의 정권 반대 세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 통제가 강한 국가의 권력층에서 늘 논쟁거리다. 이 논쟁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상기된 바와 같이 대중적 저항의 격화와 강경 탄압, 그 탄압으로 인한 더 큰 규모의 저항이 반복되면서 당시의 박정희 정권이 독재 정권의 전형적인 말기적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두환의 경우이지만 광주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개된 상태를 보아서 이미 사회적으로 무장하고 싸우는 것도 감내할 분위기가 내재된 상태였다. 추론의 영역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재규가 이 상황에서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을 가능성은 있다.

4.6. 분노에 의한 우발적 암살


전제는 3, 내용은 변형인 4와 거의 비슷하다. 박정희와의 자리에서 김재규가 부마항쟁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온건한 대응을 주장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의 말에 대해 비꼬는 투로 비난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한 소리를 할 당시 차지철이 이때 전차로 밀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만화 '박정희'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차지철이 부마항쟁에 대해 캄보디아폴 포트처럼 싹 쓸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 경력에서 비교도 안되게 우위에 있던 사람인데, 보잘 것 없던 차지철이 자신을 무시하기에 순간적 분노에서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도 뒤이어 쏘았을 거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차지철은 특전사 창설 멤버로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바로 전역했지만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였고[60], 실제 3군단장까지 했던 3성장군 출신이다. 워낙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보니 흔히들 김재규를 4성장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김재규는 예비역 중장이다. 의외로 10.26 당시 동석자 중 한 명이었던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육군 대장 출신이다. 당시 참석했던 인물의 병역 사항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대장 예편, 김계원도 대장 예편, 김재규는 중장 예편, 차지철만 겨우 중령 예편이다. 그만큼 차지철과 계급차가 컸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정희 사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단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61]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냔 의견도 있다. 즉, 평소 가지던 불만에 당일의 분노가 기름을 부은 것이라는 의견.
당시 차지철과 김재규의 상호 견제는 절정에 달해있었는데, 이러한 암투 속에서 박정희가 차지철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자 결국 자신이 밀렸다고 판단한 김재규가 10.26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차지철은 성격이 안하무인이라 박정희의 총애를 받자 대통령 신변 보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서 기타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월권 행위를 일삼았는데, 이에 김재규를 비롯한 박정희의 측근들이 박정희에게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오히려 두둔했고, 도리어 차지철 앞에서 김재규에게 면박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차지철의 횡포는 더 심해졌고, 때문에 거사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김재규의 제자였던 이만섭이 추정하는 설이기도 하다. ##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도 김재규가 거사 직전 " '대위 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62]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라 말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63]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면 10.26이 사전계획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행동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김재규가 거사 직후 자신의 본거지였던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가는 등 김재규의 행동이 계획적이라기엔 너무 어설펐기 때문이다. 김종필도 10.26의 발단은 차지철과 김재규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고 우발적으로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덧붙여서 박정희 집권기 동안 두루 요직을 거치면서 그렇게 박정희에게 충성하던 사람이 법정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인 혁명을 한 것마냥 민주화투사로 둔갑하였다고 주장했다. #[64]

4.7. 중앙정보부 부장이라는 위치의 위험성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정권의 정치공작에서 최전선을 담당했으며, 역대 중정부장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다. '''하지만 박정희가 장기 집권하고 있는 한 중정부장의 막강한 권력도 시한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거대한 위치가 중정부장 개인의 일신에는 위험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등 권력을 휘두르던 중정부장들은 최종적으로 박정희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는 수순을 받았다.
특히 김형욱의 말로가 크게 영향을 미친것으로 추정되는데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실각당한 이후 앙심을 품고 박정희가 미국 정계에 벌인 불법 로비들을 폭로했는데 후대의 조사에 따르면 김재규의 지시로 김형욱을 납치해 암살한다. 이 암살시점이 10.26이 있었던 같은 달 10월 초였고 몇 주뒤에 김재규는 박정희를 살해한다. 김형욱의 죽음을 보고 김재규가 자신 역시 단지 박정희의 소모품일 뿐, 언젠가는 실각 당하거나 처참한 말로를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고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느끼게 했다는 분석이다. 더불어 청문회 증인으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던 김형욱을 암살했다는 사실은 김재규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안겨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4.8. 장준하-김재규 밀약설


한편 장준하와의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밀약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지만 평소에 장준하와 김재규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권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 사후 김재규가 여러 모로 유족들을 도와줬다고 하며,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며칠 전 김재규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다만 김재규의 행동이 장준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 외에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태다. 이런 밀약설 중에는 시인 김지하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사이에도 쿠데타에 대한 의논이 있었으며, 성공할 경우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국회의원의 1/3 이상을 자기쪽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즉, 실제로 시행 가능성을 전제로 둔 밀약이었다는 것. 이 밀약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지하 본인인데, 그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4.9. 김영삼 지지설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영삼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설. 김재규와 김영삼 두 사람은 김녕(金寧) 김씨 문중의 종친이었고, 이 점에서 야당 지도자임에도 김영삼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으며, 도리어 그가 박정희 대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지하여 10.26을 저질렀다는 주장. 다만 이는 관련자의 증언, 물적 증거가 전혀 없는 개연성, 추측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할 내용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다음에 나올 건강이상설보다는 그럴듯해 보인다.

4.10. 건강 이상설


前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발기 부전'''(...)을 비롯한 건강 문제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 링크. 실제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고, 10.26 당시엔 중정부장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때의 간 기능 장애로 극심한 발기부전을 앓게 되어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생겼고, 이것이 10.26 같은 암살을 저지른 한가지 먼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저 당시 김재규의 정신적 혼란에 대한 먼 원인을 추측한 것일 뿐 큰 의미는 부여하지 말자. 해당 칼럼에 대한 비판.

다만 위의 김진의 억측말고 궁정동 연회와 관련해서 김재규의 건강문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게 당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다 간경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간경변 환자에게 술은 독약이나 다름 없다. 이런데도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연회때마다 술을 마셔야 했다. 반면에 차지철은 건강한데도 종교적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 하나만으로는 사람을 죽일 정도로 분노하는 것이 어렵지만 이전부터 분노가 쌓인 상황에서 박정희가 독약이나 다름없는 술을 강권하는 것 때문에 분노가 폭발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술기운과 분노가 쌓이자 원래 계획한 치밀한 암살계획 대신 급작스럽게 암살을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주장들이 존재하며, 위의 추측 중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매우 많다. 그만큼 김재규의 암살은 이해하기 어려운 뜻밖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차지철에 대한 적개심 등 여러가지 복잡한 심리가 뒤죽박죽 짬뽕 극대화되어서 저지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암살이나 이후의 판단 미스도 이해는 간다. 예를 들어, 유신 체제를 지속하는 박정희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선임자 김형욱 부장의 암살을 지켜본뒤 불안감을 키우던 김재규가 부마항쟁 현장을 방문하고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박정희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으나, 26일 궁정동에서 차지철의 도를 지나친 무례한 행동과 술기운에 욱하는 바람에 "궁정동 안가에서 중정 직원들만으로 현장을 제압할 수 있는 지금이 기회"라는 판단을 굳히고는 아직 미완이었던 계획을 급하게 앞당겨 실행한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이후 김재규의 혼란스러운 행동은 아무리 계획된 암살이었더라도 자신이 수십 년 충심으로 따르던 박정희를 막상 자기 손으로 암살하고 나자, 김재규 스스로도 충격과 공황 상태에 빠져 정승화가 하자는 대로 육본에 따라가는 등 판단 미스를 거듭한 것일 수도 있다.

4.11. 최태민의 존재


사실은 최태민도 10.26 사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주장도 있다. 처음에는 전두환 합수부가 제시한, 예정된 민중 혁명과 정권 붕괴가 촉발한 유신 권력 내부의 모순 격화와 권력 다툼으로 인한 우발적 사건 정도의 프레임에서 평가가 진행되었지만, 사료가 점점 축적되고 발굴되어 '과연 당시 시민 사회의 역량이 역대 한반도 독재정권 중 최고로 공고한 수준이었던 유신 정권을 몰아낼 정도로 굳건했는가? 김재규 개인의 신념과 동기가 그렇게 무시하고 축소할 만한 것인가?' 에 대한 문제 제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재평가와 재조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하여 과거의 축소 해석을 비판하는 관점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이미 2010년대 초 하나의 주장으로 정초가 끝난 상황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도에 따라 조작되어 조직된 것은 아니다. 학술적 층위에서는 상기된 축소 해석에 대한 비판은 민주 회복이 이루어진 1990년대 초에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며, 저렇게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컨센서스가 2010년대 초 확고히 성립된다. 예로, 최종적으로 10.26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던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 서중석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이전 이미 '김재규 개인의 신념과 동기'를 10.26의 성립 배경 중 하나로 확실히 언급하고 있다.
대중적 층위에서는 당시 김재규가 항소했을 시 밝힌 동기가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재조명을 받고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읍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읍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재규가 쓴 옥중수기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 #

***음력 12월 11일**

대통령 일가의 횡포

1.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관여치 말라는 노여움을 샀다).

2. 육사의 명예제도와 지만생도

- 백광현 고검검사가 조사를 담당함(당시 6국장)

- 김근수 중정제6국장이 사실 전모를 파악하고 있음.

참고. 최의민의 전화도청으로 최가 일일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사실(기록을 국장 소지 보관중)

*상기 내용은 혁명과 직접.간접으로 관계가 있으나 일절 언급치 않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일이라서. 돕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간단히 여기에 기록하고 자세한 것은 후일 백 검사와 김근수 국장이 조사결과.

당시 김재규 변호사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는 10.26 관련 책을 썼었는데, 신동아와 인터뷰를 했고 그게 2005년 12월호에 실렸다. 당시 김재규가 최태민을 주목했다는 점을 역시 증언하고 있다.

그는 김재규가 우발범이거나 패륜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체제 회복에 나선 '''확신범 내지 양심범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 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신동아 2005년 12월 #

이호 객원기자는 2005년, 10.26 사건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김계원과 인터뷰를 했고, 이것은 이코노미스트 811호(2005.10.31)에 실려있다.
https://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244751
http://blog.naver.com/palhj/100038634428
묻는 사람이 이호 기자고 답변하는 사람이 김계원이다.

「김계원:

그게 이제 (잠시 망설이다가) 차지철하고 김재규 최태민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그 때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때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은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기자: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 혼을 냈다는 말씀 아닙니까.

김계원:

예. 이건 내가 들어가기 전 얘기입니다. 내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비서실장이 돼 내가 김재규에게 '뭐가 제일 문제냐' 그랬더니 '큰 영애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최태민 문제다 그래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최태민씨가 청와대 드나드는 것은 경호실 문제 아닙니까?

김계원:

뭐 본론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최태민이 문제 있다는 걸 김재규가 얘기해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나도 비서실장 하면서 중정이나 각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를 보니까 이건 뭐... 최태민이 그놈하고 관계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최태민이) 나쁜 놈이야.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

그런데 대통령한테 혼나고 나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못 들어왔죠. 또 근혜양한테는 못 나가게 했어요.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근혜양이 밖으로 나가니까 그건 경호실 문제지. 그래서 박 대통령께 내가 한 번 물어봤어. 이 문제는 내가 청와대 들어오기 전에 있었고 김재규를 통해 주로 들은 얘기니까. 그걸 확인하려고 비서실장 된 뒤에 박 대통령한테 물어봤어.

'각하. 요즘도 최태민이 근혜양과 만났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랬더니 '아니야. 그놈의 자식 내가 아주 그냥 혼내놨어. 요즘은 근혜도 자주 못 나가. 자주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자식이지만 속이 아프고 하시겠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거니까.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청와대 출입을 못하게 됐는데 왜 최태민 때문에 차지철과 김재규가 다투게 됩니까.

김계원: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인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에서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되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치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

기자:

중정부장이 대통령한테 긴급 보고도 할 수 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가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는 겁니까.

김계원:

그래서 내가 청와대 간 뒤로 얼마 후에 김재규가 나에게 '실장이, 실장님도 과거에 청와대 들어오는 게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자네가 청와대 들어와 대통령께 보고드리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것이 어렵단 말이냐'내가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유. 지금 저 차지철이란 놈이 어떻게 제한하는지, 왜 들어가느냐, 뭣 때문에 들어가느냐, 빠르다, 늦아, 시간이 길다.' 자꾸 자기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아. 정보부장은 국가 유사시에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대통령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느냐, 난 어떨 때 새벽 1시에 가 대통령 주무시는 걸 깨워 보고드린 일도 있어' 그래서 경호실장이 하는 일을 내가 도중에 막을 순 없으니까 '자네가 정 급한 일로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기 어려울 때는 비서실장 만나러 온다'고 전화하라고 했어요. 비서실장이 오라고 하면 그건 누구도 못 막거든. 그래서 내가 한 네댓 번 바로 넣어준 일이 있어요 대통령한테. 차지철이가 그랬다고 글쎄. 그러니 김재규하고 안 싸워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차지철이 그토록 김재규를 막고, 김재규는 가까우니까 실장님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결국 근혜양에게 실장님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김계원:

그것만큼은 사실일 겁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정보부하고 쉬 틀어졌던 것이 김재규가 최태민 일로 자꾸 여러 가지 귀찮게 했는데, 그러니까 김재규는 김계원 사람이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나하고 가까웠고, 뭐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그랬거든. 김재규가 해군하고 같이 술 먹고 오다 차가 전복돼 거의 죽게 됐을 때 내가 언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업고 와 살린 그런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김재규가 그랬죠. 자기가 세상에 은인이 세 사람 있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하나는 고 이종찬 국방부 장관, 그 다음에 김계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여태까지 박근혜가 아무 지장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됐는데 이게 자꾸, 김재규가 정보부장 되더니 브레이크가 걸리거든.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김계원 지시다, 그런데다 큰 영애가 볼 때는 김재규가 하는 일이 김계원이 정보부장 할 때 하고 똑같구나,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어요?

기자:

실장님하고 근혜양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겠습니다.

김계원:

또 하나는 최태민이 대통령한테 혼나고 그 후에 내가 최태민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비서질장 밑에 큰 영애 전속 비서실을 만들어야겠다 싶어 대통령한테 '각하 비서실을 개편해야겠습니다. 영부인이 안 계시지만 큰 영애가 영부인 역할을 하고 있으니 공식 비서를 하나 따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재가받았어요. 그런 다음 내가 큰 영애에게 '비서를 따로 하나 두려고 그러는데 누가 좋겠습니까, 추천할 사람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좋아하면서 그때 구로공단 책임자로 있던 최명헌씨를 지명해요.

근데 그 사람이 또 최태민과 가까워요. 아주 곤란해 다른 이유를 대고 다른 사람을 말해 보라고 했어요. 그랬으니 큰 영애가 나를 좋게 생각했겠어요?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 최필립 비서관이라고, 우리 비서실에 있던 사람인데 걜 지명하더구먼. 그래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랬더니 걜 예뻐해요, 큰 영애가. 아 그런데 나중에 보니 최필립도 최태민을 아는 거야. 난 몰랐지 첨엔. 어떻게 이상하게, 최씨 세 사람이 그렇게 합쳐 움직여, 나 참"」

최태민이란 자가 박정희 딸인 박근혜를 위시하여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내용이 중앙정보부에 들어왔고, 이에 따라 김재규는 조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보고했으나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김재규는 사안이 중하다고 판단해 최태민을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재차 건의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는 최태민을 직접 불러 김재규와 같이 심문을 시작한다. 문제는 이 조사에 박근혜가 동행했었다는 것이고, 박근혜는 최태민 관련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박근혜의 태도만 보고 최태민을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김재규를 강하게 질책해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차지철 역시 최태민과 박근혜를 감싸고 돌았고, 박정희는 이때부터 차지철을 더 신임하였다고 하며 차지철의 위세가 엄청났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커진 차지철의 위세는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까지 막았고, 박정희에게 긴급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되도 청와대에 들어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김재규는 당시 비서실장인 김계원을 만나러 오는 것처럼 하여 간신히 청와대를 출입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차지철의 행동으로 인해 김재규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고, 이런 것을 외면한 박정희에 대해서도 큰 배신감이 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주장은 일반적인 추론이 아니라, 당시 사건 전후를 잘 아는 비서실장이 증언한 것임을 주목할 만하다.
조갑제 기자는 월간조선 2006년 2월호에서 역시 김계원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최태민 문제가 이야기에 나타난다.
https://pub.chosun.com/client/news/print.asp?cate=C01&mcate=M1001&nNewsNumb=20161222249

기자:

얼마 전 金실장께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대통령의 큰 딸인 槿惠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김계원:

자꾸 차지철이 김재규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崔太敏(최태민) 목사 문제였습니다. 최태민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청와대로)비난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구국봉사단 총재였던 최태민이 재벌 사람을 불러 돈을 모으는데… (액수가) 꽤 큽니다.

박근혜씨가 앞서서 돕기 때문에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朴대통령이 딸 얘기만 듣는다」고 해요

기자:

당시 朴槿惠씨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나요.

김계원:

朴대통령께 두어 번 말씀드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朴대통령께서 최태민 얘기를 했어요.「최태민이라고 있는데 金실장 알아?」 그래요. >제가 알 수 없죠.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목사라고 하던데요」 하니, 「글쎄 목사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불러 親鞫(친국)을 했는데, 요즘은 덜 만나는 모양인데」 그래요

기자:

최태민을 직접 불러 친국을 했다는 겁니까.

김계원:

네, 朴 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김재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으니 「親鞫을 했다」고 해요. 꿇어 앉혀서... 그런데 그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방조해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높았어요.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차지철이 볼 때는 김재규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니, 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자연 청와대 출입이 어려워지게 된 겁니다

기자:

朴槿惠씨도 朴 대통령에게 김재규를 많이 비난했겠네요.

김계원:

그렇죠. 자연 그렇게 될게 아닙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감시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니…

기자:

최태민이 기업체 회장에게 일종의 압력을 넣어 돈을 많이 모은다」는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온 거죠.

김계원

그때 잘못한 일이 있는데, 최○○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청와대 비서로 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朴 대통령에게 「槿惠양이 영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어요. 대통령께서 「글쎄...」 이러시면서 「누가 좋겠냐」고 묻길래 「槿惠양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의전수석인 최광수 이야기가 「최○○이 담당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추천하지 않았겠어요? 최씨 몇이 몰리게 된 것이지요』

기자:

최○○은 최태민과 가까워졌겠네요.

김계원:

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 영 달라지게 됐어요.

기자:

참 이상한 게 그전의 朴 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

김계원:

한 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

조갑제는 박정희가 최태민을 잡아넣을텐데라고 의문을 품지만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답변하고 있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에 따르면 김재규의 감정엔 분명히 최태민-박근혜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박정희-차지철-김재규 사이를 지켜봤으니 상당히 믿을 만한 증언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이 증언들은 2005~2006년에 한 것이다.
더욱이 김계원 비서실장의 주장만이 아니라, 최태민을 증오하다시피 한 김재규의 태도가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게 한다. #
1979년 11월의 합수본부기록에도 김재규의 증오가 드러난다. 다음은 기록에 나타난 정보부 수사 파트 K국장의 진술.

<'''김 부장은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새마음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사이비 목사 최가 사기 횡령 등 비위 사실로 퇴임한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 기업체 사장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고 성금을 뜯어내는 등 새마음운동 취지를 흐리게 해서 '''계속 동향을 감시하라는 김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79년 내사 결과 최의 이권 개입, 여자 봉사단원과의 추문 등 비위 사실을 탐지하여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한 바 그렇게 말했다'''.>

동아일보, 1992.08.29. 남산의 부장들 (107) 10.26의 서막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 프레임을 비판한다. 이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이란 의견이다. #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 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 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 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10.26사건의 원인에 대해 지금도 웬만한 학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집권층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 투쟁을 꼽는 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갇힌 결과다. 무엇보다도 전두환 합수부는 훗날 대법원이 판결한 내란 집단과 동질적 조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수사결과 발표란 실체적 진실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4년 전에 분석한 내용이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끼춰맞춘 내용은 아니다. 김재홍 교수에 따르면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투쟁'이 '전두환 합수부의 프레임'이며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4.11.1. 그 후


최태민 부분은 과거부터 증언과 기사를 통해 조금씩 제기되어 오기는 했지만, 문제는 최태민과 관련된 내용 자체가 그동안 찌라시 취급을 받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2016년에 들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재조명되고 있다.
김재규의 이런 판단을 했다는 내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보도에 자주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 헤럴드경제, 2016-10-26 13:02, 37년전 김재규 "박근혜-최태민 관계, 박정희에 건의해도 소용없었다" #
  • SBS CNBC, 2016-10-26 11:27, [직설] 현대판 수렴청정... 최태민·최순실, 그들은 누구인가 #
  • 한겨레, 2016-10-26 17:35, 1979년 박정희와 2016년 박근혜... 부녀 대통령의 10월 26일 #
그리고 김재규가 차지철 상대로 권력을 압박당한 계기는 바로 최태민 사건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된 최태민 관련 인터뷰를 다시 확인해보자.

「김계원:

그게 이제 (잠시 망설이다가) 차지철하고 김재규 최태민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그 때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때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은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기자: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 혼을 냈다는 말씀 아닙니까.

김계원:

예. 이건 내가 들어가기 전 얘기입니다. 내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비서실장이 돼 내가 김재규에게 '뭐가 제일 문제냐' 그랬더니 '큰 영애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최태민 문제다 그래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최태민씨가 청와대 드나드는 것은 '''경호실 문제''' 아닙니까?

김계원:

뭐 본론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최태민이 문제 있다는 걸 김재규가 얘기해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나도 비서실장 하면서 중정이나 각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를 보니까 이건 뭐... 최태민이 그놈하고 관계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최태민이) 나쁜 놈이야.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

그런데 대통령한테 혼나고 나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못 들어왔죠. 또 근혜양한테는 못 나가게 했어요.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근혜양이 밖으로 나가니까 그건 '''경호실 문제지'''. 그래서 박 대통령께 내가 한 번 물어봤어. 이 문제는 내가 청와대 들어오기 전에 있었고 김재규를 통해 주로 들은 얘기니까. 그걸 확인하려고 비서실장 된 뒤에 박 대통령한테 물어봤어.

'각하. 요즘도 최태민이 근혜양과 만났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랬더니 '아니야. 그놈의 자식 내가 아주 그냥 혼내놨어. 요즘은 근혜도 자주 못 나가. 자주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자식이지만 속이 아프고 하시겠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거니까.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청와대 출입을 못하게 됐는데 '''왜 최태민 때문에 차지철과 김재규가 다투게 됩니까.'''

김계원: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인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에서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되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치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

기자:

중정부장이 대통령한테 긴급 보고도 할 수 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가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는 겁니까.'''

김계원:

그래서 내가 청와대 간 뒤로 얼마 후에 '''김재규가 나에게 '실장이, 실장님도 과거에 청와대 들어오는 게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자네가 청와대 들어와 대통령께 보고드리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것이 어렵단 말이냐'내가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유. 지금 저 차지철이란 놈이 어떻게 제한하는지, 왜 들어가느냐, 뭣 때문에 들어가느냐, 빠르다, 늦아, 시간이 길다.' 자꾸 자기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아. 정보부장은 국가 유사시에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대통령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느냐, 난 어떨 때 새벽 1시에 가 대통령 주무시는 걸 깨워 보고드린 일도 있어' 그래서 경호실장이 하는 일을 내가 도중에 막을 순 없으니까 '자네가 정 급한 일로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기 어려울 때는 비서실장 만나러 온다'고 전화하라고 했어요. 비서실장이 오라고 하면 그건 누구도 못 막거든. 그래서 내가 한 네댓 번 바로 넣어준 일이 있어요 대통령한테. '''차지철이가 그랬다고 글쎄. 그러니 김재규하고 안 싸워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차지철이 그토록 김재규를 막고, 김재규는 가까우니까 실장님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결국 근혜양에게 실장님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김계원:

그것만큼은 사실일 겁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정보부하고 쉬 틀어졌던 것이 김재규가 최태민 일로 자꾸 여러 가지 귀찮게 했는데, 그러니까 김재규는 김계원 사람이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나하고 가까웠고, 뭐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그랬거든. 김재규가 해군하고 같이 술 먹고 오다 차가 전복돼 거의 죽게 됐을 때 내가 언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업고 와 살린 그런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김재규가 그랬죠. 자기가 세상에 은인이 세 사람 있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하나는 고 이종찬 국방부 장관, 그 다음에 김계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여태까지 박근혜가 아무 지장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됐는데 이게 자꾸, 김재규가 정보부장 되더니 브레이크가 걸리거든.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김계원 지시다, 그런데다 큰 영애가 볼 때는 김재규가 하는 일이 김계원이 정보부장 할 때 하고 똑같구나,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어요?

그 때문에 이미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최태민은 김재규와 차지철 대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됐다.

김재규 중정의'큰 영애와 최태민 내사보고서'박정희의 역린 건드려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불과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2012.10.26''' #

최태민을 원인으로 지적한 날짜에 주목. 박근혜 게이트와 전혀 무관한 시기에도 이미 지적당할 정도로 최태민은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권력을 압박당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리고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권력을 압박당하는 상황이었다고 주변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4.12. 권력을 노린 정변이다


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 판결 [(가)내란목적살인,(나)내란수괴미수,(다)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라)증거은닉,(마)살인(변경된죄명)] [전원합의체판결집(형2),49]
피의자신문조서(제1회) 김재규 진술서
김재규 등 피고인 8명에 대한 대통령시해사건 공소장 전문
검찰 조사 당시 김재규가 진술한 증언을 바탕으로 김재규가 스스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주장에 의하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은 김재규 본인이 소요사태 수습에 대한 무능함을 드러냈고 본인과 형제들의 부정부패를 박정희가 알고 있었기에 자리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불안했던 점도 있으나, 가장 주된 요인은 자신이 차지철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차지철을 신뢰하고 감싸는 행태에서 분노를 느꼈던 것이였다.
이에 처음에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으로 차지철만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지철을 죽이면 김재규 본인도 사형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결국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동시에 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후 김재규는 자신이 스스로 정권을 잡지 않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직접 정권을 잡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하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잡으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부마항쟁 이후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매우 커지고 이런 소요가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박정희 정권이 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때 거사를 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0.26 사건을 사전에 계획하여 실행했다는 것이다.
1979.10.27. 김재규 심문조서 및 10.28. 김재규 자필진술서(수사기록66-71쪽)에는 김재규가 쓴 범행동기가 자백돼 있다.

“본인은 76.12.4.부터 정보부장으로 근무해 왔다. 정국이 시끄럽고, 야당의 활동이 날로 적극화돼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본인의 수습방안이 실패를 반복하여 무능함이 노출됐다. 본인 및 형제 등의 이권개입과 비위가 노출되어 대통령으로부터 경고친서를 받아 놓고 있었다. 군 후배이자 연하의 차지철이 너무 오만방자하여 수차에 걸쳐 수모를 당했고, 대통령은 이런 차지철만 편애했다. 이런 사유로 79.4월 경부터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고 군부의 지지를 받아 직접 집권하려고 결심했다. 그 후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곧 있을 대통령의 중요 인사 단행에 본인이 포함될 것이라는 데 대해 불안을 느꼈다. 10.19. 부산지역 소요사태를 관찰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다. 이런 소요가 서울 대구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현정권이 끝장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에 거사를 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본인은 10.26. 만찬기회가 결행의 적기라고 생각하게 됐다.

실제로 당시 언론들은 개각과 당직개편 계획을 보도했다. 여당은 경화정국 타개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으며 정부-여당의 개편을 통해 국민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국수습 민심일신 위해 개각.여권 개편설
11월 17일 검찰관 중령 전창열과 검찰서기 4갑 서윤석이 참여한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에서는 김재규는 이러한 자백을 내놓았다

문: 범행의 구체적인 계획은 언제부터 어떻게 세웠나요?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대통령 각하를 시해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각하께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 ‘가동’에서 만찬을 하시는 기회를 이용 시해하려고 마음을 먹고 이번 거사와 같이 3군 참모총장을 이용하려고 각하께서 도착하는 시간과 약30분 간격으로 본관집무실에서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불러놓았는데 당시에는 대통령 각하의 주변경호가 삼엄하다고 판단되어 거사에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각 총장들을 김학호 실장으로 하여금 대신 저녁 대접케 하였는 바 본인이 각하와 만찬을 끝내고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각 군 총장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본인이 연희동 소재 명불상 음식점에서 술을 대접하고 끝낸 일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최근 일련의 정치사태가 경화된 정국으로 발전하여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또한 10월19일 본인이 대통령 각하의 명에 따라 ‘부산지역의 소요사태’를 관찰하려고 다녀왔던 바, 소요사태의 성격이 일반인 숫자가 월등한 것으로 보아 이는 서민의 조세정책에 대한 저항 및 정부불신임에 기인한 민란이라고 판단되었고 이것은 조속한 시일 내에 진정되지 않을 것이고 5대도시(서울 대구 등)로 확산되어 현 정권이 국내적으로 한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판단되었고

국외적으로는 미국을 위시한 우방 국가들이 유신체재를 非민주적이라고 평가하므로 대외의존적인 한국경제가 여러 가지로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판단, 지금이 거사의 적기로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식당밖에도 경호차가 2대 정도 대기하고 경호관 숫자도 7~8명 정도여서 경비가 삼엄하였으나 최근에는 밖에 경호차도 대기치 않고 경호관도 4~5명 정도여서 경비가 허술하므로 더욱 용이하였고 궁정도 소재 위 식당은 전부 본인의 심복인 경비원들이 경계를 담당하는 중정자체 시설이므로 거사에 용이한 점 등을 감안, 범행 장소로 선택하였고 대통령과 차지철은 본인이 직접 시해하기로 하고 수행경호관들은 중앙정보부 비서실 직원인 본인의 심복으로 처치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대통령과 차지철을 본인이 직접 하지 않으면 실패할 염려가 있고(심정변화로) 또한 다른 직원들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 시해후의 범행구상 내용은 언제부터 어떻게 구상하였나요.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보안유지를 위하여 단독으로 구상하여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조시대 이래 2人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후 우선 늘 참석하는 김계원 실장에게는 보안을 유지시키고 현장목격자로서 동조자로 확보하고 현장부근에 군 실력자를 유인 대기시켜 놓고 거사 직후 본인의 거사 목적과 의도를 설득 또는 협박하여 끌어들이고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계엄사령관을 조종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서서히 군사혁명 위원회로 전화시키어 국민혁명으로 이끌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단시일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기존정당을 해체시키고 집행기관인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본인이, 부위원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 하여 군인들로만 구성하고 이를 감독하기 위하여 혁명회의를 설치 구성함에 있어서는 본인이 의장이 되고 국무총리는 부의장으로 하고 혁명위원은 관구사령관급 이상의 육군주요지휘관, 함대사령관급 이상의 해군주요지휘관 작전사령관급 이상의 공군주요지휘관 도지사급 이상의 각료전원으로 하고 다시 在京지구에 재직하는 사람은 상임의원으로 지방에 재직하는 사람은 비상임 의원으로 구성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혁명회의는 입법과 행정을 관장하고 부설기구로서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그 산하에 설치하되 혁명검찰부는 군민합동으로 참신한 검사와 군검찰관으로 구성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관급으로 구성하여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자. 5·16혁명 주체로 권력 주변에서 치부한 자 및 악덕기업 및 특혜 재벌 등 비 동조 세력을 처단하고 재산을 국고에 환수한 후 본인의 거사목적과 의도를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헌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여 국민이 원하는 헌법만을 연구 작성케 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하므로서 확정시킨 후에 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육군참모총장과 중정 제2차장보를 사고현장 부근에 부른 이유는

답: 처음부터 거사 후에 이용할 목적으로 유인 하였는 바 거사 후에 곧바로 와서 육군총장을 곁에 두고 데리고 다니면서 딴 생각을 못하게 계속 접촉을 유지하면서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게 되므로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시키고 본인이 직접 사태의 진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미리 불러놓는 것이고 김정섭은 대통령과의 만찬관계로 본인이 직접 육군총장을 대접할 수 없으므로 그 공간을 메꾸기 위하여 본인의 대리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국내사태를 해설해 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문: 만약에 상대방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답: 거사 후에 설득을 하여 혁명의 동조세력으로 이끌고 말을 듣지 않으면 협박 또는 감금을 해서 본인의 의도한 바대로 쫓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바짝 붙어 따라다니며 감시를 한 것이고 우선은 사실을 속인 것입니다.

문: 식당정원에서 김계원 실장과의 대화 중 차지철을 제거한다고 제의한데 대하여 김실장이 반대하였다면?

답: 본인은 그냥 농담이오 하고 얼버무리고 또한 대통령 시해 현장에서 함께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문: 왜 대통령을 시해하였나요.

답: 본인은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으면서 현 유신체재와 이를 방호하기 위한 긴급조치의 맹점과 부작용에 관하여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철폐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하여야 하는데 현 체재는 강한 체재이므로 권력의 핵인 대통령을 살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거행하였습니다.

문: 그렇다면 왜 차실장까지 살해하였나요.

답: 본인이 거사를 하기 위하여는 장해자인 차지철과 수행경호관들과 함께 처리하여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또한 항상 차지철이 강경한 발언과 월권적 행동으로 농간을 부리어 본인이 각하에게 드린 건의가 좌절로 돌아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함께 제거하였습니다.

문: 그런 순수한 목적이라면 대통령만을 제거하고 현장에서 자살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지 않나요.

답: 물론 본인의 목적을 문서로 남겨 놓고 위와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설거지를 하고 본인의 구상대로 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 각하로부터 야단을 맞은 사실이 있나요.

답: 근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사태 수습에 있어서 중앙정보부장의 직책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수습책을 건의하였지만 최근에 들어 자주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통령 각하로부터 질책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본인이 무능력하다고 각하께서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형제간의 이권개입 문제에 개입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금년 4월경 각하의 개인 서신으로 “계씨인 김항규가 사업상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데 주의하라는” 내용의 경고를 받은 바 있기는 합니다만 당시 중정 감찰실장인 김학호 소장으로 하여금 김항규의 비위사실 및 경위를 재조사하여 각하에게 보고 해명한 사실이 있으나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또한 요직 개편설 문제는 사실 무근입니다.

문: 전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답: 차지철이 본연의 업무인 경호업무 외에 월권을 하여 정치문제 등 광범한 업무에 관여하고 의견 및 주장에 있어서 본인과는 정반대로 강경일변도였으므로 못마땅하게 늘 생각한 것은 사실이고 차지철이 군 후배이고 연하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또는 연장자에게 오만불손하고 방자한 행동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으나 본인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문: 대통령 시해 후의 정국혼란을 수습하고 주도권을 장악할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였습니까?

답: 기존의 정치인 중 여당권에서는 대통령감이라고 생각되었던 인사는 전부 부정부패에 관련되어 있어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었고 야당권에서는 김대중이는 사상적인 하자가 있어서 곤란하고 김영삼 의원은 일응 출마는 할 수 있지만. 그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고 이철승 의원은 당 자체에서 사꾸라시 하므로 국민의 지지기반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 시해 후의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적임자는 우선 본인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과도기적 단계를 일정기간 지나 사태를 수습한 후에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려고 한 바 대통령 출마후보자는 일응 최규하 국무총리나 태완선 유정회 의장 등을 꼽을 수 있고 본인도 상황에 따라서 출마여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이번 거사를 위한 동조세력 규합은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하였나요.

​답: 별도의 조직을 활용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기존체재의 조직을 설득 내지는 협박을 통하여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중앙정보부 조직은 본인이 약 3년간 정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부하들이 본인의 의도를 잘 받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무력은 없지만 전국적인 광범위한 조직이고 군 조직은 본인이 오랫동안 몸 바쳐 왔기 때문에 본인이 의도한 바의 혁명목적을 제일 먼저 동조할 것으로 생각하였고 평상시에도 본인은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접촉과 노력은 하였으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안문제가 있어서 의도를 노출시키거나 거사에 가담하라고 권유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대통령을 시해한 후 어떠한 방법으로 범행을 은폐하려고 하였나요.

답: 궁정동 소재 중정식당은 중정자체의 시설임을 주장하여 비상 국무회의의 결의 하에 따라 그날 밤으로 본인이 평소부터 신임하던 안전국장 김근수 등 안전국요원으로 하여금 궁정동 현장에 보내어 궁정동 소재 보안을 유지시키고 사건현장은 안전국 요원이 조사 중이라는 구실로 일체 비밀로 하고 본인이 의도하는 혁명이 성공단계로 접어든다고 판단될 때 국민 앞에 진상을 발표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이번 범행이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답: 결국은 보안이 유지되지 않고 가장 믿었던 김계원 실장이 너무 빨리 변심을 하였기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목적이 채 관철될 시간여유가 없어 중도에서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김재규를 취조한 이학봉은 김재규와 잘 아는 사이였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이었을 때 보안사에서 수사계장으로 브리핑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학봉은 부산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운전병한테서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급히 사령부로 가니 수사관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김재규가 내일 새벽이면 새 세상이 와서 다 잡혀갈 놈들이 나를 조사한다고 큰소리치니까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학봉은 사태를 일단 "혁명적 상황"으로 판단하고 어떤 부대가 서울로 쳐들어올지를 빨리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새벽 1시에 직접 조사실에서 김재규를 만났다.
김재규는 이학봉을 알아보면서 "자네가 수사책임자야?"라고 말하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학봉이 김재규한테 "사령관님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김재규가 "이미 판은 끝났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게 나라를 위한 거야"라고 대답했다. 이학봉은 속이 바작바작 탔다. 분명히 거사에 동원되는 부대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중앙정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전두환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김재규가 자꾸만 동문서답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 김재규는 이학봉에게 "그러지 말고 전두환 불러줘"라고 계속 부탁했지만. 이학봉은 "저도 뭔가 알아야 가서 말씀드리고 오시라고 할 게 아닙니까?"라고 대답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 김재규를 취조한 이학봉은 훗날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잔재주를 부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 오히려 조금은 우둔한 편이라 말했으며, 말을 들어보니 거사 전에 워낙 여러 가지 공상에 빠지다 보니까 실행계획이 너무 빈약했던 것 같다고 평가하며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김재규는 자기가 대통령을 하면 박정희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야당 탄압을 늦추고 민주주의를 하면 미국 대통령 카터와의 불화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였죠. 그리고 경제문제는 박정희 대통령같이 기업인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면 계속 문제없이 굴러간다는 사고였어요.

그리고 이상한 건 김재규가 우리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이라 그런지 미신을 많이 믿는 것 같았어요. 남산의 하얏트 호텔 아래 유명한 풍수쟁이가 있었죠. 그 사람이 김재규의 아버지를 이장하면서 앞으로 그 집안에 왕이 나온다고 했어요. 김재규는 그걸 믿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김재규는 거사가 있으면 미국이 동조할 거라고 계산한 것 같았어요.

그게 오판이었죠. 제가 김재규에게 ‘어떻게 그렇게 치밀하지 못한 거사 준비를 했느냐’고 뭐라고 했죠. 그랬더니 하는 말이 ‘대통령을 죽이는 거사를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현장에 있던 측근 몇 명에게 실행 순간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참모총장 정승화만 옆에 와 있게 해서 동조하는 모습으로만 보이게 하면 된다는 거였죠. 계엄령을 선포하고 비상기구를 만들고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는 거예요.

내가 김재규보고 ‘대통령을 죽이면 그 치명적인 도덕성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랬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김재규가 그건 적당히 얼마든지 다르게 꾸며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아마도 은폐나 조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거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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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엄 변호사의 못다한 이야기 10·26과 김재규 그리고 어떤 진실 ③

그러던 중 김재규는 수사관들이 상황 파악을 위해 켜 놓은 라디오에서 새벽 4시 10분께 '정승화 계엄사령관 임명 소식을 듣고 돌연 손뼉을 치면서 떠들어댔다고 전두환 회고록에 적혀있다.# 허화평은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요청으로 범행 현장 인근에 있었고 사건 직후 육본으로 동행한 사실을 그때서야 수사관들이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는 계엄사령관 임명 사실을 전해 들은 뒤 안도한 듯 조사관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사실을 줄줄이 털어놓았다는 것이다.[65] 이때부터 3단계 혁명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이학봉의 증언에 의하면 11월 8일. 김재규는 구체적인 “3단계 혁명 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주도 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이 3단계 혁명계획은 매우 정교하게 진술됐다.
중정에 남아 있을 요원들을 연행하여 남산에 수용시키고 사건현장만 조사케 한다. 이후 현장증거를 인멸시키고 중정 간부를 소집하여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고 안전국장이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고만 알리게 할 계획이었다. 또한 정승화 육군총장을 설득 또는 협박하여 혁명위원회를 발족시켜 국민이 납득, 호응할 수 있게 홍보하고, ‘10.26 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전환한다. 또한 정부 조직을 최대로 활용, 참여의식을 갖게 한다. 혁명위원회 의장은 김재규 본인이 하며, 부의장은 국무총리, 위원장은 정승화와 상의하여 총장 또는 국방장관으로 하고, 위원은 전 각료, 각군 총장, 군사령관, 군단장, 관구사령관, 해군함대사령관, 공군작전사령관, 각 도지사로 한다. 위원은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으로 한다. 혁명검찰부와 혁명대판소를 설치하고, 검찰부는 군민 합동으로 참신한 검사 및 검찰관으로 임명하며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성급으로 구성하고, 반혁명분자를 제거한다. 이후 빠른 시일 내에 김재규는 직접 대통령에 출마하여 집권하고자 했다. 김재규는 정보부장으로 근무하며 국내외 정보를 분석해 보니 우리나라에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없고, 나의 권한을 최대로 활용하면 대통령 시해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며, 중정의 조직력과 권한으로 군부의 세력을 장악할 수 있어, 스스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재규의 군맥은 대단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이 된 사람, 특전사라는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던 정병주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을 할 때 대대장으로 시작해 줄곧 인연을 맺어온 사람,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3사령관인 이건영은 김재규가 정보부장일 때 차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다시 3군사령관으로 내보낸 심복이었다 심지어 김재규는 이들과 상당히 자주 만나며 친분을 쌓아왔기에 사실상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군맥이라면 자신이 쿠데타를 실행했을 때 동조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11월 8일,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구상해왓다는 '3단계 혁명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 주도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66]
실제로 김재규의 계획은 거의 들어맞았는데 김계원은 만찬 직전에 김재규에게서 박정희차지철을 죽일 거란 말을 들었으나 그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조했고,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만찬에 참석했다.[67] 김재규가 한 "형님 그놈을 해치워 버릴까요? 뒷일을 책임져 주시오.” 이 엄청난 말에 김계원이 선뜻 동의한 것은 차지철만이 아니라 박정희까지도 해치우겠다는 의도에 동의한 것이고, 김재규가 언젠가는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는 데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는 해석이라는 주장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게 무슨 말이오? 경호실장을 죽이겠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설명해 보시오!"'''라며 크게 놀랐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차지철을 해치워 버리겠다"는 말이 국가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말 그대로 암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는 주장도 있다.[68] 또한 김계원은 박정희 살해 당시 밖으로 나간 것은 자신도 김재규에게 살해될까봐 두려워서였다고 증언했으며, 법정에서 박정희 살해 후 김재규가 보안을 유지해달라는 말에 "알았소"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때 김재규가 총을 들고 살기가 등등하여 그 장소를 모면하기 위하여 '알았어'라고 한 것뿐이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자 김계원은 자신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김재규가 이 정도 일을 벌이려면 그에 맞는 지지세력이 있거나 치밀한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여 김재규의 지시대로 박정희의 시신을 처리하고 사건현장 은폐에 동조하며 청와대를 통제했다.
한편 정승화가 10.26 사건 당시에 보여준 행동은 상당히 논란이 많다. 일단 10.26 사건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69]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한 채, 함께 차를 타고 육본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당시 수경사령관인 '''전성각''' 육군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수경사 병력을 장악하고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점이 정승화 전 육삼총장 공소장을 보면 함께 차를 타고 서울후암동소재 병무청 앞을 통과할 즈음에 김재규가 사탕같은 껌(네모난 계피 껌) 1개를 주어 이를 받아먹으려다가 그 속에 약물이 들어있어 김재규에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의심하여 껌을 슬그머니 바닥에 버렸으며,[70] 상황 수습을 위해 정승화가 전군에 비상발령을 하고, 계엄군의 서울 진주를 위해 육군 ○○부대의 출동을 지시한 뒤에 대통령 시해범인이 측근이라면 청와대 내부의 소행인지 또는 김재규의 소행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부대에 이상 없느냐, 병력은 모두 장악하고 있느냐"라고 물어보자 "아무 이상없다"는 대답을 듣고 청와대 내부의 소행은 아니고 김재규의 범행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러나 김재규는 현직 중앙부장으로서 막강한 조직과 권력이 있고 그 배후에 상당한 추종세력이 관련되었을 것이며, 대통령 시해 후 나라의 실권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이에 동조하는 것만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믿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박정희가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 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박정희가 죽었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나 김계원의 실토로 10.26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지시도[71] 정승화가 사실상 김재규와 한패였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승화는 자신의 재판과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자신은 김재규와 친한 지인이 아니라 1979년 2월 총장 취임 당시에 처음 식사를 했을 정도로 서먹서먹한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해 사건 당시에 총소리를 듣긴 했으나 그 총소리가 먼 곳에서 난 총소리로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김재규가 피 묻은 셔츠를 입은 채로 자신에게 오고 나서야 그 총소리가 청와대에서 난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재규와 같이 차를 탄 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김재규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정승화는 김재규가 난장판이 된 만찬장에서 빠져나온 것뿐이라 판단하여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하며, 박정희를 암살한 범인을 추론해보니 청와대 같이 경호가 엄중한 곳에서 외부인이 대통령을 저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했고, 이에 청와대 경호를 맡고 있는 차지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즉, 정승화는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72] 여러 정황을 보아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하여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했다는 것이다.[73] 또한 정승화 입장에서는 통치권자 유고상황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범인이 누구인가보다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과 계엄선포문제등 사후조치문제가 더욱 시급하고 중요했기에 범인 색출이 우선순위가 아니였다. 그리고 김계원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를 체포하라 했을 때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말은 1997년 무죄 판결 당시에 이 지시를 당시 김재규가 막강한 중앙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루라는 뜻이었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으며, 오히려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에게 조사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정승화는 전두환이 아닌 김진기 헌병감에게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그러나 김재규와 정승화는 사건 현장에서 같이 차를 타고 와서 육본의 상황을 진두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둘이 마치 한 패인 것처럼 보였고, 다른 장관들이 이들의 눈치를 본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실제로 김계원이 김재규가 살해범이라는 것을 증언할 당시에 정승화는 "김 비서실장이 내가 김재규와 공모한 줄로 알고 눈치만 보고 있다가 그게 아닌 걸 알고서는 은밀히 내게 얘기한 것이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주변사람들 눈에는 김재규와 정승화가 마치 한패였던 것처럼 보였던 것.#
이러한 정황 때문에 수사를 맡은 이학봉 중령은 전두환에게 김계원, 정승화 두 사람을 구속하여 수사해야겠다고 건의할 정도였다. 수사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김계원이 김재규의 범행에 동조한 것 같다고 판단했으며 정승화가 시해사건 현장 부근에 김재규의 초대로 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10.26 사건 직후 김재규가 단독범인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전두환과 합수부 수사관들은 일단 정승화와 김계원을 공범으로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김계원 실장은 구속수사해라, 그러나 정승화는 어제 계엄사령관이 됐다, 그러니까 함부로 할 수 없다. 지금부터 극비리에 내사를 더해봐라"라 지시했다. 훗날 전두환은 5·18 사건공판기록에서 이학봉 중령이 "육군총장이 대통령이 돌아갔다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시신수습과 범인색출을 한 흔적이 없다, 청와대를 포위시켰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라는 보고를 받고 정보부장과 대통령비서실장, 육군참모총장이 공모한 조직적인 내란이며 비록 계획은 실패했지만 정승화를 구속하면 배후세력에 의해서 또 다른 내란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체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이유로 정승화는 10.26 사건 후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직책에 있으면서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에게 약점을 잡혔고, 전두환의 월권행위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두환은 정승화가 김재규에게 이용 혹은 동조한 사실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체포시키고 최규하를 하야시키는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을 잡았고 정승화를 사실상 김재규와 한패로 몰아 처벌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김재규와 한패가 아니였기에 하나회는 정승화와 김재규와의 연관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내란죄가 아니라 '''내란방조죄'''라는 이상한 혐의를 겨우 엮어 처벌했다.[74]
한편 대한민국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국무회의는 청와대에서 최규하 총리에 의해 열렸어야 하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김계원한테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최규하는 경호실에 명령을 내려 대통령 시해의 현장부터 확보하라는 지시부터 내렸어야 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김재규가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김재규의 의도대로 국무회의를 국방부에서 열었다. 한마디로 최규하는 김재규가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김재규의 뜻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이는 김계원 생전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신현확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오기 전까지 최규하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 중 진상을 밝히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각이 완전히 무력화된 상황이었기에 김재규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김재규가 상황을 주도했다. 김재규가 이끄는 중앙정보부, 김계원이 이끄는 청와대, 정승화가 이끄는 60만 육군이 단합했던 것처럼 보였던 당시의 상황은 누가봐도 막강했으며 실제로 김재규의 쿠데타는 거의 성공직전처럼 보였다. 그러나 계엄선포를 해야한다는 김재규의 주장에 국무위원들이 반발하면서 김계원이 김재규의 배후에 친위 세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배신을 한 것이 결정적이였다. 만약 김계원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김재규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부가 국가를 좌지우지 했을 것이다.
즉, 제2단계까지 성공적이었고 3단계까지 성공할 찰나에 김계원의 배신으로 정승화와 노재현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가 체포되고 박정희 살해를 순순히 인정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는 것이다.
허화평은 2019년 10월 25일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합수부 조사 때는 (범행을) 자책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를 민주 투사로 생각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돼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수차례 진술(자필 진술서나 조사 과정의 발언)을 바꿨다"고 말하며 그가 절대로 민주주의를 위한 거사를 행한 것이 아니라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전두환은 김재규를 "처세에 능하고 관운이 좋아 권력의 그늘에서 18년간 온갖 특권을 누린 사람"으로 평가하면서 "김재규의 언동에서는 자신의 평생 은인인 박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충격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리고 김재규가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더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김재규는 스스로 대통령을 죽인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정권을 넘기려 하지 않고 스스로 최고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잡았을 것이며, 김재규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대통령을 시해한 살인자라는 비난과 자신을 총애한 박정희를 죽인 배신자라는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결국 이런 비난 여론을 억압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아주 가혹한 독재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김재규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YH 사건 당시 김재규의 태도에 대한 증언을 예로 든다.
1979.11.18.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정섭은 YH사건과 김재규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했다.

“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를 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 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이어서 김정섭은 김재규가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에 대해 박대통령보다 더 강경한 탄압 수단인 긴급조치10호를 건의했다가 대통령에 의해 거절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1979. 8월 중순 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카톨릭 농민회의 등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 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하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 10호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있었던 김계원의 진술과 일치한다. 이어서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물었을 때, 김정섭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산 계엄사태로 부산에 다녀온 김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부산에 가보니 300만 시민 중 70% 이상은 유신에 호의적이더라. 시가와 항만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30% 이하의 반대세력은 행정기관이 잘만 선도하면 회복될 것 같더라.’ 김재규는 소영웅주의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으로 그를 따를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위 김정섭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보다 제세한 진술을 했다.

“1979.8.10. 10:00경 YH 노무자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집결, 계속취업을 요구했습니다. 배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고, 장차 노동계와 종교계가 합세, 강력한 대정부 투쟁 세력으로 진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수습대책을 논하기 위해 8.10.10:00경 청와대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유혁인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등이 모여 논의를 했습니다. 중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사부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부 고위 관리가 신민당사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해산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을 시킨 바 있습니다.”

또한 이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긴급조치 10호에 대해서도 진술을 했는데 그 진술 내용은 김정섭의 진술과 일치했다.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보다 더 강한 10호를 강구했고, 박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를 들어 김계원과 김정섭 두 사람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들이 현실과 일치하고 그 진술 내용들은 한결같이 김재규가 박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강경하고 탄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며 김재규가 만약 정권을 잡았다면 박정희보다도 더 잔혹하고 엄격한 독재정권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일화라 주장한다.

5. 여담



  • 심수봉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해 상세히 언급한적있다. 특히 박정희에 대해서는 좋게 묘사하지만 본인이 이래저래 수모를 겪은 시절의 대통령인 전두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언급을 강하게 하는 편이다.[75]

  •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93년 철거되어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 디시인사이드국내야구 갤러리, 예전 주식 갤러리 등에서는 박정희를 비하하는 의미로 이 날을 '대국절', '탕탕절', '관통절', '발터절'[76] 등으로 칭한다. 일베가 장악하기 이전 주갤은 거의 김재규 팬클럽 수준이라 김재규 장군을 의사라 칭하며 묘까지 찾아가는 사람도 있고, 실제 고인의 재평가와 명예회복을 위해 유족 접촉, 성금 모금 같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글을 올리기도 했다. 다시 쓰여지는 김재규. 지금은 박정희/박근혜를 혐오하는 커뮤니티에서 이 날만큼은 탕수육을 시켜먹으면서 탕탕절을 기념하는게 관례가 되었다.
  • MBC에서 매년 12월 31일에 열리는 MBC 가요대제전의 전신은 10대 가수 가요제 였는데, 원래는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다가 이 사건 때문에 연기되어 12월 31일에 열리게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1979년 10월 20일 신묘한 통찰력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선전이 있다고 한다.
  •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였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한후 2년 동안이나 가수 활동을 정지당해야 했고, 신재순 또한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참고로 김재규의 유족들도 이후 상당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사후 유족들을 어느 정도 챙겨줬다고.
  • 유례 없는 현직 국가 원수 저격 사건이라 사건 전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 치사를 박정희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으나 참석자들의 말에 따르면, 여느 때와 달리 힘이 없어보였고[77], 준공비 제막식에서는 가림막이 벗겨지지 않아 경호원들이 뛰어올라가 낑낑거리며 가림막을 내렸고[78], 행사를 마치고 전용 헬기를 타고 도고온천으로 갔을 땐 근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사슴이 헬기 착륙 소리에 놀라 날뛰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즉사하기도 했다.[79] 김종필도 그의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한남동 음식점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한 참석자가 “오늘 낮 아산 도고호텔 앞마당에 대통령 일행이 탄 헬기 세 대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렸답니다. 헬기가 착륙하는 소리에 놀라 사육장에서 키우던 새끼 밴 어미 사슴이 날뛰면서 헬기 뒤꼬리 프로펠러에 부딪쳐 죽었다고 하네요.”라고 말하자 순간 가슴에 서늘한 것이 스쳐가는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어 등이 오싹했다고 회고했다. #
  • 김종필은 훗날 10.26 사건을 회고하면서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뒤 서울 다동 한 음식점에서 박정희와 함께 유명 역술가인 백운학을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고 한다.[80] 그 자리에서 백운학은 박정희에게 “각하, (정권이) 20년쯤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고 했고, 박정희는 빙그레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식사를 마치고 마루 끝에 앉아 신발끈을 매던 자신에게 백운학이 슬그머니 다가와 “차마 본인한테 직접 말씀드릴 수 없었는데…. 각하께서 마지막은 퍽 험하게 돌아가실 명운입니다.”라고 말했다고 말하며 "백운학의 말이 맞아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얘기하지 못했고, 안 맞으면 싱거운 사람이 되겠기에 얘기하지 못했던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18년 뒤 참혹한 현실로 찾아왔다."라며 회고했다. [발굴특종] 10·26 그날 … 김재규, 박정희 향해 "야, 너두 죽어봐"
  • 2016년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관련 보도가 나가며 본격적으로 촉발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뒤집어진 상황 속에서 10월 26일을 맞이하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계속 실검 순위에 오르는 등, 10.26에 대한 재평가가 역사학계를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가 서로 비슷한 날 정치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셈.[81] 김재규를 평가하는 책들이 다시 서점가에 재발간되기도 했으며, 박근혜 탄핵안이 가결되었을 때와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되었을 때 김재규 묘소에 탄핵 관련 기사가 올라온 신문을 놓고 가는 등 많은 참배객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 이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 주기가 무서운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지 70년 후에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고 박정희가 암살된지 37년 후에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벌어졌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주기로 사건이 발생했다.
  • 박근혜 대통령에게 탄핵 주문을 선고한 이정미 헌법재판관(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임명 청문회에서 "고등학생 때 원래 수학교사가 꿈이었는데, 10.26 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보고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 운명의 장난이라면 장난일 수 있다.
  • 박정희의 동거녀 였던 이현란[82]은, 前 동거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하던 중에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접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다 먹었다고.
  • 사건 당시 김재규가 사용한 총기인 PPKM36 리볼버는 증거품으로 보안사령부에서 몰수하였는데 그 뒤의 행적이 묘연하다. 당시 수사기록을 보면 원래 서류상 중앙정보부가 소유한 총기여서 중앙정보부에 반납했다고 나오는데, 정작 국가정보원에서 확인 결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83]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의 활동을 장악했고 중정 사무실에 요원들을 배치했다는 미국 문건이 나왔다.#
  • 김재규 셋째 여동생인 김정숙 씨가 프랑스 AFP통신 인터뷰에서 "사람을 죽였다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며 "그러나 오빠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고자 대통령을 죽이지 않았으며 국가에 반역을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6. 어록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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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YH 사건 당시 연설.[84]

김영삼 총재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이를 함부로 국회에서 정치적 의도로 제명해서는 안 된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게 되면 각하께서 불행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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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 당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당시.

박정희가 그가 바라는 대로 추가 6년의 임기를 더할 경우, '''그는 아마도 살아서 임기를 마치지 못할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직 CIA 한국지부장, 1976년 텍사스대 연설에서.[85]

[86]

인간 박정희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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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박정희의 죽음은 한국사 최대의 비극이다.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꺾인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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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

그분이 그렇게 빨리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 인생도 허무하고 정치도 무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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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10.26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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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를 조문하면서[87]

고인께서 군인과 대통령으로서 보여주신 애국심은 열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고인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실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 사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집과 탐욕, 증오와 폭력을 우리 가슴속에서 씻어 내고 용서와 화해,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국상을 끝낸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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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1979년 11월 2일 명동성당 박정희 대통령 추도 미사에서.#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난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 서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흘린 피를 굽어 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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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이 10.26소식을 듣고 쓴

민주주의쿠데타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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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당시 민민연합 공동의장, 10.26 직후 인터뷰에서.


7.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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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가수 심수봉(왼쪽 모자 눌러쓴 여성)과 신재순(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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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과 관련된 인물들. 박정희를 중심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재규, 오른쪽 끝이 차지철이다. 사진 로고에 가려서 눈치채기 어려운데, 사진 맨 왼쪽은 비서실장 김계원이다. 박정희 머리 위에 얼굴을 돌리고 서있는 인물은 박상범 경호관으로 추정된다. 10.26 사건 4년 전 사방공사 시찰 때의 모습이다. 사진에 나와 있는 좌우 김재규 차지철 두 인물의 위치가 박정희의 왼팔과 오른팔의 위치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 사진 출처 : 뉴스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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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모를 브리핑하는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육군 소장.

8. 창작물


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삽교천 행사 참석을 하지 말라는 차지철(이대근 역)과의 전화상 말싸움과 전화가 끊기자 "이런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박정희를 저격하기 전 집무실에서 빈 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일본어로 '코로시마스(殺します, 죽여 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코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4공의 해당 장면에서는 자막은 '고로시마스'라고 뜨는데, 김재규 역을 맡은 박근형의 대사는 "코로스(殺す, 죽인다)"였다. 존댓말과 반말의 차이.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근데 이건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88]
박정희 저격 후 체포되고 난 다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등장이 없다가, 5.18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되실 뻔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다만 육군본부 앞에서 보초병이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해 "어느 대학 총장님이신지?"라고 묻는 부분은 없다. 또한 김치열 법무장관이 "그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라고 외치는 대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서거라니..."라고 말한다.
사극에서 정도전 전문 배우로 유명했던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 자체는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화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김재규와 10.26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백윤식이 김재규 역을 맡았는데, 특유의 능글맞은 이미지가 김재규 역에 잘 녹아들었다.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편에 속하는 수작이다. 다만 조롱과 희화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을 묘사할 때의 고증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박정희와 관련자를 풍자하는 부분에서 역사 사실과 다른 경우도 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김재규 역을 맡은 김형일이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다만 연기는 너무 점잖아보이는 감도 있다(사실 큰 차이라면 배우와 실존 인물의 음성 차이). 또한 어느 국밥집에서 박정희의 유고를 다룬 뉴스가 보도되자 "잘 죽었다!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과 "각하께서는 나라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사람이 싸움이 붙는 장면 또한 백미. 별것 아닌 장면 같지만 이는 오늘날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리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참고로 문서 맨 위의 10.26 사건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평 가운데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 1국장이 한 말을 이 드라마에서는 이학봉이 하는 것으로 나온다.
  • 10.26 사태를 다룬 소설로 김진명의 '한반도'가 있다. 10.26 사태의 CIA 개입설을 다룬 이 소설은 최근 1026으로 개작되어 재출간되었다.

김형욱[89] 암살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영화로 최후반부에 묘사된다. 다만 시대 때문에 사전조사를 못했는지[90], 극적 연출을 위해서였는지 고증오류가 제일 심한 축에 든다. 궁정동부터가 정말 중세시대 양식의 궁전 같은 인테리어로 나오고, PPK의 탄걸림이나 정전에 관한 묘사도 없이 그냥 이상규(신성일 분, 김재규)와 국가보안부 요원들이 권총과 M16까지 쏴대며 대통령 한성태(조지 타케이 분, 박정희)와 경호실장 김영철(김동현 분, 차지철), 경호실 요원들을 한큐에 몰살시켜 버린다. 묘사를 보면 도망가는 경호실 요원들을 중정 요원들이 쫓아가서 총을 난사해 죽이는 등 엄청 요란하다. 그리고 일을 끝마치고 난 뒤 이상규가 궁정동을 나서려는데, 이미 헌병들이 체포하려고 와 있었다. 근데 개연성도 진짜 엉망인 게, 분명히 일을 저지르고 나온 지 시간상으로 1시간도 안 된 거처럼 묘사되는데 헌병 장교는 "미국은 이미 비상 사태에 들어갔어!"라는 말과 함께 "미국은 대통령 시해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온다(...) 거사를 치른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 송강호 주연의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도 나온다. 다만 이 작품은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른 부분이 있다. 예로 경호실장은 1974년 육영수 저격 이후 박종규에서 차지철로 바뀌었으나, 여기서는 차지철이 모티브인 인물이 그냥 5.16 이후 그대로 경호실장이다. 애당초 풍자 영화에 가까우니 역사적 고증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 웹툰 제0시: 대통령을 죽여라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하다가 뜬금없이 다른 전개로 흘러간다. <26년>보다 자극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보니 댓글 상황은 개판. 게다가 원래 사건과는 다르게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전 중앙정보부장을 암살했다는 식으로 더 저평가를 내리려고 작가가 노력하는 바람에, 은유라고 보기에 너무 직설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되어 버렸다.

  • 북한에서도 해당 사건을 드라마로 다루었다. 남한 출신의 고위급 월북자의 전기를 다룬 민족과 운명 13부 홍영자 편 3화[91]에서 그려지고 있다(다른 월북자와 달리 홍영자는 가상의 인물이다). 여기서는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니나노를 벌이던 중 박정희가 김재규를 김영삼 구속 건으로 질책하고 차지철이 신민당 놈들 탱크로 어쩌고라고 떠들자, 김재규가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고 한 뒤에 "각하, 저런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 하고 차지철의 팔뚝을 쏴버렸다. 박정희가 삿대질을 하며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이러느냐. 그만두지 못해" 라고 외치자 김재규는 비웃음을 흘리며 "야, 박정희" 라고 일갈하며 발사했고, 박정희는 테이블보를 붙잡고 술상을 와장창 무너뜨리며 쓰러졌다. 이후 중정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처치한 후 김재규는 의전과장의 총을 빌려 차지철을 쏜 뒤에 네 발의 확인 사살로 박정희의 숨통을 끊었다. 몇 가지 각색된 장면(ex. 경호원들이 군복 차림에 거의 한개 소대 병력인 점,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만 따로 불러 쿠데타를 지시한 것과 달리 안가 요원을 전부 불러놓고 모의한 점, 김재규가 평소 형님으로 모신 김계원에게 반말을 하는 점, 나름 개신교 신자라 술을 마시지 않던 차지철이 꽐라가 된 점, 박정희가 총 맞은 부위와 횟수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 등)을 빼면 위에서 언급한 다수설에 근거하는 내용이다.
  • 미국 소설가 스티브 쉐건이 쓴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소재 음모론 소설 [92]에서는 말 그대로 마약을 동원한 환락파티 끝에 김재규가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총과 기생들의 독침에 의해서 벌어진다. 박정희는 원래대로 총, 차지철은 독침에 찔려죽는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은 독실한 불교도인 박정희가 핵개발을 하고 미국과 단교하고 기독교를 불법화할 계획을 세운 것을 알게 된 미국에서 꾸민 일이였고 이미 기생 대장 이손지[93]와 짠 갑툭튀한 전두환이 그걸 낼름했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냐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자마자 전두환이 공수부대 병력을 끌고 안가에 들이닥친다. 소설 마지막에는 미국에서 전두환도 그렇게 처리할 준비를 하지만 전두환은 이미 눈치 챘다는 걸 암시한다. 당연히 내용이 내용인지라 1984년에 일월서각이 <π=10.26 회귀>란 제목으로 번역판을 냈으나, 번역자 김자동과 발행인 김승균이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경찰에 끌려가 구류를 살았다. 그래서 80년대 해적판에서는 하나같이 파르크 대통령, 큐우 부장, 츙크[94] 장군 등으로 표기되었다. 1987년 6.29선언 후 이듬해 일월서각판 역자 등 2명이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 팬텀 하록의 만화 포천에서 프롤로그에 70년 간격으로 같은 날 벌어진 하얼빈 의거와 교차해서 등장한다.
  • 영화 동감에서 아침에 등교하기 전 TV를 보던 여대생 윤소은(김하늘)이 10.26 사태를 다룬 뉴스를 보면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소은의 아버지는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까봐 딸이 두려워하는 줄 알고 당장 달려가 딸을 토닥이며 달래주는데[95], 사실 소은에게 있어 박정희의 사망 따윈 아오안(...) 소은은 단지 1979년에 10.26 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걸 미리 알려준 2000년의 지인(유지태)이 실존하는 인물임을 이를 통해 알았고, 현재 소은이 짝사랑하는 선배와 자신의 절친 사이에서 태어난 인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짝사랑이 결코 이뤄질 수 없음을 깨닫고 슬퍼한 거다.
  • 남산의 부장들 : 동명의 논픽션이 원작이며 이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에서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경호실장 등이 모두 등장하며 10.26 사건 40일 이전부터 벌어진 일을 다뤘다.

9. 관련 인물



9.1. 가해자


가해자 명단 및 적용된 죄는 다음과 같다.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가해자. -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내란목적살인죄.
  • 박선호 -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가해자. - 대통령 경호원 정인형, 안재송을 살해한 내란목적살인죄.
  •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가해자. -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관 김용섭, 운행계장 김용태를 살해하고, 경호계장 박상범, 안가 요리사 이정오, 운전사 김용남을 살인 미수한 내란목적살인죄 및 살인 미수죄.
  • 이기주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조장, 가해자. - 박흥주와 함께 식당에서 총격을 가해 2명 살해, 3명 살인미수로 동일한 죄 적용.
  • 유성옥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운전기사, 가해자. - 박흥주, 이기주와 동일한 죄 적용.
  • 김태원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가해자. - 위에 나열한 5명들처럼 직접 총격에 가담하진 않았으나, 사건 직후 뒷처리 중 박선호의 명령을 받고 M16 소총으로 피해자들에게 총격을 가해 확인사살을 했는데, 피해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사격하여 최종 사망하게 했다는 이유로 내란목적살인죄 적용.[96]
  • 이 외 중정 안가 경비원 유석술이 증거 인멸 혐의(사건에 사용된 총기를 안가 정원에 매장)로 체포되었다. 또다른 경비원 서영준은 박정희를 병원으로 옮길 때 유성옥과 같이 가 병원 관계자 및 대통령 주치의를 총기로 위협했다가 체포되었다. 이 둘은 사건이 끝난 뒤 증거인멸 및 협박에만 가담하였으므로, 가해자는 아니다.
살인 가해자 6명은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고, 당시 살인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 확인된 유석술과 서영준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유석술은 출소 후 26년 뒤인 2005년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96회에서 사건증언을 하기도 했다.

9.2. 사망자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허파 관통상과 후두부 총상으로 사망.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손목 관통상과 복부 총상을 입은 후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 당함.
  • 정인형 - 대통령경호실 경호처장
박선호의 저격에 목 관통상으로 사망. 해병대 간부사관 장교 출신이자 박선호의 동기였다.
  • 안재송 - 대통령경호실 경호부처장
박선호의 저격에 흉부 총상으로 사망. 정인형과 같은 해병대 간부사관 장교 출신이었고 정인형과 박선호의 후배였다.
  • 김용섭 - 대통령경호실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 김용태 - 대통령경호실 특수차량운행계장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9.3. 생존자


  •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 박상범 - 대통령 경호실 경호계장, 사건 피해자.[97]
  • 이정오 - 중앙정보부 안가 요리사, 사건 피해자. 별관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과 식사중 안가 경비원의 소총 사격에 허리 총상을 입고 후송. 이후의 소식이 없다.
  • 김용남 - 중앙정보부 안가 식당 차량 운전사, 사건 피해자. 별관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과 식사 중 안가 경비원의 총격에 어깨 총상을 입고 후송. 이 사람도 이후 소식이 없는데 역시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상황에서 어렵게 살았을 법 싶다.

9.4. 후속 조치


  •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사망 후 계엄사령관.
  •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 주관. 이후 10대 대통령으로 취임.
  •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사건 당일 김재규의 지시로 정승화 장군을 김재규 대신 영접했고, 직후 김재규가 암살범임을 안 뒤 보안사와 협조해 중정 내 자신들의 직원들을 동원, 안가에 남아있던 김재규의 부하들을 체포하고 만약을 대비해 안가 내 탄약고를 처리하는 등[98] 뒷수습을 맡았다.
  • 전두환 -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그리고 동년 12월에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다.

10. 둘러보기




[1] 자세히 보면 팔이 이미 포승줄로 묶여 있다.[2] 보도 시작 전 흐르는 노래는 모차르트 레퀴엠[3] 한때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이 살았던 곳으로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철거된 자리에는 무궁화 동산이 생겼다.[4] 최근에는 '일공이륙'이라는 읽기 방법도 쓰인다. 여담이지만 12.12 군사반란의 경우 '십이-일이'라고 읽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이걸로 보아 딱히 날짜를 읽는데 규칙성은 없는 듯 보일 수 있으나, 단지 우연히 12라는 날짜가 반복되어 부르기 쉽게 같은 단어를 반복한, 예외적인 경우로도 볼 수 있다.[5] 물가 상승률이 경제 성장률을 추월하는 물가 폭등의 시대로 서민고가 가중되었다.[6] 이 때는 한국 내 재벌기업이 중동 건설 시장을 개척하며 1970년대 중반 경제 호황의 기반을 만들었다.[7] 이 행사는 박정희가 생애 '''마지막'''으로 참석한 공개 행사가 됐다.[8] 이 때문에 송신소 행사는 민간에 공개되지 않고 치러져서 일반인들에게는 당진 송신소가 아닌 삽교천 완공식이 박정희 생전의 마지막 공식 행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송신소 행사 장면이 민간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99년 KBS 박정희 특집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9] 이 말은 2019년 일본 불매운동 사건 이후로 많이 쓰인 "이 시국에" 의 베이스가 된다.[10] 상단 사진 맨 좌측의 새마을 모자를 쓴 흰 수염 노인이다.[11] 김재규는 "대행사를 준비하고 참여하라"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 정승화를 불렀으나, 정작 정승화에게는 약속을 잡고 나서 "급작스레 대통령이 불러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으니 행사가 끝나고 바로 오겠다" 라고 둘러댔다.[12] 이 권총은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이던 1960년에 당시 총장 이성가 장군에게 선물받은 것으로, 예편 후 주소 관할지의 성북경찰서에 맡겨 놓았다가 중정부장 취임 후인 1977년 반환받아 집무실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13] 김계원이 중정부장에 오른 뒤 1970년 3월 발생한 정인숙 살해사건에 중정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청와대를 포함한 고위층은 장안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오명을 썼다. 결정적으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김대중이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급부상했을 때, 박정희는 김계원에게 "노회한 이미지에 상대하기도 쉬운 유진산이 대선에 나오도록 뒷공작을 펼쳐 보라." 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무위에 그치면서 김대중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결국 박정희에게 미운 털이 박힌 김계원은 중정부장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14] 2020년 기준 가치로 약 35만원 가량 된다.[15] 당시 리갈을 닮은 술병이라고 하면 진로위스키의 '길벗 로얄' 밖에 없다.[16] 출처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년 5월 29일 (일) / 제 96회, 10.26 궁정동 사람들[17] 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몰아내고 정운갑을 총재 대행으로 올리려 했던 중정의 공작이다.[18] 당시 신민당은 김영삼의 국회 제명에 항의하는 목적으로 민주통일당과 더불어 의원 전원(신민당 61명, 통일당 3명)이 국회에 의원직 사표를 낸 상태였고, 중앙정보부에서는 신민당 당직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당직에서 사퇴하게 한 후 총재 직무가 정지된 김영삼에게 당권을 빼앗아 정운갑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에게 넘기려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 공작의 일환으로 신민당 의원들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겠다는 설을 퍼뜨리며 으름장을 놓던 중에 공화당이 사표를 전부 반환하겠다고 선언해 버리며 중정에 협조적이던 일부 신민당 의원까지 강경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중정은 헛물만 켜야 했다.[19] 실제로는 정인형, 안재송, 박상범, 김용섭에 경호실 운전기사 김용태까지 포함해 총 5명이었다. 김재규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박선호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경호실장인 차지철까지 포함하면 6명이라 7명에 근접한 수치이기는 하다. 다만 실질적으로 무장 상태의 경호원은 차지철, 김용태를 뺀 4명이라고 봐야 했다.[20] 공교롭게도 똑같은 이유로 단종 복위 시도가 실패하고 관련자는 처형되었다. 김재규가 조상인 김문기를 무리하게 사육신에 넣으려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21]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전가옥로 배치되었으며, 그 해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고 한다.[22] 평소 청와대 관용차량은 박정희의 육군포병학교 교장 시절 운전병으로 복무한 인연으로 채용된 이타관이 몰았지만 대, 소 행사 때는 비공식 행사용 차량인 토요타 크라운 슈퍼 살롱을 운행했기 때문에 이날은 김용태가 슈퍼 살롱 운전을 맡았다.[23] 국내 컬러 방송 송출은 1980년 12월에 시작되었기에, 몇몇 컬러 TV를 볼 수 있었던 이들은 주한미군을 위한 이 방송을 꽤 많이 시청했다.[24]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경호실 내부 회의 중에 경호실 수행계장 박상범이 "청와대 경호원들의 영향이 안가에선 무력화된다. 조치가 필요하다."라는 건의를 올렸는데, 차지철은 "김재규 부장 정도야 내 파워로 꽉 누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장면이 있었다.[25] 이 때문에 이 노래는 후대에 10.26을 상징하는 노래로 회자되고 있으며, 훗날 10.26을 소재로 한 한석규, 백윤식 주연의 영화 제목으로도 쓰였다.[26] 정 중앙에서 약간 왼쪽을 맞았다.[27] 반면 심수봉은 꾸준히 당시의 소수설을 밀어서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직접 고증을 맡을 때에도 김재규의 대사를 "이 새끼! 너 건방져!"로 정했다.[28] 그때 차지철이 입었던 손목 관통상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현장에는 대통령 경호원들도 있던 현장이었던 만큼 만일 차지철이 도망치지 않고 김재규를 저지했다면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현대사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뒤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29] 이때 김계원이 사건이 진전되는 것을 감시하는 공범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과, 단순히 김재규가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었든 박정희가 살해당할 당시 어떠한 제지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30] 안가 요원들의 사격은 거구의 김용섭에게 집중되었고, 김용섭은 다섯 발 중 네 발을 가슴에 피격당하여 쓰러진 채 한동안 신음하다 사망했다.[31] 남아 있는 증거 사진을 보면 확실히 이 총이다. 당시 궁정동에 모였던 박정희와 핵심 인물 3명의 목숨을 빼앗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통째로 바꾼 총이다. 이 S&W M36과 김재규의 발터 PP는 현재 행방이 알려져 있지 않다. 총기번호까지 기록에 명확히 남아있는 데도 말이다. 총기 행방에 관한 기사 게다가 운명의 장난인지 육영수문세광에게 같은 모델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32] 이 일화는 '''총을 먼저 겨눈다'''는 것이 얼마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안재송은 해병 장교 출신으로 권총 부문 사격 국가대표로 선발된 적도 있으며, 특히 속사가 주특기인 명사수였다. 가슴에 찬 권총을 뽑아 0.7초 내에 25미터 앞의 박카스 병을 명중시켰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출처.[33] 게다가 안재송은 해병 대위 시절에 미국 해병학교에 유학을 갔다 왔는데, 당시 어떤 미 해병대 장교도 안재송의 45구경 권총 속사 사격 기록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출처 : 이근식(예비역 해병대령), 노해병의 어제와 오늘.)[34] 출처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35] 營繕, 건축물 따위를 신축하거나 수선함.[36] 전기가 갑자기 합선되면 펑 하는 폭발음이 난다.[37] 합수부에서 김재규는 "차지철을 거꾸러뜨리고 앞을 보니 대통령은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어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대통령에게 다가가자 여자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권총을 각하의 머리에서 50cm 거리에 대고 쏘았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38] 국군서울지구병원 원장 김병수 대한민국 공군 군의 준장은 박정희의 머리에서 멈춘 이 총알을 수술로 제거해 고인을 깨끗이 모시자고 건의하였으나 장녀 박근혜가 시신에 다시 칼질을 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시신과 함께 지금도 국립묘지에 묻혀있다고 한다. 출처[39] 1989년까지 육군본부는 용산구 삼각지, 현 전쟁기념관 자리에 있었다.[40] 후에 서술한대로 '''이 결정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꿔놓는다.''' [41] #기사[42] 이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 세력은 정승화에게 혐의를 씌우면서 이 명령은 정승화가 김재규와 함께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43] 영화 그때 그사람들 때문에 브레즈네프의 사망을 보안유지했다고 잘못 알려진 고증 오류의 원래 내용. 브레즈네프는 '''김재규가 사형에 처해지고도 뒤인 1982년에 사망'''했다.[44] 신현확은 김재규의 동향 선배(신현확은 경북 칠곡, 김재규는 선산 태생)였고, 평소 찬바람이 몰아치는 박정희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45] 전두환 회고록에 묘사된 당시 상황이다.[46] 훗날 이 지시는 상당히 논란이 되었는데, 전두환은 이 지시에 대해 김재규와 정승화가 사실상의 공모관계였다는 근거라고 주장하나 정승화는 1990년대 무죄 판결 당시에 이 지시를 김재규가 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다며 반박했다.#[47] 264일의 쿠데타 1 1권 193쪽[48] 여담으로, 10.26 사건으로 압송된 김재규가 수사를 당한 보안서 서빙고 분실은 다름 아닌 김재규 자신이 보안사령관 시절 만든 곳이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49] 권위주의정부 당시 중앙정보부(안기부), 보안사령부가 위세를 떨쳤지만, 그들의 순수한 전투력은 수도경비사령부보다 열세였다. 12.12 당시 전두환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50] 현 세종대로 21길 TV조선 별관 건물[51] 박흥주는 다른 이들과 달리 육군 대령으로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사법원의 단심제가 적용되어 가장 빨리 사형됐다.[52] 1982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53] 그나마 21세기 들어서야 다시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지만 관련 인력도 적고 진행속도도 훨씬 느리다. 물론 유신정권 때가 지나치게 지원이 컸던 것에 가깝기는 하고, 당시 무려 대통령의 관심이란 부담 때문에 학술적으로는 무모하게 접근한 것도 있었다.[54] 그러면서도 김재규는 김종필을 항상 각하라고 불렀다. 김종필이 "이미 각하가 계신데 그런 호칭은 그만 둬 달라"고 했지만 김재규는 "습관이니 양해하시라"며 눙쳤다고 한다. 그런데 육사 기수는 김재규(2기)가 김종필(8기)보다 6기 선배이며 나이는 호적상으로 둘 다 1926년생 동갑이지만 김재규가 재판을 받을 때 자신은 1924년생 이라고 밝힌 바 있다.[55] 김재규는 위와 같은 대화를 듣고 이러다 큰일나겠다 생각해 자신이 거사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불분명한 사실이고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구체적 근거를 들지 않았다.같은 자리에 동석했던 김계원,심수봉,신재순 그 누구도 저런 증언을 하지 않았고 오직 암살범 김재규뿐이다. 실제 10.26 사건 당시 밝혀진 대화는 차지철이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라는 말이다.[56] 사실상 당시 한국 건설기업의 해외활동 중 대부분이 남베트남에서 이루어 졌다[57] 이름은 물론 Brutus이지만 '브루투스, 너마저!' 하는 라틴어 문장에서는 호격어미인 'Brute, et tu!'라고 쓰기 때문에 브루투스의 라틴어 이름을 Brute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58] 이미 부마항쟁 1년 전인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이런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유신 독재 정권의 압도적인 관권, 금권을 등에 업은 집권 민주공화당이 제1야당 신민당에 지역구 득표율에서 오히려 뒤진 것이다. 당시 공화당은 31.7%, 신민당은 32.8%로 그 격차는 불과 1.1%였지만, 민주화를 내세운 제1야당의 득표율이 집권당을 넘어선 건 헌정 사상 최초였다. 여기에 제3당인 민주통일당의 득표율 7.4%를 감안하면 10대 총선은 사실상 집권당의 참패였다. 지역구 당선자는 공화당이 68명으로 신민당의 61명보다 많긴 하지만 차이가 크진 않다. 박정희가 임명하는 유신정우회가 없다면 국회에서 공화당과 신민당은 사실상 박빙 상태였다.[59] 이만섭 전 국회의장도 방송출연 중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60] 박정희는 훗날 육사가 되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이었고 김재규도 이곳 2기생이었다.[61] 하지만 분노라는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특히 당일 삽교천과 관련하여 분노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 있었기에 더 분노설이 지지받기도 한다.[62] 차지철은 사실 중령으로 전역했다. 다만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 소령을 달고 2달만에 중령달았으니 고까울만도 했다.[63] 사실 이 둘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두환까지 끼어서 알고보면 셋이 서로 속으로는 갈등이 매우 심한 상태였는데, 다만 전두환은 두 사람과는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꾹 눌러 참았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아무리 보안사령부 사령관이라지만 그때의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소장을 경호차장으로 둘 만큼 기세등등했다), 중정부장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은 의전상 부총리급이었다)에 비해 끗발이 달렸다.[64] 김종필은 10.26이 계획적인 거사라면 상태가 불량한 총을 사용할 리가 있겠냐며 그 사건은 우발적인 것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는데, 이에 대해 김계원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김재규의 총기는 불량이 아니었으나, 본인이 김재규의 총격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내구성에 문제가 생겨 격발 이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 하지만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 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정희 암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65] 이학봉 당시 수사국장은 이를 전두환에게 즉각 보고했고 수사관들은 정승화와 김재규의 공모에 대한 심증을 굳히게 됐다고 주장했다.[66] 한국국가안보전략사상사(중) - 근,현대편: 대한민국건국의 아버지들 제3부 557페이지 참고. # [67] 훗날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김계원이 자신의 말에 동조했기에 살려뒀다고 이야기했으며, 만약 동조하지 않았으면 물론 농담이요라고 말한 뒤, 박정희 차지철과 함께 죽여버릴 것이였다고 털어놓았다.[68] 이 견해는 다름 아닌 10.26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에서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대법관 등이 제기한 소수의견에 나타나 있다. 양병호 당시 대법관의 소수의견을 그대로 인용한다. "(김재규의)"해치워 버린다"는 말이 깡패사회도 아닌 피고인들과 같은 국가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죽여없앤다는 뜻의 말로는 도저히 새겨들어지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피고인(김계원)이 위 T(차지철)를 암살하겠다는 것인 정을 인식하였다고 인정할만한 자료는 보여지지 아니한다."[69] 약 50m 정도[70]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껌을 준다.[71] 전두환은 정승화가 김재규를 체포하라 했을 때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말로 정승화와 김재규가 공범이라는 것에 확신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사실상 김재규와 권력을 찬탈하려했다는 혐의를 씌웠다.[72] 정승화는 차지철은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차지철은 경호실 상황실에 육군 예하사단에까지 직통전화를 연결하여 지휘관들을 제멋대로 부릴 정도였으며, 군에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는 중이였다. 게다가 권력이 날로 막강해지자 군 일부 장성들이 차지철에게 찾아가 아부를 했을 정도였기에 이 사건이 단지 차지철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배후에 군 지휘관들이 개입된 심각한 사태라 판단했다.[73] 이는 264일의 쿠데타 25페이지에서도 확인 가능하다.[74] 물론 민주화 이후에는 무죄로 판결[75] 영상에 MISS 신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은 신재순.[76] 다만 위 사건의 전말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발터 PPK로 박정희를 죽인 것이 아니다. 물론 임팩트는 발터가 더 센지라...[77] 1979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78] 이 때 준공비에서 가림막이 내려가지 않고 걸려있는건 당시 대한뉴스 등 기록 영상에서도 확인된다.[79] 준공비 제막식 및 사슴 즉사 에피소드 출처 :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80] 백운학은 쿠데타 전 자신을 찾아온 김종필에게 대뜸 “당신, 혁명하려고? 그거 성공하니 밀어 붙이시오”라고 말하여 김종필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81] 10월 24일 보도 이후 25일 대국민 사과, 26일 퇴진 시위 본격화가 일어났으니 같은 날이라고 봐도 어찌 보면 무방할 듯.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박정희는 1961.5.16 쿠데타 이후 18년 만인 79년 비극을 맞이하였는데, 박근혜도 98년 정치 입문 이후 18년 만인 2016년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점이다.[82] 김호남과 이혼하기 전~육영수와 재혼하기 전 사이에 동거했다.[83] 아마도 내곡동으로 이전할때 유실된걸로 추정된다[84] 10.26 사태가 일어나기 약 두 달 전이다.[85] 미국이 10.26의 배후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계기기도 하다. 다만 도널드 그레그는 그냥 쿠데타나 암살 가능성을 예측한 것일 뿐이며, 미국 정부가 10.26에 관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부인하였다.#도널드 그레그의 예측은 부마항쟁으로 박정희의 정치생명은 이미 끝났다고 보고 있으며 그걸 무릅쓰고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누군가의 손에 암살당하거나 쿠데타를 당한 뒤 처형당할 것으로 예측했다.[86] 도널드 그레그는 CIA의 동아시아 지역 전문가로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베트남, 한국, 일본을 오가면서 활동하였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국대사로도 재직했으며, 은퇴후에는 미국 내 한국 전문가들을 한데 모은 코리아소사이어티를 창립해서 한미관계, 북미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내 한국통 중에서 최고참 격인 인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미국쪽 관계자로 이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87] 다만 이건 겉치레일 확률이 높은게, 2003년 일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10.26 당시 소회를 전하며, 박정희 사망 시 솔직히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88] 이 장면에서 2분 뒤에 나오는 장면인 김계원과의 대화에서는 코로시마스라고 한다.[89] 극중에서는 박진욱이라는 이름으로 김희라가 역할을 맡았다.[90] 신상옥 감독은 사건 당시 전 아내 최은희와 함께 북에 납치된 상태였다.[91] 시간 없으면 8분 13초부터.[92] 툼스톤의 비밀, 파문, 10.26과 기생 이손지 등등의 여러 버전으로 국내 출간되었다.[93] 아버지가 민주화 인사였다가 고문당해 사망하고 이 여자도 연좌제에 걸려서 체포되었다가 중정에 의해 기쁨조로 키워졌단다...[94] 혹은 이중 장군.[95] 달래는 대사가 "괜찮아, 전쟁 안 나"다.[96] 본래 이 날은 비번이었으나, 다른 경비원의 사정으로 대신 근무하러 나왔다가 이 사건에 휘말렸다.[97] 기적적으로 총알이 치명적 부위를 피해간 데다 쓰러지면서 머리를 찧어 기절해 죽은 것처럼 보였고, 중정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중정 직원들(요리사 이정오, 운전사 김용남)까지 다치는 바람에 확인사살에 소극적이어서 죽음을 면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계속 경호실에서 근무했고, 김영삼 정권 출범 때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육영수 저격 사건 때 직접 총을 들고 뛰쳐나왔던 경호원 중의 한 명이었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도 경호원으로 있다가 살아남았다.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얽힌 인물.[98] 일설에 따르면 1개 사단 평시 재고분의 소총 탄약을 전부 그 자리에서 실탄 사격해 소모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