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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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惠慶宮 洪氏
사도세자의 정실이며 정조의 친어머니. 그 외의 자녀로는 의소세손,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있다. 혜경궁(惠慶宮)은 정조에게서 받은 궁호다.[2]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으로 홍주원의 부인이 선조의 딸 정명공주였기 때문에 선조의 6대손이기도 하다.
2. 생애
2.1. 간택
1744년(영조 20년) 10살의 어린 나이[3] 로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혼인하였다. 명목상 간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초간택 때 이미 대왕대비인 인원왕후, 왕비인 정성왕후 등 높으신 분들을 뵙고 궁인들이 홍씨가 괴로워할 정도로 그녀를 안으려 다툰 것을 보아, 간택 전에 이미 그녀는 세자빈으로 낙점이 되었던 듯하다. 이때 그녀의 조상인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혼수로 들어와 기이하게 여겼다.[4] 특히 병풍에는 홍봉한이 꾼 그녀의 태몽에 나타난 흑룡과 똑같은 흑룡이 수놓아져 있었다고 한다.
2.2. 출산
1750년(영조 26년) 의소세손을 낳았는데, 이때 꿈에 이미 죽은 시누이 화평옹주가 보여서 혹시 해산하다 죽은 화평옹주가 무슨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은 아닌가 불안해했다. 처음에는 사랑하던 딸 화평옹주의 3주기 즈음에 태어난 아이라 탐탁치 않아 하던 영조가 갑자기 와서 아이를 살피는데, 화평옹주와 같은 곳에 점이 있어 화평옹주의 환생이라 여기고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의소세손은 3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같은 해에 정조를 낳는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2남 2녀를 낳고 2명을 유산했다.
2.3. 후궁 문제
22세때 청선군주[5] 를 낳고 이후로는 임신하지 못했다. 이는 다음해 연이어 정성왕후와 인원왕후가 사망했기에 3년상을 마치기 전까지 세자빈이 임신하기는 어려웠을 상황이었고, 이후로는 사도세자의 병증이 심각했기에 그녀가 더 이상 자식을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궁녀 임씨(훗날의 숙빈 임씨)가 첫 임신하자 영조의 질책이 두려워 낙태까지 시키려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세자빈 홍씨가 임씨를 불쌍히 여겨 도와줬다고. 하지만 결국 은언군이 태어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1달 넘게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홍씨까지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6]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가 궁녀에게서 자식을 일찍 본 것이 영조에게는 매우 못마땅했던 것. 하지만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임씨에게서 은신군을, 또 다른 궁녀 박씨에게서 청근옹주와 은전군을 얻어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 임씨는 낙태를 당할 뻔하고, 박씨는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사도세자에게 폭행으로 살해당했다.[7]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 영조가 후궁들과 그 자녀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세자빈 홍씨는 남편의 후궁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는커녕 되레 동정심과 연민을 느꼈을 정도다.[8]
2.4. 부자간의 갈등
영조는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유일한 후계자였던 사도세자에 대한 큰 기대와 두 부자간의 성격 차이 등 두 부자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때는 사도세자가 광증(狂症) 때문에 궁녀들을 마구 살해하자, 시어머니 영빈 이씨에게 가서 같이 울면서 의논했는데, 영빈이 영조에게 이야기하는 게 어떻냐고 묻자 대경실색하면서 '''왕에게 세자를 헐뜯은 걸 세자가 알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뜯어말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자빈인 혜경궁도 시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미쳐가는 남편을 말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2.5. 임오화변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가 '대처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안절부절못하다, 오후 3시에 창경궁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칼로 2차례나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칼을 빼앗아 실패했다. 홍씨는 사도세자를 만나기 위해서 달려갔으나 들어가진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단 말인가?"하고 남편을 원망 아닌 원망을 하며 울었다.[9]
이후 세자빈 홍씨는 내시를 시켜서 영조에게 "죄인의 아내가 어찌 궁에 있겠습니까" 하고 친정으로 갈 것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세손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잠시 후에 세자빈의 오빠 홍낙인이 세자빈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동궁을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하니, 빈궁도 더 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 주상께서 본가로 나가라 하시니 가마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10] 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라고 했고 홍씨도 통곡했다.
2.6. 남편의 죽음 이후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당일에 세자빈 홍씨에게 혜빈(惠嬪)이라는 빈호(嬪號)를 내린다.[11] 영조의 명으로 친정으로 나가 있다가 다시 궁으로 돌아온 홍씨는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유일한 희망밖에 없었을 것이다.
친정아버지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영조에게 직접 바친 상소문에서 혜빈 홍씨는 왕세손 정조에게 "나는 아내로서 이런 경우를 당하고, 너는 자식으로 이런 경우를 만났으니, 다만 스스로 운명을 슬퍼할 뿐이다. 장차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느냐? 또 나와 네가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상 덕분이며 우러러 의지하고 목숨을 맡길 분도 오직 성상뿐이다."라고 하며 성은에 보답해야 말했다고 한다.
물론 영조는 한 점 후회 없었고(...) 영조는 자신이 종사를 위해 의로써 결단한 것이라고 홍봉한에게 말하며 영조 자신도 홍봉한이 상소문을 바치기 전에 이미 직접 혜빈을 찾아가 보았는데 "저희 모자가 살아있는건 다 성상의 은혜덕분입니다"라고 영조의 처분을 긍정하는 뜻을 보이자 혜빈이 효성스러웠다고 칭찬했다.
한편 혜빈은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혜빈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남편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아들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당시 세손은 9세였다.[12] 한 번은 어린 세손이 혜빈에게 와서는 울면서 떨어지지 않자 영조가 이렇게 어미를 그리워하니 놔두고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는데, 혹 영조가 항상 함께 있는 할아비보다 어미를 더 좋아한다고 섭섭해할까 봐 '여기 있으면 주상을 그리워한다.'며 무정하게 떼어놓았다고 회고했다.
2.7. 정조 즉위 후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에 혜경궁이라는 궁호를 받았으며 '''자궁(慈宮)'''이라 불리게 된다. 전통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국왕의 적모를 일컫는 칭호는 자전(慈殿)이었다. 그러나 홍씨는 왕의 어머니이자 왕실 여인 중 가장 연장자였지만 홍씨의 살아생전에 사도세자가 국왕으로 추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왕대비가 되지 못했다.
또 정조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면서 법적으로는 국왕의 어머니조차 아니었기 때문에 '자전'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고 그 지위도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했다. 거기다 당시에 왕실의 서열 1위이자 최고어른은 혜경궁의 시어머니이자 그녀보다 10살이나 어린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만일 당시에 혜빈 홍씨가 남편이 국왕으로 추존되었다면 자신은 왕대비가 되고 정순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었을 것이다.
정조는 궁여지책으로 한 단계 낮은 '자궁(慈宮)'이라는 칭호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보다는 낮고 중전 효의왕후 김씨보다는 높은 대우를 하여 결과적으로 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해서 친어머니를 위로했다.[13][14] 혜빈 홍씨가 궁호인 혜경궁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즉위 초반 반대파들의 공격에 친정이 수난을 당했으나 정조는 끝까지 외가를 보호했고, 즉위 중후반 이후로는 정조가 직접 외가에 대한 명예 회복에 나서며 아들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평온한 시절을 보낸다.[15]
정조 20년(1796), 정조는 혜경궁의 환갑 잔치를 위해 화성행차를 했는데, 홍씨는 무려 33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 사도세자의 무덤에 방문했다. 왕조차도 궁궐 밖 외출이 자유롭지는 않았으니, 더구나 왕실의 여성이었던 혜경궁은 당연히 남편의 무덤은커녕 궁궐 밖에 외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홍씨가 남편과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한중록>에 따르면, '임오화변 당시 앞날이 막막했으나 당시 11살이던 아들은 왕이 되었고 10살이 되지 않았던 딸들은 현재 모두 장성하여 40세가 넘었다'며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2.8. 정조 사후, 순조 즉위 후
하지만 정조 사후 그녀의 큰 고난이 시작되었다.[16] 혜경궁의 친정 풍산 홍씨와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가 대립했기에,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혜경궁의 남동생 홍낙임을 처벌하려고 했다. 이에 혜경궁은 단식 투쟁을 벌여가면서까지 반대했고, 며느리였던 수빈 박씨도 합세해 둘이서 손자 순조에게 기대어 정순왕후의 뜻을 일단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사사되었다.
당시 궁중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 하면 혜경궁에게 문후(問厚)를 오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순조는 물론이고 대비인 효의왕후와 순조의 생모인 수빈마저도 정순왕후의 눈치를 봐 혜경궁에게 올 수가 없었던 것.
뒷날, 순조가 순원왕후와 가례를 올릴 때도 혜경궁은 폐백과 문후를 받지 못했다.[17]
1814년에 혜경궁의 친정은 복권되었고, 그 다음 해에 혜경궁은 눈을 감았다.
2.9. 사후
손자 순조가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올렸다[18] . 후에 고종 대에 남편 사도세자가 장종(莊宗)으로 추존되자 혜경궁은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후 장종이 장조 황제로 추존되면서 함께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높여졌다. 그녀는 손자의 치세에도 왕비로 추존되지 못했는데, 생전에 그리도 싫어하던 은신군의 양자의 손자에 의해 왕비를 뛰어넘어 황후로 추존되었음이 역사의 얄궂음이라 하겠다. 다만 고종은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으므로, 법적으로는 사도세자가 고조할아버지이다. 나라를 세우거나 칭제를 했을 때 4대조까지 추존하는 관례를 따르면 사도세자까지 추존함이 맞다.
3. 한중록
혜경궁 홍씨가 말년에 쓴 수필. 해당 항목 참조.
4. 노론 음모론자들이 퍼뜨린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 설
그러나 이덕일이나 그 일파인 이주한 같은 사람 때문에 '무고한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여자'란 이미지가 퍼지고 있다. 이덕일이 활동하기 수십 년 전부터 홍씨가 악녀로 나온 건 <조선왕조 오백년> 에도 있지만 이덕일은 역사학 박사였다는 게 문제.[19]
문제는 그게 제대로 근거가 없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 문제다.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20] 라면서 사도세자의 정신병 서술을 조작이라 설명하는데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한중록 말고도 증거가 여럿 있다.[21]
권두환 교수는 2007년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해당 편지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가 우울증 때문에 약을 부탁했다고 나온다. 원문을 번역한 내용은 이렇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광증을 나타내는 서술이 있다. 단, 광증이 기록된 시작점이 1761년이며 사도세자는 1년 후인 1762년에 죽었고, 대리 청정을 무려 14년이나 한 사람이라는 건 기억해 두자.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해 답답하다'''.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을 남몰래 보내 달라'''(1753년 또는 1754년 모월 모일) #
영조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 기사
영조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을묘) 2번째 기사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 ·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3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신하나 궁녀를 죽여버리는 일을 여럿 저질렀고, 그 설명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정신병인 것으로 보이는 게 분명한 서술들이 나온다. 사도세자 본인도 본래 있던 화증이라고 말했다.한참 후에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22]
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박종겸이 쓴 소론 준론계 당론서인 현고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소론 계열 당론서로써, 시종일관 사도세자에 우호적이고 노론에게 적대적이지만 사도세자의 병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평양 사람 이갑(李甲)이 용력이 있었는데 환관을 통해서 동궁을 모시게 되었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동궁이 어떤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심화가 치밀어 오르자, 철편(鐵鞭)을 휘둘러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맞아 죽었다. 애증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 마치 날씨가 갠 날에 밝았다가 어두운 구름이 갑자기 가리는 것과 같았다"
폐세자반교에도 분명히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23]
또한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조작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며 다음을 증거로 하였다.'''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100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지금 비록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이덕일은 '태묘'라는 단어에 '태조의 묘'라고 설명까지 달아놓았다. 근데 '''태묘는 무덤이 아니다. 종묘(宗廟)의 정전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굳이 정병설 같은 전문가까지 갈 필요도 없이 '''국어사전만 보면 알 수 있다.''' 해당 뜻 국어 사전에 있는 단어도 확인하지 않고 1차 사료를 부정했다. 이에 대해 이덕일 본인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서문을 통해 이미 <이덕일의 여인열전>에서 태묘의 뜻을 바로 풀어썼다며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작가를 매장시키지 말라고 반박했다.혜경궁은 한중록에 세자가 22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 번도 수가[24]
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이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 혜경궁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앞선 영조 28년(1752) 7월 태묘에 거둥할 때로 수가했으며 또한 같은 해 12월 태실에 나아갈 때와 다음 해 첫날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
<사도세자의 고백> 181쪽
이주한은 한술 더 떠서 '''혜경궁 홍씨를 가해자로 기본 전제해서 논리를 전개한 적이 있다.''' 혜경궁 홍씨를 가해자로 전재해놓고, 이덕일의 사료 왜곡에 반박했던 정병설을 '''정병설은 중요한 살인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반사실적 가정의 오류를 범했다.[25] 그러나 정작 실제 정병설은 그딴 논거를 쓴 적 없고, "사도세자가 정신 질환이 있다는 건 '한중록'에만 있는 사실이 아니다. 영조가 사도세자 무덤에 두려고 직접 쓴 묘지 이름,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간찰, 정조가 사돈 김조순에게 한말 등(후략)"라고 여러 사료와 교차 검증하여 이덕일을 반박했다. 이건 관련 논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써서 상대의 논거를 날조한 것이다.
일단 혜경궁 홍씨를 당연히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 홍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료는 저자의 주관에 따라 편향성이나 왜곡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중록은 그 특성상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의 책임을 실제보다 작게 묘사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다. 위에서 계속 언급된 정병설 교수도 한중록을 완벽히 믿지 않는다.[26] 사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모든 학자들이 가져야만 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그 가능성을 넘어서 딱히 고의적인 날조를 했다는 정황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이덕일과 그 부류의 인물들은 제대로 증거도 없이 의심을 넘어 확신을 하며 유사역사학방법을 동원하는 게 문제다.
2014년 울산대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의사 정하은과 김창윤이 한중록을 분석했다. 그 내용이 정신병 증상에 맞으며, 모르는 사람이 서술했다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당 서술이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진 게 아니라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참고로 이런 건 정신 의학 분야 맞다. 역사학자들도 자기가 모르는 분야는 관련 전문가들에게 의뢰해서 조사를 받는다. 예로 해방 후 미군들이 독도에 폭격을 가했을 때 관련 미군의 증언이 남아 있었다. 국사학과 박사 학위 정병준 교수는 <독도 1947 (전후 독도 문제와 한.미.일 관계)>에서 폭격이 고의적인가 여부를 분석하기 위해 실제 공군 장교에게 분석을 의뢰하고 인터뷰를 했고, 국사학과 박사 학위 김태우 교수도 <폭격 미 공군의 공중 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에서 위의 정병준처럼 미국의 고의성을 조사하고자 공군 장교에게 분석을 의뢰하고 인터뷰했다. 정병준과 김태우는 순수하게 군사적 전문가의 분석을 위해서 인터뷰 한 것이다.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해당 논문
모순적이게도, 음모론자들은 정조가 즉위한 뒤 홍씨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했음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음모론대로라면 혜경궁 홍씨는 정조에겐 '훌륭한 아버지를 정신병자로 모함해 죽인 원수이자 정적'인데도, 왜 정조는 친모에게 하소연조차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정조가 성인군자라서?[27]
5. 가계
5.1. 친정 (풍산 홍씨)
5.2. 시가(왕가, 전주 이씨)
- 시아버지 : 제21대 영조(1694년 ~ 1776년)
- 시어머니 : 영빈 이씨[29]
- 남편 : 장조 의황제(1735년 ~ 1762년)
6. 여담
- 정조 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혜경궁 홍씨는 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의 딸 '성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친히 길렀다고 한다. 조선 시대 왕비들은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어린 궁녀를 딸처럼 기르기도 했는데, 혜경궁 홍씨는 덕임과 비슷한 나이의 자녀(정조, 청연 공주, 청선 공주)가 셋이 있었다.
- 정조는 어머니가 기르는 궁녀인 '덕임'에게 반해 15살 소년 시절에 고백했으나 사양했고, 15년 후에 30살 청년이 되어 고백했으나 또 사양했다고 한다. 정조가 덕임의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속을 책벌할 정도면 혜경궁의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혜경궁은 아들을 두 번이나 찬 덕임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 출산할 때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과 유모를 보내 도우는 듯 지극히 챙겨줬다고 한다.
- 이 '덕임'이라는 궁녀가 바로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이다. 즉 혜경궁은 자신의 양녀를 며느리로 맞이하게 된 셈. 또한, 의빈 성씨는 궁녀 시절 혜경궁의 딸들인 청연 공주, 청선 공주와 함께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기도 하는 등 밀접한 사이였다.
7. 혜경궁 홍씨가 등장한 작품
영조 - 사도세자 - 정조 연간이 한국 사극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인기 소재이기 때문에 자주 등장한다.
- 1979년작 MBC 드라마 <안국동 아씨>에선 배우 김영란이 연기했다.
- 1988년작 KBS2 드라마 <하늘아 하늘아>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주인공으로 한중록을 기초 삼아 만들어졌으며. 극본은 임충, 연출은 안영동 PD였다. 혜경궁 역은 이재은(아역), 하희라[32] (성인역)이 맡았다. 내용은 고전적인 해석인 비운의 여인으로 나왔다. KBS 대하드라마 <왕도>에서는 정영숙.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최명길.
- 1998년작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는 홍리나가 출연하였다. 이인혜가 연기한 정순왕후 김씨나 윤손하가 연기한 숙의 문씨가 표독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지는 반면, 혜경궁 홍씨는 이에 대비되는 굉장히 착하고 가련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극중 내내 참거나 당하는 포지션.
- 2007년작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견미리가 출연했다. 드라마 이산은 임오화변 한참 후의 시기를 메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비운의 여인 이미지보다는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이다. 단, 남편을 잃고 아들도 몇 번이고 잃을 위기를 맞은 것에는 당연히 한이 맺혀 있기에 노론 측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정조 즉위 후에는 엄한 내명부의 주인 역할을 맡기도 한다. 히로인인 의빈 성씨와 정조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청국에 보내버리기도 하는 등 무서운 시어머니 역할도 하였다.[33]
-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傳>에서는 이선영 아나운서가 연기한다.
- 채널 CGV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은 이덕일 식 역사관을 참고했기 때문인지 혜경궁 홍씨를 '친정을 위해 남편을 버렸고 이제는 아들까지 버리려 하는' 냉혹한 이미지로 묘사했으며 정애리가 연기했다.[34][35]
- 영화 <역린>에서는 김성령이 혜경궁 홍씨 역을 맡았다.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남편을 버린 비정한 면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에게 굴욕을 당하고 인내하는 등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 KBS 드라마 스페셜 2015 시즌2- 붉은 달에서는 박하나가 혜경궁 역으로 출연하였다.
- 영국인 작가 마가렛 드래블이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듣고 <붉은 왕세자빈>이란 작품을 썼다. (마가렛 드래블은 A.S. 바이어트의 여동생이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혜경궁의 반지가 유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