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희
1. 개요
대한제국 순종의 연호.
1907년 8월 3일에 발간된 대한제국 관보 3835호부터 사용되었고,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2. 상세
1907년 8월 2일 당시 내각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이(...) 내각을 대표하여 연호 후보로 '융희(隆熙)'와 '태시(太始)' 2개를 상주하였고,[1] 순종이 이 중에 융희를 고름으로써 새 연호가 결정되었다.
원래 중국과 한국에서 따르던 유교 예법에 따르면 정변이나 반정 등 비정상적 황위 계승이 아닌 경우에는 유년칭원법에 따라 즉위년 다음 해에 개원(改元)하는 것이 전통이므로,[2] 정상적으로는 순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908년이 융희 원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엄연히 황태자가 예정대로 황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년칭원법이 아닌 즉위년칭원법을 택해 순종이 즉위한 바로 그 해인 1907년을 융희 원년으로 정했다.
융희 개원이 전통적인 예법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크게 2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로 불명예스럽게 퇴위시켜 정상적인 황위 계승이 되지 못한 탓도 있고, 둘째로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에 따라 이미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였으므로 일본식으로 즉위년칭원법을 따른 측면도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이후부터 대한제국 내에서는 일본의 메이지(明治)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국기를 게양하더라도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게양하였다. 순종 시절에 이미 대한제국이 껍데기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사례.
3. 기타
- 1908년 부산 ~ 신의주 간 최초의 특급 열차 이름이 이 연호를 딴 '융희호'였다.신의주 ~ 부산 간 14시간 30분이 걸렸다.
- 2016년 말, 1926년을 '융희 20년'으로 표기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일제의 통치를 거부한다는 뜻을 연호로써 드러낸 것인데 이런 행동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