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대한제국
大韓帝國 | Korean Empir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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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2]
[image]
'''1897년''' '''10월 12일''' '''~''' '''1910년''' '''8월 29일'''
,'''(12년 320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조선'''
'''일제강점기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오얏꽃
'''표어'''
광명천지(光明天地)
(모든 땅에 밝은 빛을 내리리다.)
'''위치'''
한반도 및 부속 도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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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칭제건원, 광무개혁
1899년 대한국 국제 선포
1900년 만국우편연합 가입
1901년 경인선 개통
1904년 러일전쟁, 한일의정서 체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1906년 통감부 설치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국채보상운동,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
1909년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제국 멸망'''

<rowcolor=#ffde09> '''수도'''
'''최대도시'''
한성부
'''면적'''
222,300km² (내수면 비율 2.8%)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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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인구
(추산)'''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총인구'''
17,420,000명(1910년)
'''인구밀도'''
78명/km²
'''민족'''
한민족
'''공용어'''
한국어, 한문
'''공용 문자'''
한글, 한자[51]
'''종교'''
유교 (성리학)
불교
천도교
기독교
'''군대'''
대한제국군

'''행정구역'''
13도 7부[3] 1목[4] 331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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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52]
'''국가원수'''
황제
'''역대 황제'''
초대 고종 (1897년 ~ 1907년)
2대 순종 (1907년 ~ 1910년)
'''국성'''
전주 이씨(全州 李氏)

'''연호'''
광무 ,(1897년 ~ 1907년),
융희 ,(1907년 ~ 1910년),
'''통화'''
[5][6]
'''현재 국가'''


1. 개요
2. 상징
2.1. 국호
2.2. 국기
2.3. 국가
2.4. 국장
3. 조선과 대한제국의 연속성
5. 역사
5.1. 건국
5.1.1. 건국 배경
5.1.2. 제국 선포
5.2. 근대화 추진
5.3. 순종 즉위와 멸망
6. 대한제국의 근대성 논쟁
7. 황사
7.1. 대한제국 황실
7.2. 대한제국 계보도
8. 한국통감부
8.1. 역대 통감
9. 수교 국가
10. 행정 기관 및 기타 관청
11.1. 편제
12. 기타
12.1. 이 시대에 들어온 근대 문물
12.2. 대한제국의 오악(五嶽)
13. 대한제국의 인물 목록
14. 역사적 사건 목록
15.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
15.1. 드라마[7]
15.1.1. 가상의 대한제국을 다룬 드라마
15.2. 영화
15.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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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正殿) 덕수궁 석조전'''[8]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사용된 조선의 국명이다. 26대 국왕 고종이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대한으로 변경하였다.
격동하는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주변 각국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청일전쟁 이후 대외적으로 청의 종속에서 자주독립한 국가임을 공포하고 광무개혁을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지만 결국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멸망하였다.
일본 제국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견제가 존재하던 대한제국 선포 초기에는 일정 수준의 자주성을 보전하고 있었지만,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한 이후 체결된 을사조약(1905년)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의 보호국화가 진행됐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한일합방조약을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학자에 따라선 대한제국의 수립 시점을 한국 근대 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보통 근현대사 교과서는 삼정의 문란, 세도정치, 흥선대원군의 등장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2. 상징



2.1. 국호


국명은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대한은 삼한을 일컫는 다른 말로써 한반도 전역을 이르는 말이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아래 '대한국 국제'에서 보듯 '대한국'과 혼용되었다.
약칭으로는 '대한'과 '한국'이 사용되었는데, 현대의 대한민국과 약칭이 같다. 나라이름은 '대한'이고, '제국'과 '민국'은 각각 황제국과 민주국이라는 정체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정체가 달라졌을 뿐, 국호는 같은 이름을 쓰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서 대한제국을 구한(舊韓)·구 한국(舊韓國)이라 하기도 하며, 흔히 쓰이는 구한말(舊韓末)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9] 반대로 대한제국을 기준으로 보아 대한민국을 신한국(新韓國)이라 하기도 한다.
영어명 Empire of Dai Han은 대한제국 정부가 초기에 잠시 내세웠던 명칭이지만, 결국에는 Korean Empire나 Empire of Korea가 통용되었다. Korea의 어원이 '고려'인데 바로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였던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은 외국인들이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해서, 'Korean Empire'라고 하지 말고 'Empire of Dai Han'이라는 영문 호칭을 사용해주길 주한 외국 공사관에 요청하기도 했는데 무시당했으며, 결국 Korea (프랑스어 Corée/러시아어 Корея)란 명칭을 받아들여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발행한 우표를 보면 잘 알수 있다.

2.2.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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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국가



국가는 국권 침탈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가 광복하면서 으로 갈라지고 양쪽이 서로 다른 국가(하지만 제목은 둘 다 애국가)를 채택했다.

2.4.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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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문의 음각문과 양각문'''
'''독수리 문장'''
황실 상징이자 국장은 이화문의 오얏꽃 문장(李花紋)이다. 이화문은 전주 이씨 종친회, 대종종약원 등이 계승하여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10] 우표와 주화 등의 제조에 대해서는 오른쪽의 독수리 문양이 쓰였다.

3. 조선과 대한제국의 연속성


대한제국 시대 당대에는 공문서는 물론 모든 신문·잡지를 비롯한 모든 사적인 출판물조차 국호를 엄격히 지켜 '대한국', '대한', '한국'으로 사용하였다. 황제가 바꾸어 공포한 새 국호를 무시하고 예전의 국호를 고집하는 것 자체가 불충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니 당연하다. 일본도 대한제국을 함부로 '조선'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없었으며(남한대토벌작전 등), 한일병합조약문에서까지 '한국'이라는 국호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과 조선의 실체가 동일하다고 하여 대한제국 시대를 다룬 미디어에서 대한제국을 함부로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역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갈아엎힌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왕조가 이름만 바꾼 것일 뿐더러, 어차피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봤자 군주의 호칭이 황제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그 전의 조선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 머릿 속에서의 역사상의 비중은 '그런 게 있었지' 수준이다. 이 시대를 구한말이라고 부르면서도 '조선시대 언제 끝났어?'라고 물어보면 1910년의 경술국치를 대는 사람이 대부분. 사실 한반도의 여타 왕조들의 사례로 미루어 보면 대한제국만 따로 특별히 취급해야 할 이유가 칭제말고는 없긴 하다.
궁예의 태봉의 경우 '고려'나 '마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한 나라로 취급하며, 심지어 조선마저 극 초창기(1392년 ~ 1393년)에는 이전 왕조의 국호인 '고려'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시기만을 따로 떼어 내어 이때의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거나 조선의 건국 연도를 1392년이 아닌 1393년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고구려역시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꿨으며 이의 사용 기간 역시 '대한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어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내외적으로 '고려'라는 호칭이 널리 보편화되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단지 국호 변경만을 이유로 '고구려'의 멸망 시기를 장수왕 때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구려'로 불리든 '고려'로 불리든 700년 역사 전체를 고구려의 것으로 보고 있지. 백제도 '십제'나 '남부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고, 신라 또한 '사로국' · '서라벌' · '계림' 등 다양한 국호를 사용하다가 지증왕의 통치기인 503년에 이르러서야 '신라'로 국호를 통일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냥 전체 역사를 통칭해서 '백제'나 '신라'로 부른다. 이름만 바꾸었을 뿐 왕조 교체 없이 국체가 조선에서 물 흐르듯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부르는 게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조선과 대한제국을 칼로 무 베듯 생판 별개로 취급하여 조선이 1897년에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되레 이상하다고 할수도 있다.
한 예로 1900년 10월 14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 안에 있던 어진들이 소실되자 '정묘년병자년의 오랑캐 난리말고는 이처럼 큰 재앙이 없었다'는 표현까지 써 가며 매우 비통해한 고종은 넉넉지 않은 자금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비(= 내탕전(內帑錢))까지 털어 가며 선원전 복원 및 어진 모사 작업을 추진했으며, 모사를 위해 함경남도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도 대규모의 화려한 행렬을 꾸렸을 만큼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종이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는 조선과 대한제국이 '''동일한 국체(國體)'''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이 외에 대한제국 시대에도(심지어 일제 강점기에도) 황실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겼으며, 순종 역시 즉위 교서에서 ''우리나라의 터전을 열어준 분은 태조 고황제'라고 똑똑히 명시해 놓았다.
대한제국이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나라라는 사실은 대한제국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과거 '500년간' 전래되어 왔음을 밝힌 대한국 국제 제2조로도 확인 가능하며, 대한제국 수립 이후의 고종 실록과 순종 실록에도 '500년 종묘 사직 어쩌구저쩌구'라는 문구가 다수 등장한다. 조선 시대에 역적으로 몰린 신하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대거 신원한 것도,[11][12] 박지원정약용 등 조선 시대의 명신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린 것도, 대한제국 수립 후 일반적인 추존 대상인 고종의 4 아니라 한참 옛날의 인물인 조선 왕조의 개창자 태조 이성계까지 그 범위에 포함시켜 '태조 고황제'로 추존했던 것도.[13]
이후 순종 시대에도 조선의 세자에 대한 추존 작업은 계속 이루어졌던 데 반해 삼국이나 남북국이나 고려와 같은 이전 왕조의 군주들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도 대한제국이 조선 왕조의 연속체임을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정치 체제가 공화제, 하다못해 입헌군주제로라도 바뀌었으면 몰라도 실제로는 군주의 직함 이름이 '황제'로 바뀌었을 뿐인 전제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했으니 정치 체제에 급격한 변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본이 한일합방을 통해 옛 대한제국의 영역에 성립된 식민지를 '조선'이라 칭한 것은 대한제국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당대 백성들에게 이전부터 계속 써온 '조선'(朝鮮)이란 단어가 훨씬 친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민지 한반도 내에서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한국 대신 조선이란 명칭이 보편적으로 계속 쓰였다.

4. 대한국 국제



大韓國國制. 1899년 8월 17일 대한제국에서 공표한 국제. 두산 백과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헌법이 아닌 국제라는 이름을 쓰는 이유는 이것이 황제가 제정하고 반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5. 역사



5.1. 건국



5.1.1. 건국 배경


청일전쟁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게 경복궁을 두번이나 점령당하고 일본군과 친일파에게 건청궁에 감금당해 감시받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망명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구성한 대신들을 잡아들이고 일본에 대항할 힘을 갖추기 위해 중앙과 지방조직의 개편 등 내부 개혁을 추진하고 대신들을 유럽과 북미에 파견시켜 각국의 외교에 힘을 쏟으며 정무를 해나간다. 특히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와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교류가 잦아지며 일본을 견제할 힘을 가진 러시아에 매력을 느끼고 국가를 변모시킬 것을 구상한다.
1년 남짓한 기간동안 러시아 장교의 훈련으로 양성한 1천여 명의 호위병력인 시위대를 갖추고 러시아 공사관과 매우 가까운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 동안 구상했던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초기 대한제국의 체제는 고종이나 독립협회나 독일식이냐 영국식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입헌군주제가 고려되었다. 하급 관료와 황실 종친이 주축인 독립협회영국입헌군주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고위 관료가 추축인 근왕파는 독일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독일식과 영국식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영국식이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 그 형태라면, 독일식은 의회가 국왕권의 영역과 약간의 특수성은 인정하는 형태로 공존하는 체계로 군주정과 민주정의 중간 정도 되는 시스템이다. 영국식은 영국이, 독일식은 당연히 독일이 채택하고 있었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군주가 정치에 참여할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때문에 군주가 주도하거나 동의한 경우는 독일식이 되는 거고, 하부에서 군주권을 빼앗는 식으로 입헌 군주제가 되면 영국식이 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협상 과정에서 성립된 것에 가깝다. 독일 모델은 고위 관료라기보다는 홍종우를 중심으로 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중심으로 나왔다. 황국협회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황권 강화에 방해되는 단체(즉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성격을 띄고 있으며, 조직 건설에 고위 관료들이 대거 관여 되어 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언제든 시위와 집단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보부상들의 지지를 받았다.[14] 독립협회의 실력도 권력을 인수하기엔 부족했다. 독립문 만들겠다는 목표 하나로 시작했던 독립협회가 당시 한양 내 여론을 등에 업고 국내 외국 공사관들의 암묵적 지지를 배경[15]으로 해서 정권 하나를 통으로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강 절충이 되어서, 영국식 입헌 군주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립협회가 주축되었던 중추원(상원) 설립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독립협회 임원들의 거대한 막장 짓으로 시작과 동시에 박살이 난다.
당시 법제상으로 중추원에서는 내각 추천 권한이 없었는데, 바로 1회의 첫 번째 의제로 내각 구성을 들고 나온 것이 문제였다. 내각 구성권을 의회가 가지면 실질적으로 영국식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으로 당시 명성황후 암살 모의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다[16] 귀국한 박영효나 국외 추방된 미국인 서재필(필립 제이슨)[17] 등의 이름이 나온 것도 원인이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더구나 이 둘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 내부의 친미, 친일 쪽 계파들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할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고종이 가장 혐오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을 귀국시켜서 각료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은 고종의 인사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고종은 무기명으로 행해진 투표지를 '''하나하나 필적 대조로 다 잡아내었고,'''[18] 중추원은 바로 해산당한다.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독립협회에도 유례 없이 강하게 나서서 바로 박살내었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매우 급진적이어서 공화주의까지 이야기되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박영효 국왕설은 반대파의 모략이라고 해도, 박영효 대통령 주장은 입헌 군주정과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독립협회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정 언급을 특별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중추원이 성립되자 바로 기존의 자세로 돌아갔고, 강경파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5.1.2. 제국 선포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에 힘을 쏟았다. 무력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외교적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19] 처음엔 제국 선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시기가 러일 전쟁으로 나아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이후부터는 언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기록을 보면 고종은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용이야? 이런거 안 하면 안 될까?'하는 말을 계속하고는 있었다. 이렇게 보면 황제 선포 괜히 했다가 큰일에 휘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러나 그와는 모순되는 사실도 있다. 고종은 환구단을 이미 짓고 있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전에는 사직단이었다. 사대부 중에서는 환구단을 짓고 제국을 선포하게 되면 나라 예산만 축날 뿐이니 하지 말자고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원구단은 세조가 실제로 지었고, 광해군이 하려다 못한것이긴 했다. 이것만으로 고종이 제국이 되는 걸 반겼다는 걸 증명하기엔 조금은 부족하지만 심증은 된다.
고종은 몇 번이고 사양하면서도 비등한 여론에 못 이기는 척하며 급하게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자기들 나라 이름은 외자로 쓰고 인근 민족과 나라 이름은 두 자로 써왔다. 근세에 서양 열강과 접촉하면서부터는 이들 나라의 이름을 굳이 세 글자에 맞추어 미리견, 영길리, 불란서, 노서아 등[20]으로 썼다. 서양 열강의 침탈로 중화주의가 패퇴한 뒤에야 이들 나라 이름을 한 글자[21]로 고쳐 불렀다.
주자학적 화이론(華夷論)의 영향에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제국은 당연히 외자 이름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정한 '한(韓)'은 고종의 말에 따르면 우리 나라를 옛부터 중국 등에서 불렀으며, 삼한을 이었기 때문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삼한은 원삼국시대마한, 진한, 변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삼한의 의미는 삼국시대 후반부에 이르면 의미가 잘못 전해져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람들 스스로가 삼한이자 그 후예라고 여겼다.[22] 삼한이 원래 삼국시대 초반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여러 나라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현대에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알아낸 것으로, 즉 삼국시대 후반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 때까지 삼한이란 단어는 삼국=삼한일통=한국이란 의미이다. 이 부분은 삼한한국의 국명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대(大)'는 대청제국, 대명국 등 당시 중국 왕조들이 관용적으로 쓰던 접사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고종 실록 1897년 10월 11일

앞서 보듯이 정치적으로는 입헌 군주정 운운하던 세력이 전멸한 상황. 결국 대한제국은 헌법격인 대한국 국제를 통해서 전제 군주국으로 태어난다. 이런 전제 군주화는 실제로 미국인과 영국인이었던 당시 법률 고문들이 '''전제 군주정이 아니라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의 막장 상황이긴 했다. 박영효 등의 야심가는 국내와 연락해서 꾸준히 반란 시도를 이었고, 부친인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형제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과 연루되었다. 거기에 자기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고 자기 목숨이 오락가락한 상황을 꾸준히 겪은 고종의 불안감이 더해진 결과였다. 결정타는 앞서 언급한 독립협회의 무리한 입헌군주국화 기도였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언제 러일 전쟁이 터져서 열강에 의해 하던 것이 리셋될지 모르는 시대적 상황에서 배웠다는 인물들은 독립협회 등에 참여하며 밀려나가는 인재풀의 고갈이 더해지는 절망적 상황이 더해지는 전개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고종이 측근이나 믿을 만해 보이는 외국인 고문을 데리고 근대화 개혁을 추진한다. 이른바 광무개혁의 시작이다.
국제 정세나 외교에는 큰 힘을 기울였지만 감각은 부족했던 고종의 노선은 제국 선포 8년 후인 러일전쟁 때 제대로 깨지게 된다.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그를 무시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는 뒤이어 전쟁에 승리한다.

5.2. 근대화 추진



제국은 멋으로 붙여놓은게 아니라는걸 보여주 듯 대한제국 시기에 급속도로 근대화가 추진됐다. 근대식 군대인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고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들을 양성하였으며 정부 기관과 제도를 개편하였다.13도를 골자로 하는 지방행정도 개편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의 구역과 명칭이 이 때 탄생하였다.[23] 외국자본에 각종 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을 주고 세금을 부여하였고 도로망과 전기 등 기간시설을 구축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이전에 비하여 세수를 크게 늘렸다. 광무양전으로 경작지에만 국한되던 토지측량을 임야와 해안 등 모든 국토에 대해 호구조사 지질조사와 병행하여 측량하여 종래의 토지결수를 늘리고 집세를 부과하였다. 서울 시내와 인천 간에는 전철이 다니며 대로변과 시가지가 정리되고 수많은 유럽풍의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다. 전기회사를 설립하여 전신, 전화 통화가 가능해졌고 밤에는 가로등이 시내를 밝혔다.
복식도 크게 변화하여 1895년에 일본이 시행했던 1차 단발령은 실패한 반면 대한제국이 시행한 단발령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행하였고, 중앙정부 관료들만 입던 서양식 복식도 지방관과 대중들에게 확대되었다.[24] 상공업을 장려하여 한국인이 설립한 수많은 기업과 가게가 들어서고 많은 서양 문물이 전파된다. 오늘날의 많은 대학교 등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이 대폭으로 설립되어 근대식 교육이 시행되었고 공문서의 국문화 또는 국한문화와 함께 12개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과 군사력은 위협적이었고 그만큼 변화도 빨랐다. 광무개혁 이전에 방문했던 외국인 기자와 선교사들은 몇년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고 평가할 만큼 급진적이었다.
하지만 재정과 지지세력의 한계,[25] 상업자본의 축적이나 금융자원의 부재 상태에서 외국 자본의 침투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제국 치곤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를 탈피하지 못했고 재정은 황실비자금인 내탕금을 통해 운영되는 비중이 컸다. 고종의 직권으로 정책의 추진력은 높았으나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다.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덕수궁을 점령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1904년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며 자주적 개혁은 끝나고 일본의 개입을 받게된다.

5.3. 순종 즉위와 멸망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한 후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여기에 미합중국대영제국 역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명확하게 인정하게 된다.
고종황제빌헬름 2세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빌헬름 2세는 "카이저 폰 코리아"(한국의 황제께)라고 쓴 답장까지 써주면서 나름대로 관심을 표명했으며, 황제의 내탕금 백만 냥(500억 상당)을 독일 은행에 입금까지 시켜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정세 하에서 독일 황제가 직접적으로 힘을 쓰지는 못하게 되었다. 일만 잘 돌아갔으면,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그 동맹 파트너인 일본을 견제할 좋은 찬스로서 독일이 한국에 적극 개입했을지도 모르기에 나름대로는 고종이 머리를 잘 쓴 거긴 했다. 삼국간섭의 선례도 있다. 하지만 안됐다.
이에 고종은 일본의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만국평화회의특사를 보내게 되지만 이미 눈치를 챈 일본이 손을 써서 특사들이 회의장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옹립했다.
1907년 7월 19일. 순종이 새 황제로 즉위하자 일본은 정미7조약, 기유각서 등의 조약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경찰권 등의 국가 권력을 하나 둘 빼앗아 대한제국은 허울 뿐인 제국이 되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라는 이름의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고, 연호 또한 융희 4년에서 메이지 43년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여 일본 제국식민지가 된다.

5.4. 3.1 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통 계승


한일합방 9년 뒤인 1919년 3월 1일고종 황제의 죽음과 민족자결주의의 확산,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 등 여러 이유를 계기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3.1 운동이 국내외 전역에서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의 적통을 계승함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게 된다.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국호에 대해 의견이 둘로 나뉘였는데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의 모순을 상기시키며 대한이 아닌 조선[26]을 주장했고,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였기 때문에 국호를 대한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헌법을 제정하면서 초대 헌법인 임시 헌장에서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우대하고, 임시 헌법에서는 대한제국의 판도를 계승한다고 밝혀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의 적통을 계승함을 명문화 하였다.
그리고 광복 이후 1948년 7월 1일에 제헌의회는 대한민국을 신생 국가의 정식 국호로 결정했다.#
한일합방 이후에도 대한이란 국명은 남아서 후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는 대한제국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없었을 확률이 높고, 북한과 남한은 지금도 북조선, 남조선 하면서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북한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기도 하고. 그 외 한민당은 고려 공화국을 지지하기도 했다. 기타 자세한건 대한민국/국명 문서 참고.

6. 대한제국의 근대성 논쟁


대한제국은 흔히 한반도 최초의 근대 국가로 평가되며, 근대 국가를 지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진정한 근대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러한 논쟁은 고종에 대한 논쟁,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논쟁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을 펴내면서 대한제국이 명실상부한 근대 국가였다고 주장했다. 황태연 교수는 근대성을 논할 때 종교에서 분리해 세속화된 정치, 신분적으로 차별이 없는 국민, 국민개병제에 바탕을 둔 군대의 정예화, 시장화와 산업화 등을 두루 살피자고 제안했으며, 대한제국은 이를 모두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대한제국이 비록 전제군주제 국가였지만 독일제국, 일본제국 등의 예를 들어 근대성과 전제군주제는 반드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군사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어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은 군사력을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근대성이 오랫동안 대한제국을 끝장낸 일제에 의해 폄하되어왔다고 주장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복권을 주장한다. 황태연 교수 이전에도 이태진 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등은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강하게 옹호한 바 있다. "대한제국이 제정한 헌법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무한한 군권과 전제정치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대한제국을 근대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다면 메이지 시대 일본 역시 헌법에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메이지 시대 일본도 봉건왕조로 보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대한국국제에는 일본헌법과 같은 의회 규정이 없지만, 황제와 독립협회의 추천으로 구성되는 중추원을 탄생시켜 이에 법률 칙령의 폐지, 개정의 권한을 부여해왔고, 갑오개혁 때 없어진 신분제를 되살리지 않으면서 만민이 평등한 근대 국민국가가 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27] 이와 관련해 중앙일보에서는 식민사관에 폄훼된 대한제국을 새롭게 조명하는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대한국국제에서 나타나는 전제군주제의 유지와 왕권에 집착하는 고종의 태도, 광무개혁의 문제점으로 미루어볼 때 대한제국은 제대로 된 근대국가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록 전제군주제가 근대성과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하나 서구의 근대식 전제군주제는 절대왕정에서 계승된 것으로써 그를 지지할 사회적 계층(부르주아)이 있었는데 고종은 그런 사회적 계층 없이 친위세력으로만 정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대한국국제의 전근대성과 후진성은 똑같이 전제군주제적 성격이 강한 청나라의 흠정헌법대강과 일본의 대일본제국 헌법과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또한 근대국민국가가 수립된 뒤의 군사제도는 국민군제, 말하자면 국민개병제인데, 국민적 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는 대외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대내적으로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바랐던 고종의 군대는 그저 왕에게만 충성하는 왕의 사병일 뿐이었다. 게다가 고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만 군대를 사용했지 정작 일본에 대항하려고 군대를 사용하려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김재호 전남대 교수는 아예 대한제국을 고종이 권력을 사유화하려 했던 반동적 시도로 보고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부정한다.

7. 황사



7.1. 대한제국 황실









7.2. 대한제국 계보도




8. 한국통감부




8.1. 역대 통감


'''순서'''
'''이름'''
'''재임 기간'''
'''설명'''
임시
하세가와 요시미치
1906년 2월 1일 ~ 1906년 3월 1일
조선군 사령관 / 이토 부임까지 직무 대리
1
이토 히로부미
1905년 12월 21일[28] ~ 1909년 6월 13일
1대 통감
2
소네 아라스케
1909년 6월 14일 ~ 1910년 5월 29일
2대 통감
3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년 5월 30일 ~ 1910년 9월 30일
3대 통감 / 이어서 초대 총독으로 취임

9. 수교 국가




다음 국가들은 대한제국이 수교한 순서대로 나열되었다. 괄호 안의 날짜는 태양력이다.
이 가운데 일본제국만 1910년 국권 침탈 때까지 수교 상태에 있었으며, 나머지 나라들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모두 단교하였다.
미수교국 중 스페인 왕국(西班牙)과 네덜란드 왕국(荷蘭)은 차기 수교국으로 고려되어 조약 초안 단계까지 진행되었으나 을미사변아관파천 등 혼란한 정세로 무산된것으로 보인다.[29]
이 중 미국, 영국(이탈리아도 관할), 프랑스, 독일(오스트리아도 관할)과 러시아에는 따로 공사관들이 세워졌으나 을사조약으로 인해 모두 폐쇄되었고[30], 다만 주러공사 이범진 혼자만 현지에 남아 개인자격으로 외교를 계속하다가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후인 1911년에 자결하였다.
현대 한국 정부는 일본[31], 중국, 러시아[32]를 제외하고 대한제국(과 조선 왕조)의 외교관계를 현대 대한민국이 계승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가령 2001년에 한국과 벨기에는 한-벨기에 수교 100주년 행사를 치렀는데 대한제국과 벨기에의 수교년도인 1901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관련 기사 이는 현대 한국 정부의 역사관에서 볼 때 1919년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시점이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이고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의 후신이며, 일본의 식민통치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10. 행정 기관 및 기타 관청



일반적으로 내각을 포함한 산하 관청 및 궁내부, 사법 기관 등의 관청들로 칭제건원 후부터 1905년 을사 조약이 있기 이전의 관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11. 군대



11.1. 편제



대한제국군 편제가 잘 정리된 블로그

12. 기타



12.1. 이 시대에 들어온 근대 문물


  • 가로등[33]
  • 수도
  • 야구[34]
  • 농구[35]
  • 육상[36]
  • 군함[37]
  • 만화[38]
  • 활명수
  • 한국은행
  • 노면전차#s-5.1[39]
  • 철도
  • 인력거 / 인력거꾼
  • 자동차(어차)
  • 포경 수술(...)
  • , 엿 장수[40]
  • 유관순 교복
  • 서양 의복
  • 소총
  • 우체국#s-2
  • 사진#s-6
  • 전화#s-3
  • 전신#s-2
  • 전보
  • 종교
  • 짜장면
  • 탕수육#s-3
  • 전구 1887년, 경복궁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 성냥
  • 신문
  • 대한적십자사
  • 동양척식주식회사
  • 서대문형무소
  • 경운궁 양관
  • 프랑스 음식[41]
  • 과학사

12.2. 대한제국의 오악(五嶽)



천자국은 악해독(嶽海瀆)과 같은 중요한 자연물에 깃든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관례에 따라 지정했다.[42] 악은 오악이라 하여 다섯 곳을 꼽았지만 바다와 하천은 각각 사해(四海), 사독(四瀆) 즉 네 곳을 꼽았다.

13. 대한제국의 인물 목록



14. 역사적 사건 목록


대한제국 선포 후에 일어난 사건 목록이다.

15.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같은 왕조이자 직전 국가였던 조선을 소재로 한 창작물은 많다 못해 넘쳐 흐르지만 정작 대한제국을 제대로 다룬 창작물은 거의 없다시피한다. 있어도 조선 말기를 다룬 작품에 곁다리로 나오거나, 단막극, 특집극으로 짧게 나오거나, 실제보다 훨씬 부강한 대체역사 속의 대한제국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 나라가 망해가는 우울하고 슬픈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뤄야하고,[43] 또 제국 선포 직전에는 흥선대원군명성황후의 대립이라는 좋은 소스거리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10년 후반부터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다수 나온다. 특히 2018년 tvN에서 방영된 '미스터 션샤인'은 정말 간만에[44] 대한제국기를 메인으로 다루었고 대박을 터뜨렸다. 대한제국기를 다루어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으니 앞으로 기대해 봐도 좋을 듯.
상기한 이유로 이 항목의 상당수는 조선/창작물구한말/창작물, 개화기/창작물과 겹친다. 단, 항목이 항목이니만큼 조금이라도 '대한제국'이 나온 작품에 한해서만 올리고 개화기를 다뤘어도 대한제국 배경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면 등재하지 말 것.

15.1. 드라마[45]


  •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 독립문
  • 명성황후[46]
  • 미망
  • 미스터 션샤인
  • 제중원
  • 토지
  • 철인왕후[47]

15.1.1. 가상의 대한제국을 다룬 드라마



15.2. 영화


  • YMCA 야구단
  •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 그림자 살인
  • 도마 안중근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 마지막 황후 윤비
  • 요화 배정자
  • 이재수의 난
  • 인플루언스
  •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 [48]

15.3. 기타


  • 대한제국 연대기(소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리첼렌문피아 웹소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대한제국
  • 한성 1905(다음 웹툰) - 대한제국(한성 1905)
  • 회랑식 중정(순정만화)[49]
  • 1904 대한민국(소설)
  • 대통령 각하 만세(리첼렌문피아 웹소설) [50]

[1] ‘Empire of Korea’라고도 한다. 'Korea'는 조선(대한제국)의 전 왕조인 고려에서 유래된 이름이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Empire of Dai Han’을 사용해주길 원했으나 거의 무시당했다.[2] 이화문. 이화는 전주 이씨 왕실/황실의 상징인 오얏나무(자두)꽃을 의미한다.[3] 한성부 제외[4] 제주목.[5] 1892년 ~ 1902년[6] 1902년 ~ 1910년[7] 단막극, 특집극 포함.[8] 1897년 대한제국 건국 해에 짓기 시작하여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해에 완성된 근대식 궁전이다.[9] 엄밀히 말하면 '구한말'이라는 용어 자체는 대한제국 시기를 가리킨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시점 혹은 흥선대원군(명목상으로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1863년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10] 엄연히 조선 시대 당대부터 왕족의 가계를 정리한 전용 족보 선원록과 왕족 밖 전주 이씨 일반 종친의 족보가 구분되었으며, 훗날 흥선대원군 섭정 때 덕흥대원군 계파를 한 집안처럼 묶었지만 이는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으로 전주 이씨 종친회와 본디 관련없다. 해방 이후 전주 이씨 종친회 재단 대동 종약원이 사실상 참칭하고 있는 셈.[11] 이것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삭탈된 자에 대한 신원 행위는 같은 왕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전 왕조의 것은 그 왕조가 망하면서 의미가 없어지는만큼... 물론 정몽주와 같이 특이 케이스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12] 1908년 이완용이 건의하고 순종이 명을 내려 신원된 대표적인 신하로 이징옥, 윤원형, 정인홍, 윤휴, 조태구, 김일경, 정후겸, 김익순 등이 있다. 다들 조선 시대에는 그 언급조차 조심히 해야 했던 인물들.[13] 4대조 추존이 고종의 '조상'들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면, 이성계 추존은 고종이 속한 '왕조'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추존이지만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는 얘기.[14] 흥미로운 건 서울과 중추원(상원)으로 제한을 두려고 한 독립협회에 대항해서, 황국협회는 전국적인 선거를 통한 하원 설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독립협회의 영향력 범위가 아직 서울 일부로 제한적이었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지방민들은 여전히 왕을 섬기는 근왕 의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보다는 황국협회의 세력과 지지도가 훨씬 컸다. 또 단순히 독립협회에 대한 안티테제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황국협회를 주도한 홍종우 역시 프랑스 유학을 거친 근대적 지식인이었다.[15] 고종이 독립협회 해산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한양 내 독립협회 지지층이 아니라, 정동에 있던 외국 공사관들이었다. 독립협회를 해산하는 것이 대외적으로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을까를 고민했던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 서양 공사관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독립협회의 해산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6] 을미사변 이전에 일어난 다른 사건[17] 당시 박영효는 반란 시도를 하다 일본으로 망명한 상황, 서재필은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귀화한 다음 독립문과 관련해서 귀국했다가 다시 정치적으로 사고를 쳐서 추방된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조선인도 아니었다.[18] 특히 박영효를 쓴 사람이 주요 대상이었다. 박영효는 이 시점에서도 조선 내부와의 연결과 반란을 시도하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즉 박영효를 추천한 사람은 외환죄로 취급된 것.[19] 이 문제는 중립화론, 3.1 운동의 독립 청원, 상해임시정부국제연맹을 이용한 외교 독립론 등 끝이 없이 이어진다.[20] 순서대로 아메리카, 잉글랜드, 프랑스, 로시야(=러시아).[21] 아메리카는 미리견의 미(美), 잉글랜드는 영길지의 영(英), 프랑스는 법(法), 독일은 덕(德), 러시아는 아라사의 아(俄).[22] 이는 고요묘, 고진, 고현 등 고구려 사람의 묘지명에서 고구려인 스스로를 삼한 사람으로 지칭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단지 진한 = 신라는 거의 맞는데 마한과 변한 중 어느 쪽이 고구려이고 어느 쪽이 백제인지를 놓고 당시에 논쟁이 있었을 뿐. [23] 아관파천 이후 시기인 건양 원년(1896년 8월) '칙령 36호-지방제도개정'으로 개편하였다.[24] 을미개혁 때의 단발령은 엄청난 반발로 인해 철회하였다가 1900년에 고종이 단발령을 재공포하고 관리들의 양복 착용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관공서에 근무하거나 신학교에 입학하는 조건이 단발이어야 한다는 조칙을 넣어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단발을 하였고 복식이 변화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버티는 사람은 있었다.[25] 당시엔 근왕사상이 충만했던 대다수의 민중들과 보부상은 고종을 지지했지만 일부 독립협회의 인물들은 일본에 대해 너무 순진했고 수뇌부의 여러차례 정변과 고종내외 암살시도 등으로 고종과 척을 졌다. 김홍륙독다사건 처리과정에서 고종에 반대하고 중추원 내각대신으로 앙숙인 박영효, 서재필을 뽑았다. 또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을 근간으로 하는 공화제를 추진하여 당시엔 혁명적인 사상을 추구하자 격노한 고종이 해산시켰다.[26] 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했다.[27] 이태진, 김재호 공저, 고종황제 역사청문회[28] 서울 부임은 1906년 3월 2일[29] 결국 스페인 왕국, 네덜란드 왕국과는 각각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50년 3월 17일, 1961년 4월 4일에 각각 수교하였다.[30] 이 과정에서 최후의 주영공사 이한응이 1905년 자결한다.[31] 식민통치로 인해 식민통치 이전의 조일수교나 한일수교를 통째로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32]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화민국(국민정부)이 맺은 수교관계를 통째로 부정하고 모든 외교관계를 새로 수립했으며, 러시아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질 때 대부분의 나라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인정하지 않은 탓에 소련이 안정되고 나서 새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33] 한성 전기 회사가 1900년에 가로등 3개를 종로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34] 1905년에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야구를 전파하였다. 또한 <황성 YMCA 야구단>을 세웠다.[35] 1907년 질레트가 농구를 소개하면서 농구를 전파하였다.[36] 1896년 최초 근대 운동회인 화류회 개최[37] 광제호, 양무호[38] 1909년 ~ 1910년까지 출간한 대한민보가 한국 만화의 시초이며 일본제국의 기득권층의 탄압에 대한 풍자 만화다.[39] (청량리 ~ 서대문) 운행을 1898년부터 시작하였다.[40] 1909년의 엿장수에 관한 기록에 흰 엿과 검은 엿을 하루 종일 걸어다니면서 팔았다고 한다.[41] 당시 황제국의 예를 다하려고 외국 대신을 접대할 때 프랑스 음식으로 대접했다고 한다. 2017년 10월 11일 음식을 재현했다.#[42] 악해독의 악은 큰 산, 해는 바다, 독은 큰 하천을 말한다.[43] 역설적으로, 그래서 해방과 6.25 전쟁 직후 애국심을 고취시키던 시기에 많이 다뤄지기도 했다.[44] 1984년에 방영한 독립문 역시 이 시대를 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었고 자료도 별로 없어 '미스터 션샤인'이 현재 청장년층들에게는 거의 처음으로 인식된다.[45] 단막극, 특집극 포함.[46] 주 시대배경은 조선 말 개화기. 종반부에야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명성황후의 장례와 흥선대원군의 사망으로 드라마가 끝난다.[47] 역사와는 달리 조선 제 25대 왕인 이원범이 대한제국을 수립하며, 전제군주제가 아닌 입헌군주제 국가를 수립했다는 사실이 철조실록에 나온다. 다만 고종실록의 내용에서 명성황후와 이은, 이강이 언급됨을 보아 김소용의 태중 아이가 아닌 이명복이 역사 그대로 철조 사후 왕위를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48] 이 영화가 다루는 시기는 1919년 ~ 1980년대(일제강점기 ~ 대한민국). 대한제국이 한 번도 안나왔다.[49] 1920년대에 존재하는 대한제국이 배경이다.[50] 상단에 있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와 동일작가가 집필한 소설이다. 전작이 19세기 중반이 배경이라면 해당 작은 20세기 초반 구한말이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