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석

 


성명
이건석(李建奭)
이명
이한경(李漢卿), 이원필(李源弼)
생몰
1851년 11월 25일 ~ 1906년 5월 10일
출생지
경상북도 김산군 봉산면 예지동
사망지
일본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건석은 185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김산군 봉산면 예지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8년 송수만(宋秀晩)[1]·김운락(金雲洛)·심선승(沈宣承)·채광묵·이문화(李文和)·이세진(李世鎭)·김연식(金璉植) 등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이름을 도약소(都約所)라 하고 상소를 올렸다. 그들은 이 상소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적을 복수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국외로 도망한 적을 잡아오지 않는 외부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한규설을 탄핵했다.
1905년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 전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 등과 함께 유약소(儒約所)를 설치하고 이어서 조약의 부당함과 적신들의 처단을 조직적으로 상소하기 위하여 13도소청(十三道疏廳)을 구성하였다. 이후 유생들과 함께 을사조약을 폐기하고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연명상소를 올렸다가 일본군 파견사령부에 체포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끌려가 옥중에서 갖은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고, 수차례 피를 토하다 1906년 5월 10일 옥사했다. 그는 버선 속에 유서를 감춰서 자신의 시신이 아들 이응수에게 전해질 때 그 유서를 전하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사람이 그 누가 죽지 않겠는가마는 죽고자 하는 곳에서 죽기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죽어도 눈을 차마 감지 못할 일이다. 아아 응수(應洙)야! 너는 이 애비의 죽음을 애통해 하지 말고, 네 애비가 매국노를 주살(誅殺)하지 못하고 죽음을 가슴아프게 생각하며, 네 애비가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애통해 해라. 지금 피를 토하고 죽음에 있어 몇자로 너와의 이별에 대하고자 한다. 내가 죽은 후에 너는 슬퍼함으로써 효도를 하지 말 것이며,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지 말고, 마땅히 내 뜻을 이어야만이 내 자식이 됨을 명심하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건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송수만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