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광묵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채광묵은 1850년 7월 15일 충청도 홍주 매평리에서 부친 채동식(蔡東軾)과 모친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화남(華南)선생으로 불리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채광묵은 어려서 부친의 훈육을 받아 뜻이 강개하고 절개가 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어김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과거를 보지 않고 효와 의의 실천에 힘썼다. 그러던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전국 각지의 유림이 들고 일어났다. 이때 채광묵은 안창식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그는 1896년 1월 12일 안창식 등과 함께 청양의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했다. 여기에 지역 유생들이 참석해 의병을 결의하고 180명의 민병을 모았다.
다음날, 채광묵은 안병찬과 함께 이들을 인솔하여 홍주성에 들어갔다. 여기에 김복한 등 전직 고관들이 합세했다. 이들은 안병찬, 이봉학 등과 비밀히 연락을 취하여 의병 봉기를 준비하면서, 관찰사 이승우(李勝宇)를 만나 의리정신을 들어 여러 차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이승우가 거부하자, 의병들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관 강호선 등을 체포하고 창의의 깃발을 조양문 위에 걸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관찰사 이승우가 의병에 참여했다. 1월 16일, 채광목 등은 홍주 관아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면에 통문을 띄웠다. 채광묵은 이때 김복한의 지시에 따라 이창서와 함께 남면 소모관의 직을 맡았다.
청양군수 정인희는 창의소를 별도로 청양읍내에 설치하고 홍주부에 연락을 취해 포군 5백 명과 화포 1천 자루를 관찰사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만인 1월 17일, 관찰사 이승우가 서리들의 유혹에 넘어가 의병 지휘부 인사들을 차례로 구속했다. 이에 따라 김복한, 이설, 홍건, 안병찬, 송병직, 이상린 등은 한성재판소로 이송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채광목은 당시 외지에 나가 있어 화를 면했다. 그는 홍주의진이 와해된 후 1898년 송수만(宋秀晩)[1] ·김운락(金雲洛)·심의승(沈宜承)·이건석·이문화(李文和)·이세진(李世鎭)·김연식(金璉植) 등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이름을 도약소(都約所)라 하고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적을 복수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국외로 도망한 적을 잡아오지 않는 외부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한규설을 탄핵했다.
채광묵 등의 탄핵소를 받은 한규설은 “지난번 채광묵의 상소가 올라오자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라면서 사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은 비답을 내려 사임하지 말라고 하였다. 반면 이완용은 “그가 무고(誣告)한 것에 대해서는 반좌율(反坐律)이 있겠지만, 신은 통분하고 억울함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채광묵 등이 자신을 무고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고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청했다. 1901년 8월 조정은 대흥군수를 통해 대흥의 광시에 있던 채광묵에게 내부주사(內部主事)의 교지를 내려 보냈다. 그러나 그는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어찌 먼저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며 거절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뜻을 담아 시를 썼다.
또한 그는 1904년 6월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가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한 일에 대해 김기우(金箕祐), 이기하(李起夏) 등과 이를 성토하는 통문을 작성했다. 그들은 철도, 어업 등의 이익이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고 일본인이 한국의 산림천택과 진황지의 개척권을 청구한 일에 대해 반발하며, 장차 이를 허가한다면 한국인들이 어디에 몸을 의탁해 살 것이냐고 비판했다. 이들은 통문을 황성신문에 맡겼다. 이후 채광묵과 김기우, 허위, 김연식(金璉植), 이상천(李相天) 등은 일본 공사를 만나 일본인의 요구가 무리함을 질책했다. 그러나 일본 공사는 순사와 헌병을 시켜 이들 중 김기우를 체포해 경무청에 넘겼다. 주한 대리공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김기우 등이 일본을 멸시하고 근거 없는 말로 헐뜯었다며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이들을 엄벌할 것을 요구했다.대한제국의 나라 광시 산속에 숨어
빛을 감추고 몸을 아끼나 이름이 없음이여
원수와 아직도 같은 하늘아래 있으니 살아있음이 부끄럽구나
의로운 길을 찾았으니 죽음 역시 영예롭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채광묵은 이듬해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을 다시 일으키고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했다. 민종식은 땅을 팔아 5만냥을 군자금으로 제공했다. 민종식과 의병들은 1906년 3월 15일 광시장터(예산군 광시면)에서 천제를 지내고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의병대는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을 공격했다. 관군의 저항에 의병대는 진로를 화성으로 바꿔 청양의 합천 일대에 진을 쳤다. 3월 17일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은 의병대를 공격해 안병찬과 박창로 등 주요 인사들을 체포했다. 민종식은 탈출해 이용규 등과 5월 9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치동(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이들은 홍산, 서천, 남포 등을 점령하고 광천을 거쳐 5월 19일 홍성 시내에 들어왔다.
홍성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5월 20일 홍주성을 점령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한 후 고종에게 글을 올려 을사오적과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물어 죽이고, 의병의 목적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또한 민종식은 채광묵과 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를 참모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당시 채광묵은 중병에 걸려 있었기에, 아들 채규대가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국난을 당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은 곧 내가 평소에 가졌던 뜻이거늘 어찌 집안에서만 있겠느냐"라며 나섰고, 채규대 역시 그런 아버지와 함께 죽겠다며 홍주성으로 향했다. 이후 이들은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대항해 맞서 싸웠지만 1906년 5월 30일 일본군 보병 제60연대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전주 수비대 1개 소대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홍주성이 끝내 함락되었다.
채광묵과 아들 채규대는 성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막다 전사했다. 그 전에 어떤 이가 채광묵에게 대피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대의를 부르짖었는데 어찌 차마 도망가 살 수 있겠느냐"라며 아들과 함께 죽었다. 채광묵의 부인이 후일 남편과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했다. 유족들은 남아 있는 의복을 수습해 청양의 신왕리 압수동(鴨水洞) 산록에 장사지냈다. 그의 족조 황석(黃石)과 사돈인 유상준(兪尙濬)은 부자가 함께 죽음에 정묵(楨默)의 아들인 규현(奎現, 1905 ~ 1979)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였다. 채광묵의 전사 소식을 들은 김복한은 그의 순국을 기렸다.
안병찬도 다음과 같이 애통해 했다.“저 학식도 없고 의리도 모르는 놈들은 참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평상시에 의리를 공부하여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도 각자 도망가 살려고 한다. 그들이 채광묵의 의로운 죽음을 보고서 혹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채광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와 함께 전사한 아들 채규대에게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내가 형(채광묵)과 더불어 살고 죽는 마당에 의(義)만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먼저 목숨을 다하여 순의(殉義)하려는 본심을 얻었는데, 유독 나만은 완둔(頑鈍)하여 함께 죽기로 약속한 형만을 잃었습니다. 형의 아들 규대가 형을 따라 죽었으니, 세상에서는 아버지는 충(忠)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 죽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