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심
1. 소개
남조의 제7대 군주. 시호는 효항왕(孝恆王). 각라봉의 손자이자, 도혜왕(悼惠王)으로 추존된 봉가이(鳳伽異)의 아들이었다.異牟尋有智數, 善撫衆, 略知書.
이모심은 지모와 계략이 있고 무리를 위무하는데 능하였으며, 대략이나마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신당서』 「남만전」 상
2. 생애
779년, 할아버지 각라봉(閣羅鳳)이 죽자 뒤를 이어 손자 이모심이 즉위했다. 이모심이 즉위한지 얼마 안돼서 토번의 첸포 치송데첸은 당을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그 해 10월, 이모심은 토번의 압력에 의해 군사를 일으켜 검남도 일대를 공격했다. 토번은 자칭 20만의 군사라고 일컬었다. 당시 당은 당대종의 장례를 치루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당덕종은 급히 각 지역의 군사를 검남으로 이동시켜 구원하도록 했다. 당의 공격에 버티지 못한 토번-남조 연합군은 결국 패배하였다. (더 자세한 사항은 당-남조 전쟁 참고.) 전쟁 이후 이모심은 토번으로부터 일동왕(日東王)에 책봉되었으나, 토번은 남조에 전쟁의 책임을 물어 과거 형제지국(兄弟之國)의 관계에서 군신관계(君臣關係)로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이모심은 토번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토번이 위압적인 태도로 나오자 이후 당나라와 더욱 친밀함을 쌓았다. 더불어 이모심은 실추한 왕권과 보수적인 신하들의 기반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성을 태화성에서 양저미성으로 천도하였다.
788년, 이모심은 청평관(淸平官) 정회(鄭回)[1] 와 당으로의 귀부 문제를 놓고 이야기하다가 결국 내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토번이 낌새를 느꼈는지 불모를 요구했다. 이모심은 무시하고, 3명의 사자를 각각 다른 길로 가도록 하여 성도로 파견했다. 검남서천절도사 위고(韋皋)는 이모심의 백서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또한, 이모심은 황금과 단사를 보내어 당의 속국이 되기를 맹세하였다.“이모심은 대대로 당(唐)의 신하이었는데, 전에 장건타(張虔陀)로 인하여 모욕을 앙갚음하는데 뜻을 두게 되었습니다. 사자(使者)를 통하여서도 깨끗하게 해결하지 못하게 되자, 부족 전체가 당황하고 궁지에 몰려 딴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 선우중통(鮮于仲通)이 매년 병사를 일으킨 까닭에 스스로 개선하고자 하여도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조(代祖)가 돌아가시자 토번이 나를 속이고 약속을 어겼습니다. 신천도독(神川都督) 논눌설(論訥舌)이 낭인 이라식(利羅式)으로 하여금 부족의 백성들을 현혹하여 무시로 병사를 일으킨 것이 지금 12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참은 것입니다. 하늘이 토번의 조정에 재난을 내려 내부에 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태자와 형제는 모두 흩어져 숨어버리고 가까운 신하는 방자하고 썩었으니, 모두 상결찬(尙結贊)이 음밀한 꾀로서, 도륙을 행한 까닭에 치세의 공신은 하나 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눌설 등은 모두 책봉왕인데, 소국이 주청하여도 위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참은 것입니다. 또 눌설을 보내 도성으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핍박하니 읍에 대한 폐단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라식은 많은 상을 사사로이 취하니 부락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참은 것입니다. 또 이라식은 사자에게 욕하여 말하기를 ‘너희를 멸할 장수가 내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너희의 재산은 마땅히 내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입니다.
(중략)
증조(曾祖)가 선제(先帝)로부터 총애를 입어 후사가 모두 왕의 작위를 세습하게 되었으며, 사람마다 예악을 알게 되고, 당의 풍속을 기본으로 교화되었습니다. 토번은 모든이의 마음을 속여 악을 품고 서로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이모심은 진실로 일신(日新)하기를 원하여 천자에게 정성을 다하여 귀의합니다. 청하건대 검남(黔南), 서산(西山), 경원(涇原)등의 주(州)와 안서도호(安西都護)가 지키고 있는 곳에 군대를 증파한 뒤에 군대를 일으켜 사방에서 임하게 하시고, 회골(回鶻) 여러 국가에 위탁하여 그곳에서 (토번을) 침략하게 하시면,토번으로 하여금 힘을 분산하게 하여 그 강함을 유지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서남지역은 천자의 군대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당서』 「남만전」 상
794년, 이모심의 정책에 따라 남조는 친토번에서 친당으로 바뀌었고, 당과 함께 점창산(點蒼山) 신사(神祠)에서 우호적인 맹약을 맺었다. 비공식적으로 체결했기 때문에 토번은 전혀 알지 못했다. 한편 서역에서 토번과 위구르 제국의 전투가 지속되자 토번은 손실을 감축하기 위해 남조에 지원군을 요구했다. 남조는 토번에 군사를 보내겠다고 전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함께 연합하여 토번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토번군이 대패하고 당-남조 연합군은 토번의 속국왕 5명을 사로잡게 된다. 그리고 토번과 남조가 통하는 철교(鐵橋)를 끊었다. 당 조정에서는 남조의 공을 높게 사고 남조의 명호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사품을 후하게 내렸다. 7월에는 이모심에게 은(銀)을 상감한 황금인(黃金印)을 하사했는데 그 인장에는 ‘정원책남조인(貞元冊南詔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2] 당은 이모심을 남조왕(南詔王)으로 책봉하였고, 궁에서 책봉의례를 행하였다. 이때부터 남조는 대내외적인 왕권 강화와 오랫동안의 리즈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매번 당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당은 남조, 대식, 위구르의 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토번에 대항할 수 있게 된다. 이후에도 이모심은 토번의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곤명성(昆明城)[3] 을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고, 시만(施蠻), 순만(順蠻)을 격파하였으며, 기존에 토번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망만(茫蠻), 농동만(弄棟蠻), 그리고 한상만(漢裳蠻)을 모두 장악하여 남조의 최고 전성기를 이룩했다.
799년, 이모심은 토번을 재차 공격하자는 모의를 위고에게 보냈으나, 당의 군사가 경서와 삭방에 있고, 검남은 역병이 들끓어서 군사를 모집하는게 어렵다고 말하였다. 끝내 좌절되는 듯 했으나, 토번이 군사를 일으켜 전쟁은 또 다시 일어났다. 토번은 군사적 요충지인 수주(雟州)를 포위공격하기 위해 곤명에 8만의 군사를 주둔시켰고, 양약라(攘鄀羅)를 도통으로 삼았다. 이 소식을 들은 당과 남조는 서로 알렸고, 3만 8천여명의 군사를 수주로 이동시켰다. 이때 급한 상황에는 남조가 증원군과 보급을 파병하기로 약속했다. 남조는 전쟁에 임하기 앞서 토번에 귀부할 것 같은 만족 부락을 공격하여 후환을 제거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당군과 토번군의 첫교전이 발발했을 때 그 군대는 당에 항복하기로 한 군대였고, 마정덕(馬定德), 서공절도감군(西貢節度監軍) 야다수전(野多輸煎) 등 토번의 장수들이 줄줄이 당군에 투항했다. 남조 방면으로 쳐들어 온 토번의 한 군대는 남조가 철교에 독을 풀면서 익사했다. 이처럼 토번군은 저번과는 달리 분명 쇠약했음이 틀림없었다. 결국 토번군은 폭설로 철군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토번과 당-남조는 매번 서로 국경을 침범하며 국지전을 펼쳤다.
808년, 28년간 재위한 이모심은 붕어하고, 아들 심각권(尋閤勸)이 남조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당 조정에서는 태상경 무소의(武少儀)를 보내 장례를 조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