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진

 

李文眞
고구려태학박사.
600년 영양왕의 명으로 국초부터 전해지는 유기 100권을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했다. 6세기 후반 평양을 기반으로 부상한 귀족으로 보기도 한다. 이씨라서 그런지 중국계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문진을 시조로 하는 이씨는 익산 이씨라고 한다. 익산이씨 족보에는 이문진이 577년에 출생하여 24세에 신집을 편찬하고 642년에 죽었으며, 영양왕 때 태학박사, 문부전서, 오경박사로 공신후가 되고, 백제 공주와 혼인하여 백제로부터 익주를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고 전하지만 족보 기록이 대부분 그렇듯 다른 사서들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다만 만약 642년에 죽은 게 사실이라면 이 해에 연개소문의 정변이 있었고 이 당시 영류왕 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대신들이 많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이 정변 와중에 죽었을 수도 있다.
북한에는 이 사람의 묘가 전한다. 실제로 이 사람의 묘라고 보기는 힘들다. 남한에 전해지는 광개토왕릉만큼이나 근거가 없다.
'적패'라는 소설에서는 귀족들의 주요 관직 독점에 불만이 가득한 소년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