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집

 


'''신집(新集)'''
1. 소개
2. 삼국사기와의 관계


1. 소개


재위 11년(기원후 600년), 임금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옛 역사를 요약하여 다섯 권의 『신집(新集)』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1백 권의 책을 쓰고 이것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

고구려역사서.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기> '''100권'''을 집약하여 600년(영양왕11년) 태학박사 이문진이 '''5권'''으로 편찬하였다.[1] 유기는 종래 구전되어 오던 신화, 전설 등을 고구려 건국 초기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구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역사인식이 높아지게 되어 건국 이후의 역사를 다시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에 신집을 편찬한 듯하다.
<유기>와 <신집> 모두 현재 전하지 않는다. 가능성이지만 만일 이 두 권 중 한 권, 혹은 그 일부라도 발견된다면 '''당장 고대사 관련 문구 상당수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아래에 나올 설과 같이 삼국사기 13~17권이 신집 복붙 수준이라면 진짜 신집을 발견해도 의외로 건질 것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2. 삼국사기와의 관계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13~17권에 해당하는 고구려본기 다섯 권[2]이 신집을 상당히 참고한 것으로 본다. 실제로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명성왕-미천왕 사이의 기록은 등장하는 인명이나 인물들의 발언이 세세하게 언급되며, 고구려 내부사정도 잘 나온다. 이 파트 기록들의 전개 방식도 단순한 사실의 나열 수준이 아니라 각자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들이 많다. 반면 동시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의 경우 분량이 고구려본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반면 그 후대인 고국원왕대부터 기록이 급감[3]하기 시작하며, 중국 측 역사서에서 인용된 기록의 비중이 높아진다. 그나마 있는 기록도 어떤 일이 언제 있었다는 내용의 간략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광개토대왕대[4]까지는 당대의 사료도 남았고 삼국사기 자체기록도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지만, 장수왕대부터는 말 그대로 조공기록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할 정도로 내정기록이 줄어든다. 즉, 전자와 후자는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고려시대 당시 참고한 옛 기록 원전이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양왕 본기의 고구려-수 전쟁의 기록이나 보장왕 본기의 고구려-당 전쟁의 기록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중국사서를 옮겨온 수준이 되버린다. 연개소문은 아예 중국 사서의 피휘를 미처 감안하지 못하고[5] 천개소문으로 강제개명되는 수준(...)이며 전투와 관련된 기록들도 대부분 중국측 규모나 피해는 상세하나 고구려는 정확한 규모가 명시되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그 이유로 신집의 기록이 고구려본기에 반영된 점을 들고 있는데, 이는 신집의 원사료인 유기가 소수림왕대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신집이 5권이라는 것과 고구려본기 초반 5권이 동명왕-미천왕 시기의 내용을 실었다는 사실로도 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만 동명성왕광개토대왕 사이의 세손차이[6]같이 오류가 있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반영된 것은 아닌듯 하다.

[1] 100권이 5권이 됐다는 것에 의문을 품기 마련인데, 유기는 목간, 즉 간독이고 신집은 종이책이 아니겠느냐라는 설이 있다. 게다가 '유기' 라는 것이 역사책이 아니라 한자 그대로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남겨진 기록'의 모음을 의미한다면, 이것저것 가지치기를 하는 과정에서 내용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2] 참고로 고구려본기는 총 10권이며 이중 보장왕 본기가 2권 분량이다.[3] 정확히는 미천왕 원년 10월부터 기록이 급감한다.[4] 물론 삼국사기 편찬 당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가 잊힌 상태라 신라를 구원한 사실 등이 빠지긴 했다.[5] 당나라 시대 사서들은 자기들 황제 이연의 이름 연자를 피휘하다보니 천개소문으로 적었는데 당나라도 멸망하고 이 피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진 고려시대의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옛날 당나라 사서를 참고하다가 이게 피휘로 바꿔적은것인 줄 모르고 삼국사기에도 그냥 천개소문이라고 쓴 것이다.[6]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13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17세손을 직계가 아닌 (3대 대주류왕으로부터의) 왕계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