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연개소문
淵蓋蘇文
'''
경극 독목관 대본 표지.
설인귀(좌)와 연개소문(우)

<colbgcolor=black> '''관직'''
대대로(大對盧)
막리지(莫離支)
'''태대대로(太大對盧)'''[1]
'''국적'''
[image] 고구려
'''부족'''
동부(東部)
'''주군'''
영류왕보장왕
'''성씨'''
천(泉)[2] / 연(淵)
'''이름'''
개소문(蓋蘇文) / 개금(蓋金)
/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아버지'''
연태조(淵太祚)
'''생몰년'''
594년~ 666년(?)
1. 개요
2. 연개소문의 본명에 관한 추론
3. 생애
3.1. 출신과 계보
3.1.1. 출생
3.1.2. 10월의 유혈 쿠데타
3.1.3.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
3.2. 정권 장악
3.3. 김춘추와의 회담
3.3.1. 회담의 결렬
3.3.2. 김춘추를 풀어주다
3.3.3. 회담 결렬의 원인
3.4. 당나라와의 대립
3.4.1. 당태종의 분노
3.4.2. 도교 우대와 불교 탄압
3.4.3. 신라 공격
3.5. 죽음과 사후
4. 평가
4.1. 과거의 평가
4.2. 현대의 평가
4.3. 고구려 멸망의 책임
5. 가족관계
6. 그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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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개소문은

(一) 고구려의 9백 년 이래의 전통이었던 호족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二)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三) 그리하여 영류태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西國)의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하였으니,

그 선악(善惡)과 현우(賢愚)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

삼국시대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 말기를 대표하는 권신. 아버지는 동부대인 연태조이며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지위를 계승받았다.
이후에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으며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후 연개소문이 신라, 당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임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 당나라 사이에는 수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연개소문 생전에는 방어에 성공했지만 사후 권력을 물려준 세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고구려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임금을 시해하고 전횡을 일삼은 면이 있지만 당시 세계최강국가라 할 수 있는 당나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내고 오히려 당태종조차 어쩔 수 없게 만들었던 정치가이자 명장이었으며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유독 심혈을 기울여 복원하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일만큼 우리 역사에서 대단한 존재였던 것은 분명하다.

2. 연개소문의 본명에 관한 추론


'''淵蓋蘇文'''
'''연개소문'''
우선 연개소문의 성이 연(淵)씨라고 언급한 사료는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 삼국사기》의 천개소문 열전에서는 연개소문의 이름을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쇠를 뜻하는 걸로 추정되는 '소문'을 '金' 자로 가차하여 훈독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의하면 현대인의 인명에 가까우며 삼국시대에 이미 정착되기 시작한 한자식 이름으로는 연개금(淵蓋金)이 된다.[3] 일본 기록인 등씨가전에도 연개소문이 '개금'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사신에게서 연개소문의 정변에 대해 직접 들은 걸 기록한 파트가 있는데 여기서는 고구려 사신이 말한 걸 그대로 음차하여 연개소문을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라고 적어놨다. 여기서 이리(伊梨)는 연(淵)에, 카스미(柯須彌)는 개소문(蓋蘇文)에 해당한다.
  • 대의 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 《천남생묘지명》 에 따르면 연씨 가문은 그 성씨가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도 이를 그대로 복붙했다. 천개소문이 당 측의 피휘고 사실은 연씨라는 건 김부식이 살던 고려 중기에서 500년도 넘게 지나 조선 후기나 가야 밝혀낸 거라서 그걸 못 알아챈 게 김부식 뿐만은 아니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연태조갓 쉰(50) 살 때 얻은 아이라고 해서 아이 이름을 '갓쉰'으로 지었고 그것을 고구려 이두문으로 표기한 것이 개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갓쉰둥전'의 갓쉰둥[4]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진 못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성씨가 연씨라는 설은 18세기에 이르러 국학안정복이 자신의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처음으로 주창했던 것이다. 안정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구려의 대신인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록과 '통고(通攷)와 신당서에 정토는 소문(개소문)의 아우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사실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였으나 이름이 당고조 이연(李淵)의 휘와 겹쳐서 당나라 사람들이 연개소문의 성을 피휘하여 적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5] 이는 한국 사학계에 거의 정설로 인정받아 오늘날에는 개소문의 성을 연씨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개소문열전에서 이를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인 것 때문에 아직도 중국일본의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천개소문이라 표기하던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런 추세가 어느 정도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임병준 씨의 경북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고구려 말의 차자표기 연구'에 따르면 淵(연)은 훈독으로 읽는 게 아니라 泉(천)이 가지고 있는 뜻인 '샘'을 음차해놓은 것이라고 한다.[6] 이 논문에서는 성인 淵(연)의 원래 발음[7]에 대해서만 분석했다. 이름의 경우, 蓋蘇文과 柯須彌의 발음이 일치하지 않아서 추정에 난점이 있다. 정확히는 蓋와 柯는 '가'로 읽혔다는 게 거의 확실한데 뒤의 두 글자는 ㅅ, ㅁ이라는 자음은 확실하지만 모음이 불확실하다.[8]
종합해 보면 '''연개소문(=천개소문)=연개금=이리카스미'''가 되는데, 우선 '연못 연(淵)'과 '샘 천(泉)'은 각각 뜻이 통하고 이것이 일본에서 음차한 '이리'라는 음가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고구려 고유어로 '연못'을 뜻하는 '이리' 비슷한 말이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泉井郡一云於乙買”에서 ‘泉井’은 새김을 이용한 표기이고, ‘於乙買’는 음을 이용한 표기라고 보면, 고구려어의 ‘어을(於乙)’과 ‘매(買)’가 각각 샘[泉]과 우물[井]을 의미한 단어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연못 연(淵)'과 '샘 천(泉)'을 고구려어로 '이리'라고 발음했으며, '샘 천(泉)'이 '어을(於乙)이라고도 읽힌 것에서 '이리'와 '어을'이 같은 단어였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소문'과 '카스미'는 음이 통하고 이것이 뒷글자를 뜻으로 읽은 '개금'에 해당됨을 보아, '쇠'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유어 '소문(스미)'이 있었음을 추측 가능하다.[9] 이 경우는 현대어 '쇠'와도 대충 비슷해 보이긴 한다.[10] 견훤의 아들 중 '수미강(須彌康)'이라는 인물이 기록에 남아 있는데, 이 사람을 금강(金剛)으로 보기도 한다. '수미(須彌)'를 '금(金)'의 훈독으로 적었다고 보는 설이다.
성 외에 개소문이라는 이름의 경우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소문'이 신라의 시중에 해당하는 벼슬 이름이고 성이 개 씨, 이름은 금으로 본명은 '개금'이라고 쓰고 있다. 즉 '개소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유황숙이나 김과장 같이 성+지위라는 것. 다만 삼국유사가 1차 사료나 체계적인 역사서는 아니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단 연개소문 가문이 연씨(피휘해 천씨) 성을 취했다는 당시 기록은 많다.

3. 생애



3.1. 출신과 계보



3.1.1. 출생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천(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이미 신(神)에 의탁하여 퇴지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데에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봉(鳳)이 단혈(丹穴)에서 나서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학(鶴)이 청전(靑田)에서 나와 천년(千年)동안 신령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상(空桑)이 의(懿)를 낳고 허죽(虛竹)이 파(波)를 따르듯이 아울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금구(金樞)를 가리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에 이르렀던 것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자(資)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천남생 묘지명 中'''

삼국사기구당서, 신당서의 기록에는 고구려의 동부대인(혹은 서부대인)이었던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나온다. 서부동부 중 정확히 어느 쪽 출신인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서 알기 힘들지만 동부대인이었다는 기록이 더 많기 때문에 동부 출신이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연개소문의 출생연도에 관한 설은 590년설, 594년설, 595년설, 601년설, 603년설, 614년설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 614년설은 의심스러운데 출처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인용한 <고려고기>란 책으로 내용부터가 오류가 많은 책이다. 그 책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성을 개씨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하였다. 지위가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

'''삼국유사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암자를 옮기다. 中'''

당장 연개소문의 성씨부터 제대로 써놓지 않았고 개소문과 개금이 같은 말이란 것도 모르고 소문을 벼슬 이름으로 착각해 오기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까지 범해놓았다. 내용 전반적으로도 친불교 및 반도교적 색채가 짙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부터가 승려였으므로 이런 기록에 다소 편향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양왕(영류왕) 때에 연개소문이 도교를 받아들이자고 간언을 올렸다고 하는데 영류왕이 도교를 받아들인 건 624년의 일이다. 만약 연개소문이 614년생이라면 11세에 불과했을 시기다. 그런데 문제의 <고려고기>란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양제가 죽은 뒤에 양명이 고구려에서 태어났는데 15세가 되자 총명하고도 신기한 무용이 있었다. 당시에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신하로 삼았다.'''

'''삼국유사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암자를 옮기다. 中'''

614년생으로 쳤을 때 11세의 어린 소년에 불과한 연개소문이었으니 이런 일이 있었을 수는 없다. 이건 일찍이 삼국유사의 저자 본인인 일연조차 의문을 표한 기록이다. 614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남생이 634년생이라서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연개소문이 늦은 나이에 장가를 갔을 수도 있고 결혼을 빨리 했어도 늦둥이 자식을 봤을 여지도 있다. 진짜 연개소문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갓쉰동전>에서는 아버지 연태조가 연개소문을 50에야 낳았다고 하여 갓쉰동이라 하지 않았던가? 혹은 연남생 위에 누나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보통 공주같은 지체 높은 신분의 여성조차 사서에 따로 잘 기록을 해놓지 않는 판국에 왕의 자식도 아닌 연남생의 누나들이 없었다고 부정할 수도 없다. 연개소문과 연남생의 나이 차에만 집착해서 무조건 연개소문이 614년생이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천리장성을 축조할 것을 간언했다고 하는데 천리장성은 일반적으로 631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게 천리장성 축조를 간언했고 영류왕이 받아들였다면 이미 당시 연개소문은 조정 내 중신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뜻일텐데 614년생이라면 연개소문은 겨우 18세에 불과하다. 아무리 가문을 잘 타고 났다도 하더라도 겨우 18세에 불과한 연개소문이 국가 대사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게 봐도 610년대에 태어났다는 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조선상고사는 595년설, 환단고기는 603년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전자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후자는 현전하지 않는 <조대기>라는 사서를 인용해 쓰고 있다. 두 설에 대해서는 추후 검증이 필요하지만 614년설보다는 좀 더 그럴 듯하다. 단지 연개소문과 연남생의 나이 차이만 가지고 614년설이 옳다고 하기에는 기록에 모순점이 많다. 보다 정확한 것은 연개소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야 분명해지겠지만 최소한 610년대 출생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직위를 계승한 연개소문은 642년 1월 영류왕으로부터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아 고구려 북부의 국경 지대로 파견나가게 되었다. 이는 6세기 이래 고구려의 귀족 연립 체제를 위협해오는 연씨 가문의 힘과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류왕과 관료들이 의도적으로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연개소문은 동부대인이 된 이후에도 흉포하고 잔악무도한 행동을 계속 하였다고 관련 기록에 전하며 구당서에는 연개소문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권을 범하려 했다고도 적혀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 내에서 강성한 세력으로 올라선 연씨 가문, 영류왕, 귀족들 간의 정치 투쟁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영류왕까지 포함된 연개소문 제거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연씨 가문의 힘은 고구려의 왕권마저도 위협할 정도로 비대하게 성장해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암살 모의도 이미 조정 깊숙히 세력을 심어두었던 연개소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하는 가운데 연개소문은 대담하게도 역습을 꾀한다.

3.1.2. 10월의 유혈 쿠데타


冬十月 蓋蘇文 弑王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임진일, 고려의 사신이 나니와진(難波津)[11]

에 다다랐다.

정미일, 여러 대부들을 나니와부(難波郡)에 보내어 고려국에서 바치는 금,은 등과 아울러 물건을 살피게 하였다. 사신이 물건을 바치고는 “지난해 6월 아우 왕자[12]

가 죽고 가을 9월에 '''대신(大臣)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가 대왕이리코세시(伊梨渠世事) 등 180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아우 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동성(同姓)인 츠스루코무루(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4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性忍暴. 父爲東部 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殘凶不道, 諸大臣與建武議誅之, 蓋蘇文覺, 悉召諸部, 紿云大閱兵, 列饌具請大臣臨視, 賓至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殺建武, 殘其尸投諸溝. 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 自爲莫離支, 專國, 猶唐兵部尙書·中書令職云.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이며, 자신이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비인 동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당연히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직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병(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나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신당서》 권 제220 동이열전 제145'''

642년 10월, 왕과 대신들이 한통속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대담하게도 역으로 정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다. 연개소문은 성 남쪽[13]에 여러 부의 군사들을 전부 불러 모아 놓고는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린 후에 대신들을 불러 들여서 함께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석하기로 했던 대신들은 사열식 도중 들어닥친 연개소문 밑의 동부 군사들에 의해 무참히 목숨을 잃었는데, 이때 살해당한 인원들이 임금과 대신들을 포함하여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대신들을 어육으로 만들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구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사열식을 하던 중에 갑자기 동부의 군사를 휘몰아쳐 대신들을 죽였다고 나오나 신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군사들을 숨겨두었다가 대신들이 도착하는 족족 하나씩 죽여버렸다고 적혀 있다.
의문점이 있다면 왜 하필이면, 고위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적인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사열하는 행사에 어떠한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에서 그랬는지는 이해하기 꽤 힘든 부분이다. 이는 아무래도 그 행사가 보통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참석해야 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행사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의 지위를 내놓는 이임식 행사나, 혹은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위해 변방으로 떠나기 전에 베푼 송별식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인다.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 대신들을 없애버린 연개소문은 곧바로 궁궐로 쳐들어갔다. 다른 4부의 군사들이 저지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궁성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궁궐을 향해 달려가면서 일부러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 나와 있다. 이는 수도 경비병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경비병들이 불을 끄기 위해 창고로 달려가는 동안 연개소문의 사병들은 큰 저항없이 왕이 거처하는 궁전에 다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위해 아주 치밀하고 정교한 계략을 짜놓았고, 이를 신속히 행동으로 옮겼다.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난입한 연개소문은 마침내 영류왕을 찾아내고는 그를 시해해버린다. 신당서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한 후에 그 시체를 '''토막내서''' 시궁창에 내팽겨쳐버렸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스산하게 기록되어 있다. 642년 9월에 대신 이리카스미(연개소문)가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대왕을 시해하고 이리코세시 등을 비롯한 '''180여 명'''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이어서 왕의 어린 조카(고보장)를 왕으로 세우고 동성(同姓)인 츠스루코무루를 대신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동성(同姓)이라는 기록이 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직관적으로 봐도 츠스루코무루보다 이리코세시 쪽이 연개소문과 동성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은 아예 그냥 오기라 하거나 혹은 동성(同姓)은 같은 부(部) 소속을 의미하기에 츠스루코무루도 연개소문과 같은 부의 인물이었으며 이리코세시는 연씨 가문 내에서 연개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 등[14] 해석이 제각각이다.

3.1.3.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


이처럼 기록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를 포함한 집권 세력들을 도륙내고 보장왕을 옹립하며, 자신의 세력들을 조정 대신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연개소문이 왜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립하고 있다.
  • 첫 번째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 개소문열전에 기록되어있듯 영류왕과 당시의 집권 세력들과 연개소문 사이에 일어난 권력 다툼의 결과라는 설이다. 위에서도 여러번 설명하였듯 연개소문의 가문은 이미 할아버지대인 연자유 때부터 2대에 걸쳐 막리지 직위를 역임했었고, 강력한 무력과 동부대인의 지위를 바탕으로 당대 고구려의 막강한 신흥 귀족 세력으로 부상하던 중이었다. 당시 집권층이었던 고구려 왕실과 기존 권력층은 연개소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가 동부대인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한편 천리장성 건축의 감독을 맡긴다는 핑계로 변방으로 몰아내려는 등 그들의 권력을 제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시도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씨 가문의 힘이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연개소문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려다가 연개소문이 이를 먼저 알고는 먼저 선수를 쳐서 왕과 집권층을 갈아 엎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당시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왕과 결탁하였다는 설이다. 영류왕은 사실 선왕인 영양왕의 배다른 아우였으나 여수전쟁 당시에 큰 전공을 세웠으며 또한 영양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영양왕의 또다른 아우였던 태양(太陽)과 그의 아들인 보장왕이 이에 불만을 품었고, 그들 또한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에 불타 당시 영류왕과 대립하던 연개소문과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15]
  • 세 번째는 대당외교 문제와 관련된 설이다. 당시 영류왕은 당나라에 대해 온건하고 저자세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대당강경파이자 신흥귀족 세력의 대표였던 연개소문이 이에 반대하며 영류왕과 충돌한 끝에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16] 그 근거로는 영류왕과는 달리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을 들고 있다.

3.2. 정권 장악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시해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아우인 태양(太陽)의 아들 보장을 불러와 그를 임금 자리에 앉혔으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이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는 직책에 올랐는데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나라의 군사력과 궁중의 행정을 모두 맡는 그야말로 엄청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통해 고구려의 군사력과 궁중의 권력을 모두 수중에 넣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이나 연남생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의 벼슬을 지냈다고 기록하였는데 정권을 일으킨 이후 어느 정도 세력이 안정되자 제가 회의의 장인 대대로 직위까지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17][18] 이 일로 말미암아 연개소문은 왕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는 고구려의 최고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삼국사기에서 이 시기의 고구려사를 기록한 보장왕본기는 사실상 '''연개소문 본기'''라 해도 할 말 없을 정도. 이후로 연개소문은 권위적인 성격을 마음껏 뽐내고 다녔는데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자신의 관복을 온통 으로 장식하였으며 평소에도 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고 을 타고 내릴 때는 장수를 받침삼았다고 묘사하였지만 실제로 모든 고구려 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다섯 자루의 칼을 가지고 다녔다. 이를 보면 구당서와 신당서의 경우 연개소문의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짙게 각색하기 위한 내용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경우 이러한 구당서와 신당서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므로 논외로 한다. 연개소문이 행차를 할 때에는 호위병들로 하여금 엄중하게 대오를 이루어 다녔으며 길을 지날 때에는 행차를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는데 이럴 때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구덩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숨었다고 한다.
당태종이 들은 풍문에 의하면 안시성주[19]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주는 이를 기어코 막아냈고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 속의 불화는 고당 전쟁 수행에 차질이 있었다는 가설로 설명하거나 반대로 당나라의 패배를 희석하기 위해 삽입된 과장된 풍문이라는 견해가 있는 등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는 않다.[20] 다만 안시성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647년에 오골성 등의 대성에서 동원되어 지휘를 받는 것을 보면 안시성의 반발은 과장되었거나 642년 당시에는 실제로 있었으나 고당 전쟁 시기 이전까지 어떻게든 봉합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당나라와의 전쟁 때 명확히 알 수 있는 신성#s-5국내성의 지원군 4만 명을 시작해서 중앙의 통제에 따라 각 성에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고 있었던 것과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15만 명, 667년 금산 전투에서 20만 명을 동원하고 이후에도 남소성에서 15만 명과 말갈족 수만 명이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는 등 전력을 백제신라에다가 들이부었으면 과연 두 국가가 버틸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물량을 동원하는 등 국가 통제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전국을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3.3. 김춘추와의 회담



3.3.1. 회담의 결렬


한편 642년 겨울, 백제 의자왕공격으로 딸과 사위, 손주들을 모조리 잃게 된 신라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넘어와 고구려 조정에 함께 백제를 칠 것을 요청해왔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직후의 일이었는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왕명을 받들어 김춘추를 맞아들이고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21]
이처럼 신라와의 회담은 처음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다음날에 김춘추보장왕과 만나 논의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군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보장왕은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는 조건으로 '''죽령 서북의 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죽령은 지금의 충청도경상도를 잇는 길목으로, 고구려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영토로 이어지는 요충지였는데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신라의 진흥왕이 이 곳을 빼앗아 신라의 영토에 넣었다.
비록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고 있던 김춘추라고는 하나 김춘추 입장에서는 난처한 게 이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다. 그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가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차단되고, 고구려에게 신라로 통하는 진격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보장왕이 신라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뜻이 되는데, 보장왕의 뜻은 사실상 실권을 움켜쥐고 있던 연개소문의 뜻이었다.

3.3.2. 김춘추를 풀어주다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그를 가두어 억류해버렸다. 그러자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구하도록 조치하였고, 곧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와의 국경 지대로 나아가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에서는 곧 김춘추를 풀어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김춘추가 풀려나 귀국하게 된 사연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라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국경에 나타나 무력 시위를 벌이자 보장왕이 그제서야 김춘추를 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보장왕의 측근이었던 선도해가 김유신에게 뇌물을 받고는 '토끼의 간'에 대한 이야기[22]를 들려주며 꾀를 내주자 김춘추가 이를 받아들여 보장왕에게 땅을 내어주기로 약조하고는 정작 국경에 이르자 이를 어기고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도 김춘추 석방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김유신이 고구려 국경으로 군사를 끌고 가 무력시위를 벌였다고 하였다.[23]

3.3.3. 회담 결렬의 원인


연개소문이 무슨 까닭에서 김춘추의 제의를 거절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지 않고 적대관계를 만들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연개소문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나라와의 갈등을 빚어내 군사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또한 연개소문이 애초부터 신라를 전혀 믿지 않고 있었으며, 후방의 신라 정도는 백제나 왜를 이용해 견제할 수 있다는 연개소문의 자만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보다는 백제와 동맹을 맺는 것이 더욱 이득이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제의를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무왕, 의자왕의 2대에 걸쳐 신라를 압박하였는데 이 때 교통 및 군사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 곳의 성주이자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이자 딸인 고타소의 목을 베기까지 했으며 이후 40여개의 성을 수중에 넣는데까지 성공했다. 더욱이 의자왕은 전술한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고구려와는 화친을 맺고 있었다. 고구려 측의 입장에서는 한창 신라를 신나게 몰아붙이던 백제와 사이 좋게 동맹을 맺고, 신라를 견제하여 후방을 안전하게 만든 후 곧 닥쳐올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으로 여겨졌을 공산이 크다.
조선상고사에는 백제의 성충이 연개소문에게 김춘추가 제의하러 왔을 시점에 맞춰 글을 보냈는데 만약 신라와 손을 잡는다면 백제는 당과 손을 잡고 그렇게 되면 당은 고구려에 진격할 길과 자원을 쉽게 공급받아 앞뒤로 압박받게 된다는 서술이 있다. 원 출처가 되는 사료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가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한 속사정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도만 보면 한강 쪽은 신라땅 에 가로막히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싶지만 당시 신라는 백제의 맹공에 시달리며 국가 존망 자체를 걱정해야 했을 정도로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자원 공급 쪽으로 가면 신라보다 백제 쪽이 훨씬 빠르고 수월했다. 당장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가로막는 요충지이자 당과의 교역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나란히 공격당하며 큰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해로나 수로를 통해 일시적으로 군사를 보낼 수도 있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도 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특히 오랫동안 백제와의 마찰이 적었던 것과 달리[24][25] 신라와는 알게 모르게 마찰을 빚었고, 대표적으로 김유신이 함락한 성이 고구려의 낭비성이었다. 그러니 연개소문과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보다 백제의 제안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연개소문은 옛 장수왕 때의 영토 반환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대로라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백제 쪽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 맞았다. 만약 신라와 손을 잡았다면 백제와 당의 손에 신라나 고구려가 멸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연개소문이 내건 죽령 서북 땅이라는 무리한 요구 또한 납득이 되는데 완곡히 신라와 결렬하는 이유로도 충분하고 만에 하나지만 수락이 되어 백제와 척을 진다 해도 이 정도의 땅을 가진다면 당이 수로를 통해 오는 것도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한 이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득보단 손해가 많으니 거절할 걸 노려 요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어찌 되었든간에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일어났던 회담 결렬의 결과는 매우 큰 것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고립된 처지가 된 신라는 이후로 '''당나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고구려와 백제는 나당연합과 대립하는 형국이 된다.

3.4. 당나라와의 대립



3.4.1. 당태종의 분노


이처럼 다루기 힘든 성격의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력자가 되면서 해동에 대한 영향력 행사 및 고구려 정벌에 대한 준비 등에 걸림돌이 되었고 고구려당나라의 관계는 차츰 나빠져만 갔다.
거기다 이세민은 당시 내부적으로 태자 교체의 후유증으로 인해 꽤나 통치력이 줄어든 상황이었고, 장손무기를 필두로 하는 외척의 힘이 역으로 커져서 한참 어지러웠던 시대였다. 심지어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에게 환속해서 자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정치적 어려움이 매우 심각했던 시기였으며 스스로가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이기도 하였으니 '''고구려 정복이라는 군사적 활동을 통해 당태종 자신과 막 세운 태자 이치의 권위를 세우고 정국을 안정화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을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문란케 하는 역적'''이라 일컫으며 고구려를 칠 것을 계획하였으나, 측근이었던 장손무기가 아직 방비가 단단하니 상황을 지켜봐야 옳다고 만류하자 계획을 보류하였다.

3.4.2. 도교 우대와 불교 탄압


643년 3월, 연개소문은 "우리 나라에는 유교불교는 번성하나 도교가 없다."라면서 보장왕에게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도교를 전파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나라 조정은 이에 응하여 고구려에 숙달 등을 비롯한 8명의 도사를 파견하여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을 전해주도록 하였다. 연개소문 역시 이에 화답하여 도사들을 절과 객관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이미 당시 고구려에서는 도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류왕 본기에도 당시의 고구려에 도교가 번창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즈음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도 이전에 불교적 색채가 짙었던 것과는 달리 도교적인 요소가 매우 늘어났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을지문덕여수장우중문시도 도교적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연개소문이 새삼스럽게 당나라에 도교 전파를 요청한 이유는 당시 당나라 이씨 황실이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도교를 무척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즉, 연개소문이 당나라 조정이 받드는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에 대한 유화책이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온 도사들에게 절을 숙소로 내준 것은 불교에 대한 탄압책으로 여겨진다.[26] 보장왕 본기에는 650년 6월에 변룡사의 승려인 보덕화상이 나라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한다 하여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반발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삼국의 불교가 왕실을 보위하는 호국불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왕실의 친위세력인 불교의 권위를 약화시켜 왕의 위상 자체도 떨어뜨리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스님들은 귀족 가문의 출신들이 많았고, 학문과 무예를 익힌 엘리트였으며, 스님들이 숙식하는 사찰은 유사시 대규모 병력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군사적 기능도 하였기에 그 대항마로 도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교 우선시 정책과 상대적으로 불교를 탄압한 점 때문에 이후 불교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수백 년 동안 굉장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듯 하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 의하면, 고구려가 불의(不義)를 많이 저질렀으니 제석(帝釋)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인간세상에 보낸 괴물 무상대귀(無常大鬼)가 바로 개금(=연개소문)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도 연개소문이 수나라 장수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환생한 것이라는 전승을 싣는 등 대체로 당대 불교계 기록에서 연개소문을 고구려를 망친 장본인으로서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3.4.3. 신라 공격


한편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643년 9월에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가 신라의 40여 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신라의 뱃길을 끊어 버렸다"라면서 당에 직접 도움을 청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644년 정월에 당태종은 고구려 조정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는 일을 그만 두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여 2개의 성을 격파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보장왕이 사자를 보내 부르자 그제서야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리현장은 개소문에게 신라를 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지난날 수나라와 싸우는 중에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땅을 빼앗아갔으므로 이를 되찾아야 한다며 듣지 않았다.
사실 이 해에는 이미 양국은 교전 상황에 돌입하였다. 이미 대릉하 일대에서는 고구려와 당이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644년 9월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백금을 보내었으나 당나라의 대신인 저수량이 이를 고구려 측이 보낸 뇌물이라 주장하여 당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백금을 받지 않았다. 또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보낸 50여 명의 사신들을 가리켜서 '왕을 죽인 막리지를 섬기는 죄인들'이라 하며 붙잡아 처벌하였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분노하여 당태종이 보낸 사신 장엄을 인질로 삼고는 굴방에 감금해 버렸다.

3.4.4. 고구려-당 전쟁



연개소문이 장엄을 감금한 것을 알고 크게 분노한 당태종은 645년에,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전쟁 초기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요동성 백암성, 비사성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1차 적인 함락 이래로 진군조차 지지부진하였고 안시성, 신성#s-5, 건안성 등을 필두로 하는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패퇴하고 만다. 그 이후로도 당태종은 이런 저런 전략을 구사하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며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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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사수 전투 기록화
한편 그 뒤를 이은 아들 당고종 역시 650년대부터 내몽골과 요서 일대에서 고구려와 각축전을 시도하였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660년대에 들어서는 소정방, 임아상, 계필하력, 정명진, 방효태 등을 필두로 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회심의 일격을 날려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외교력과 용병술을 발휘하여 이들을 모두 물리쳤고 야전에서의 활약도 두드러져 사수에서 좌효위대장군 방효태 지휘하의 옥저도행군을 전멸시키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전원을 절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바로 사수 전투이다.

3.5. 죽음과 사후


고구려-당 전쟁 중에 동맹국이던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후방이 위험해지는 등의 위기를 맞았으나 연개소문은 당나라군을 전멸시키는 무용을 보인다.
이러한 시기에 연개소문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신당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자면, 642년 겨울에 난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를 제거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지 24년이 지난 후인 666년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맏아들이었던 연남생이 막리지의 직위를 계승하였으며, 남생의 두 아우였던 연남건연남산은 형을 도와 국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주위의 여러 사람들은 이들 삼형제들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이간질하는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결국 맏아들 연남생의 마음이 흔들려 남건과 남산에게 첩자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남생을 의심하여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불렀으나 연남생은 이미 동생들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연남생은 국내성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무리들과 거란, 말갈병 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통치하던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버려 고구려는 더이상 오래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668년에 당고종신라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의 사망연도가 657년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27] 이는 아들 연남생의 묘비 기록을 근거로 그가 막리지를 계승한 시점이 657년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아무리 내분이 있었다지만 당나라도 어쩌지 못하던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사후 불과 2년만에 멸망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신채호의 연구는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이미 한중일 삼국 사서에 엇비슷하게 연개소문의 사망년도가 적혀있다. 연개소문이 했다는 유언인 "너희 삼형제는 물과 물고기처럼 화합해라" 라는 말도 일본서기에 연개소문 사망 소식을 실으면서 적은 내용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연개소문이 660년 이전에 사망했다면 662년 사수 전투 당시 방효태, 정명진 등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대체 누구랑 싸워서 전멸당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삼국사기와 구•신당서의 기록은 연개소문이 최소한 662년까지 살아있었음을 명백히 알려준다.
신채호는 그 노력과 별개로 연구성과가 현대에 많이 반박되고 있어서, 역사적 성과는 그다지 입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4. 평가



4.1. 과거의 평가


...기자가 남긴 풍속이 아직 남아서 6백여 년을 편안히 지내다가, 그 쇠할 무렵에 연개소문이 흉악하게 굴어서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의 군사를 불러들였고..(중략)..'''연개소문 때부터 난리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다''''...(중략).. 지방에 가면 반드시 임금의 덕과 위엄을 펴고, 교화를 밝혀서 이미 잘 된 것은 그대로 지키고 아직 미진한 것은 더 장려하여, 기자(箕子)의 유풍을 되찾는 데 힘쓰고 '''연개소문의 나쁜 습관'''을 깨끗이 없애서, 덕성을 훈도하여 기르자...

동문선, 제93권, 하륜, 서북면 도순문겸 병마도절제사 평양윤 조공을 전송한 시의 서문[송서북면도순문겸병마도절제사평양윤조공시서] 中.

조선이 비록 그런 흠이 있지만, '''천개소문(泉蓋蘇文)처럼 임금을 시해한 죄가 없고''' 천조(天朝)를 섬기어 신하의 예절이 어긋나지 않았으니...(조선을 합병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일한, 사학천[28]

근거없는 말을 답습하여 요신(饒伸)은, 개소문(蓋蘇文)에 비유하고...

광해군[29]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때를 타고 진출하여,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 되었으니, 간사함으로 손바닥 위에 나라의 권력을 놓고 농단하고, 정사(政事)에 임해서는 편리에 따라 충신을 죽이고 말았도다. 중외(中外)에 권력을 천단하고 날로 포악해지니, 민(民)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기틀은 기울었네.

이승휴-제왕운기

근대로 들어와 연개소문이 '민족적 영웅'으로 재평가되기까지 그에 관한 평가는 대역죄라는 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연개소문은 임금을 자기 입맛대로 갈아치우고 전횡을 일삼는 포악한 역적이라는 것이 당시 비판의 요지였다. 특히나 조선시대 문집이나 자료를 찾아보면 해동이 배출한 대역 죄인의 대명사 정도의 취급, 명나라에서 조선을 깔 때도 곧잘 소환당하곤 했다.
특히 일연삼국유사에서 연개소문을 신랄히 비판했다. '고려고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사서를 인용하여, 수양제의 신하가 '''고구려를 멸망시켜 양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환생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전설을 대놓고 언급해 놓았을 정도. 또한 연개소문이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도입함으로써 고구려를 쇠망하게 만들었다는 기록까지 적었다. 물론 이건 친불교적 관점에서 도교를 도입한 연개소문을 까는 내용의 설화이기는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책이 당시 불교계에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30]

전해지는 말에 대당에는 위징이 있고, '''고려에는 개금(蓋金)''', 백제에는 선중(善仲), 신라에는 짐순(鴆淳)이 있다.[31]

이들은 각자 일방을 맡아 '''이름을 만리에 떨쳤으니''' 이들은 모두 '''당세의 준걸'''로 지략이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덴지 덴노[32]

지난날 선제께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고구려[33]

빈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언충[34]

(당태종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것은) 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안석[35]

역시 연개소문은 재주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는데 곧은 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김부식[36]

개소문(蓋蘇文)은 안시성(安市城) 하나로 천하의 대병을 당해 내었으니 이는 사람을 제대로 얻은 효과입니다."

홍식[37]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소유하여 삼국 중에..(결락)... 수(隨)나라와 당(唐)나라가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원이 광활하여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지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씩씩하고 호방한 사람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고구려의 역사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고 일컫는 자는 비록 찬역(簒逆)한 도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적의 효웅(梟雄無敵之人)'''입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군신(群臣)들과 '''당세의 웅걸(雄傑)'''을 논하였는데 연개소문이 7인 가운데에 끼었으니, 그 인물이 어떠한지 상상이 됩니다.”

홍서봉

연개소문의 재주는 조조(曹操)에 뒤지지 않을 듯하다.

인조

당 태종은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이 견고한 성을 넘지 못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연개소문이 영웅이었는데도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양 간주함이 지나쳤던 것이다. 고종 때는 개소문이 죽었으니 이적 한 사람만으로도 취하기에 충분했다. 이적의 재주가 어찌 태종을 능가했겠는가? 상대방의 때가 달랐던 것이다

장뢰[38]

고구려에 연개소문이 있어 소동파가 그를 영웅이라 여겼으니 역시 보는 안목이 있도다

이수광[39]

하지만 그 능력이나 업적에 관한 평가만큼은 꽤 높은 편이다. 요약하자면 "역적인데 인물은 인물이다." 정도로 강조점이 다를 뿐 이것은 사실 당대부터 근대의 신채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진 내용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시성의 승리 역시 연개소문의 공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역적이라고 욕을 하다가도 막상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통쾌하게 질러버리는 연개소문을 은근히 그리워하는 분위기였으며 중국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당태종이 역사를 왜곡하고 전과를 부풀린 사실을 감안하고 능력을 제법 좋게 평하는 이들도 은근 있었다.
김부식을 비롯하여 연개소문에 대해 내리는 대체적인 평은 '재주는 뛰어나지만, 나라를 올바르게 받들지 못했고 성질이 더러워서 끝내 대역죄까지 저지른 인물'이었고 일단 나라를 구한 공만큼은 높이 쳐주었지만, 함부로 임금을 죽이고 오만하고 잔인한 행동을 한 데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그나마 병들어 천수를 누리다 간 것도 '''반역자 치고는''' 운이 좋은 최후였다고 사론에 대놓고 실어놓기도 했다.
다만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평과는 미묘하게 다른듯 하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등은 그냥 대놓고 '''나라 말아먹은 것들'''이라고 적어 놓았으니(...).
군사적으로는 명장이라는 평가가 많다. 공성전, 수성전까지 산전수전을 겪으며 전력을 쌓은 수 십년 동안 그는 시가전에서 불세출의 기량을 보여준 고건무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버린 후 집권했으며, 총사령관으로서는 대륙 1인자인 이세민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주는가 하면 야전으로는 당나라 1인자였던 소정방에게도 굴욕을 안겨주었으며 사수 대첩와 같이 최전선에서의 굵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각 분야마다 도장깨기를 하듯 천하의 1인자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중원 대륙에 천년 넘게 명성이 울려퍼진 케이스는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비견할 이를 찾기가 힘들 지경. 집안 싸움에서만 칼 들고 무적으로 군림하다가 정작 외세에는 무력하던 여타 무신 집권자들이랑은 격이 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영휘 연간에[40]

도성에서 연회가 열렸는데 람들은 서로 말을 하다가 민간의 일을 거론하여 누군가가 말하였다.

"예천현은 도성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그 곳에서는 고독(蠱毒)[41]

이 성행합니다. 그런 고을 사람들은 당장 멀리 유배를 보내야지 어찌 도성 가까이 둘 수 있겠습니까?"

또 누군가가 말하기를 "멀리 유배를 보낸들 그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인데 거기서 또 고독을 행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해치치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그럼 그들을 어디에 안치해야 합니까?’

그 때 장손현동이 말하였다. ‘저 현동에게 안치하게 하신다면 필히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어디인지 물으니 현동이 답하였다

'''고독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모아 막리지에게 보내 잡아먹히게 해야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웃었다.

태평광기

중국에서도 당나라의 기라성같은 명장들을 압도한 연개소문의 임팩트는 매우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당태종이 비참하게 진 직후인 650년대에 이미 연개소문은 사람들을 잡아먹는 마왕도 같은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관련된 전승이나 소설로 가면 거의 최종보스급의 위엄을 자랑할 정도. 대표적인 것이 설인귀가 주인공인 설인귀정사략. 심지어 산동성, 강소성에까지 그런 형태의 연개소문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요동에서 북경을 지나는 기행문을 보면 연개소문의 고장으로 아직까지도 연개소문의 강대함을 논하고 상을 세워 기리기까지 하는 등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당나라명장 이정(李靖)당 태종과 했던 군사학 토론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의 내용에는 '연개소문이 스스로 병법을 아는 것을 믿고 토벌당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내게 3만 군사를 주면 그를 사로잡겠다.'라는 내용이 나와있다. 전체적으로는 스스로와 이세민을 띄우면서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는 발언이지만 역으로 병법가로서의 연개소문의 면모 내지는 이미지를 파편적으로나마 드러내주는 대목이랄 수 있다.

4.2. 현대의 평가


그 선악 현부(善惡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아무튼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아시아에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중략) 봉건세습(封建世襲)의 호족공치제(豪族共治制)의 정치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곳에 집중시켰으니 이는 분립의 대국(大局)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묻지 않고 한꺼 번에 소탕하여 영류왕 이하 수백 명 대관을 죽이고, 침노해온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당을 진격하여 지나 전국을 놀라 떨게 하였으니 그는 다만 혁명가의 기백(氣魄)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혁명가의 재능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함이 옳겠다. 다만 그가 죽을 때에 따로 어진 이를 골라 자기의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한 자식 형제에게 대권(大權)을 맡겨 마침내 이룬 공업(功業)을 뒤옆어버렸으니 '''대개 야심이 많고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 역사가 아주 없어져서 '''오직 적국 사람들의 붓으로 전한 기록을 가지고''' 그를 논술하게 되어 사실의 전말을 환히 알아볼 수 없으니...

신채호

연개소문은 분명히 '''지략가이고 당당한 무인'''이었으며 결과로 볼 때도 '''대국인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한 정략가'''였다. 그리고 외세인 당이 자신의 지위를 문제삼을 때 그를 거부하고 '''당의 침략을 일단 격퇴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도 있겠다.  당과 신라가 연결되어 국가의 운명이 내다보이는데도 그는 '''자신과 가족의 집권에 일단은 집착'''하였다. 그러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서 그 같은 자세를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의 '''국제감각은 국가경영자로서 너무나 미흡'''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장기간의 집권기간에 이렇다할 '''국정의 개선조치가 없었던 사실'''을 보면, 그는 체제 붕괴기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정권의 재창출에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자주적인 영웅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한말 그리고 일제 침략기에는 연개소문이 거대한 당나라에 대항한 민족적 영웅으로서 주목을 받았지만, 이제는 보다 면밀한 재검토를 받아야 할 시점에 처한 듯 하다. 이러한 재검토와 재평가는 그만큼 우리의 민족적 역량이 축적된 데서 가능해진 만큼 이를 피하거나 터부시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김기흥

근대를 거치면서 연개소문의 평가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는데 다른 면으로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외세에 유린당한 무력한 시대를 거치고 왕조시대의 군신 간의 충의라는 가치에서 한결 자유로워지면서 외세를 무찌른 영웅으로서의 용맹하고 자주적인 모습이 한층 더 부각되는가 하면 이전까지 단순히 당태종의 침입을 막아냈다는 개략적인 부분을 넘어 그 행적이 왜곡되고 은폐된 정황까지 찾아내어 그 업적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이뤄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주의적인 욕구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그와 정치성향이 반대인 쪽에서는 업적까지 비판적으로 검토되거나 심지어 여타 독재자들의 폐해까지 소급해서 연개소문에게 책임을 지우는 가설이 세워지는 경우도 적잖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 세조와 마찬가지인 경우.
바로 그 예가 밑의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연개소문은 최충헌이나 사마소와 같이 역적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최충헌도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었지만 그가 역적 간신배 취급받는 것이 최고의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민심 수습과 거란 유민들의 침략을 막아낼 노력을 하지 않고 자기 보신과 부귀영화에 눈 멀어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연개소문이 생각한 연씨독재체제의 후계자가 장남이었든 차남 이하였든, 누군가를 내정했다면 그에게 권력을 제대로 몰아주고 나머지는 공식 후계자에 개길 수 없도록 권력을 한정시켰어야 한다. 이는 원소견훤의 파멸 과정이나 최충헌, 독재가 대대로 안정적으로 세습된 것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이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삼형제가 서로 다투기 딱 적당하도록 비등비등한 권력을 나눠주었고 이는 연개소문 사후 3년도 되지 않아 고구려가 내전으로 자멸에 가까운 파국을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구려 멸망이 아들들의 단순한 개인적 무능뿐 아니라 서로 싸웠던 점이 크다고 본다면, 서로 싸울 판을 깔아놓았던 연개소문의 책임은 적지 않다.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정에 대해선 최근엔 연남생을 후계자로 삼고 가문 일원들이 그를 보좌하는 공조체계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생기고 있다. [42]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최후엔 삼형제 주위의 측근들의 이간질로 인해 바로 무너졌으니 연개소문이 지나치게 안일했다는 비판은 나올 수밖에 없다.

4.3. 고구려 멸망의 책임


그는 7세기 고구려의 한계 상황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그는 '''명장, 혁명가, 정치가'''로 만족해야 했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권신의 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통솔한 것은 이점보다는 폐해가 많았다.''' 그의 라이벌로 지칭되는 이세민과 김춘추는 모두 일국의 왕이었다. 따라서 정적 제거나 권력 강화에서 연개소문은 이들보다 명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권력 강화는 무리한 독재권력, 세습정권의 폐해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비정상적인 권력구조는 고구려 정치권의 비효율성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중략) 그가 죽은 후에 빚어진 카리스마의 공백은 곧 고구려의 내분과 더 나아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가 권력을 다시 왕에게 돌려주었거나, 혹은 후계자 선정을 제대로 했더라면 고구려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었다. 후계자 선정에서의 잘못이란 문제 하나만으로도 연개소문은 고구려 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개소문은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략) 당나라의 경우에서 보듯 비록 후계자가 자신보다 부족한 면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를 보좌하는 정치 시스템이 부재했던 것이 고구려가 실패한 더 큰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은 '''대단히 뛰어난 군사지휘자의 능력'''을 지녔지만, 국가의 총체적 국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활용해야 하는 국가 최고경영자의 능력 면에서는 여러 부족한 면모를 보였다. (중략) 연개소문은 고구려 국력의 한계를 파악하고, 중간에 전쟁을 중지시킬 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더욱이 상대인 당나라는 수나라와 달리 돌궐을 복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당의 용병으로 활용했으며,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은 설연타마저 멸망시켰으며,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힘과 의지를 갖고 있었다. (중략) 무엇보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에는 주변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적인 당나라는 새롭게 성장하는 신흥 강대국이었다. 반면 고구려는 전성기를 지난 노쇠한 대국이었다. 성장 에너지란 측면에서 고구려는 당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중략) 전통 귀족들이 여전히 권력의 한 축을 장악하고 있었고, 제도는 낡았고, 혁신은 뒤늦었다. (중략) 연개소문은 1차 고-당 전쟁과 2차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전투에만 승리했을 뿐 전쟁의 성과물을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비록 '''위대한 전략가, 고구려의 위신을 드높인 영웅'''이라고 칭송될 수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 지도자였다.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은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해, 고구려의 시대를 새롭게 열지는 못했던 것이다.''' '''다만 후대에 본인만한 지도자가 없는 게 연개소문의 책임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 김용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中'''

사실 저 위의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이미 수, 당은 고구려를 지도상에서 지우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기 때문에 고구려에게는 군사적 대결 이외에는 선택지가 아예 없었다. 왜냐하면 고구려 자체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나 당에게는 자기들을 휘협할 만한 역량을 가진 세력으로 낙인 찍힌지 오래라, 대화라는 선택지는 이미 오래전에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43] , 은 건국 직후 국내가 어느정도 안정되자마자 바로 고구려 원정을 선택할 정도로 고구려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왔다. 심지어는 고구려에서 먼저 굽히고자 공물과 함께 사신을 보냈을 뿐 아니라 후엔 태자까지 입조시켰음에도 타국의 사신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고구려의 사신에게 면박을 주거나, 예우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 등 대놓고 고구려의 화친요청을 받아줄 의향이 없음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왔다.
아무리 백제와 신라에 비해 막대한 물자와 군비를 생산하던 고구려였지만[44] 당나라고구려보다도 더 많은 물자와 군비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45] 지휘관들의 역량도 절정기를 달리고 있던 시점이었으며 전쟁이 주로 고구려 영토 안에서 벌어진 점,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청야 전술도 장기적으로는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즉 연개소문은 그를 중심으로 고구려를 재편하여 당과 오랫동안 맞서 싸울 수 있게 했지만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일단 고구려와 당나라는 기본적인 체급 차이가 현저했다. 같이 어그로 끌어주던 돌궐은 망한지 오래고 토번은 아직 타이밍각만 잡고 있지 어그로 끌기 전이라 이 모든 국력이 고구려를 향하였고 이는 고구려에 치명적이었다. 백제도 오래 버텨주지 못했기도 하고 신라까지 당나라를 도와주고 있었으니. 고구려의 영토를 대폭 늘리고 인구도 훗날 루마니아차우셰스쿠 같이 무식하게 출산장려운동을 벌여 증식시키지 않는 한 그건 연개소문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연개소문은 당이 작정을 하고 멸망시키려 하고 영류왕은 당에 밀리는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면서 당의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자국 내 요충지들을 보여주어 고구려-당 전쟁에서 고구려가 밀리게 되는 큰 실책을 저지른 상황에서 고구려를 지켜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재권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다만 그의 후계자 선정 실책은 고구려 멸망까지 이르는 연개소문 책임론의 핵심이다. 위의 김용만이 언급한 '권력을 다시 왕에게 돌려준다'는 이상주의적인 대책은 연개소문이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다고 해도, 그게 아니라도 연개소문이 생각한 연씨독재체제의 후계자가 장남이었든 차남 이하였든, 누군가를 내정했다면 그에게 권력을 제대로 몰아주고 나머지는 공식 후계자에 개길 수 없도록 권력을 한정시켰어야 한다. 이는 원소견훤의 파멸 과정이나 반대로 최충헌, 김일성 독재가 대대로 안정적으로 세습된 것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이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그러지 않았고 이는 연개소문 사후 3년도 되지 않아 고구려가 내전으로 자멸에 가까운 파국을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구려 멸망이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서로 싸웠던 점이 크다고 본다면, 서로 싸울 판을 깔아놓았던 연개소문의 책임은 적지 않다. 다만 이 점을 제외하면 연개소문은 확실히 고구려를 이끄는 전시지도자로서 그리 큰 실책은 저지르지 않았다.

5. 가족관계


아버지로 연태조, 동생으로 연정토, 아들로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이 있다.
연개소문의 부인에 대한 기록도 전하는데, 남생의 아들인 연헌성 묘지명에 '조모(祖母)'란 인물이 등장한다. 이 조모는 679년 아들 연남생이 병으로 먼저 죽었을 때 슬퍼하던 손자 연헌성에게 끼니 거르지 말라고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682년에 당나라에서 죽었다. 헌성의 조모는 당연히 남생의 어머니, 연개소문의 아내를 의미한다. 이를 보아 연남생이 당으로 도망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간 걸로 보인다. 아니면 고구려 패망 후 따로 모시고 왔든지.
한편 옛 고구려 지역에 전하는 전설 중에 연개소문의 여동생이라 하는 연수영이 있다. 실존 여부는 불명.

6. 그 외에


  • 연개소문이 평소에 차고 다녔다는 5자루의 칼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중국 쪽의 기록에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칼을 5자루씩 가지고 다닌다는 기록도 있다. 혹은 이것이 사냥용, 가죽 다듬기용 등의 크고 작은 칼을 차고 다닌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실제로 황남대총에선 칠지도의 이전 단계로 추정되는, 큰 칼 칼날에 작은 검집 6개가 달려 있고 거기에 작은 칼 6개가 꽂혀 있는 환두대도 유물도 있다.[46]
  • 중국 경극에서는 연개소문이 비도술(飛刀術)에 능통한 것으로 묘사된다. 중국의 민간 설화에서는 칼이 5자루가 아닌 7자루로 묘사되며, 이것으로 당태종을 뒤쫓다 설인귀가 창으로 이것을 막아내어 연개소문의 추격을 막아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스펀지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경극(중국 전통무용) 중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그것도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로 꽤나 용맹스럽고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경극 팬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과 고구려 사람인 것까지 알고 있다고 할 정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의 힘을 가진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패퇴시키고 뒤쫓지만, 최후에는 당 태종을 구하러온 설인귀와 싸우다 패하는 내용으로 끝난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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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 삼국사기, 남생 묘지명 참조[2]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연개소문의 성씨다. 이는 당 고조인 이연의 이름이 연개소문의 성씨와 같은 자를 썼기 때문에 이를 피휘한 것이다.[3] "善化公主主隱"을 "선화공주님은"이라고 읽는 신라의 향찰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4] SBS 연개소문에서는 이 이름을 '개똥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아명으로 설정했다.[5] 다만 연남생, 연남산 등 당나라에 들어가서 평생 산 아들들은 당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휘하여 천(泉)을 성씨로 삼았을 것이므로 사실상 개명(개성)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6] 다만 淵(연)과 가까운 뜻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의미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어서 일종의 훈독으로도 여길 여지도 있다. 물론 그냥 단순한 훈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편.[7] 으리 혹은 이리.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에 쓸 때는 이리.[8] 蓋蘇文을 따르면 가소문이라 읽을 수도 있고, 柯須彌를 따르면 가스미, 가수미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자음이 받침으로 쓰였을 경우나(가솜, 가슴, 가숨 등) 아래 아 같은 사라진 발음까지 합쳐서 추정하면 더더욱 복잡해진다.[9] 고국원왕의 본명인 사유(斯由), 소(釗), 소(召)와도 통하는 말이라 추정된다.[10] 참고 일본서기에 금관가야를 수내라(須奈羅) 혹은 소내라(素奈羅)라 표기한 기록이 있다. 둘 다 스나라(すなら)라고 읽는데 이는 현대어의 쇠나라에 해당하는 고대어를 가차한 걸로 보인다.[11] 현재의 오사카시에 위치한 난바(難波) 인근을 의미한다.[12] 영류왕의 동생이자 보장왕의 아버지인 고태양[13] 정확히 어느 성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추정된다.[14] 성씨의 개념을 만든 중국에선 성과 씨는 다른 개념이었다가 후대에 하나로 합쳐졌지만 중국 문물을 수입한 고대 일본에서는 카바네(姓)와 우지(氏)를 분리해서 구분했다.[15]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 대왕의 꿈이나 칼과 꽃 등에서는 이 설을 바탕으로 한 내용전개가 펼쳐진다.[16] 특히 SBS에서 방영했던 사극 연개소문나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 등이 이 설의 영향을 받고 있다.[17] 막리지는 1. 제일 높은 관직인 대대로와 같은 관직이라는 설 2.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인 태대형과 같은 관직이라는 설 3. 연개소문의 정변 이후 신설된 관직이라는 설이 있다.[18]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이 대신 이리거세사 등을 죽이고 도수류금류 등을 대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중앙 정계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처형한 후에 자신의 사람들로 자리를 메꾸는 등 대대적인 인사 개혁을 단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19] 현재 양만춘(楊萬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본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20] 풍문이 인용된 기록을 봐도 ‘연개소문과 반목한 성이라 쉬울 것이다’ 따위가 아니라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 지키는 성이니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뉘앙스이다.[21] 해당기록에는 연개소문을 태대대로 개금이라 표기하였다.[22]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궁가와 같은 이야기이다.[23] 세간에는 연개소문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김춘추를 가둔 것은 보장왕이고,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 것은 신원미상의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연개소문이 실권자인 상황에서 보장왕이 마음대로 김춘추를 죽이려고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딱히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증거가 없는 셈.[24] 물론 서로의 왕을 죽인 흑역사가 있었지만 이 시점에선 이미 200~300년이나 지난 한참 전 이야기이고 그 후에도 여제 양국의 감정이 좋진 않았다지만 5세기 신라의 급격한 팽창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사이좋게 영토를 빼앗기면서 공공의 적이 생겨버린 상황이었다.[25] 당장 위덕왕 때까지만 해도 서로 이를 갈고 싸울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몇 대 뒤에 왕위에 오른 무왕은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면 돕겠다고 먼저 제의해놓고서는 정작 수나라가 전쟁을 벌이자 발을 빼버리는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구사하면서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기도 했다. 허나 앞선 전적과 의자왕 대 이어진 신라에 대한 맹공 탓에 당나라는 백제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의자왕 역시 당의 위협을 무마하고 신라를 치기 위해서 고구려의 협조가 절실해졌다. 결국 양국의 이해 관계를 전부 충족하는 동맹이었던 것이다.[26] 실제로 삼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유기에서는 도교의 도사들을 극악한 무리인 양 묘사한다.[27] "나는 연개소문이 죽은 년도가 660년 백제 멸망 이전이라는 가정 하에 그가 죽은 년도를 조사해봤지만 오랫동안 확증을 얻지 못했었다. 그러던 차에 근자에 하남성 낙양의 땅 속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장남 천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남생 형제의 분쟁이 666년 이전의 일이라는 게 명백해졌다”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몇 년도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남생이) 24세 때 막리지를 맡고 삼군대장군을 겸했으며, 32세 때 태막리지 지위가 더해져 군사와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고 했고, ‘679년 정월 19일 병에 걸려 안동부 관사에서 죽으니 춘추 46세였다’고 했으므로, 남생의 나이 24세는 657년이라는 말이 된다. 남생이 병권을 잡았다는 것은 그 이전에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직책이 남생에게 승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28] 명나라 급사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틈에 조선을 병합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며 나온 이야기다.[29] 명나라 일부 대신들이 조선을 병합하고자 모함한 언사를 인용[30] 연개소문의 이러한 시도는 도교를 수용해서 기존의 불교를 견제하거나 억압하려 한 의도였다고 평가된다.[31] 이 중 '짐순'은 일반적으로 김유신을 뜻한다고 해석되는데, 발음 때문에 김유신이 아니라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자세한 것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항목 참고.[32] 등씨(藤氏=후지와라씨藤原氏) 기록, 후지와라씨의 내력을 서술한 서적으로 한국의 행장 비슷한 형식의 기록이다. 이 발언은 후지와라씨의 시조가 되는 후지와라노 카마타리를 덴지 덴노가 "우리 카마타리는 위징, 연개소문, 성충, 김유신(혹은 김흠순)과 견줄 만한 인재라고!"라는 의도로 칭찬한 말.[33] 오랑캐 虜로 표기[34] 당나라 시어사, 668년 2월에 고구려 전선에서 장안으로 귀환하여 보고하는 중에[35] 송신종과 왕안석의 대화[36] 삼국사기에서 위의 왕안석의 대화를 인용하면서[37] 조선 선조 때의 대사헌, 선조와의 강론에서[38] 소동파의 4학사 중 하나, 조충국론을 저술하여 국방을 논하면서 나온 발언이다.[39] 문맥상으로 소동파의 제자(위에 언급된 장뢰)를 소동파로 썼을 가능성도 보인다.[40] 650년대 초[41] 독충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일[42] #[43]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확장 이래, 고구려는 동북방의 유목민족과 군소세력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권국으로 자리 잡았고, 북위 등을 비롯한 중국의 왕조들은 중화천자를 자저하면서도, 만리장성 동쪽은 고구려가 관장하는 천하임을 은연중에 인정할 정도였다. 중원을 통일한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동북방에 자리잡아 주변세력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강대국의 존재는 눈엣가시를 넘어 언제든지 국가의 존속성을 헤칠 수 있는 심대한 위협으로 작용했고, 이 때문에 수나라는 이런 병존적인 질서를 뒤엎고자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국력고갈을 견디지 못해 멸망했고, 수나라의 뒤를 이어 건국한 당나라는 수나라를 상대로 보인 고구려의 저력에 국내가 안정되기 전까지 고구려에게 중화사상을 배제한 대우를 논의할 정도였다.[44] 실제로 수당과의 전쟁당시의 고구려 병력을 백제와 신라전선에 투입시켰으면 백제와 신라는 절대 못 견딘다. 국내성 하나에서 4만을 동원하였는데 이 4만은 백제가 원정을 나가며, 최대규모로 편성될 때나 나타나는 수치이며 백제 내부에서 전쟁을 벌일 때는 그만한 규모를 동원한 기록이 없다. 신라도 일부러 과장되게 적은 것들을 제외하면 백제로 5만이 원정을 나갔을 때가 최대규모이며 이를 넘는 병력동원은 신라 후기 내전을 벌일 때나 나타난다. 그런데 그런 규모를 넘는 병력동원을 고구려는 642년 국내성 하나에서 4만, 661년 안시성과 그 주변의 3만, 642년 주필산에서의 15만, 667년 금산에서의 20만을 동원했다. 게다가 상대는 한창 군사적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던 시기였고 고구려를 뛰어넘는 물량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설프게 머릿수만 채우는 수준으로는 중동에서 미군 상대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 마냥 상대가 도저히 되지 못한다. 즉 저들 못지 않은 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이를 감안하면 고구려는 요동, 송화강 유역, 평안도-황해도 지역, 함흥평야, 연변 등 기타 지역의 인구와 물자 생산량을 바탕으로 백제와 신라를 뛰어넘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45] 수양제 때 건설된 대운하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강남 지역의 막대한 물자들이 신속하게 화북으로 이송될 수 있었다. 이 대운하가 없었다면 아무리 당나라라도 고구려를 상대로 그 정도의 장기전을 치르는 것은 불가능했다.[46] 다만 이러한 형태의 유물은 대체로 신라에서나 발견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