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키오스 1세
1. 개요
'''중기 동로마 제국의 위기를 상징하는 인물'''
동로마 제국의 106대 황제이자, 콤니노스 왕조의 초대 황제.
본명은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바실리오스 2세 시대에 활약하였던 마누일 이로티코스 콤니노스의 장남.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되자 이를 불쌍하게 여긴 바실리오스 2세가 직접 10년간 동생 요안니스와 함께 후견인으로서 스투디온 수도원에 입적시키고서는 길러주었다. 아버지가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하사받은 파플라고니아의 영지를 기반으로 군인직을 중심으로 한 명문가를 일으켰다. 조카가 그 유명한 알렉시오스 1세로, 동생 요안니스의 아들이다. 아내로는 불가리아 제국의 마지막 공주와 결혼하였다.
2. 의문의 활약
1025년 이후 이사키오스의 활약에 대해서는 언급되는 바가 없다. 그가 재차 언급되는 시점은 1056년 8월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 가운데서 특별히 언급되는 일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 내에서 신뢰를 받으며 나름 승승장구한 것으로 보인다. 테오도라#s-2.3 시기에 돌연 해임되기 전까지 동부군 총사령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보아 콘스탄티노스 9세와 친밀하였거나 아니면 전쟁 과정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후자라면 그의 출세는 기본적으로 바실리오스 2세의 후광을 배경으로 한 까닭일 수 있다.
3. 쿠데타
3.1. 배경
1056년 8월에 정권이 바뀌자 동부군의 주요 지휘관인 이사키오스와 카타칼론 등은 새로운 황제가 관료들과 시민들에게 작위 승진이나 선물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혜택을 받기를 바랐다. 이들은 황제를 직접 면담하여 이사키오스와 카타칼론에게 '의장' 품계를 내려줄 것 등을 요구했다. 이 '의장'(Proedros)은 곧 원로원 의장을 뜻하는 직급으로서 963년에 창설되었으며 11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전히 왕실의 인척이나 정부의 가장 명성 높은 관료 혹은 학자들에게 주어지는 자리였다. (963년 이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이 원로원의 수장을 겸했다.)
하지만 미하일 6세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미하일은 군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메세지가 주어졌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카타칼론과 이사키오스는 자신들이 대동한 군 지휘관들과 함께 1056년 8월 바로 그 무렵에 몰래 성 소피아 교회에서 회합을 열었다. 역시나 유력한 군 지휘관 출신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및 그의 친척이자 총대주교인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 역시 여기에 참석하거나 이를 최소한 방조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쿠데타 모의는 1056년 말 혹은 1057년 연초에 모의에 가담하고 있었던 브린니오스의 갑작스런 반란으로 그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3.2. 진행
콘스탄티노스 9세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아르메니아 변경을 헤집고 다니는 유목민들과 셀주크 왕조의 추가적인 내습에 대비하여 마케도니아의 금군을 동방 전선으로 전진 배치할 것을 결정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 역시 동부군 장성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동부군을 견제하는 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새롭게 카파도키아에 배치된 이 병력을 지휘하던 인물이 니키포로스 브린니오스였다. 브린니오스는 앞에서 나온 것처럼 이사키오스 쿠데타 모의에 가담해 있었는데 1056년 - 1057년 전환기 쯤에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요안니스 옵사라스라는 재무관을 체포하는 일을 벌였다. 당시 옵사라스는 제국 재무부 군사국에서 파견되어 카파도키아의 군사들에게 나누어줄 봉급을 소지하고 있었다. 브린니오스는 그를 체포하고 돈을 빼앗아 반란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곧 아나톨리코스 군단 소속의 리칸티스 장군이 이를 눈치채고 재빨리 브린니오스를 쳐 진압함으로서 사태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제 브린니오스의 체포 및 송환으로 말미암아 이사키오스 쿠데타 모의자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되었다. 브린니오스가 언제든 자신들의 계획을 고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들은 1057년 3월, 예정보다 계획을 앞당겨 반란을 일으켰다. 제국 동부 전선의 핵심을 이루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수비대까지 차출한 대규모 병력으로서, 이들은 일전을 각오하였다. 물론 이들이 반란에 동조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웠던 까닭에 정부의 명령서를 위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군의 존경을 받는 케카브메노스가 직접 이사키오스의 호위대를 거느리고 각지에 흩어진 금군 부대를 위협하고 달래는 어려움을 여러차례 겪고 나서야 주요 변경의 금군 부대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1] 동부 지역의 변경을 지키는 정규군을 차출함은 물론이고 동부 내륙에 이르는 상당수의 병력까지 대규모로 차출함에 따라 지방의 방어력은 급격하게 취약해졌다. 그러나 아나톨리코스와 카르시아논 등 상대적으로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군단들은 상당수가 이사키오스의 반란에 거부감을 느꼈다. 이들은 오히려 반대로 치달아 정부군의 주를 이루고 있는 서부군에 가담해버렸다. 이사키오스의 쿠데타는 이렇듯 그 동력원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정부군은 미하일 6세의 조서에 따라 니코미디아에 방어선을 준비했다. 그러나 곧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니케아에 다시 주둔할 것을 명령하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들은 니케아로 이동하다가 이미 그곳을 장악하고 역시 자신들을 향해 나아오고 있던 반군과 맞닥뜨렸다. 이들은 상가리오스 강을 가로지르는 석조 대교 인근에서 싸우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지어진 이 다리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와 이 전투를 페트로에 전투 혹은 하디스-폴리몬 전투라고 부른다. 반군은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정부군을 격파하였으며 퇴각하는 이들을 확실히 제압하려다가 엄청난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 당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연대기에서 이사키오스를 논할 때마다 언급이 되었고 이사키오스 쿠데타와 이후 수립된 정부에도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역할을 했다.
이후 미하일 6세 정부와 이사키오스 진영은 타협을 논의하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나 그 친적이고 군부와도 연관이 있는 콘스탄티노스[2] 등이 정부를 전복하는 일이 일어났다. 완전히 승리한 이사키오스는 9월 1일, 수도에 입성하였으며 9월 2일에 대관 의례를 모두 완료했다.
4. 치세
정부 기능을 접수한 이사키오스는 첫날부터 바로 궁정에 들어가 집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곧장 미하일 6세 시기에 주요 관료와 원로원 의원을 지냈던 많은 인물들을 추방하거나 관직 및 품계를 삭탈하는 조처를 취했다. (물론 대부분의 관료들은 충분한 선물을 받고 그대로 자리에 남았다) 그리곤 그의 친위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4.1. 재정 개혁
이사키오스 정권이 시급하다고 파악한 현안은 재정의 문제였다. 당시에는 숱한 전쟁으로 인하여 재정 수지가 악화되어 있었으며 바실리오스 2세가 저축한 비축금 역시 대부분 소모된 상태였다. 이 문제 해결에 이사키오스는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가 택한 노선은 강경한 것이었다. 이전 정부까지 여러 이유로 부과되었던 세제 혜택을 대량으로 철폐하고 정부에서 민간이나 교회, 수도원에 양도되었던 모든 토지들을 강압적으로 회수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옛 황제들이 증명서로서 나누어주었던 금인칙서까지 취소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강경한 수단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 비록 재정 회복이 시급한 문제긴 하였지만 죄인에게서 재산을 박탈하는 듯한 태도는 결코 호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특히 수도원 재산에 함부로 개입한 문제는 점점 세력을 강화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청과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였다.
4.2. 대외 정책
이사키오스는 대외적으로도 군인 출신다운 강직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의 태도를 보고 헝가리, 셀주크 제국 및 파티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 기존의 노선을 버리고 나오는 것으로 간주,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특히 헝가리는 1053년 이후 발칸 북부에 정착하고 있는 페체네그와 연계하여 제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1059년, 이사키오스는 동쪽 끝 이베리아 지역의 원정을 다녀온 후 곧바로 페체네그에 대한 공략을 준비했다. 대군을 동원한 동로마 군대가 이스트로스 강까지 진출하자 헝가리가 먼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이탈했다. 곧이어 페체네그의 다른 부족들도 황급히 화친을 맺었다. 셀티(Selte)가 거느린 부족만은 제국군에 저항하였으나 수적 차이가 압도적이었기에 비밀리에 발칸을 탈출했다. 9월 말에 이사키오스는 귀환을 시작했다.
4.3. 정치 실패
재정 개혁을 도모한답시고 강압적으로 시민의 혜택을 빼앗아 간 처사부터 시작하여 이사키오스의 정치적 능력은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설사 대지주의 토지를 빼앗는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 이사키오스였으므로 항변의 여지가 없는 셈이었다. 여기에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하게 된 그는 예전과 달리 동생 요안니스에게 형제의 예보다는 군신의 예를 갖추도록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요안니스는 조용히 이에 따랐지만 주변의 측근들과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서도 의문을 가졌다.
여기에 1058년부터 수도원 재산 압류 문제 등으로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와 갈등이 불거진 것도 큰 문제를 일으켰다. 대주교는 점차 이사키오스에게 '폐위'를 암시하는 강한 정치적 압박을 넣기에 이르렀다. 이사키오스는 그가 자신의 친척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다는 추측에 설득되었다. 하지만 케룰라리오스는 당시 강직한 성직자로서 시민의 지지를 널리 받던 인물이었기에 수도에서는 손을 대기 어려웠다. 이에 1058년 11월, 케룰라리오스가 잠시 수도를 떠나 근교 수도원을 방문하는 시점을 노렸다. 총대주교는 황제가 보낸 병사들에게 갑자기 붙들려 굴욕적으로 끌려나왔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 해안가에서 즉흥적으로 유배에 처한다는 칙서를 전해들었다.
이사키오스는 케룰라리오스를 부정한 혐의로 기소하여 공식적으로 주교좌를 박탈하기를 원했다. 몇 명의 관료와 성직자들이 그의 의견을 따라 대주교에게 먼저 명예롭게 자진 사퇴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완고한 대주교는 자신을 찾아온 주교들을 거침없이 비판하여 용서를 빌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사키오스는 끝내 자신이 총애하는 미하일 프셀로스를 통해 케룰라리오스의 반역 음모와 이단 혐의를 준비하여 소송을 진행할 준비에 들어갔다. 1059년 1월에 케룰라리오스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는 점점 더 확대되었을지도 모른다. 후임 대주교로 역시 학식이 깊으며 프셀로스의 지인인 콘스탄티노스 리쿠디스(1059년 - 1063년)가 지명되면서 갈등은 일단 봉합되었다. 이 문제가 마무리되자마자 곧바로 북벌을 떠난 것을 보면 이사키오스가 이후로 정치에 대한 염증에 빠진 것은 아닌가 싶다.
5. 퇴위
1059년 9월 원정에서 돌아온 뒤 이사키오스는 2개월 동안 사냥에 몰두했다. 그런데 돌연히 11월 중순에 갑자기 벼락을 맞고 쓰러졌다. 프셀로스와 어의가 모두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이 3일 뒤부터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곧 그는 블라헤르네 궁으로 돌아왔다. 11월 24일이 되자 더 이상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콤니노스 일가가 침전으로 들어와 울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에 이사키오스는 교회에서 '참회'를 하고 싶다며 굳이 몸을 일으켜 말을 타고 성 소피아 교회로 향했다. 어떤 성격의 참회인지는 알 수 없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언제나 그의 부담이었던 페트로에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이 떠올랐던 것인가? 대주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데서 비롯된 것인가? 어찌되었든 아내가 남편의 죄를 대신 지겠다며 만류했지만 이사키오스는 궁에서 교회까지 이동하였다. 교회에 도착할 무렵에 그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성 소피아 교회로 들어가 참회를 마친 뒤 그는 후계자를 결정했다. 케룰라리오스의 친척이자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의 성공을 도와준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차기 황제가 될 것이었다.
정권이 받던 무언의 압력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이사키오스는 퇴진을 선택한 것이다. 11월 25일에 모이시아 절도사로 근무하던 콘스탄티노스가 궁전에 도착하여 이사키오스를 알현했고 여기서 정권을 인계받았다. 이사키오스는 가족과 후계를 부탁한 뒤 머리를 깎고 스투디온 수도원으로 은거했다. 이후 1060년에 군부 쿠데타 혹은 원로원 측의 쿠데타가 한 차례 더 발생하는 일도 있었으나 이사키오스는 더 이상 정계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은퇴 6개월 6일 후인 1060년 5월 31일, 사망했다.
6. 평가
이사키오스는 바실리오스 2세의 피후견인이었다는 굉장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군대 내에서 완전한 지지는 받지 못했어도 원로원과 대립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지지를 통해 집권할 수 있었다. 이 지지를 바탕으로 그는 강력한 개혁 정책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 능력은 개혁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폭정으로 만들어갔다. 비록 정책 결정에 있어서 프셀로스와 같은 전문가나 학자의 조언을 먼저 귀담아듣는 미덕을 보이긴 했어도 그가 동로마 제국의 아주 세심한 여론 정치에서 보인 서투른 행보는 여지없이 자신의 평가를 악화시키기 좋은 약점이었다.
이때 콤니노스 등 파플라고니아 군부에 대해 학을 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콤니노스 가문을 싫어하게 되었고 그 반대 급부로 카파도키아 군부를 더 지지하게 되었다. 로마노스 4세, 니키포로스 3세와 같은 군인 황제들이 하나같이 카파도키아 가문 출신인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또한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동부 유프라테스 방어선 등의 주요 병력을 이탈시킨 것 역시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내전 와중에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나 제국은 재정 수지가 좋지 않아 이의 개선에 주로 몰두하여야 했으며 그만큼 인력 충원은 매우 더뎠다. 거기에 정변 성공 후에 바로 부대들을 원대 복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1057년부터 1059년 사이 소아시아 동부 방어선은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튀르크의 다양한 유목민들이 동부 소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노략하였다. 실제로 연속된 전쟁으로 점점 피해가 누적되고 중앙 정부와도 관계가 악화된 끝에 동부 수비 라인의 최전선은 콘스탄티노스 10세에 들어 유프라테스 지역으로 후퇴해야했고 그마저도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다. 유프라테스 동쪽에 위치한 지역은 연속된 침략으로 황폐해졌다. 또한 바스푸라칸, 아르사니아 계곡 등의 방어선이 붕괴됨에 따라 연이어 에데사, 북부 시리아로 이어지는 지역까지 여지없이 튀르크족의 침략 대상으로 노출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7. 참고 문헌
Alexander D. Beihammer, Byzantium and the Emergence of Muslim-Turkish Anatolia, ca. 1040-1130, Routledge Press, 2017.
John Skylitzes, John Wortley Tr., A Synopsis of Byzantine History, 811-1057,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Michael Psellos, E. R. A. Sewter Tr., Chronographia, Yale University Press, 1952.
Paul A. Blaum, Diplomacy Gone to Seed: A History of Byzantine Foreign Relations A.D. 1047-57,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Kurdish Studies, Vol.18, 2004.
Telemachos C. Lounghis, The Byzantine historians on politics and people from 1042 to 1081, Byzantion Vol.72, No. 2, 2002.
[1] 아르메니아 역사가인 아리스타키스는 비슷한 시기 동부 전선의 주요 기병 전력을 6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2] 이전 편집에서 그를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로 표현했지만 이는 오기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