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평

 


李参平
? ∼ 1656년
1. 소개
2. 생애
2.1. 순왜 활동과 도일
2.2. 고령토 발견과 아리타 자기 생산
2.3. 아리타 자기의 세계 수출과 명성
2.4. 말년
2.5. 일본의 신이 되다


1. 소개


조선 중기의 도공으로 아리타(有田)·이마리(伊萬里) 도자기의 모태를 만든 인물이자, 임진왜란 시절 일본에 부역했다가 일본으로 도주한 순왜다. 일본어식 이름은 카나가에 산베에(金ヶ江 三兵衛)이며, 한국어식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성이 이씨라는 것만 '타쿠가(多久家) 문서'에 남아 있으며, '이삼평' 이라는 이름은 산베에라는 이름을 한국어식 발음으로 복원, 추정한 것.[1]

2. 생애



2.1. 순왜 활동과 도일


고향을 비롯해, 조선에서 살았을 당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일본식 성씨를 카나가에(金ヶ江, 금강)로 지은 것으로 볼 때 충청도금강(錦江) 부근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지만, 한자도 다르고[2] 뚜렷한 근거는 없다보니 당시 조선에서 도자기로 유명했던 다른 고을인 경기도 이천이나, 전라남도 강진,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이 중 김해설의 경우 이삼평을 일본에 데려간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6년 ~ 1618년)가 정유재란 당시 김해 왜성에서 농성했던 것이 근거로 꼽힌다. 그리고 그의 성 카나가에도 금(김, 金) 뒤의 ‘바다(海)를 강(江)으로 고친 것’이라는 것.
임진왜란 때 조선인 포로로 일본에 끌려왔는데 카나가에가 문서에 의하면 정유재란 당시 길을 잃고 방황하는 히젠노쿠니(肥前国) 사가번(佐賀藩)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대에 길을 안내한 공로로 일본에 건너오게 되었다고 하며, 이삼평 비문에도 '공(이삼평)은 우리 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이런 기록들은 일본 입장에서 후대에 그를 칭송하면서 쓴 기록이라 100퍼센트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정 부분 순왜 활동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2.2. 고령토 발견과 아리타 자기 생산


일본에 이삼평을 데리고 간 나베시마는 그를 그의 가신인 타쿠(多久)의 영주 타쿠 야스토시(多久 安順)에게 맡긴다. 이삼평은 처음에 사무라이 계급을 받아 야스토시의 이야기 상대역을 맡는 등 소홀치 않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도공 18명과 함께 아리타(有田)로 옮겨지게 되는데, 아마도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원래 도공이었는지라 일본 사무라이 신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리타에 거주지를 옮긴 그는 나베시마의 영지를 전전하며 도자기의 원료인 양질의 고령토를 찾아헤맨다. 기존의 흙을 이용해 도자기를 빚어 꽤 만족할 만한 그릇을 얻었으나, 이삼평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양질의 고령토를 찾겠다고 청하여 야스토시는 이를 허락하고 마음대로 실험을 하도록 했다.
몇 년을 찾아다닌 끝에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이즈미산(泉山)에서 순백색의 자기를 구워내는 백토를 발견하였고, 1605년경 이곳에 ‘텐구다니가마(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 자기의 시초가 된다.
이삼평이 백자광산을 발견하고 자기를 구워내자 도공들은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아리타는 명실공히 일본에서도 유명한 도자기 마을이 되었다. 나베시마 역시 이를 크게 치하하였으며, 타쿠 야스토시도 자신의 하녀를 결혼시켜 부부의 연을 맺어주었다. 그 이후 이삼평은 '카나가에'(金ヶ江)로 창씨개명하여 아리타에 정착하여 산다.
이후 나베시마 번의 적극적인 후원이 더해지면서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다. 나베시마 번에서 생산되는 자기는 청화백자와 오채자기가 주를 이루었고, 크기가 규격화ㆍ표준화되고 색상이 다채롭고 호화로운 편이며, 공예품적인 디자인 특성을 지녔다. 대량 생산과 판매를 위한 산업 생산품으로서의 성격이 컸던 것이다. 조선 자기장들의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명나라 도자 양식을 수용하고 거기에 일본의 전통 회화나 공예의 색상과 문양 등을 적용시킴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2.3. 아리타 자기의 세계 수출과 명성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50년 1백45개의 일본 자기를 구입했는데, 이는 일본이 자기를 해외에 수출한 최초의 사례였다. 1659년에는 5만6천7백 점의 자기가 수출되었는데, 유럽에 대량 수출되어 널리 퍼지면서 18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동양, 일본 취미 붐 자포네스크 국면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3] 아리타 자기를 이마리(伊萬里) 자기라고도 하는데, 아리타에서 가까운 이마리 항구로 옮겨 출하했기 때문이다. 첫 수출 뒤 70년 동안 약 700만개의 자기가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물건이 소장되어 있다. 아리타에서는 지금까지도 수천 톤의 흙을 퍼내어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명품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2.4. 말년


이삼평은 이 공로로 자손 대대로 번으로부터 급여를 받았으며, 이시바(石場)의 쇼야(庄屋 : 지역의 관리자)가 되었다. 또 백자 광산의 채굴권도 부여받았고, 그의 밑에는 150여명의 조선 출신 도공이 딸려 있었다. 대규모 도공을 관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후 그는 1653년 가미시라와의 저택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친다.

2.5. 일본의 신이 되다


1656년 아리타 주민들은 니리무라(二里村)의 오자토(大里)에 있는 하치만궁의 신체를 받아서 오타루(大樽) 언덕에 아리타야마소뵤하치만궁(有田山宗廟八幡宮)을 건립할 때 이삼평과 나오시게를 합사하여 모셨다. 이 신사는 1828년 대화재로 인해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메이지기에 접어들어 스에야마신사(陶山神社)로 이름을 고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긴다. 1917년에는 아리타 시내가 보이는 렌게이시산(蓮花石山) 정상에 '도조 이삼평비'를 세운다. 조선인의 기념을 일본 신을 모신 신사 위에 세운다는 것에 대해 반발이 있었으나, 구 나베시마의 후예들이 송덕회를 조직하고 명예총재로 거물급 정치인 오쿠마 시게노부를 추대하자 일사천리로 건립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삼평이 백토를 발견한 곳에는 이삼평발견지자광지(李參平發見之磁鑛地)라는 대형 기념비가 세워졌고, 이시바신사(石場神社)의 경내에 이삼평상이 안치되었다. 이삼평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자 히에코바(裨古場)의 보은사 묘지에 가묘가 건립되었다.[4]
[1] 조선에서의 이름에 대한 연구는 메이지 시기에 시작되어, 1917년에 도조 이삼평비(陶祖 李參平碑)가 세워지면서 이삼평 내지 이참평으로 불리게 되었다.[2] 물론 한국의 전통 지명들은 보통 거슬러올라가면 고유어 음차라서 같거나 비슷한 음의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현상도 있긴 했으므로 한자가 다르다고 무조건 아니랄 수도 없다.[3] 일본 자기가 뛰어났던 것과 함께, 17세기 중후반 당시 이른바 명청(明淸) 교체기를 맞이하고 오삼계(吳三桂)의 반란까지 일어나 자기 생산과 수출이 여의치 않았던 중국의 정세도 크게 작용했다.[4] 이삼평의 무덤은 훗날 텐쿠타니가 있는 시라카와(白川)에서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