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1. 개요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약칭 VOC.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설립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2년 후인 1602년에 설립하였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임과 동시에 17세기 세계 최대의 회사였다.
2. 역사
당시 무역 항로 중에서 최대 이익을 내는 항로는 인도, 중국, 동남아 항로였다. 후추는 유럽에서 고가에 팔리고 중국의 차와 도자기도 역시 값비싸게 팔려서 네덜란드의 한 무역 회사가 포르투갈의 독점 상품이었던 동남아시아 향료 무역에 진출했다. 처음 진출한 시기는 1595년으로, 이 해의 첫 항해는 투자자들에게 무려 4배의 수익을 안겨 줄 정도였다.
이 모습을 본 유럽 각국의 다른 회사들이 동남아시아 무역에 앞다투어 뛰어들어 출혈 경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1600년 영국 상인들은 서로 연합하여 영국 동인도 회사를 결성했다. 이에 영국이 동남아시아 무역에 뛰어드는 것을 본 네덜란드 정부는 이에 대항을 함과 동시에 영국과 스페인과의 관계를 파탄내 버렸다. 독립을 한 대가로 대 스페인 무역이 중단돼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어 돈벌 기회가 널려있는 곳에 더 투자도 할 생각으로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네덜란드 의회는 대규모 무역선단을 꾸리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재정만으로는 조금 무리가 있어서 고민하던 차에 네덜란드의 부자들과 국민들에게 한푼 두푼 투자 받아서 대규모 선단에서 나오는 이익을 나누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됐다.
그런데 돈을 받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투자를 받을 때, 이익을 나눌 때 표시를 어떻게 하냐는 것인데 수천 명 투자자의 몫만큼 배에 일일이 선을 그어놓을 수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던 네덜란드는 투자 받은 돈을 한 곳에 모아놓고 그 자금에 대한 소유권을 나타내는 종이 권리증서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증서에는 동인도 회사 주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주식의 시작이었다. 이를 따라서 다른 유럽 열강들도 상인들과 왕실이 연합해서 주식회사들을 만들게 되었다. 여기서 주주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이익을 배당한다는 주식회사의 개념이 생겼다. 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다. 회사의 지분을 판매하는 주식이라는 개념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최초이며, 역사상 최초의 증권거래소도 네덜란드에서 바로 이 동인도 회사 주식을 거래하기 위해 생겼다. 즉, 근대 금융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큰 기여를 한 셈.
회사를 처음 설립할 때 1602년 투자금 650만 길더였다. 현재 가치로 300만 유로, 2013년 12월 3일 자의 원화로 약 43억 7백만원. 정부도 권한을 2만 5천길더로 환산을 해서 투자한 주주로서 참여해 네덜란드 국민들의 신뢰를 높였다. 그 외에 영국과 마찬가지로 출혈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독점권을 부여했으며 또 일개 회사 주제에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전쟁 발동권을 가진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처음 10년간은 투자자들이 조선, 건축, 아시아의 무역왕국 건립 등 장기적인 사업에 투자하길 원해서 전혀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영국 동인도 회사보다 은화 부족 현상을 훨씬 일찍 알아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산업 혁명 이전의 유럽이 천연자원도 모자라고 기술도 부족하여 아시아에 내다 팔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팔 물건이 없다 보니 당시의 국제 결제 수단인 은화를 주고 비단과 후추를 비롯한 사치품들을 구입해야 했고, 이것은 본국의 대규모 무역 적자로 이어졌다. 경쟁사였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 사치품들을 다시 유럽의 다른 나라에 내다 팔아서 무역 적자를 해소했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 즉 아시아에서의 중계 무역을 생각해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후추 무역으로 얻은 자산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말라카, 스리랑카, 일본 나가사키(데지마), 타이완 섬, 중국 광저우는 물론 페르시아에까지 상관을 설립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은과 구리가 많이 나서 네덜란드의 무역 적자를 상당 부분 해소해 주었다. 이 무렵 동인도 회사가 보급항으로 건설한 아프리카 남단의 상관이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다.
여기에 투자자들 중 갑자기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투자한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익을 받고 주식 권리를 포기하려고 했고, 또 어떤 다른 사람은 동인도 회사의 미래를 유망하게 보고 주식 권리를 신규로 혹은 증액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이 둘의 주식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넓은 네덜란드에서 서로 이런 생각들을 의사 표시하지 못하고 있어서 거래가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이를 해결하려고 1609년에 생긴 것이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이고 여기서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과부하를 막기 위해 1609년에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신용 대출도 있었다고 한다. 은행의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정부가 은행에 간섭할 수 없도록 법을 제정했는데, 네덜란드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적대국에게도 합법적으로 돈을 빌려줬다. 독립적인 권한을 가진 동인도 '회사'에 대한 소개지만 사실상 네덜란드라는 국가 자체와 뗄 수 없는 관계라 같이 서술한다.
이렇게 은행, 증권거래소, 유한회사를 하나의 금융 체계로 통합시켜 폭발적으로 돈을 끌어모았다. 전성기인 1670년대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50척의 상선, 40척의 군함, 50,000명의 직원과 10,000명 규모의 군대를 거느린 거대 조직이 되었고, 회사의 주식은 배당금으로만 액면가의 40%를 배당하는 큰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주가가 워낙 많이 올라서 상대적으로 배당금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 못지않게 많은 해악을 점령지에 끼쳤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가 워낙 악명이 높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60년대 남명이 청나라에 멸망하면서 중국무역이 대폭 감소하고,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은 수입이 감소하자 회사의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하였다.[3] 동인도 회사는 기존의 향료 무역으로부터 커피, 차, 도자기, 면직물 등으로 상품의 종류를 늘리고 상관의 숫자를 늘려 대응했지만, 경쟁사인 영국 동인도 회사가 규모를 키우고, 1700년대 이후로는 신대륙에서도 향료, 설탕 등의 상품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에서의 수익이 줄어들게 되었다.
18세기 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러, 나폴레옹에 의헤 네덜란드에 세워진 괴뢰국인 바타비아 공화국 정부에 의해 국유화되었고, 1799년 해산하였다. 동인도 회사가 소유한 식민지(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역시 네덜란드의 직할령이 되었다.
3. 해산 이후
구 동인도회사의 금융, 상업 부문은 네덜란드 무역회사(NHM)에 인계되었다.[4] 이 회사는 현 ABN-AMRO 은행의 전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
[1] 2020년 3월 22일 기준 무려'''9035조원'''이다. 삼성전자가 시가총액 499조원, 현존하는 기업중 시가총액 1위인 애플이 시가총액 2,287조원인걸 생각하면...[2] 무섭게도 초기 주식시장 양대 거품인 미시시피 거품과 남해회사 주식사건이 바로 뒤를 잇는다.[3] 이 시기 조선은 경신대기근이라는 끔찍한 사태가 휩쓸고 간 지라 헨드릭 하멜등의 연결 고리가 있었더라도 동인도 회사와 접촉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하멜의 탈출 이후 네덜란드 상선이 조선과의 교역시도를 하긴 했다. 일본의 방해와 거듭되는 항해실패로 포기했지만.[4] 다만 직접적인 전-후신 관계는 아니다. 위키피디아 등에서 NHM이 한동안 VOC의 직접적인 후신인 양 서술되어 있었다가 나중에 고쳐졌을 정도인걸 보면 꽤나 널리 퍼진 오류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