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문타시르
페르시아어 اسماعیل منتصر بن نوح
별명인 문타시르는 '승리자' 라는 뚯이다.
''' 사만 왕조 최후의 불꽃 '''
이스마일은 사만 왕조 말기의 군주로서 역시 무너져 가던 제국을 살리려 노력한 누흐 2세 (재위 976 ~ 997년)의 세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들인 만수르 2세와 아브드 알 말리크 2세는 모두 제국의 붕괴를 막지 못하였고 사만 왕실은 튀르크 인[1] 들의 포로가 되었다.
이스마일은 극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였고 호라즘에 이르러 총독에게 도움을 구하였다. 그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의 명분을 쌓으려는 생각이 든 총독은 군대를 빌려주었고,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한 이스마일은 습격과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빠른 속도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카라한 중앙군이 몰려오자 후퇴하였다.
후퇴한 이스마일이 세력을 이끌고 향한 곳은 남쪽의 가즈니 왕조였다. 사만 왕조의 멸망 이후 호라산은 사만 조의 신하국이던 가즈니 왕조가 접수하였는데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사만 조의 땅이었는지라 동조자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 생각은 현실이 되어 이스마일은 가즈니 령 호라산의 치소인 니샤푸르를 점령하였고 총독으로 있던 술탄 마흐무드의 동생 나스르를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마흐무드가 정예병과 함께 진군하자 이스마일은 다시 피신을 선택하였다.
호라산에서 쫓겨난 이스마일은 현재 우즈베키스탄 중부에 해당하는 자라프샨[2] 으로 가서 오우즈 튀르크인들을 만났다. (1003년) 그들의 협조를 얻은 이스마일은 곧장 남쪽으로 진격하여 카라한 조의 군대를 수차례 격파하였고, 이에 카라한 조의 나스르 칸이 정예병을 이끌고 트란스옥시아나로 왔지만 그마저도 패배시켰다. 하지만 이스마일은 튀르크 인의 도움을 받아 튀르크 칸국을 격파하고 사만 조를 복원시키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는지 연이은 상승세를 접고 호라산으로 떠나버렸다.
이스마일은 뻔뻔하게도 자신이 선제 공격했던 가즈니 조의 술탄 마흐무드에게 (게다가 사만 왕조의 멸망을 앞당긴 것도 가즈니 세력이었다 !) 도움을 청하였으나 인도 침공에 앞서 배후에 유능한 이스마일 세력을 두기를 원치 않던 마흐무드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후 중앙아시아를 정처 없이 떠돌던 이스마일은 자라프샨 계곡으로 돌아와 자신이 버렸던 오우즈 튀르크인들에게 재차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번에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이스마일은 근처의 다른 부족의 지원까지 얻은 후 1004년에 다시 부하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스마일은 그해 5월에 카라한 군대를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다음 전투에서 결국 오우즈 튀르크가 전선을 이탈해 버리며 패배, 이스마일은 눈물을 머금고 호라산으로 후퇴하였다.
1004년 말, 이스마일은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시금 트란스옥시아나에 진입하려 하였다. 하지만 카라한 측은 국경 경비를 대폭 강화시켜 놓은 뒤였고, 부하라에 닿기도 전에 튀르크 기병대에 포위되어 대패하였다. 그는 중상을 입은채로 간신히 전장에서 빠져나왔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스마일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메르브 인근의 아랍인 마을에 머물렀는데, 그가 바로 가즈니 - 카라한 국에서 지명수배된 이스마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마을 이장은 후환이 두려웠던 나머지 그를 살해하였다. (1005년 2월)
이스마일의 죽음으로 사만 왕조는 200여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이스마일이 카라한 조를 극심히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만 가문의 후예들은 카라한 칸들의 비호 아래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별명인 문타시르는 '승리자' 라는 뚯이다.
1. 개요
''' 사만 왕조 최후의 불꽃 '''
999년에 카라한 칸국에게 부하라가 함락되며 멸망한 사만 제국의 부흥을 위하여 1000년 ~ 1005년에 걸쳐 6번이나 시도한, 불굴의 의지를 지닌 근성가이. 그는 한때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회복하고 카라한 왕조의 칸 나스르가 직접 이끈 대군을 격파하는 위엄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중상을 입은 후 메르브 근처의 마을로 피신하였다가 살해되어 투쟁으로 가득하였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오직 죽음만이 그를 막을 수 있었다.
2. 생애
이스마일은 사만 왕조 말기의 군주로서 역시 무너져 가던 제국을 살리려 노력한 누흐 2세 (재위 976 ~ 997년)의 세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들인 만수르 2세와 아브드 알 말리크 2세는 모두 제국의 붕괴를 막지 못하였고 사만 왕실은 튀르크 인[1] 들의 포로가 되었다.
2.1. 전설의 시작
이스마일은 극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였고 호라즘에 이르러 총독에게 도움을 구하였다. 그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의 명분을 쌓으려는 생각이 든 총독은 군대를 빌려주었고,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한 이스마일은 습격과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빠른 속도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카라한 중앙군이 몰려오자 후퇴하였다.
2.2. 두번째 시도
후퇴한 이스마일이 세력을 이끌고 향한 곳은 남쪽의 가즈니 왕조였다. 사만 왕조의 멸망 이후 호라산은 사만 조의 신하국이던 가즈니 왕조가 접수하였는데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사만 조의 땅이었는지라 동조자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 생각은 현실이 되어 이스마일은 가즈니 령 호라산의 치소인 니샤푸르를 점령하였고 총독으로 있던 술탄 마흐무드의 동생 나스르를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마흐무드가 정예병과 함께 진군하자 이스마일은 다시 피신을 선택하였다.
2.3. 세번째 시도
호라산에서 쫓겨난 이스마일은 현재 우즈베키스탄 중부에 해당하는 자라프샨[2] 으로 가서 오우즈 튀르크인들을 만났다. (1003년) 그들의 협조를 얻은 이스마일은 곧장 남쪽으로 진격하여 카라한 조의 군대를 수차례 격파하였고, 이에 카라한 조의 나스르 칸이 정예병을 이끌고 트란스옥시아나로 왔지만 그마저도 패배시켰다. 하지만 이스마일은 튀르크 인의 도움을 받아 튀르크 칸국을 격파하고 사만 조를 복원시키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는지 연이은 상승세를 접고 호라산으로 떠나버렸다.
2.4. 4 & 5번째 시도
이스마일은 뻔뻔하게도 자신이 선제 공격했던 가즈니 조의 술탄 마흐무드에게 (게다가 사만 왕조의 멸망을 앞당긴 것도 가즈니 세력이었다 !) 도움을 청하였으나 인도 침공에 앞서 배후에 유능한 이스마일 세력을 두기를 원치 않던 마흐무드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후 중앙아시아를 정처 없이 떠돌던 이스마일은 자라프샨 계곡으로 돌아와 자신이 버렸던 오우즈 튀르크인들에게 재차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번에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이스마일은 근처의 다른 부족의 지원까지 얻은 후 1004년에 다시 부하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스마일은 그해 5월에 카라한 군대를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다음 전투에서 결국 오우즈 튀르크가 전선을 이탈해 버리며 패배, 이스마일은 눈물을 머금고 호라산으로 후퇴하였다.
2.5. 마지막 시도와 죽음
1004년 말, 이스마일은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시금 트란스옥시아나에 진입하려 하였다. 하지만 카라한 측은 국경 경비를 대폭 강화시켜 놓은 뒤였고, 부하라에 닿기도 전에 튀르크 기병대에 포위되어 대패하였다. 그는 중상을 입은채로 간신히 전장에서 빠져나왔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스마일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메르브 인근의 아랍인 마을에 머물렀는데, 그가 바로 가즈니 - 카라한 국에서 지명수배된 이스마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마을 이장은 후환이 두려웠던 나머지 그를 살해하였다. (1005년 2월)
이스마일의 죽음으로 사만 왕조는 200여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이스마일이 카라한 조를 극심히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만 가문의 후예들은 카라한 칸들의 비호 아래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