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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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의 중심, 레기스탄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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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중세 건물인 비비 하눔 모스크
우즈베크어 : Samarqand, Самарқанд
타지크어: Самарқанд
러시아어 : Самарка́нд
아랍어 : سمرقند,
페르시아어 : سمرقند
영어 : samark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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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수도 타슈켄트에 이은 제2의 도시로 중앙아시아의 역사적인 도시로 유명하다.
2. 역사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중심도시로서 장안,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실크로드하면 떠오르는 도시다. 현재 남은 중앙아시아의 도시 중 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략 4천 년 전부터 인류가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문헌 사료에서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정복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의 기록에는 마라칸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는 소그드어 Asmarakand에서 유래한 것이다. Asmara는 돌 혹은 바위, kand는 성채 혹은 도시를 가리키며, 발음이 약간 변하여 오늘날의 사마르칸트가 되었다.
고대의 사마르칸트는 상인 민족으로 유명한 소그드인들의 중심지였으며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중간 기착지 중 하나였다. 소그드인들은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남쪽의 이란에 기반한 아케메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박트리아, 사산 왕조 혹은 북쪽과 동쪽의 샤카족, 쿠샨 왕조, 에프탈, 괵튀르크 등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각축장 아래에 있었다. 사마르칸트는 뛰어난 입지 조건과 소그드인들의 탁월한 상업 능력 덕택에 여러 지배세력들을 거치면서도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무역 도시로 남을 수 있었다.
8세기 초 이란을 정복한 우마이야 왕조가 사마르칸트를 점령하면서 이슬람이 유입되었고, 우마이야 왕조의 뒤를 이은 압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압바스 왕조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이후 등장한 이란계 국가인 사만 왕조가 부하라, 사마르칸트 일대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9~10세기 사마르칸드는 번영하는 도시로서 명망이 높았다. 도로는 석재로 포장되었으며 도시 전체에는 정교한 상수도 체계가 설치되어 식수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었다. 상류층 이외에 상당수의 가정은 우물로 식수를 충당하긴 했으나 대신 대부분에 가정에는 간단한 하수체계가 도입되었으며 이들이 물자를 수입해오는 중국보다 보건과 위생 수준이 월등한 편이었다. 도시에는 목욕탕이 많았으며 진흙과 알칼리, 소금을 사용한 목욕이 유행했다. 사만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사마르칸트는 카라한 왕조, 카라 키타이, 호라즘 왕국 등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13세기 초 몽골 제국의 침공 때 약탈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끌려갔지만, 워낙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기 때문에 곧 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초 차가타이 한국 시대에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매우 크고 훌륭한 도시이며 아름다움은 그 중 제일이라고 평했다. 차가타이 한국 다음에 들어선 티무르 제국은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았으며, 현재 도시에 남은 수많은 역사적 관광지가 이 당시에 만들어진 것일 만큼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의 문화, 예술, 무역의 중심지로서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16세기 초 차가타이 칸국의 일파였던 우즈베크인들의 침략으로 티무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사마르칸트의 번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새 우즈베크족 왕조 부하라 칸국이 사마르칸트 대신 부하라를 수도로 삼으며 지역의 중심지로서의 주도권을 내줬다.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비단길의 가치가 떨어지고, 중앙아시아 일대가 유목민들의 침략과 내전으로 안정된 시대를 가지지 못한 바람에 18세기 쯤에는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황폐화되었다. 19세기 중엽에 들어서 러시아 제국에게 복속, 이후 소련령이 되었다. 한때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지만, 그 지위마저 1930년에 타슈켄트에 내주게 된다. 이후 모스크바와 타슈켄트를 잇는 철도가 지나가게 되면서 어느 정도 부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공중분해되어 우즈베키스탄의 도시가 되어 현재 동명의 주의 주도로 되었다.
3.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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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히진다 영묘
타슈켄트에서 아프로시욥 고속열차로 약 2시간 10분의 시간이 소요되며 가격은 일반석은 $18, 비지니스 석은 $25, 일등석은 $35 정도 한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만 고속선이고, 물론 부하라 등의 도시로도 운행되나 사마르칸트 이후로는 기존선으로 운행된다. 우즈벡 국내 항공 노선으로는 30분 정도면 사마르칸트 국제공항에 도착이 가능하다.
사마르칸트역 광장으로 나가면 수많은 택시기사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데, 바가지를 씌울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택시를 타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
레기스탄으로 시작해서 레기스탄으로 끝나는 도시. 우즈벡에서 보기힘든 횡단보도의 신호등도 레기스탄 근처에선 볼 수 있다.레기스탄에서 이슬롬 카리모프의 동상쪽으로 올라가 북동쪽으로 가면 비비하눔 모스크와 시장인 시압 바자르로 갈 수 있고, 같은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면 전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의 묘를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샤히진다 네크로폴리스가 나온다. 관광객들이 많은 도시라 관광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표지판들을 쉽게 찾을 수 있고 큰 길만 따라가면 관광은 어렵지 않은편. 레기스탄에서 샤히진다까지 도보로 1시간 정도가 걸리며, 중간중간 유적지를 모두 둘러보고 시압 바자르에서 쇼핑도 한시간 정도 해도 5시간정도면 충분하다.
그 외에 아프로시욥 역사 박물관, 울루그벡 천문대와 박물관, 티무르 본인과 그 일가의 왕릉인 구르에 아미르[4] 등의 관광지가 있다. 사마르칸트 근교에 있는 소도시 샤흐리삽스도 당일치기 관광지로 많이 간다.
배낭여행객들이라면 한국에서 일하다온 외노자 출신[5] 이나 한국어를 배우는 현지인을 만나서 가이드 받는걸 추천한다.
우즈베키스탄 제 2의 도시답게 나름 시가지 규모도 크며 역사유적만 있는 고도가 아니라 클럽이나 술집들도 많이 존재한다. 사마르칸트 사람들은 자기 고향 사마르칸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한국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니 매력적인 관광지.
4. 현재
중앙아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고도이자 우즈베키스탄 제일의 관광지. 도시 전체가 역사적인 장소로 가득하다. 위 사진에 있는 레기스탄 광장이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 우즈베키스탄 도심 시가지에서 보기 힘든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레기스탄 광장 앞에 존재한다. 세계 각 정부 수반들이 우즈베키스탄에 들리면 꼭 들르는 곳이 레기스탄 광장이다 보니 전반적인 시가지의 길거리와 다르게 포장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레기스탄 광장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이슬롬 카리모프의 동상도 덩그라니 세워져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레기스탄 근처와 낡고 오래된 주택가가 펼쳐진 구시가 사이에 거대한 벽을 쳐 낡은 모습을 가리는 꼼수를 썼다(...). 물론 안 보이게 일단 눈가림만 했지 찾아가려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는 있다.
레기스탄을 대표로 하여 사마르칸트 구시가지 동북쪽에 샤히진다 영묘라 하여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촌 쿠삼(Kusam)과 울르그벡의 은사, 자녀 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실크로드와 이슬람 감성이 융화되어 해질녘에 가면 경관이 황홀하다.
특이사항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의 제2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주민의 대다수가 타지크인이다. 사마르칸트는 부하라와 함께 역사적으로 타지크/페르시아인이 주도한 도시였고 현재에도 타지크인이 다수이기 때문에 여전히 타지크어가 일상생활에 널리 쓰인다. 사마르칸트의 주민의 약 70%가 타지크어를 모어로 쓰며, 도시 곳곳에서 타지크어를 많이 들어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타지키스탄에서 우즈베크인들이 많이 거주하기도 하는 후잔트(호젠트)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와 자매도시를 맺기도 했다. 그 외 일부 투르크멘인들도 산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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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고구려의 국제 교류를 다룬 책들에서 자주 나오는 벽화가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에 위치한 소그디아나 궁에 그려진 벽화인데[6] , 여기에 여러 나라 (차가니안[7] , 돌궐, 당 등...)에서 온 사신들과 접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 조우관과 환두대도를 찬 남자 두 명이 보이는데, 이들을 주로 고구려의 사신으로 해석한다. 이 무렵은 당나라의 대 고구려 압박이 심해지던 때이기 때문에 권영길 교수는 벽화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 사신들이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연개소문이 보낸 밀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신채호가 지은 <조선상고사>에서도 소개되는데, 연개소문이 오족루라는 사람을 돌궐의 여러 나라에 보내 당나라의 배후를 치게끔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이 벽화는 복제품으로만 볼 수 있다. 원본은 풍화로 거의 소실.[8] 국내의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복제품이 있다.
우즈베키스탄 요리를 파는 식당 이름으로 대한민국에서 많이 쓰이는 사마르칸트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 안산, 광주, 부산, 김해, 거제, 대구 등 전국에 사마르칸트라는 우즈벡 식당이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악명높은 독재자인 이슬람 카리모프가 이 도시 출신이다.
레인보우 식스 시즈: 스페츠나츠 진영에서 나오는 퓨즈(FUZE)가 사마르칸트 출신이다.
우즈베크어의 친척에 가까운 위구르어로는 semerqend로 표기한다.
징기스칸 4에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도시로 등장한다.
김용의 사조영웅전에서는 위의 징기스칸과 호라즘 제국의 전쟁때 등장하며, 난공불락의 성으로 묘사된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원래는 티무르 본인이 손자 무함마드 술탄의 영묘로 만들었으나 이후 티무르 본인과 아들들도 이곳에 추가로 묻혔다고 한다.[5] 한국 취업비자는 4년 기간제한이 있어서 일하고 돌아온 우즈벡 사람이 상당히 많다.[6] 현재는 아프로시압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실제로 아프로시압 박물관에 가서 보면 우리가 흔히 인터넷이나 교과서에서 본 채색된 모습이 아니라 거의 인물들의 실루엣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상태다. 위의 사진 역시 색 복원을 한 사진이다.[7] 사마르칸트 남부에 있었던 작은 나라라고 한다[8] 그림이 많이 소실되었지만 아프로시압 박물관에서 확인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