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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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 하우즈(Bolo Haouz) 모스크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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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부하라 역사 지구
영어
Historic Centre of Bukhara
러시아어
Исторический центр города Бухара
프랑스어
Centre historique de Boukhara
국가·위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3년[1]
등재기준
(ii)[2], (iv)[3], (vi)[4]
지정번호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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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라 구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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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라의 이미지 중 하나인 육중한 아르크의 성벽
1. 개요
2. 상세
3.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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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즈베키스탄 중부에 위치한 도시. 부하라 주의 주도.

2. 상세


부하라는 고대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도시이다. 그리스계 박트리아 왕조 시절의 금화가 출토되었으며 사마르칸드,발흐와 함께 불교가 매우 융성했던 지역이었다. 고대에는 인도 쿠샨 왕조와 중국 사이의 중개 무역으로, 사산 왕조와 튀르크족 사이의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의 영향도 많이 받은 국제도시였다. 무역만 했던 것은 아니고 기원원년 전후로 인도의 관개 농업 기술을 도입하여 양질의 과일을 많이 생산했다.
이슬람화 이후에는 중세 초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는데, 부하라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이슬람에서 가장 권위있는 하디스 편집본인 사힛 알 부하리가 바로 부하라 출신 학자 무함마드 알-부하리(부하라 사람 무함마드)에 의해서 수집되고 편집되었다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특히 사만 왕조 시절에 부하라의 번영은 절정에 달하였다 전해진다.
한 때 몽골군의 의해 도시 인구가 전멸했던 적도 있지만, 탁월한 지리적 입지 덕분에 다시 복구되었다. 티무르 제국이 몰락한 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부하라 칸국의 실질적인 수도이기도 했다. 사마르칸트, 히바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역사 도시이기도 하다. 위 사진에 보이는 아르크(성)과 구시가지는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하라는 원래 성곽 도시였지만, 현재 도시 성벽은 일부만 남아 있다.
인구 약 26만 명 규모의 도시이지만, 구시가지가 그렇게 크지는 않아 전부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다. 과거 에미르가 살던 아르크나 부하라의 랜드마크인 칼론 미나렛, 구시가지의 중심 랴비하우즈를 둘러싼 수많은 모스크와 수백 년 된 가옥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주민 중에는 타지크인이 많이 산다.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와 함께 역사적으로 타지크/페르시아인이 주도한 도시였고 현재에도 타지크인이 다수이기 때문에 여전히 타지크어가 일상생활에 널리 쓰인다. 부하라 주민의 약 90%가 타지크어를 모어로 쓰며, 도시 곳곳에서 타지크어를 많이 들어볼 수 있다. 애초 소련 시대에는 전부 한 나라였으므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지금도 국경선으로 민족이 딱 나뉘지 않는다. 도시 자체는 등장하지 않지만 역사 만화 신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 부하라 일대의 반유목, 목축 공동체들이다.

2.1. 부하라의 유대인


부하라는 과거 16~18세기동안 중앙아시아 지역 유대인들의 중심지였다. 페르시아가 계속 사막화되면서 점점 빈곤해지고 그 와중에 아르메니아인들이 페르시아에서 유대인들의 경제기반을 잠식하자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의 3분의 1 가까이가 부하라로 이민을 간 것으로 추정된다. 부하라 칸국에서는 새로 시나고그를 건립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새로 마스지드를 짓는 일을 후원한 후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짓는 방식으로 예배 장소를 확보했다. 이들은 새로 이주한 부하라에서 무슬림인 척 행세할 때가 많았으며, 통치자의 성향에 따라 대놓고 유대인으로 살 때도 있었다. 대게 무슬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집 안에서는 몰래 유대교를 믿었다고 한다. 이들은 우즈베크어 대신에 타지크어 방언을 사용한다.
소련에서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단체의 후원금으로 미국으로 이민갔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대인 후손이 10~12만명 정도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를 중심으로 5만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 되는 부하라 유대인이 남아 있으며 [5]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있다. 유대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원래 중세 초에 중앙아시아에서 유대인이 제일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 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한 후 맥이 끊겼던 듯 하다. 근세 사마르칸트에도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부하라 유대인과 같이 16~18세기에 페르시아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의 후손이다.

3. 교통


도심부 근처에 부하라 국제공항이 있고, 시 남동쪽 외곽 코곤이라는 도시에 부하라 역이 있다.[6] 타슈켄트에서 부하라까지 이동할 때는 주 4회 운항되는 우즈베키스탄항공 국내선 혹은 타슈켄트 역에서 철도(일 8~10여편, 그 중 2편은 아프로시욥이다)로 이동할 수 있다. 고속버스도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동할 때는 택시를 이용하기도 한다.
부하라 국제공항에서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라스노다르 로 가는 국제선이 운항된다. 그 외 국가로 이동하려면 타슈켄트 국제공항을 이용하자.

[1] 2016년 수정[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사실 우즈베크인들은 유대인들이랑 크게 관계가 나쁘진 않고, 그냥 보통이다. 심지어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은 이스라엘과 외교를 맺고있기도 하다. 다만 국민들 중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6] 다만, 코곤도 부하라 주에 있는 도시이긴 하다. 코곤에서 부하라까지는 10여km, 20~30분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