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만 왕조

 

1. 개요
2. 기원과 건국
3. 전성기
4. 몰락
5. 멸망
6. 역사적 의의
7. 역사보기 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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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 왕조.(Saman dynasty 또는 Samanid Emirate, Samanid Empire. 819~999. 페르시아어로는 Sāmāniyān이라고 한다.)

2. 기원과 건국


사만 가문은 자신들의 시조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 시절의 전설적인 장군이자 찬탈자였던 바흐람 추빈이라고 말하며 그것 자체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사만 조의 확실한 실질 시조인 사만 쿠다가 트랜스옥시아나에서 그 세를 확립한 기록이 있으며 사만 쿠다라는 인물이 파르티아 대가문이던 미흐란 가문 소속 혹은 미흐란 가문과 어느 정도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기록적 단서가 있기에 사만 가문 역시 파르티아계 토호 혈통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사만 가문은 오늘날의 부하라~사마르칸트 등지에서 나름의 세력을 형성하던 토착 호족이었으며 사산 조가 이슬람 아랍 제국에게 멸망 당하면서 사만 가문은 이슬람 제국에게 고개를 숙이고 산하로 들어갔으며 우마이야 왕조 시기를 거쳐 압바스 왕조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니파로 개종하고 지방 토호로써의 입지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사만 가문이 아직 아바스 왕조 하의 이슬람 제국의 충실한 산하로 있던 시기인 사만 가주 아사드[1] 시절, 아사드의 네 아들들인 누흐, 아흐마드, 야흐야, 일야스가 각기 군세를 이끌고 반란군 토벌에서 큰 공적을 세우자 압바스 왕조는 이들에게 트랜스옥시아나 각지에 상당한 세습 영지를 하사하였다. 이후 얼마 안가 압바스 조는 연속적인 내전과 반란으로 급격하게 쇠락하였는데 반면 영지가 크게 늘어난 사만 가문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아흐마드의 아들인 이스마일 1세, 즉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 시기에는 압바스 조가 너무도 크게 쇠락하여 자그로스 산맥 이동으로는 거의 모든 지배력을 상실해버렸기에 사만 조의 이러한 대두를 막을 수 없었다. 차근차근 주변 이란계 토호들을 굴복시키고 아랍계 총독, 관료들을 제거하거나 복속시킨 사만 조는 이스마일 1세 시기에 사실상 압바스 조로부터 독립하였으며 트랜스옥시아나 전역을 장악하면서 그 근거지를 부하라에 두었다.

3. 전성기


그 즈음 남방에서는 이란 고원 본토의 타히르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이란 고원 전역과 타브리즈 일대, 아프가니스탄, 시스탄, 파키스탄 전역을 지배하며 엄청난 세력을 뽐내던 사파르 왕조가 호시탐탐 사만 왕조를 노리면서 지속적인 국경 분쟁이 있었는데 사파르 왕조의 건국 군주이자 최대 판도를 일구어낸 인물인 야쿠브 이븐 라이스가 메소포타미아 원정에서 압바스 조의 군세에게 패하면서 원정에 실패하고 얼마 안 가 후계자없이 급사해버리면서 사파르 왕조는 내부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야쿠브의 뒤를 이어 사파르 조의 군주가 된 야쿠브의 동생 아므르 이븐 라이스는 내부적인 동요를 수습할 겸, 이스마일 1세의 영도 하에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사만 조가 자신들의 큰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대군을 일으켜 트랜스옥시아나로 진군하였으나 이스마일 1세는 발흐에서 이를 대파하고 도리어 역습하여 당시 이란 고원의 실질적인 중심지인 호라산 등지를 점령하고 사파르 왕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또한 이스마일 1세는 그의 백부인 누흐 이븐 아사드가 이미 북방 투르케스탄 등지의 투르크 인들을 한 차례 토벌하였고 본인도 틈날 때마다 수 차례 토벌전을 감행하여 사만 왕조의 북방 국경선을 안정화시키고자 하였기에 적어도 이스마일 1세 치세에는 북방의 투르크인이나 키르기즈, 페체네그와 같은 유목 민족들이 사만 조의 지배권을 인정하며 국경을 거의 침범하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많은 유목민 전사들이 이스마일 1세에게 귀순하여 그의 군대의 일원으로써 활약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스마일 1세는 자신이 수도로 삼은 부하라의 상업, 문화적인 발전에 크게 심혈을 기울여 사산 조 멸망 이래의 많은 페르시아 문인, 학자들이 부하라로 몰려들었다고 하며 비록 조로아스터를 포기하고 수니 이슬람을 국교로 삼기는 했지만 이스마일 1세는 자신의 통치 권역에 대하여 '이 땅은 페르시아 인의 거주지이자 페르시아이자 페르시아 왕인 나의 것.'임을 선포하면서 어느 정도는 사산 조의 뒤를 잇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했다는 학계의 의견이 있다.
발흐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사파르 조를 중동 패권 경쟁에서 탈락시킨 이스마일 1세는 타바리스탄[2] 원정을 감행하여 무함마드 이븐 자이드를 공격하여 죽이고 타바리스탄을 정복하였으며 그 후 얼마 안가 죽었다.(907.) 그의 뒤를 이어 아흐마드 이븐 이스마일 사마니가 사만 조의 왕이 되었으며 그는 더더욱 세력을 확장하여 이란 고원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여전히 시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사파르 조를 공격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상당부분을 뺏어내었다. 이후 몰락한 압바스 조를 대신하여 중동 전역을 제패하겠다는 큰 야심을 품은 아흐마드는 시리아 원정을 감행하여 어느 정도는 시리아 일대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진출하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타바리스탄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을 움직이던 도중 암살당하였다.

4. 몰락


아흐마드 이븐 이스마일의 아들은 어린 나스르 이븐 아흐마드로써 나스르 2세로 불리는데 아버지가 죽고 고작 8살의 나이에 즉위하면서 사만 조는 한동안 큰 혼란에 빠졌다. 급격하게 성장한 제국의 내부적 문제로 인하여 그리고 나스르 2세는 기존의 수니파 이슬람을 버리고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거의 생애 내내 이에 반발하는 내부의 총독, 복속된 토후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다녀야 했다. 이러한 계속된 내전으로 인해 나스르 2세의 아들 누흐 이븐 나스르[3]가 통치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만 조 내부에는 마치 로마 제국이 몰락 직전에 게르만 출신 병력의 비중이 높았던 것처럼 투르크 계 출신 병력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는데 이 투르크 계 병력들을 지휘하는 투르크 지휘관들은 사만 조가 점차 쇠락하는 틈을 타 각지에서 반쯤 독립적인(형식적으로만 사만 조에 충성하는)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가즈나 왕조의 실질 시조인 사부크티긴이다. 이러한 사만 조의 몰락과 튀르크 세력의 흥기는 서로마 말기에 서로마 정부의 유명무실함을 깨닫고 구 서로마령 각지에 독자 왕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한 프랑크 왕국, 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등의 게르만계 세력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사부크티긴의 가즈나 튀르크 군벌들이나 오우즈 튀르크 군벌들은 사만 왕조의 군주에게 여전히 충성했으나 당나라의 황소의 난에 빗댈만한 '파이크의 난'이 터지고 호라즘 총독, 파이크 등의 세력들이 제국을 혼란으로 몰고 갔으며 당시 새로이 떠오르던 신생 이란계 왕조인 부와이 왕조가 사만 조를 공격하여 타바리스탄, 이란 등지를 빼앗아버림으로써 사만 왕조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5. 멸망


이렇듯이 사만 조가 몰락하던 와중에 중앙 아시아에서 발현한 유목 제국 중 하나인 카라한 왕조(Karakhanids)가 사만 왕조를 침공하였는데 수도인 부하라를 점령당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실질적으로 이 때에 멸망하였다. 압둘 알 말리크의 아들이자 사만 조 마지막 왕이었던 이스마일 문타시르[4]는 호라산으로 도망쳐 병력을 규합하고 자신들을 배신하면서 세워진 원수 국가라 할 수 있는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 가즈나비드 (가즈나의 마흐무드) 에게까지 구원을 요청하면서 카라한 왕조에 대항하였다.
또한 이스마일은 당시 중앙 아시아 오우즈 지역(아랄 해 서안)에서 터를 잡고 있었고 얼마 안 있어 이란 고원으로 남하하게될 오우즈 튀르크 세력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자신의 부흥군을 결집시켜 대규모 연합군을 구성하여 부하라를 수복하고자 하였으며 실패 속에서도 계속해서 도주와 재기를 반복하며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 차례 카라한 칸국의 대군을 격파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으나 마흐무드의 지원 거부와 오우즈 튀르크 세력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장기간 세력을 유지하기 어려웠기에 끝내 전쟁에서 패하였다. 다시금 재기를 노리던 이스마일은 끝내 메르브 지역의 아랍인 토후들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이로써 사만 왕조는 멸망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만 왕조는 그 자신들이 멸망의 길로 몰아넣은 사파르 왕조보다 조금 더 일찍 망했다.

6. 역사적 의의


사만 왕조는 사실 이란 문화, 그 중에서도 페르시아 문화가 트랜스옥시아나에도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게 한 문화사적 영향을 지닌 왕조다. 물론 부하라-사마르칸트를 비롯하여 그 너머의 타림 분지 일대에 이르기까지 일찍부터 소그드인, 토하라인과 같은 이란계 종족들이 살고 있었으나 같은 이란계라고는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이란 고원에 그 중심을 두고 있던 페르시아의 발전된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 문화를, 정확히 말하면 이를 아랍식으로 어레인지한 이슬람 페르시안 문화를 트랜스옥시아나에 정착시켰으며 이는 후에 이 지역을 거쳐간 거의 모든 중동 투르크 왕조들이나 아프간, 타지크인 왕조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한편, 발트 해 연안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 사만 왕조에서 주조한 것이 확실한 금화들이 발견되면서 사만 왕조의 상업적인 영향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 역사보기 틀







[1] 사만 왕조 건국 시조인 이스마일 1세의 조부.[2] 오늘날의 카스피 해 남단과 이란 고원 북단 사이.[3] 통칭 누흐 1세.[4] 누흐 1세의 고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