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타쿠로
1. 개요
일본의 야구 코치이자 전 야구선수. 본명은 이시이 다다노리(石井忠徳)이지만 등록명인 '''이시이 타쿠로(石井琢朗)'''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명 '''머신건 타선'''[1] 이라 불리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전성기의 리드오프-유격수였다.
2. 커리어
2.1. 아마추어 시절
체구는 작았지만 나름 재능있는 투수였으며, 고교 2학년 때엔 고시엔에도 출전했었다. 하지만 3학년 때에는 투수로서의 자신감이 없어 프로 입단을 포기하고 토요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스카우터였던 에지리 아키라의 눈에 들면서 번외지명[2] 으로 베이스타즈의 전신인 다이요 웨일즈에 입단했다.
2.2. 요코하마 시절
데뷔 첫 해부터 투수 유망주로 주목 받았고, 입단 동기 다니시게 모토노부와 배터리를 이루며[3] 처음이자 마지막 선발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본인은 일찍이 타자 전향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감독에 의해 묵살당했었는데, 결국엔 이시이가 감독의 고집을 꺾는 데 성공하면서 1992년부로 내야수로 전향하게 되었다.[4] 더불어 이 즈음부터 등록명을 '''이시이 타쿠로'''로 변경했다.
야수전향 첫 해부터 유격수와 3루수를 오가며 준주전급 활약을 펼쳤고, 1993년엔 주전 3루수로 각성에 성공하며 센트럴리그 도루왕과 3루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다.
1996년부터는 유격수로 전향[5] , 이후로도 올스타급 유격수로 활약했다. 우승 시즌인 1998년에는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고, 요코하마 유니폼을 입고 4번의 도루왕(1993, 1998~2000)과 2번의 최다안타, 5번의 베스트 나인과 4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다. 2006년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하며 명구회 회원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그 역시 세월을 피해가진 못했고, 조금씩 하락세를 보이다가 2008 시즌을 끝으로 요코하마에서 방출 당했다. 비슷한 시기에 방출된 요코하마의 또다른 프렌차이즈 스타 스즈키 타카노리가 은퇴를 선택한 것과는 달리 그는 현역 연장을 택하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했다.
2.3. 히로시마 시절
히로시마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며 통산 100홈런, 유격수로서의 최다 경기 출전[6] 등을 기록하다가 2012년에 은퇴를 선언하며 프로생활을 마무리하였다.
통산 성적은 24년간 2413경기 출장, 타/출/장 .282/.356/.372 (OPS .728) 2432안타(NPB 통산 11위) 102홈런 670타점 1298득점(10위) 358도루(16위)[7] .
은퇴경기 겸 은퇴식은 친정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원정경기 때 이루어졌는데, 이시이가 히로시마 이적 후에도 요코하마 시절의 응원가를 그대로 이어 쓴 덕분인지 양 팀의 팬들이 함께 응원가를 불러주는 장관이 펼쳐졌다.https://www.youtube.com/watch?v=xUtWoJwSTps
2.4. 코치 시절
2018년 까지는 유능한 모습을 보이며 히로시마와 야쿠르트의 타선에 보탬이 되었지만, 2019년에는 야쿠르트 타선 침체의 원인으로 꼽히는 등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이후 요미우리 코치로 새 둥지를 차렸다.
3. 기타
최후의 번외지명 출신 야구선수였다. 그의 은퇴를 끝으로 번외지명 출신 선수는 전원 은퇴했다.
일본의 걸그룹 CoCo출신 가수 세노 아즈사와 결혼했으나, 이시이의 바람으로[8] 이혼하였다. 이후 이시이는 아나운서 아라세 시오리와 재혼했다.
그 외에도 CoCo와는 인연이 있는데, 아직 총각이던 1993년경, CoCo 멤버들(당시 세노 아즈사는 이미 탈퇴), 사사키 카즈히로, 다니시게 모토노부등의 팀 동료들과 함께 Winning이라는 응원가를 녹음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Winning은 작곡된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베이스타즈 응원단에게 쓰이고 있다.
앞서 언급되었듯 1993년부터 사용했던 이 응원가를 이적 후인 2012년까지 사용하였다. 당시의 요코하마 응원가가 그렇듯[10] 곡의 퀄리티나 팬들의 반응이 그럭저럭 괜찮았던 편이다.
1992년, 다이요 시절 사용했던 응원가는 가사 중 それ만 さあ로 바꿔서(둘다 뜻은 '자'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 쿠라모토 토시히코의 응원가로 재사용되었다. 이시이의 응원가를 물려받기를 원했던 쿠라모토의 바램을 응원단이 우회적으로나마 이루게 해준 셈이다.
[1] 40홈런 이상을 기대해볼만한 거포는 없었지만, 특유의 컨택과 중장거리 포로 무장한 강력했던 타선으로, 요코하마의 우승에 일조했다.[2] 지금은 없어진 제도로, 번외지명을 통해 드래프트 지명을 못 받은 선수가 막차로나마 프로에 입단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육성신인과 비슷한 느낌. 하지만 꼭 그런것은 아니고, 실력은 있으나 프로에 꿈이 없던 선수가 스카우터들의 설득으로 뒤늦게 프로에 입단하거나(이시이는 이 쪽에 해당된다.) 각 팀에서 찍어둔 유망주를 타 팀에게 뺏기지 않기 위한 설계(사실상 제도의 악용)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3] 투수와 포수가 10대의 나이인 배터리로 승리투수가 된 사례는 이시이-다니시게의 1989년 이후 17년 뒤에야 세이부 라이온즈의 와쿠이 히데아키-스미타니 긴지로 배터리의 사례로 다시 나타난다.[4] 투수로서의 통산 성적은 3년간 28경기(5선발) 49이닝 1승 4패 ERA 5.69 23삼진 29볼넷.[5] 이 해 새로 부임한 감독 오오야 아키히코의 구상에 따른 것. 당시 오오야 감독의 구상은 주전 2루수이던 로버트 로즈를 3루로, 유격수이던 신도 타츠야를 2루로, 3루수이던 이시이를 유격수로 보내며 내야진 전체의 포진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시이는 유격수 자리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지만 로즈가 3루 수비에서 크게 버벅대면서 결국 로즈가 원 포지션인 2루로 돌아가고 신도가 3루로 포지션을 이동한다.[6] 종전 기록은 요시다 요시오의 1731경기. [7] 169도루사는 NPB 통산 5위[8] 심지어 미성년자와의 불륜이었다. 이시이 본인에겐 큰 과오인 셈. 당시에는 대서특필 되었지만, 현재는 거의 묻힌 사건이 되어버렸다. [9] 1993년까지 이 부분의 가사는 "背番号0(등번호 제로)"였다. 94년에 등번호를 5번으로 교체하면서 가사도 변경된 것.[10] 90년대의 요코하마 응원가는 그 시대 응원가 치곤 꽤 세련되고 듣기 좋기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