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시게 모토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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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다니시게 모토노부 (谷繁元信)
'''생년월일'''
1970년 12월 21일
'''국적'''
일본
'''출신지'''
히로시마 현 히바 군 도조 정 (現 쇼바라 시)
'''학력'''
이와미치스이칸고등학교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8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베이스타즈 (1989~2001)
주니치 드래곤즈 (2002~2015)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2014~2016)
''''''주니치 드래곤즈''' 역대 감독'''
타카기 모리미치
(2012~2013)

'''다니시게 모토노부'''
'''(2014~2016)'''[1]

모리 시게카즈
(2017~2018)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2007'''
1. 소개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및 요코하마 시절
2.2. 주니치 시절
3. 흑역사로 남아버린 주니치 감독 시절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前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및 요코하마 시절


주고쿠 산지에 깊숙한 위치해 있는 히로시마 현 히바 군 도조 정(현재의 쇼바라 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는 시마네 현 고쓰 시에 있는 고노카와 고등학교(현재의 이와미치스이칸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원래는 투수로서 입단하였지만 연습 경기에서는 홈런을 자주 허용하면서 1개월 후에 감독으로부터 포수로 전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후 다니시게는 “감독이 무서워서 거역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여름에 열린 고시엔 대회에 두 차례나 출전했고 특히 1988년 하계 시마네 현 대회 예선에서 5경기 모두 7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 고시엔 대회 8강에 진출하는 기여를 했다. 포수로서는 고교 통산 42개 홈런을 기록하면서 에토 아키라[2]와 함께 ‘동쪽의 에토, 서쪽의 다니시게’라고 불렸다.
1988년 드래프트 1순위로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에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했고, 기대의 의미를 담아 6~70년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유격수 야마시타 다이스케가 달았던 등번호 1번을 배정받았다.
코바 타케시 감독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프로 1년차부터 1군에 출전했고 시모노세키 구장[3]에서 열린 시범 경기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상대 투수 사이토 마사키로부터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정규 경기 첫 타석에서 첫 안타를 날리는 등 초반에는 기대에 부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80경기에 출전하며 타율 1할 7푼 5리, 3홈런, 10타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이듬해인 1990년엔 스도 유타카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세이부 라이온즈로부터 영입한 아키모토 고사쿠[4]와 병용되어 전년도까지 팀의 주전 포수였던 이치카와 카즈마사를 제3의 포수로 쫓아냈다.
그러나 입단 4년차인 1992년까지는 팀의 주전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타격 성적이 1할대~2할대 초를 넘나들 정도로 심하게 부진했기에 1992년 시즌 도중에 스도 감독이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후 에지리 아키라 수석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한 뒤 수비력을 팀 방향으로 중시하면서 일시적으로 출전 기회가 박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구단 이름이 바뀐 것을 계기로 등번호를 1번에서 8번으로[5] 변경하였고 콘도 아키히토가 감독으로, 오오야 아키히코가 배터리 코치로 취임, 오오야의 지도로 리드를 포함한 수비가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타격면에도 급속도로 향상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주전 포수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오오야 아키히코가 감독으로 승격한 1996년과 1997년에는 2년 연속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한 모리타 코우키[6]와 함께 선발 배터리를 짰다. 1997년 시즌 개막전은 나고야 돔에서의 첫 공식전[7].
1998년에는 공수의 요점으로서 팀의 38년만의 센트럴리그 +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골든글러브 상을 수상했고 구원 투수인 사사키 카즈히로와 함께 최우수 배터리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개인 최다인 시즌 20개의 홈런을 기록, 그 해의 오프시즌 후 FA의 자격을 얻었다. 당초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이적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조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이 때 주니치의 주전 포수인 나카무라 타케시는 트레이드를 요구하여 현금 트레이드로 요코하마에 이적했는데 결과적으로 양팀의 주전 포수가 바뀌는 형태가 되었다.
종합해보면 당시 요코하마에서 공수의 중추로 활약했으며, 2010년대 중반까지 현역으로 남아있던 1998년 요코하마의 우승을 함께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미우라 다이스케, 사이토 타카시, 다니시게까지 3명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사이토, 다니시게가 2015년 은퇴하고 미우라도 이듬해인 2016년 은퇴하면서 1998년 요코하마 우승 당시의 선수들은 모두 현역에서 사라졌다.

2.2. 주니치 시절


2002년 FA 협상 시즌 종료 후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주전 포수의 에이스 넘버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모리 마사아키가 달았던 27번, 혹은 한신 타이거스타부치 코이치가 부착했던 22번이라는 오치아이 감독의 지론에 의해 등번호를 27번으로 변경했다. 주전 포수로서 2004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였고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고 본선의 미국전에서 선발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이후 정규 경기인 7월 26일의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포수로서는 사상 4번째인 통산 2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타율, 안타 갯수, 루타수, 도루 갯수는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 중에서 리그 최저를 기록했으나 8년 만에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07년 8월 8일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프로 야구 역대 47번째가 되는 통산 300개의 2루타를 달성했고, 8월 10일 요미우리전에서는 기록 경신중이었던 포수로서의 연속 수비 기회무실책 프로 야구 기록이 1708차례로 멈췄다. 여전히 타율, 득점, 안타 갯수, 3루타, 루타수, 도루 갯수에서는 규정 타석에 이르고 있는 가운데 리그 최저를 기록했지만 전년도에 이어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동료인 카와카미 겐신도 2년 연속으로 수상하고 있어 같은 팀의 동일 배터리에 의한 2년 연속 수상은 센트럴 리그에서 처음이었다.
2008년 6월에는 오른쪽 옆구리 통증으로 등록이 말소되었고 이적 후 처음으로 2군에서 경기 출전하였다. 또 2004년에는 부상당했던 허리 상태도 나빠졌고 다리가 저릴 정도의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요추의 추간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그 해 오프, 허리에 있는 뼈의 일부를 깎아내는 수술을 받았다.
2009년 시즌 개막 직후부터 오른쪽 장딴지 부상으로 인해 약 1개월 간 결장했고 7월 5일의 한신전에서는 포수로서 노무라 카츠야에게 계속되는 역대 2위인 통산 2328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9월 1일에는 개인 통산 200호 홈런과 함께 200개의 희생타를 달성했다(양쪽 모두를 달성한 것은 역대 3번째). 9월에는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인 4번째의 FA권을 취득했고 프로 21년차에 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0할대(무실책)의 수비율을 달성하여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10년 이듬해 7월 28일, 포수로서는 노무라 카츠야 이후의 2500경기 출장을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프로 야구 역대 8번째였다. 타격 부진으로 인해 결장은 있었지만 시즌을 통해 등록이 말소되지 않았고 팀의 4년 만에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011년 6월 4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의 5회 수비 도중 다카야마 히사시와의 크로스 플레이로 왼쪽 무릎 인대가 손상되어 약 2개월간 등록이 말소되었다. 다니시게가 팀을 비운 사이에 팀은 15승 1무 21패의 성적으로 부진하였지만 다니시게는 그 와중에 재활 훈련과 상반신을 이용한 근력 트레이닝에 임하여 7월 29일 1군으로 복귀한 이후 타율 3할 1리, 23타점을 기록하면서 타격면에서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9월 말에는 10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하는 등 페넌트레이스 종반에 팀의 역전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8월 2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전(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는 프로 23년째이자 통산 2594경기째에 프로 입문 이후 처음으로 1루수로서 선발 출전을 했는데 1루수에 한정하지 않고 정규 시즌에서 포수 이외의 수비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포스트 시즌에서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는데 야쿠르트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모두 선발 출전했지만 무안타로 끝났다. 계속되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모두 선발 출전했지만 무안타는 계속돼 11월 20일 7차전에서는 3회 첫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시점에서 1989년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오이시 다이지로가 세운 이후 21타수 연속 무안타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겼다.
2012년은 시즌 초반 정말 뜬금없이 4할타율의 맹타를 휘두르며 한때 리그 타격순위 단독 1위(!)를 기록한 적도 있었다. 특히 2011년부터 소위 통일구라 명명된 저반발 공인구탓에 리그에서 3할타자들이 거의 멸종할 정도로 극심한 투고타저였던 시절인지라 다니시게의 4할타율은 더더욱 뜬금없게 느껴졌다. 전해 후반기의 기세도 있었던지라 나이 40대에 드디어 타격에 눈을 떴다는 식으로 야구팬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는가 싶었으나... 역시나 평균 회귀의 법칙처럼 시즌은 .228의 타율로 마무리(...). 이 해 4월 25일 야쿠르트전에서는 홈런을 때려내 신인때부터 24년 연속 홈런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했고 7월 26일의 한신전에서도 2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이 홈런에 의한 통산 3000루타를 달성했다.
2013년 10월 9일, 12년만의 B클래스로 시즌을 끝낸 주니치가 그를 차기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이로써 주니치 구단 사상으로는 59년만에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계 전체로는 2006~2007년 야쿠르트 스왈로즈후루타 아츠야 이후 7년만에 선수 겸 감독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2014년 주니치의 거듭되는 부진을 저지하지 못하면서 4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4월 30일에는 3000경기 출장을 달성했고, 5월 4일, 한신전(고시엔)에서 27년 연속 홈런,안타 기록을 경신했다.[8] 7월 28일에는 3018경기로 노무라 카츠야를 넘고 최다경기 출장 기록을 경신했다. 9월 26일, 친정팀 요코하마전에서 현역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팀은 지고 본인은 1타수 무안타.
2015 시즌을 끝으로 팀이 고액연봉을 받는 고참 선수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선수 생활 마지막 경기는 친정팀인 요코하마와의 원정경기로 치루었다. 경기 종료 후 양 구단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은퇴 세레머니를 진행했다.

3. 흑역사로 남아버린 주니치 감독 시절


2016 시즌부터는 주니치 감독 전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5 시즌 종료 후 외야수 감독이 세 명이나 들어오면서 졸지에 '''세리그 감독 중 유일하게 외야수 출신이 아닌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2016년 팀은 작년처럼 계속 중하위권을 전전하며 부진에 빠졌고 결국 후반기가 시작되며 성적이 급하락해 최하위로 추락하고 말았고, 결국 2016년 8월 9일 부로 사임했다. 그러나 사실상 해임이나 마찬가지.
본인은 성적부진으로 인한 자진 사퇴로 자신은 요양할 것이라 밝혔다. 잔여시즌은 모리 시게카즈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후 각종 활동에서는 주로 전직 주니치 감독보다도 요코하마 OB라는 타이틀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은 듯 보인다. 본인도 주니치에 있으면서도 요코하마가 늘 신경이 쓰였다는 등 지속적인 요코하마 사랑을 어필하고 있다. 2018년 4월부터 TV 카나가와에서 신설되어 월 1회 방영하는 We☆Baystars라는 베이스타즈 응원 매거진 방송에서 무려 MC를 맡았다(...) 아예 요코하마 OB로 완전히 정착한 듯. 덕분에 주니치에서의 감독 실적이 그닥 좋지 않음에도 팬들이 원하는 차기 감독감 이름에 항상 오르내리는 중.
[1] 2014, 2015 시즌은 감독 겸 선수였다. 2016 시즌 도중 해임.[2] 90년대 중반 히로시마 도요 카프 막강타선의 4번타자로 활약하다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다.[3] 야마구치시모노세키에 있는 야구장. 참고로 타이요 훼일즈야마구치 연고 시절 홈구장인 '''시모노세키 구장'''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구장이다. 해당 구장이 철거된 후 다시 세워진 게 현재의 시모노세키 구장.[4] 나중에는 포크볼 포구와 블로킹이 좋다는 이유로 마무리 투수 사사키 카즈히로의 전담 포수로 쓰인다.[5] 원래 등번호인 1번은 당시 유격수 유망주로 기대받던 신도 타츠야가 가져갔다. 신도는 훗날 포지션을 3루수로 바꿨고, 1998년 붙박이 8번타자로 활약하면서 타니시게와 함께 머신건 타선의 한 축을 이루며 요코하마의 38년만의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6] 고속의 슈트볼을 무기로 했던 투수로, 요코하마에서는 선발투수로서도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사사키 카즈히로와 더블 스토퍼로 쓰이기도 했으며 1992년 방어율 1위를 차지했다. 1997년 시즌 종료 후 나카네 히토시와의 맞교환으로 킨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되었지만 뇌종양이 발견되어 선수 생명의 위기를 맞는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재활에 성공해 선수생명을 이어나가기는 했지만 이후 큰 활약은 없었고 2002년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은퇴한 후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은퇴 이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직원으로 몇년간 근무했으나 2015년 10월 뇌종양 재발과 동시에 합병증으로 증세가 악화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46세.[7] 이 경기가 선동열이 후에 일본에서 부활의 실마리를 잡은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하는, 폭투 후에 홈으로 쇄도하는 동점주자를 잡고 세이브를 올린 그 경기이다.[8] 이 홈런은 구단 최고령 홈런이고, 감독 겸임 감독이 2년 연속으로 홈런을 친건 노무라 카츠야 이후 28년만, 센트럴리그로는 후지무라 후미오 이후 59년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