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롄
1. 개요
전 NBA의 농구선수. 현역 중국 최고의 농구선수중 한명이자 야오밍의 후계자로 주목 받았던 선수였다. 야오밍을 제외하고 대개 신장이나 마케팅빨이었던 중국출신 NBA(저우치, 쑨예)선수들과는 비교를 달리하는 기량을 보여주기도 했던 선수이며 피지컬적인 부분, 부상 문제만 없었다면 NBA에서도 벤치 자원, 로테이션 멤버로는 손색없었던 선수이다.
2. 상세
프로 핸드볼 선수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중국 대표 후보로 선정 된 적도 있었다 . 12살 때 농구를 시작해 13세의 나이에 1m 93cm로 성장했다. 2002 년에 광둥 서던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 그해 뉴저지에서 열린 아디다스의 ABCD 캠프에 참가했다. 그의 이름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타임지의 2003년 8월 24일호에서 제목은 The Next Yao Ming이었다.
2002년에 15살의 이젠롄은 CBA에 들어와 광둥 서던 타이거즈 팀에서 뛰었다 . 2004년에 그는 중국 농구 국가대표팀 에 선발되었다 . 2005년에는 CBA 역사상 가장 어린 MVP가 되었다. 2007년에는 NBA 드래프트에서 이젠롄은 밀워키 벅스에 의해 1라운드 6순위로 선발되었다. 이로서 왕즈즈, 야오밍, 멍크 바터에 이어 중국 선수로는 NBA에 네 번째로 데뷔했다. 뛰어난 골밑 활약에 득점력까지 갖춰 지난 해 12월 NBA '이달의 신인상'을 받기도 했던 그는 중국에서 야오밍에 버금갈 정도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왼 무릎을 다친 뒤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채 첫 NBA 시즌을 마감했고 결국 66경기에서 49차례 선발로 나와 평균 8.6득점에 5.2개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성적표를 받았다.그 이후 밀워키 벅스와 뉴저지 네츠의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이적하게된다. 이젠롄은 평균 10.4득점, 6.2리바운드를 기록 중 이었지만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게 되고 그 이후로도 시즌 동안 내측 부측 인대, 입술, 발목등 여러 차례 부상을 입게 되어 점차 주전에서 제외되게 된다. 결국 워싱턴 위자드와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하지만 사실상의 가비지멤버가 되었고 결국 방출되었다.
이후 2016년 다시 LA레이커스에 입단하면서 NBA에 복귀하는가 싶었지만 섬머리그만 뛰고 방출요청으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3.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때는 환상적인 피지컬과 운동능력을 자랑하는 스트레치4 스타일의 센터였다. 맨발 210cm를 넘기는 신장에 훌륭한 윙스팬, 전성기때는 평균적인 NBA 7푸터들을 가볍게 상회하는 뛰어난 운동능력까지 있었기에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탈 아시안 급이었다.[2] 거기에 포지션 대비 준수한 점퍼와 넓은 슛거리, 좋은 리바운드와 협동 수비력이 장점.
단점으로는 빅맨으로서 파워가 다소 부족하여 NBA 레벨에선 대인수비에 약점을 보였고, 야투의 기복이 심한 편임에도 골밑에서 몸비비기를 싫어해 점퍼로 일관하는 성향이 강하다.
야오밍 이후 아시아권에선 최고의 재능으로 통했고 실제로 NBA에서도 어느정도는 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더딘 발전과 잦은 부상이 겹쳐 결국 야오밍의 진정한 후계자로 성장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NBA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고, 센터치고 빠른 발에 슛거리가 넓어 현 NBA 트렌드라면 좀 더 수요가 있었을만한 선수. 사실 트렌드를 떠나서 가진 재능 자체는 NBA에서 자리잡는데 모자람이 없었다고 평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NBA에 낑겨볼 기량이 절대 아님에도 중국 마켓빨로 NBA에 적을 두었던 쑨예, 저우치같은 가비지타임 선수들에 비하면, 이젠롄은 건강하다는 전제 하에 NBA 팀들이 로스터에 두고 써볼만한 실력 자체는 분명히 갖추고 있는 선수였다. 때문에 이젠롄의 NBA 적응 실패 이유는 재능부족 보단 내구성과 멘탈리티가 빈약하다는 점에 있었다는 농구팬들이 많은 편.
사실 퇴출 당시만 해도 독하게 마음 먹고 부상에서 재활했다면 충분히 부활 가능성이 있었고, 그의 나이와 중국에 돌아가 보인 활약을 보면 전망이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일단 운동능력이 케빈 가넷에 버금갈 정도인데다 팔도 길고 슈팅터치도 매우 부드러운 7푸터라면, 어디가 됐던 자리는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빡센 NBA에서 롤플레이 생활하는데 큰 미련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일단 그는 야오밍을 제외한 다른 중국선수와 마찬가지로 영어를 배우는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딱히 친한 동료도 없었던 데다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다른 동료들과 전혀 교류가 없다면 팀 케미스트리에서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의 입지가 점점 줄어든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듯. 또한 기본적으로 NBA생활은 스케줄도 그렇고 매우 빡세다. 타국생활 자체가 녹록치 않은데, 여기에 적응도 잘 못하고 스케쥴은 살인적이니...이런 상황이니 고생하면서 그저그런 NBA선수로 남느니 중국에서 왕대접받으며 편하게 선수생활하는 걸 선택한 듯. 애초에 그는 플레이스타일을 보면 알겠지만 치열하게 경기하는 선수가 아니다.
여담으로 신체비율이 흑인 선수들과 유사했으며 리우 올림픽 당시 나이키 광고에 미국 대표팀 케빈 듀란트와 나란히 출연한 사진에서 케빈 듀란트와 거의 비슷한 피지컬을 보여주어 농구팬들을 놀라게 한적도 있다. (상당히 벌크업해서 참가했다)
4. 나이 논란
그의 나이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엔트리에는 1984년생으로 적혀있었지만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부터 1987년생으로 나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맞다면 이젠롄은 13세의 나이에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한 것이 된다. 2007년과 2008년에 이젠롄의 생년월일이 1984년 10월 2일에 태어난 것으로 고등학교 등록 양식을 발견한 중국 기자에 의해 주장되었다.
[1] 국제무대나 아시아에선 센터로도 많이 뛰었지만 NBA에선 파워포워드로 주로 뛰었다. Play by play 데이터를 보면 루키 시즌엔 97%, 그 이후부터는 90, 81, 45, 88%의 출장시간을 파워포워드로 출장했으며, 4년차 때에 (정신 못 차리던 시절 자베일 맥기가 주전센터일 정도로) 골밑이 빈약한 워싱턴에서 뛸때만 센터로 조금 더 많이 (55%) 뛰었다. NBA 기준으론 파워포워드, 아시아 무대 기준으로 센터라고 볼 수 있다.[2] 드래프트 당시 신체검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드래프트 당시 공식 수치를 찾기는 힘들지만, 윙스팬이 7피트 3.5인치에 최대 점프력 38인치, 체지방률이 4% 미만이라고 알려져있다. 비유하면 케빈 가넷과 비슷한 키에 윙스팬은 0.5인치 짧고, 블레이크 그리핀보다 점프력이 높다는 얘기. 다만 공식적으로 발표된 수치가 아니니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특히 점프력) 육안으로 봐도 그의 운동능력은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