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청로는 1852년 경상도 의령현 정곡면 고송동(현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고송마을)에서 아버지 이기수(李驥洙)와 어머니 양천 허씨 허보(許俌)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궁류면 다현리로 이주하였다.
『전의이씨성보』에는 그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겸 첨정(僉正)을 지냈다고 하는데, 이를 입증할만한 사료 기록은 없다.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고 있었던 때, 그는 마침 안동과 진주에서의 의병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1월 11일 진주의병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진주에 갔다. 그곳에서 진주의병장 노응규를 만났고 노응규로부터 의병진에 가담해줄 것과 군자금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위해 우선은 거절하였다.
그후 1896년 2월 15일, 그는 의령현 지역에서 1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전상무(田相武)와 권은중(權殷中)을 선봉장으로 삼아 경상남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청로 의병진은 곧 함안을 거쳐 2월 21일 창원에 도착하여 창원군수 김철규(金哲奎)로부터 포군 50여 명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22, 23일경에는 김해도호부에 입성하여 동래부의 일본인 거류지에 대한 공격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달 26일 일본군 동래지구경비대와의 교전 중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그가 총상을 입어 이후 어쩔 수 없이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귀향한 이청로는 이후 8도를 다니면서 각지의 뜻 있는 선비들과 일본을 물리칠 것을 토론하는 등 활동하다가 1916년 6월 19일 별세하였다.
200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