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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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과 함께 대한민국 영화의 산 증인 중 한명인 영화 제작자.
1938년생으로 6.25 전쟁을 겪고 난뒤 해방후에는 한때 정치깡패 조직에 몸담기도 했었는데, 5.16 이후 대부분의 정치깡패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살아남아서 그때의 정보를 살려서 건설업자로 전향해 활동하다가, 1980년대 초반 태흥영화사를 만들고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장호, 이두용, 배창호 등 80년대 대표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다가 1989년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제작하면서 평생의 파트너가 된다. 이때부터 장군의 아들, 개벽, 서편제, 춘향뎐, 취화선 등 임권택 감독의 모든 영화를 제작한다.
그외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던 1990년대에는 박철수의 오세암,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 화엄경 등의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2004년 임권택의 하류인생이 흥행에 실패한 이후로는 영화제작에선 거의 손을 뗀 상태이다. 그래서 임권택의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은 2006년 김종원이 제작하였다. 이후 독자적인 멀티플렉스 극장 THC 9를 의정부시에 개관하였다. 허나 이후 THC 9은 바로 옆인 의정부역 신세계백화점 10층에 들어선 CGV에 밀려 고전하다 결국 CJ에 인수되어 "CGV태흥"으로 바뀌었다.
1996년도에는 영화사 매출을 조작해서 거액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당시까지 한국영화계는 대략 10여개의 국내 영화제작사, 영화배급사들 그리고 자기 고향에 한두개의 영화관을 소유한 전국 수백여명의 극장주들에 의해서 굴러가고 있었다. 서로간에 끈끈한 인맥으로 묶인 이들은 "좋은 게 좋은 거지"식의 주먹구구식 운영으로 일관했고, 당연히 매출과 관람객 집계, 세금 납부 등은 전부 엉터리였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초중반부터 금융권과 대기업 등 외부의 대자본이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이런 후진적인 구조가 투자에 방해가 된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자 문화산업 육성을 내세운 정부가 영화계에 칼을 들었고, 바로 전통적인 충무로 질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태원이 제일 먼저 걸려든 것이다. 이태원 이외에도 주요 영화제작자, 배급사, 지방 극장주들 수십여명이 탈세혐의로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당시는 지방극장주들이 미리 시나리오와 출연배우를 보고 제작사에 선금을 주고 상영권을 구매한 다음에 영화가 극장에 걸리면 입장수익을 전액가져가는 구조였기 때문에, 사실상 영화제작사들은 돈을 벌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자본축적이 안되니 다음 영화도 극장주들한테 헐값을 받고 상영권을 미리 팔 수 밖에 없었고...극장주들은 관객수를 조작해서 매출을 축소신고했고, 연계된 배급사, 제작사 모두 회계처리를 엉터리로 했다. 돈이 되는 외화수입도 비슷한 형태였다. 당연히 정확한 관람객 집계, 매출통계는 아무도 몰랐다. 한 마디로 복마전.
1996년도에 벌어진 이태원의 구속과 애니깽 사태는 1950년대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충무로 질서가 붕괴하는 신호탄이었다. 이후의 한국영화계는 기존의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서 탈피해서 자본이 주도하는 영화산업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제작-홍보-배급-상영-2차시장(비디오,인터넷,케이블tv) 등 전 분야에서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임권택과 함께 대한민국 영화의 산 증인 중 한명인 영화 제작자.
1938년생으로 6.25 전쟁을 겪고 난뒤 해방후에는 한때 정치깡패 조직에 몸담기도 했었는데, 5.16 이후 대부분의 정치깡패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살아남아서 그때의 정보를 살려서 건설업자로 전향해 활동하다가, 1980년대 초반 태흥영화사를 만들고 영화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장호, 이두용, 배창호 등 80년대 대표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다가 1989년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제작하면서 평생의 파트너가 된다. 이때부터 장군의 아들, 개벽, 서편제, 춘향뎐, 취화선 등 임권택 감독의 모든 영화를 제작한다.
그외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던 1990년대에는 박철수의 오세암,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 화엄경 등의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2004년 임권택의 하류인생이 흥행에 실패한 이후로는 영화제작에선 거의 손을 뗀 상태이다. 그래서 임권택의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은 2006년 김종원이 제작하였다. 이후 독자적인 멀티플렉스 극장 THC 9를 의정부시에 개관하였다. 허나 이후 THC 9은 바로 옆인 의정부역 신세계백화점 10층에 들어선 CGV에 밀려 고전하다 결국 CJ에 인수되어 "CGV태흥"으로 바뀌었다.
1996년도에는 영화사 매출을 조작해서 거액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당시까지 한국영화계는 대략 10여개의 국내 영화제작사, 영화배급사들 그리고 자기 고향에 한두개의 영화관을 소유한 전국 수백여명의 극장주들에 의해서 굴러가고 있었다. 서로간에 끈끈한 인맥으로 묶인 이들은 "좋은 게 좋은 거지"식의 주먹구구식 운영으로 일관했고, 당연히 매출과 관람객 집계, 세금 납부 등은 전부 엉터리였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초중반부터 금융권과 대기업 등 외부의 대자본이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이런 후진적인 구조가 투자에 방해가 된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자 문화산업 육성을 내세운 정부가 영화계에 칼을 들었고, 바로 전통적인 충무로 질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태원이 제일 먼저 걸려든 것이다. 이태원 이외에도 주요 영화제작자, 배급사, 지방 극장주들 수십여명이 탈세혐의로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당시는 지방극장주들이 미리 시나리오와 출연배우를 보고 제작사에 선금을 주고 상영권을 구매한 다음에 영화가 극장에 걸리면 입장수익을 전액가져가는 구조였기 때문에, 사실상 영화제작사들은 돈을 벌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자본축적이 안되니 다음 영화도 극장주들한테 헐값을 받고 상영권을 미리 팔 수 밖에 없었고...극장주들은 관객수를 조작해서 매출을 축소신고했고, 연계된 배급사, 제작사 모두 회계처리를 엉터리로 했다. 돈이 되는 외화수입도 비슷한 형태였다. 당연히 정확한 관람객 집계, 매출통계는 아무도 몰랐다. 한 마디로 복마전.
1996년도에 벌어진 이태원의 구속과 애니깽 사태는 1950년대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충무로 질서가 붕괴하는 신호탄이었다. 이후의 한국영화계는 기존의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서 탈피해서 자본이 주도하는 영화산업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제작-홍보-배급-상영-2차시장(비디오,인터넷,케이블tv) 등 전 분야에서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