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암
五歲巖
[1]
백담사에 속해 있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지었는데,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 1548년(명종 3)에 보우가 중건한 후 1643년(인조 21)에 설정이 또 중건하면서 현 명칭이 붙었다. 1888년(고종 25) 백화화상이 박달나무를 써서 2층짜리 법당을 지었다.
5살 된 아이가 폭설 속에서 부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오세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 설화는 암자를 중건한 설정 스님의 얘기를 토대로 했으며 전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설정이란 스님이 설악산 깊은 곳의 암자에서 수행을 하던 중 잠이 들었는데 관세음보살이 꿈속에서 설정스님에게 서둘러 마을로 가라고 얘기한다. 꿈에서 깬 설정스님은 서둘러 자신이 살던 마을로 달려갔는데 마을로 오니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 무언가 이상해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니 이 마을에 전염병이 한번 제대로 돌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린 남자아이 한 명만이 이 난리통에 혼자 살아남았다고 얘기한 뒤 갈 길을 다시 갔다. 설정스님은 남자아이란 말에 놀라 서둘러 자신의 형이 살던 집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 3살 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바로 스님의 조카이다. 스님은 관세음보살이 이 아이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하며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자신의 암자로 갔다. 이후 홀로 어린 조카를 키우며 지내던 중 어린 조카는 이제 5살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스님이 암자를 둘러보니 양식이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산 아랫마을로 양식을 구하러 가게 되었다. 이에 혼자 남겨질 조카에게 "혼자 있는 것이 무섭거든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외우며 지내거라." 하고 일러주고는 길을 떠났다. 그런데 스님이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구할 무렵 설악산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서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봄이 되어서 눈이 다 녹은 뒤에야 서둘러 암자로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조카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가 말하길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보살펴주었다는 것.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신력(神力)에 감동해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한때 전설의 고향에서도 이 오세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가 등장한 적이 있다. 물론 극의 진행을 위해 약간의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여기에선 주인공인 승려가 절을 찾아오는 어느 귀부인을 혼자 사모하다가 파계할 뻔하고, 번뇌를 떨치기 위해 방랑하나 오히려 번뇌에 더 시달려서 건강을 크게 해쳤다. 이를 딱하게 여긴 큰스님은 관음암이란 작은 암자에서 조용히 수행을 하도록 권한다. 관음암에 가던 승려는 마을에서 한 걸인 아이를 발견해서 데려다 키우고 이하 동문. 이 작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이 그 귀부인으로 현신해서 승려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라는 암시가 나온다. 다른 불교 설화에서도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보살, 혹은 부처가 현신해서 승려를 시험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를 차용한 것이다.
실제로 유명해지기 전만 해도 진짜 길이 험해 가기 힘든 사찰 중에 하나였다. 우학 스님의 수필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를 보면 처음에 오세암을 찾아갈 때 너무 힘들어서 도착했을 때는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오세암이 유명해지고 찾아가니 좁고 험한 산길은 다니기 좋게 다 정리해 놓고, 암자 주변도 자갈을 깔아 놓거나 시멘트 공구리로 정리를 다 해 놓은 덕분에 처음에 갔을 때의 감격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동화작가 정채봉(1946 ~ 2001)의 작품.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판하였다.
1에서 언급한 오세암의 전설을 모티브로 만든 동화. 프랑스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아동문학의 고전이며, 어른들도 공감이 가는 '성인동화'의 대표작.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설화와 같지만, 해당 동화에서는 소년이 스님의 조카가 아니라 떠돌이 거지로 바뀌었다. 이름은 거지를 뜻하는 길손이로 정해졌고, 누나인 시각장애를 지닌 감이라는 오리지널 캐릭터가 추가되었다.
남매는 부모를 잃고 떠돌다 우연히 만난 스님의 도움으로 근처의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머물게 되는데, 길손이가 자꾸 장난을 쳐서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되자 스님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결국 아이들을 절에 데려온 스님이 보호자 자격으로 길손이만 절 대신 근처의 낡은 암자에 머물며 수행을 하기로 하는데, 암자가 너무 오래 방치되어 손볼 곳도 많고 필요한 물건도 많은 순 폐가(…)였지만, 스님과 길손이는 암자를 정리정돈해나간다.
이 때 길손이는 골방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스님의 경고[2] 를 무시하고 골방에 들어가는데, 골방 안에 걸려있던 관세음보살의 초상을 본 순간부터 초상 속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초상 속 관세음보살을 상대로 놀이를 하거나 말을 거는 등의 행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후 암자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스님이 길손이만 암자에 두고 (여기서 설화에서처럼 스님이 길손이이게 '무서우면 관세음보살님을 찾거라'고 한다.) 마을로 탁발하러 내려갔으나, 돌아가는 길에 폭설로 길이 막혀 암자에 가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암자엔 식량도 생필품도 없고, 심지어 겨울이라 겨우 5살 꼬맹이인 길손이가 혼자 생존해 나가길 바라는 건 완벽히 무리였기에 스님은 어떻게든 암자로 가려고 무리하게 산행을 하다 조난당하게 된다.
그나마 스님은 다행히 마을사람들에게 구조받지만, 결국 눈이 녹고 얼음이 다 가실 때까지 암자로 가지 못해 전전긍긍해하다 눈과 얼음이 다 사라지자 부리나케 절에 있던 감이와 함께 암자로 달려간다. 그러나 몇달 넘게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다 생필품도 없었을 암자에서 길손이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경악하는 스님에게 길손이는 관세음보살님이 찾아와 밥도 먹여주고 같이 놀아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진짜로 관세음보살이 등장하고''', 관세음보살은 길손이의 순수함을 칭찬하면서 길손이를 품에 안아들고 함께 승천한다. '''그러니까 길손이는 이 시점에서 죽은 것'''.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 감이는 시력을 되찾는다.
그러나 감이는 슬펐다. 동생이 가르쳐준 세상을 제 눈으로 봤을 때 오히려 동생이 가르쳐준 그때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스님은 마음이 아팠다. 길손이는 마치 부처님이 열반하던 모습[3] 그대로 죽어 있었다. 스님은 이를 보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없이 오열한다.
3일 뒤 길손이의 장례식날. 암자는 다섯살 아이가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오세암이란 이름의 명물이 되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4] 이 돈을 잘 벌 수 있게 해달라, 병이 낫게 해달라는 등 부처님의 은혜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장례식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은 슬픔에 잠겨있다. 바로 섭정 스님과 눈을 뜬 감이로, 섭정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길손이의 죽음 이후 완전히 슬픔에 잠겼고 감이는 그 옆에서 홀로 길손이를 그리며 울부짖는다.[5]
기본적으로 감동적인 내용이지만, 어른들의 탐욕을 작중에 녹여내어 날선 비판을 하고 있기도 한 작품이기도 하다. 다들 길손이와 감이를 보고 말로만 불쌍하다고 하지 나서서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심지어 보호자인 섭정 스님을 제외하면 불도의 길을 걷는 스님들조차 길손이의 장난질을 공손하게 타이르기는 커녕 그저 수행에 방해된다며 길손이를 사실상 추방하기나 하는 등 불도에서 추구하는 자비로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다.
그 절정은 마지막 부분인데, 직전 관세음보살은 길손이의 순수함을 칭찬하면서 역설적으로 믿음은 없이 그저 자신에게 뭔가를 해 달라고 빌기만 하는 사람들의 탐욕을 비판하였다. 관세음보살의 전설이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또 다시 암자로 몰려들어 믿음 없는 댓가성 기도만 올리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6] 어린애가 죽은 건 생각도 않고 신적인 존재가 다녀갔다는 것만 주목해 자기 욕심이나 챙기는 한심한 어른들의 옆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동시에 불쌍한 남매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가진, 작중 등장한 어른들 중 유일하게 양심적인 어른인 보호자 스님과 그저 자신의 동생을 다시 보고싶어하며 눈물짓는 감이의 한탄이 대조되어 더욱 진한 뒤끝을 남긴다.
원작은 이렇게 동생을 태우는 재라도 잡아보려는 감이의 모습으로 끝맺었다. 결과적으로 관세음보살도 동생을 살려준 게 아니라 되레 뒤통수를 친 거고, 스님들도 기적을 이용하려고만 할 뿐이라 부처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깨달음을 얻는 장면으로 끝나며, 애니메이션에선 그 장면이 생략되었다.[7]
1990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에서는 어째서인지 원작엔 없던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추가했다. 일례로 아이들은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출신이고, 고아원에서 나온 건 고향으로 가서 부모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써, 고아원이 잘못한 건 없고 단지 애들이 제발로 나간 거란 식으로 묘사하였으며, 폭설로 길이 막혀 있다가 눈이 녹은 후 길손이가 있는 암자로 간 것은 절 스님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거두어준 스님과 이 성당에서 온 수녀(김혜수)이다. 그런 점을 빼면 큰 틀에서의 스토리는 원작 그대로라 흠잡을 곳은 없다. 말 그대로 왜 넣었는지 영문을 전혀 모를 기독교적 요소만 빼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쫄딱 망하고 묻혀졌다. 지상파에서 몇번 방영하긴 했지만 말이다.
[image]
극장용 한국 애니메이션.
하얀마음 백구의 마고21작. 감독은 성백엽. '''28회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대상 수상작품.'''[8] 주제가는 이소은, 윤도현의 '마음을 다해 부르면'. 동화나 원본설화와는 달리 만화의 배경은 1950~60년대의 한국으로 추정된다.
하얀마음 백구의 작은 성공을 발판으로 만들어진 한국 감성 애니메이션이다. 2003년 5월 1일 개봉했다. 물론 흥행은 그리 끌지 못하고 각 도시의 문화회관에 순회상영하였다. 불교석상에서 따온 그림체와 따뜻한 색감이 돋보였다. 왜 성공하지 못했냐고 한다면 당시 국산 만화영화에 대한 무관심 및 냉대가 가장 큰 원인이고 만화영화 또한 주 대상으로 삼을 연령대가 불분명했다는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네이버 영화 기준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여려모로 침체기였던 한국 애니메이션 계에 원더풀 데이즈란 작품 때문에 새로운 관심이 쏠린 상황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초점이 원더풀 데이즈에 몰리는 바람에 오히려 오세암은 묻혀버렸고, 운이 나쁘게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되던 참이었다. 허나 이후 원더풀 데이즈도 한국의 애니산업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문제가 많은 작품이 되어 버린 것도 있지만 오세암을 보러 올 정도로 한국 만화영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다지 없었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고르는 사람들도 기왕 고르자면 이미 망해버린 국산 애니메이션 대신 일본 애니메이션을 고르는 상황이었다.
오세암을 극장에서 본 사람들은 시나리오도 괜찮았고 작화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호평을 했지만 입소문이 그다지 퍼지지 못했고, 상영시간도 제멋대로 바뀌다가 막을 내리게 됐다.[9]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수상을 했지만 그 때는 이미 흥행 실패의 딱지가 붙은 뒤였다.
어쨌든 여러모로 비운의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마고21은 폭삭 망해버린 모양이다. 회사 도메인도 외국사이트가 차지했다.
여담으로 김서영씨의 풋풋한 소년 연기를 들어볼 수 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연기하다가 울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원작 동화에서는 주인공인 '길손이'와 '감이'의 이름의 유래('길손'은 '거지(…)'라는 의미로 어느 문지기가 길손이에게 붙여 준 이름이고, '감이'는 '눈을 감고 다닌다'고 하여 장님인 누나에게 길손이가 붙여 준 이름이다)에 대해 잠깐 언급되는 부분이 있는데, 애니에선 그런 거 없다. 과거회상씬에서도 어머니가 이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10]
1. 설악산에 있는 암자
[1]
백담사에 속해 있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지었는데,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 1548년(명종 3)에 보우가 중건한 후 1643년(인조 21)에 설정이 또 중건하면서 현 명칭이 붙었다. 1888년(고종 25) 백화화상이 박달나무를 써서 2층짜리 법당을 지었다.
5살 된 아이가 폭설 속에서 부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오세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 설화는 암자를 중건한 설정 스님의 얘기를 토대로 했으며 전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설정이란 스님이 설악산 깊은 곳의 암자에서 수행을 하던 중 잠이 들었는데 관세음보살이 꿈속에서 설정스님에게 서둘러 마을로 가라고 얘기한다. 꿈에서 깬 설정스님은 서둘러 자신이 살던 마을로 달려갔는데 마을로 오니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 무언가 이상해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니 이 마을에 전염병이 한번 제대로 돌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린 남자아이 한 명만이 이 난리통에 혼자 살아남았다고 얘기한 뒤 갈 길을 다시 갔다. 설정스님은 남자아이란 말에 놀라 서둘러 자신의 형이 살던 집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 3살 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바로 스님의 조카이다. 스님은 관세음보살이 이 아이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하며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자신의 암자로 갔다. 이후 홀로 어린 조카를 키우며 지내던 중 어린 조카는 이제 5살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스님이 암자를 둘러보니 양식이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산 아랫마을로 양식을 구하러 가게 되었다. 이에 혼자 남겨질 조카에게 "혼자 있는 것이 무섭거든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외우며 지내거라." 하고 일러주고는 길을 떠났다. 그런데 스님이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구할 무렵 설악산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서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봄이 되어서 눈이 다 녹은 뒤에야 서둘러 암자로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조카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가 말하길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보살펴주었다는 것.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신력(神力)에 감동해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한때 전설의 고향에서도 이 오세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가 등장한 적이 있다. 물론 극의 진행을 위해 약간의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여기에선 주인공인 승려가 절을 찾아오는 어느 귀부인을 혼자 사모하다가 파계할 뻔하고, 번뇌를 떨치기 위해 방랑하나 오히려 번뇌에 더 시달려서 건강을 크게 해쳤다. 이를 딱하게 여긴 큰스님은 관음암이란 작은 암자에서 조용히 수행을 하도록 권한다. 관음암에 가던 승려는 마을에서 한 걸인 아이를 발견해서 데려다 키우고 이하 동문. 이 작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이 그 귀부인으로 현신해서 승려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라는 암시가 나온다. 다른 불교 설화에서도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보살, 혹은 부처가 현신해서 승려를 시험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를 차용한 것이다.
실제로 유명해지기 전만 해도 진짜 길이 험해 가기 힘든 사찰 중에 하나였다. 우학 스님의 수필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를 보면 처음에 오세암을 찾아갈 때 너무 힘들어서 도착했을 때는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오세암이 유명해지고 찾아가니 좁고 험한 산길은 다니기 좋게 다 정리해 놓고, 암자 주변도 자갈을 깔아 놓거나 시멘트 공구리로 정리를 다 해 놓은 덕분에 처음에 갔을 때의 감격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1.1. 관련 문서
2. 동명의 동화
동화작가 정채봉(1946 ~ 2001)의 작품.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판하였다.
1에서 언급한 오세암의 전설을 모티브로 만든 동화. 프랑스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아동문학의 고전이며, 어른들도 공감이 가는 '성인동화'의 대표작.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설화와 같지만, 해당 동화에서는 소년이 스님의 조카가 아니라 떠돌이 거지로 바뀌었다. 이름은 거지를 뜻하는 길손이로 정해졌고, 누나인 시각장애를 지닌 감이라는 오리지널 캐릭터가 추가되었다.
남매는 부모를 잃고 떠돌다 우연히 만난 스님의 도움으로 근처의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머물게 되는데, 길손이가 자꾸 장난을 쳐서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되자 스님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결국 아이들을 절에 데려온 스님이 보호자 자격으로 길손이만 절 대신 근처의 낡은 암자에 머물며 수행을 하기로 하는데, 암자가 너무 오래 방치되어 손볼 곳도 많고 필요한 물건도 많은 순 폐가(…)였지만, 스님과 길손이는 암자를 정리정돈해나간다.
이 때 길손이는 골방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스님의 경고[2] 를 무시하고 골방에 들어가는데, 골방 안에 걸려있던 관세음보살의 초상을 본 순간부터 초상 속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초상 속 관세음보살을 상대로 놀이를 하거나 말을 거는 등의 행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후 암자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스님이 길손이만 암자에 두고 (여기서 설화에서처럼 스님이 길손이이게 '무서우면 관세음보살님을 찾거라'고 한다.) 마을로 탁발하러 내려갔으나, 돌아가는 길에 폭설로 길이 막혀 암자에 가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암자엔 식량도 생필품도 없고, 심지어 겨울이라 겨우 5살 꼬맹이인 길손이가 혼자 생존해 나가길 바라는 건 완벽히 무리였기에 스님은 어떻게든 암자로 가려고 무리하게 산행을 하다 조난당하게 된다.
그나마 스님은 다행히 마을사람들에게 구조받지만, 결국 눈이 녹고 얼음이 다 가실 때까지 암자로 가지 못해 전전긍긍해하다 눈과 얼음이 다 사라지자 부리나케 절에 있던 감이와 함께 암자로 달려간다. 그러나 몇달 넘게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다 생필품도 없었을 암자에서 길손이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경악하는 스님에게 길손이는 관세음보살님이 찾아와 밥도 먹여주고 같이 놀아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진짜로 관세음보살이 등장하고''', 관세음보살은 길손이의 순수함을 칭찬하면서 길손이를 품에 안아들고 함께 승천한다. '''그러니까 길손이는 이 시점에서 죽은 것'''.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 감이는 시력을 되찾는다.
그러나 감이는 슬펐다. 동생이 가르쳐준 세상을 제 눈으로 봤을 때 오히려 동생이 가르쳐준 그때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스님은 마음이 아팠다. 길손이는 마치 부처님이 열반하던 모습[3] 그대로 죽어 있었다. 스님은 이를 보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없이 오열한다.
3일 뒤 길손이의 장례식날. 암자는 다섯살 아이가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오세암이란 이름의 명물이 되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4] 이 돈을 잘 벌 수 있게 해달라, 병이 낫게 해달라는 등 부처님의 은혜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장례식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은 슬픔에 잠겨있다. 바로 섭정 스님과 눈을 뜬 감이로, 섭정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길손이의 죽음 이후 완전히 슬픔에 잠겼고 감이는 그 옆에서 홀로 길손이를 그리며 울부짖는다.[5]
기본적으로 감동적인 내용이지만, 어른들의 탐욕을 작중에 녹여내어 날선 비판을 하고 있기도 한 작품이기도 하다. 다들 길손이와 감이를 보고 말로만 불쌍하다고 하지 나서서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심지어 보호자인 섭정 스님을 제외하면 불도의 길을 걷는 스님들조차 길손이의 장난질을 공손하게 타이르기는 커녕 그저 수행에 방해된다며 길손이를 사실상 추방하기나 하는 등 불도에서 추구하는 자비로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다.
그 절정은 마지막 부분인데, 직전 관세음보살은 길손이의 순수함을 칭찬하면서 역설적으로 믿음은 없이 그저 자신에게 뭔가를 해 달라고 빌기만 하는 사람들의 탐욕을 비판하였다. 관세음보살의 전설이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또 다시 암자로 몰려들어 믿음 없는 댓가성 기도만 올리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6] 어린애가 죽은 건 생각도 않고 신적인 존재가 다녀갔다는 것만 주목해 자기 욕심이나 챙기는 한심한 어른들의 옆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동시에 불쌍한 남매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가진, 작중 등장한 어른들 중 유일하게 양심적인 어른인 보호자 스님과 그저 자신의 동생을 다시 보고싶어하며 눈물짓는 감이의 한탄이 대조되어 더욱 진한 뒤끝을 남긴다.
원작은 이렇게 동생을 태우는 재라도 잡아보려는 감이의 모습으로 끝맺었다. 결과적으로 관세음보살도 동생을 살려준 게 아니라 되레 뒤통수를 친 거고, 스님들도 기적을 이용하려고만 할 뿐이라 부처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깨달음을 얻는 장면으로 끝나며, 애니메이션에선 그 장면이 생략되었다.[7]
1990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에서는 어째서인지 원작엔 없던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추가했다. 일례로 아이들은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출신이고, 고아원에서 나온 건 고향으로 가서 부모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써, 고아원이 잘못한 건 없고 단지 애들이 제발로 나간 거란 식으로 묘사하였으며, 폭설로 길이 막혀 있다가 눈이 녹은 후 길손이가 있는 암자로 간 것은 절 스님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거두어준 스님과 이 성당에서 온 수녀(김혜수)이다. 그런 점을 빼면 큰 틀에서의 스토리는 원작 그대로라 흠잡을 곳은 없다. 말 그대로 왜 넣었는지 영문을 전혀 모를 기독교적 요소만 빼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쫄딱 망하고 묻혀졌다. 지상파에서 몇번 방영하긴 했지만 말이다.
3. 동명의 애니메이션
[image]
극장용 한국 애니메이션.
하얀마음 백구의 마고21작. 감독은 성백엽. '''28회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대상 수상작품.'''[8] 주제가는 이소은, 윤도현의 '마음을 다해 부르면'. 동화나 원본설화와는 달리 만화의 배경은 1950~60년대의 한국으로 추정된다.
하얀마음 백구의 작은 성공을 발판으로 만들어진 한국 감성 애니메이션이다. 2003년 5월 1일 개봉했다. 물론 흥행은 그리 끌지 못하고 각 도시의 문화회관에 순회상영하였다. 불교석상에서 따온 그림체와 따뜻한 색감이 돋보였다. 왜 성공하지 못했냐고 한다면 당시 국산 만화영화에 대한 무관심 및 냉대가 가장 큰 원인이고 만화영화 또한 주 대상으로 삼을 연령대가 불분명했다는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네이버 영화 기준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여려모로 침체기였던 한국 애니메이션 계에 원더풀 데이즈란 작품 때문에 새로운 관심이 쏠린 상황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초점이 원더풀 데이즈에 몰리는 바람에 오히려 오세암은 묻혀버렸고, 운이 나쁘게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되던 참이었다. 허나 이후 원더풀 데이즈도 한국의 애니산업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문제가 많은 작품이 되어 버린 것도 있지만 오세암을 보러 올 정도로 한국 만화영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다지 없었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고르는 사람들도 기왕 고르자면 이미 망해버린 국산 애니메이션 대신 일본 애니메이션을 고르는 상황이었다.
오세암을 극장에서 본 사람들은 시나리오도 괜찮았고 작화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호평을 했지만 입소문이 그다지 퍼지지 못했고, 상영시간도 제멋대로 바뀌다가 막을 내리게 됐다.[9]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수상을 했지만 그 때는 이미 흥행 실패의 딱지가 붙은 뒤였다.
어쨌든 여러모로 비운의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마고21은 폭삭 망해버린 모양이다. 회사 도메인도 외국사이트가 차지했다.
여담으로 김서영씨의 풋풋한 소년 연기를 들어볼 수 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연기하다가 울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원작 동화에서는 주인공인 '길손이'와 '감이'의 이름의 유래('길손'은 '거지(…)'라는 의미로 어느 문지기가 길손이에게 붙여 준 이름이고, '감이'는 '눈을 감고 다닌다'고 하여 장님인 누나에게 길손이가 붙여 준 이름이다)에 대해 잠깐 언급되는 부분이 있는데, 애니에선 그런 거 없다. 과거회상씬에서도 어머니가 이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10]
3.1. 등장인물
- 길손이
본작의 주인공으로 감이의 남동생. 누나와 단 둘이 떠돌아다니는 거지 소년으로, 강가에서 스님들과 만나 절에 기식하게 된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성격으로 엄마가 먼 곳에 여행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천방지축인 성격으로 절에서 잦은 사고를 일으켜 설정 스님과 관음암으로 수행을 떠나게 된다.
- 감이
길손이의 누나로 어렸을 적 일어난 화재로 엄마를 잃었으며, 이때 재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눈을 다쳐 장님신세가 된다. 스님들의 밥을 해주면서 절에 기식할 수 있게 되어 길손이와 다른 운명을 맞는다.[11]
- 설정 스님
부모가 없는 길손이와 감이 남매를 거두어줘 절에서 돌봐준다.
- 일지 스님
- 바람이
길손이가 주워온 어린 강아지.
- 말썽쟁이 형제
마을에서 동네에서 제일가는 말썽쟁이 형제로 길손이를 괴롭히고 심지어 절에서 감이를 괴롭히다[12] 길손이에게 제대로 얻어맞는다. 형제들 엄마의 행동이 가관인데 코피가 터진 첫째만 보고 남매더러 고아라면서 질책하는 적반하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에서 꽤나 비난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나마 형제 중 동생이 울면서 용서를 비는 감이를 보고 엄마를 말리는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
[1] 출처:영어 위키백과.[2] 사실 이 골방이 있는 암자가 방치된 원인이기도 한데, 예전에 이 골방에서 문둥병에 걸린 스님이 머물다 죽었기 때문이다.[3] 부처님은 머리를 북쪽으로 놓고 손을 머리 아래에 놓은 뒤 조용히 돌아누운 채로 열반했다.[4] 어찌나 많은지 암자 내부엔 이미 사람들이 꽉 들어차 바깥에도 줄을 설 정도라고…[5]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이때의 대사가 어찌나 안타까운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눈물을 쏟을지도 모른다. 감이: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 여기서 연기는 화장하는 연기를 말한다.[6] 그 절정은 암자로 방문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대목인데, 한 양반은 암자에 가마를 타고 가려다가 산길이 험해 가마가 오르지 못해 암자로 갈 수 없었다는 대목이다.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가도 될 것을 기어이 가마를 타고 편하게 가겠다는 욕심을 부린 댓가로 암자 근처도 못 가게 됐다. 즉, 믿음이 아닌 욕심을 위해 암자로 가려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양양군 어느 마을의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해서 아들이 어머니를 지게에 올려주고 열심히 걸어서 무사히 도착했다. 이를 통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는 올라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7] 본래 불자였던 정채봉이 5.18 이후 갑자기 천주교로 개종했는데, 아마도 이 즈음 해서 불교에게 대단히 섭섭함을 느낄 일이 있었던 듯 하다. 추측을 하자면,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침묵했던 불교계의 모습에 실망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이때 반대로 기독교 쪽은 열심히 활동했다.[8] 안시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장편 부문을 수상했던 대표작은 <붉은 돼지>(1993년 미야자키 하야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5년 타카하타 이사오),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1997년 빌 플림톤), <뮤턴트 에일리언>(2001년 빌 플림톤), <마리이야기>(2002년 이성강 감독) 등 유명한 작품들이 수상했다.[9] 대부분의 관객들이 오세암 애니메이션 게시판에 호평을 남겼지만, 상영관이 찾기 힘들거나 적다라는 글도 올렸다.[10] 과거 영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엔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귀신이 안 데려 간다, 즉 무사히 성장한다는 속설이 있어서 일부러 천한 아명을 부르곤 했는데(어느 정도 성장하거나 성인이 된 후 제대로 된 이름으로 개명시켰다)이와 연관 지어보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11] 원작의 마지막 장면으로 볼 때에 부처에 대한 믿음 자체가 사라져버려, 아마 절을 떠나 어떻게든 자기 길을 찾았을 듯 싶다.[12] 머리를 잡아당기고 치마를 들추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