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프나 왕국
- Kingdom of Jaffna யாழ்ப்பாண அரசு
- Kingdom of Aryachakravarti, ஆரியச்சக்கரவர்த்தி அரசு
1. 개요
자프나 왕국은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 반도에 오디샤 출신 정복세력이 타밀족을 규합하여 세운 중세 왕조이다. 이명인 아리아차크라와르티 왕조는 인도아리아인[1] 의 전륜성왕 왕국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스리랑카 내 타밀족 상층 카스트들의 민족 정체성을 규정하는 왕조이기도 하다.[2]
2. 상세
1215년, 인도 동부 칼링가(Kalinga) 지방에서 칼링가 마가(Kalinga Magha)가 이끄는 새로운 힌두계 민족들이 스리랑카로 건너와 싱할라인의 폴론나루와 왕조의 파라크라마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스리랑카 북부에 자리를 잡았다. 칼링가 마가는 스리랑카 전토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남부의 완전한 정복에는 끝내 실패하였다. 그 결과 스리랑카 북부는 칼링가 마가가 세운 자프나 왕국의 세력권이 되었지만, 싱할라인들은 칼링가 마가를 피해 남부로 대거 이주하였다.[3]
13세기에 자프나 왕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탐브랄링가 왕국의 군주 찬드라바누(Chandrabhanu, 재위 1230–1263)가 1247년 보낸 원정군에 패배하여 탐브랄링가에 종속되었고, 찬드라바누는 자프나로 옮겨와 1255년부터 자프나의 왕위도 얻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판디아 왕국의 사다이야와르만 순다라 1세(Cataiyavarman Sundara I, 재위 1251–1268)는 자프나의 찬드라바누에게 1258년 사절을 보내 조공하고 신속할 것을 권하였으나 찬드라바누는 거절하였다. 이에 사다이야와르만 순다라 1세는 1262년 자프나로 사다이야와르만 위라(Cataiyavarman Vira)가 이끄는 원정군을 보냈고, 찬드라바누는 판디아군과 맞서 싸우다 1263년에 전사하였다. 사다이야와르만 위라가 이끄는 판디아군은 남스리랑카도 공격해 승리를 거둔 뒤, 찬드라바누가 자프나로 옮긴 후 탐브랄링가 본토를 다스리던 찬드라바누의 아들 사와한마인단(Savakanmaindan)을 판디아 산하 자프나의 군주로 세우고 1264년 철수했다.
그러나 사와한마인단은 1268년 사다이야와르만 순다라 1세가 죽은 뒤 판디아로 보내는 조공을 끊고 다시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사다이야와르만 순다라 1세를 이은 판디아의 군주 마라와르만 쿨라세하라 1세(Maravarman Kulasekara I, 재위 1268–1308)는 이를 징벌하기 위해 북스리랑카를 다시 침공하여, 1277년 사와한마인단의 자프나군을 격파하여 사와한마인단을 퇴위시키고 자프나의 새로운 국왕으로 쿨라세하라 친가이아리얀(Kulasekara Cinkaiariyan, 재위 1277–1284)[4] 을 앉혔다. 이때 세워진 자프나의 새 왕조가 아르야 차크라와르티 왕조이다. 판디아의 자프나 지배는 14세기 초까지 이어졌지만, 마라와르만 쿨라세하라 1세가 죽고 판디아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자프나는 다시 독립 세력이 되었다.
이후 싱할라인의 코테 왕국의 파라크라마바후 6세는 아들 부와네카바후 6세(Bhuvanekabahu VI, 자프나 국왕 재위 1450–1467, 코테 국왕 재위 1472–1480)에게 1450년에 북부의 자프나를 공격하게 하여 자프나 왕국 전역을 점령에 성공하고, 부와네카바후 6세는 1450년부터 1467년까지 자프나의 국왕으로 통치하였다.[5] 그러나 부와네카바후 6세에게 쫓겨난 자프나 아르야 차크라와르티 왕조의 카나하수리야 친가이아리얀(Kanakacuriya Cinkaiariyan, 자프나 국왕 재위 1440–1450, 1467–1478)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남인도 마두라이로 피신해서 자프나로 귀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파라크라마바후 6세가 1467년 사망하자 부와네카바후 6세는 코테의 왕위 계승권 분쟁에 참가하기 위해 코테로 귀환하였는데, 이때를 노리고 카나하수리야 친가이아리얀이 남인도 용병을 데리고 자프나로 돌아와 코테 세력을 물리치고 다시 자프나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자프나에서는 왕조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고, 아르야 차크라와르티 왕조가 포르투갈령 실론에 흡수되기 직전까지 자프나의 왕위를 세습하였다.
3. 멸망
16세기 초부터 스리랑카에 손을 뻗은 포르투갈 해양 제국은 1560년 자프나 왕국과 벌인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어 수도 자프나를 점령하고, 만나르(Mannar)섬 등의 영토를 받아내었다. 자프나 왕국은 포르투갈이 1591년에 두 번째로 원정을 오자 다시 패배하고 보호국이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자프나 왕국 주민 상당수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후 식민지 운영 인력을 충당하였다. 17세기 초 자프나 지역에서 포르투갈 지배에 반항하여 반란이 일어났으나 포르투갈군에 진압되었고, 자프나 왕국은 이 과정에서 소멸하고 포르투갈령 실론에 병합되었다.
[1] 칼링가 마가를 중심으로 한 오디샤 출신 왕조 창립자들과 그 군대는 인도유럽어족 오리야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다.[2] 고대부터 중세까지 스리랑카를 침공한 남인도 및 오디샤 출신 인도인들은 군공을 세우고 카스트가 승급되거나, 지방 토호가 되어 카스트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중에 영국 식민 시절 유입된 타밀족 노동자들은 이런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계급이 수드라나 불가촉천민이었고 이는 스리랑카 내전 때 타밀족들이 서로 단합하지 못하고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3] 스리랑카 남부에서는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후예 위자야바후 3세(Vijayabahu III, 재위 1220–1224)가 이주한 싱할라인 세력을 규합하여 담바데니야(Dambadeniya)를 중심으로 담바데니야 왕국(1220–1345)을 세우고 자프나의 남진을 저지하였다.[4] 출신에 대해서는 판디아의 귀족이라는 설부터 타밀나두 지방의 브라만이라는 설, 탐브랄링가 계열의 말레이인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5] 이때 전근대 스리랑카에서 마지막으로 섬이 통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