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역사

 




1. 선사 시대
2. 고대
3. 고대 후기
4. 이슬람 시대
5. 북부 변경 지대
5.1. 탐브랄링가 왕국
5.2. 파타니 왕국
5.3. 크다 술탄국
5.4. 19세기와 20세기의 북부 변경
6. 영국의 지배
6.2. 보르네오
6.3. 말레이 반도
6.4. 주석과 고무
6.5. 인구 증가
7. 현대
7.1. 독립
7.2. 싱가포르 축출
7.3. 부미푸트라 정책
8. 참고 문헌
9. 관련 항목
10. 둘러보기


1. 선사 시대


최초로 말레이시아 지역에 호모 사피엔스가 거주한 것은 약 6만에서 4만 년 전으로, 초기 정착민은 모두 오스트랄로이드계였다. 2019년 기준으로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활동 증거는 1958년 사라왁의 니아(Niah) 동굴에서 발굴된 약 4만 년 전의 유골이다.
이후 약 기원전 4,300–3,000년 무렵에 중국 남부에서 발원한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약 기원전 2,000–1,000년 무렵에 중국 남부 및 타이완섬에서 출발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북부에 도착하였다. 이 두 집단은 기존의 오스트랄로이드계 주민을 밀어내거나 동화시켰던 것으로 보이며, 최종적으로는 가장 나중에 도착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가운데 보르네오 지역에서 발달한 말레이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우세해지게 되었다.
과거에 존재했던 오스트랄로이드 및 오스트로아시아계, 또는 문명화되지 않은 오스트로네시아계 집단의 후손으로 오랑 아살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말레이 반도의 오랑 아살은 '오랑 아슬리'로도 불린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슬리 제어로 통칭되는 오스트로아시아계 언어를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말레이인들은 이들을 '''오랑우탄 비슷하게''' 야만인이나 짐승 취급했으며[1] 노예로 만들거나 살해하기도 하였다.
지금 말레이시아의 인구의 54%를 차지하는 말레이 계열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약 3–4천 년 전부터 말레이시아에 살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말레이시아에는 이 말레이 계열도 여러 종족 집단으로 나뉘지만, 보통 부미푸트라로 통칭되어서 하나의 말레이계로 본다.

2. 고대


기원후에는 여러 왕국이 이 지역에 존재했다. 남인도 촐라 왕국의 상인들이 정착하여 인도 문화가 전파됨으로써 국가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추정 중이다.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존재 여부와 위치가 확인되는 국가들은 랑카수카 왕국(Langkasuka, 2세기?–15세기[2]), 적토(赤土, 말레이어: Tanah Merah, 2세기?–7세기?[3]), 단단(丹丹) 등으로서, 각각 파타니, 클란탄, 트렝가누 등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 반반(盘盘)이라는 국가도 클란탄 혹은 트렝가누 지역에 있었는데, 이 역시 8세기 후반에 스리위자야에 정복당했고, 중국에 6–7세기에 여러 차례 공물을 보냈다는 정도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 국가들은 대략 6세기부터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데, 중국 남조 국가들이 남방과의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덕분이라고 여겨진다.
말레이 반도 북서부의 크다 지역과 페락 지역은 고대 인도양 무역로와 가까운 관계로 고대부터 중계 무역지로 번성하였으며[5], 관련 고고학 연구가 활발하여 많은 관련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페락 지역에 약 2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존재하였던 강가 왕국(Gangga Negara, 성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음)은 19세기부터 고고학 연구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브루아스(Beruas)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그릇, 항아리, 주화, 대포, 도검 등)은 중국과 이 지역의 무역에 대한 직접 증거가 되며, 가장 오래된 유물은 제작 연도가 5–6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의 인도화된 고대 국가들과 현 말레이시아 사회와의 연계성을 확립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역사에 있어 가장 핵심인 '사람' 과 '사람의 활동' 에 대한 문서 기록의 부재 내지 파편화는 말레이시아 고대사를 다룸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말레이시아 고대 국가 형성에 영향을 준 남인도인들도 동아시아, 유럽, 서아시아 등의 문화권보다 역사 기록 전통이 빈약한 편이었으며, 제지술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흔히 구할수있는 패엽에다가 기록해놓았는데 재료를 구하기 쉬웠지만 보존성이 나쁘기 때문에 이들이 남긴 서적과 문서는 다수 소실되어 버렸다.[6]

3. 고대 후기


도서부 동남아시아에는 넓은 범위에 걸쳐 세력권을 갖춘 스리위자야(7–11세기), 다르마스라야 왕국(12–14세기), 마자파힛 제국(13–16세기) 등의 해양 제국들이 있었으며, 전성기에 이들은 말레이 반도 지역을 세력권 안에 두었고, 마자파힛의 경우는 보르네오 북부 일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스리위자야와 다르마스라야의 세력 중심부는 수마트라섬 동부, 마자파힛의 중심부는 자바섬 동부였으며, 당시 말레이 반도나 보르네오 북부는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 지역으로, 랑카수카, 크다 등 인도양 무역로와 인접한 지역이나 사라왁강 삼각주 정도를 제외하면 인구 밀도가 낮고 열대 우림이 우거진 별로 개발되지 않은 곳이었다. 스리위자야와 다르마스라야는 관련 기록 자체가 적으며, 이들이 남긴 외곽 지대에 관한 기록도 매우 파편적이다. 상대적으로 남은 기록이 풍부한 마자파힛의 경우에도 말레이 반도나 보르네오 북부에 한해서는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마자파힛의 경우, 이들 지역은 자바 문화권의 확실한 외부 지역인 비동질적 속령(누산타라)에 속하는 곳이어서 세력을 미쳤을 때도 중앙 정부가 별로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이슬람 시대


인도양에서 활동한 이슬람 상인·선교사의 영향으로 인해 말레이 반도는 인접한 수마트라 북부·동부와 함께 12–15세기를 지나며 천천히 이슬람화되어 갔다. 지역에 따라 파사이 술탄국처럼 군주의 개종이 이른 시기[7]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지역의 이슬람화는 전반적으로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오늘날 인도네시아에 속하는 기타 지역(자바, 술라웨시, 말루쿠 등)보다는 빠른 편이었으나, 수마트라 북서부 바탁 지역 및 수마트라 내륙, 말레이 반도 내륙은 끝내 이슬람화되지 않은 채 남은 지역도 있었다.
15세기에 말레이 반도 및 수마트라 북부·동부에서 말라카 해협 교역로를 장악하고 군사적, 상업적 패권을 획득한 것은 믈라카를 중심으로 한 믈라카 술탄국이었으며, 믈라카는 오늘날의 페락, 파항, 클란탄, 트렝가누, 슬랑오르, 느그리슴빌란 등지를 속령으로 두고 있었다. 북부의 파타니 왕국, 크다 술탄국 등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믈라카의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믈라카 술탄국이 포르투갈의 침입으로 붕괴한 후 믈라카의 잔당은 말레이 반도 남부의 조호르로 내려가 조호르 술탄국을 수립하였으나, 조호르는 이전의 믈라카처럼 압도적인 세력이 되지는 못하고 페락, 파항, 클란탄 등지에 있던 믈라카의 옛 봉신국들이 독립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말레이 반도 북동부의 트렝가누와 서부의 슬랑오르는 17세기까지도 조호르 술탄국의 속령이었으나 트렝가누는 18세기 초, 슬랑오르는 18세기 중반 별도의 술탄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느그리슴빌란은 14–15세기부터 믈라카와 조호르의 보호 하에 미낭카바우인들이 수마트라 서부에서 건너와 정착하던 지역이었는데, 18세기 중반까지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조호르의 속령이었지만 18세기 후반에 독자적인 미낭카바우인들의 자치 정부를 갖추고 파가루융 왕조가 통치하는 지역이 되었다. 느그리슴빌란 지역의 통치자는 술탄이 아닌 라자(Raja)나 공식적으로 '위대해진 자'(Yang di-Pertuan Besar), 또는 간단히 '얌투안 브사르'(Yamtuan Besar)로 칭해졌으며, 지역 정부는 미낭카바우 관습의 강한 영향을 받아 비교적 수평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믈라카 술탄국의 붕괴 이후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말라카 해협에서는 이전의 믈라카에 견줄 정도로 압도적인 군사·상업 세력은 등장하지 못했고, 유럽인들의 직접 지배는 1786년 페낭영국 동인도 회사령이 되기 전까지는 말라카 및 인근과 화물 집산지로 쓰이는 말레이 반도 서부의 소규모 항구에 국한되었으며 조호르 술탄국, 파타니 왕국 및 수마트라의 신흥 세력 아체 술탄국, 팔렘방 술탄국, 잠비 술탄국, 시악 술탄국 등의 군소 세력들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 활발하게 세력 경쟁을 벌였다. 특히 아체, 조호르, 시악은 한때 지역의 여러 국가를 굴복시키고 지역의 패권을 획득하기도 하였으나, 극심한 상호 견제로 최종적으로 지역을 완전히 통합한 세력은 다시 등장하지 못했다(17세기 전반의 아체가 이에 가장 근접하기는 하였다). 지역의 세력 지도는 기존 세력이 다른 세력에 흡수되거나 새로운 세력이 독립해서 생겨나면서 자주 바뀌었는데, 가령 믈라카 붕괴 이후 독립하였던 파항 술탄국(1470–1623)은 1623년, 아체에 의해 쫓겨났던 파항의 전 술탄(조호르 기준으로 압둘 잘릴 샤 3세)이 당시 패권국이었던 아체의 양해를 구하여 조호르의 술탄위를 계승하고 파항의 술탄위도 되찾음으로써 사실상 조호르에 합병되어 소멸하였다가, 18세기 중반 파항 영주의 독립성이 강해져 파항이 다시 반독립 상태로 조호르와 분리되었다.
네덜란드 세력은 18세기에 조호르를 비롯한 말레이 반도의 토착 세력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이들을 직할령으로 합병하려 노력하지는 않았고, 지역 통치자와 좋은, 때로는 강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페락의 주석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는 데 만족하였다. 18세기 전반에는 남술라웨시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해양 민족 부기스인의 세력이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에서 정치적 파란을 일으켰다. 부기스인들은 아체, 조호르, 클란탄, 슬랑오르 등지에서 18세기에 군주 또는 실권자로 집권에 성공하였고, 집권하지 않은 팔렘방 등지에서도 정치적으로 기존 정부에 반발하며 골칫거리가 되었다. 18세기 내내, 쉽사리 구슬려 이용하기 힘든 부기스인의 세력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항구적인 위협 요인이었다. 1756–1757년 부기스 세력은 네덜란드 세력과 알력을 빚어 네덜란드령 말라카를 포위 공격하다 격퇴되기도 했다. 1781년에는 부기스 세력이 페락의 네덜란드 상관을 점령하였다. 네덜란드 세력은 여러 반네덜란드 군사 행동을 성공시킨 부기스인 부왕이자 장군인 라자 하지(Raja Haji, 리아우 부왕 재위 1777–1784)가 틀룩크타팡(Teluk Ketapang)에서 전사한 1784년이 되어서야 부기스 세력을 간신히 저지하고, 부기스인 부왕이 실권자로 집권한 조호르 술탄국(조호르–리아우 술탄국)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18세기 말까지 네덜란드 세력은 조호르, 페락, 슬랑오르를 정치적·군사적으로 간신히 굴복시키고 영향권에 편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 및 네덜란드의 말레이 반도 영향권 포기로 인해 네덜란드 세력은 수마트라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19세기 초에는 영국 세력이 말레이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영국 세력의 간섭으로 말라카 해협의 토착 세력들은 19세기에 거의 모두 유럽 세력에 종속되었다. 아체 술탄국만은 19세기 후반의 아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며 네덜란드 식민 세력에 많은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아체마저도 20세기 초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불안정하게 통합되었다.
보르네오 북부에서는 브루나이 술탄국이 마자파힛이 약화하고 붕괴되는 시점에 독립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이후 한때 보르네오 북부 전체를 지배했던 적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19세기까지 영국이나 영국계 세력이 보르네오 북부를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고 오늘날 브루나이는 수도 인근의 작은 영토만을 보유한 군소 국가가 되었다. 브루나이 술탄국은 17세기 중반 보르네오 북동부 사바의 일부 영토를 술루 술탄국에 양도하였으며, 이 지역은 술루가 19세기 중반까지 지배하기도 했다.

4.1. 믈라카 술탄국



믈라카 술탄국의 건국자는 통상 '싱아푸라 왕국(Singapura, 1299–1398)[8]의 5대이자 마지막 왕 파라메스와라(1344–1414, 싱아푸라 국왕 재위 1389–1398, 믈라카 국왕 재위 1400–1414)'였다고 한다. 파라메스와라는 싱아푸라 외에도 당대 마자파힛 제국의 속령이었던 수마트라 동부의 팔렘방과 일정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4세기 후반 마자파힛의 지배에 반기를 든 팔렘방 반란(1389)에 수뇌부급으로 관여했다는 설도 있다. 파라메스와라는 마자파힛의 제5대 황제 위크라마와르다나(Wikramawardhana, 재위 1389–1429)가 보낸 자바의 대군이 싱아푸라를 공격하고[9] 함락하자, 싱아푸라의 잔당을 이끌고 말레이 반도 안쪽으로 북상하여 오늘날의 믈라카 지역에 믈라카(말라카) 왕국을 세웠다.
믈라카 술탄국은 해상 국가이자 무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는데, 그 성공 이유는 대강 이 정도로 요약된다고 한다. 먼저, 믈라카의 지배자들은 국제 상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주력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말라카 해협해적들이 들끓던 곳이었다. 믈라카는 이런 해적들을 상대로 상인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교역 시설을 확충하여 화재 및 도난 방지를 위해 지하 창고까지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무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법과 행정이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 상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덕분에 믈라카 술탄국은 100년 넘게 흥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11년 향료를 찾아나선 유럽의 포르투갈인들이 향료를 독점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곳으로서 믈라카를 침공했고, 믈라카는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나 결국 멸망당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믈라카 내부의 이반[10]과 우세한 함대 전력의 해상 포격을 활용하여 고작 천 명(포르투갈인 700명, 말라바르계 남인도 보조병 300명)의 병력만으로 2만 병력이 지키던 믈라카를 정복했다. 믈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말라카'(포르투갈어: Malaca, 영어: Malacca)로 개칭하고[11], 구 믈라카의 교역망을 그대로 접수하려 하였으나 이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후 16–17세기, 말라카는 1641년 네덜란드–조호르 연합군에 최종적으로 탈취당할 때까지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자바, 네덜란드 세력의 잦은 침공을 받았고, 포르투갈인들은 말라카의 방어를 위해 상당한 자원을 소모하게 되었다.
17세기 중반 이래 말라카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영국령이 되었으며, 결국 19세기 전반 영국령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4.2. 조호르 술탄국



포르투갈이 쫓아낸 믈라카 술탄국의 잔당은 남하하여 조호르 술탄국을 세우고 포르투갈 및 아체 술탄국, 시악 술탄국, 파타니 왕국 등과 군사적, 상업적으로 경쟁하며 일정한 세력권을 유지하고 무역 세력으로 19세기 초까지도 존속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전반, 영국과 네덜란드의 간섭으로 조호르 술탄국의 말레이 반도 외부 영토가 리아우링가 술탄국으로 분리되었으며, 이후 조호르는 서서히 영국 세력에 종속되다 마침내 1885년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5. 북부 변경 지대


한편, 오늘날 말레이 반도의 태국 남부에서 말레이시아 북부에 이르는 지대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해양 세력과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대륙 세력이 서로의 세력권을 접하는 변경 지대로서, 여러 말레이–타이계 군소 왕국들이 존재하였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는 탐브랄링가 왕국(Tambralinga, Tambralingga)과 파타니 왕국,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진 크다 술탄국이 주목할 만하다.

5.1. 탐브랄링가 왕국


오늘날 태국 남부 나콘시탐마랏 지역은 스리위자야 및 다르마스라야의 최북단 변경이었으며, 이 지역에 존재하던 말레이계 탐브랄링가 왕국은 12세기까지 수마트라계 세력의 속령이었다. 탐브랄링가 왕국은 13세기 중반의 찬드라바누 왕(Chandrabhanu, 재위 1230–1263)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스리랑카 북부로 진출하고 자프나 왕국을 한때 정복하고 영유하였다.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고, 탐브랄링가의 북스리랑카 지배는 1270년대 말 남인도 판디아 왕조의 마라와르만 쿨라세하라 1세(Maravarman Kulasekara Pandyan I, 재위 1268–1308)의 원정으로 탐브랄링가 세력이 축출되어 종식되었다. 그래도 이는 역사 시대 동남아시아에서 미얀마의 일부 정복군주의 경우와 함께 지극히 예외적인 성공한 역외 원정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전반, 탐브랄링가 지역은 남하한 수코타이 왕국 또는 수코타이 휘하 타이계 세력의 원정군에 점령되어 수코타이의 속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293년의 람캄행 비문은 람캄행 왕이 시탐마랏(탐브랄링가) 지역을 점령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람캄행 비문 자체는 후대의 조작이라는 설도 있어 수코타이의 탐브랄링가 복속은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4세기 중반 자바 문헌 《나가라크르타가마》(1365)는 이와 독립적으로 탐브랄링가 지역이 시암에 속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몇 년에서 몇십 년 정도의 시차는 있을 수 있으나 늦어도 14세기 중반부터 탐브랄링가가 시암(적어도 아유타야 왕국) 산하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시암 산하 탐브랄링가 지역에는 반독립적인 나콘시탐마랏 왕국(13세기 말/14세기–1782)이 세워졌고, 이후 나콘시탐마랏은 아유타야와 톤부리의 봉신국으로 점차 타이화되어 태국 왕조에 동화되어 가면서 역내 자치를 누렸다. 짜끄리 왕조가 개창된 1782년, 라마 1세는 나콘시탐마랏의 자치권을 거두어 지역을 중앙 정부 관할의 주로 편입하였다.
이슬람화 이전 오늘날의 송클라 지역도 탐브랄링가 치하에서 항구로 번성하였다. 송클라 지역도 인접 지역들처럼 말레이계 인구가 많은 곳이었으며, 아유타야 세력이 영향을 미칠 때도 나콘시탐마랏 지역처럼 시암의 남부 변경으로서 반독립적 상태를 유지했다. 17세기에 송클라 지역에는 단명한 싱고라 술탄국(Sultanate of Singgora/Singora, 1605–1680)이 세워졌고 아유타야 산하 반독립 무역 국가로 일정한 부를 누렸다. 1642년, 싱고라의 술탄 술라이만 샤(Sultan Sulaiman Shah)가 시암에서 독립을 천명하고 이어 세 차례에 걸쳐 시암 원정군을 격퇴했다. 1668년 술라이만 샤를 계승한 장자 무스타파의 치세에는 인근 지역에서 약화된 파타니와 우세한 입장에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680년, 시암이 잘 준비된 병력으로 본격적인 원정을 오자 싱고라는 점령당했고, 도시는 약탈되고 파괴되었으며 독립국으로서의 싱고라 술탄국도 소멸하였다. 흥미롭게도 1685년 시암은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싱고라 항구를 넘기려고 제안하기도 했는데, 당시 말레이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불려 가며 시암에도 위협적이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이 싱고라를 재건하고 완충 지대를 마련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지역에 흥미가 없어 싱고라 양도는 불발되었다.

5.2. 파타니 왕국


과거 랑카수카 왕국의 영토에 거주하던 말레이인들이 이슬람화되어 세워진 파타니 왕국(1457?–1902)은 근대까지 이어지는 독특한 문화와 기록 유산을 남겼다. 파타니 왕국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네 명의 여왕이 통치하는 시대에 경제적, 정치적 전성기를 맞았다. 파타니 왕국은 남하한 아유타야 왕국의 명목상 종주권을 받아들이며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때로 시암의 간섭에 반발하였고 징벌을 위해 파견된 시암 원정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시암과의 전쟁으로 파타니는 국력을 소모하여 네 여왕 가운데 마지막 여왕인 라투 쿠닝의 치세에는 쇠퇴하였으며 이때 파타니의 전성기도 끝났다. 17세기 후반, 파타니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인접한 말레이계 국가 클란탄[12]의 침공 및 간섭을 받아 파타니의 왕조가 클란탄 왕조로 교체되었다. 이하는 파타니의 네 여왕 시대에 관해 간략히 서술한다.
16세기 중반 시암의 공격을 받고 술탄이 사망한 후 파타니에서는 약 20년간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1584년, 소년 술탄 바두르(Sultan Bahdur, 재위 1573–1584)가 10세에 즉위한 후로 폭정을 일삼다 이복형제에게 살해당한 후, 바두르의 누나 라투 히자우(Ratu Hijau, '녹색 여왕', 재위 1584–1616)가 새로운 파타니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라투 히자우는 전 술탄 만주르 샤(Sultan Manzur Shah, 재위 1564–1572)의 세 딸 가운데 첫째였다. 라투 히자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파타니의 내정을 안정화하고 시암, 중국, 네덜란드, 영국 등과의 무역과 국내 상업을 크게 진흥하여 파타니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영국 세력 간 경쟁이 벌어져, 라투 히자우 치세에 여왕이 영국인들의 보호를 선언했음에도 네덜란드인들이 파타니의 항구에 정박한 영국 선박을 공격하여 영국인들이 파타니에서 철수하는 일도 있었다.
라투 비루(Ratu Biru, '청색 여왕', 재위 1616–1624)는 만주르 샤의 세 딸 가운데 둘째였다. 파타니의 전성기는 라투 비루 치세에도 계속되었으며, 라투 비루는 군비를 확충하고 시암의 점증하는 위협에 대비하였다. 라투 비루는 클란탄에 파타니와 합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라투 웅우(Ratu Ungu, '자색 여왕', 재위 1624–1635)는 만주르 샤의 막내딸이었다. 라투 웅우는 원래 파항의 술탄 압둘 가푸르 무히우딘 샤(Abdul Ghafur Muhiuddin Shah, 재위 1592–1614)와 결혼하여 파항에 체류하였으나 남편이 사망하자 다시 파타니로 귀환하였다. 라투 웅우는 선대의 두 여왕보다 더욱 시암에 적대적이었으며, 선대의 두 여왕이 유지하던 시암식 칭호를 버리고 '샤 알람'(paduka syah alam), 즉 '세계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채택하여 사실상 파타니의 독립을 선언하고, 나아가 1624–1625년 시암을 침공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라투 웅우는 시암에 맞서기 위해 당대의 유력한 말레이 국가 조호르 술탄국의 압둘 잘릴 샤 3세(Abdul Jalil Shah III)와 딸을 정략 결혼시켰는데, 이 공주는 원래 시암 남부 파탈룽의 영주와 결혼하였었다. 부인을 빼앗긴 파탈룽 영주는 아유타야 조정에 파타니의 징벌을 요청하였다. 한편 라투 웅우는 1629년 마침내 시암에 대한 말레이계 세력의 신종의 상징인 붕아 마스(Bunga mas, 금꽃)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파타니가 완전히 시암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 세력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1632년과 1634년 두 차례에 걸쳐 시암의 징벌 원정군이 파타니를 침공하였으나 파타니는 시암군을 모두 격퇴하였다.
라투 쿠닝(Ratu Kuning, '황색 여왕', 재위 1635–1651?)은 라투 웅우의 딸로 조호르의 압둘 잘릴 샤 3세와 결혼했던 파타니의 공주였다. 라투 웅우가 벌인 시암과의 전쟁으로 파타니의 무역은 큰 타격을 받은 상태였고, 라투 쿠닝의 치세가 시작된 1636년 시암이 파타니에 대한 재침공을 준비하자, 파타니는 결국 시암과 평화 협정을 맺고 형식적인 주종 관계를 회복해야 했다. 라투 쿠닝은 전대의 세 여왕만큼 국내외 정치에서 뛰어난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고, 국내외에서 권신들과 외국 군주에게 끌려다니는 상태를 이어 갔다. 1642년 혹은 1643년, 여왕은 조호르의 압둘 잘릴 샤 3세와 이혼하였다. 1646년, 파타니는 다시 한 번 싱고라(송클라) 등 인근의 시암 봉신국들과 연합하여 아유타야의 지배에 반발하였고, 1649년 싱고라와 함께 나콘시탐마랏을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유타야 중앙 정부는 반격하여 봉신국들을 다시 평정하였고, 이로 인해 파타니는 다시금 약화되었다. 라투 쿠닝의 치세 후반부는 사료의 부족으로 불명확한데, 클란탄계 사료에 따르면 클란탄의 군주는 파타니를 침공해 1651년 자신의 인정을 거부하는 파타니의 라투 쿠닝을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을 파타니의 군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 따르면 라투 쿠닝이 1670년 혹은 1688년까지 통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7세기 후반, 파타니로 클란탄계 세력이 진입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아직 파타니에서 불안정한 정치적 입지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파타니계 사료와 클란탄계 사료가 많은 부분 상충하고 있어 이 시기 파타니의 역사는 다소 불명확하다. 18세기 파타니에서는 클란탄 왕조의 지배가 굳어졌으나 전성기의 세력을 회복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1767년, 버마의 침공으로 아유타야가 점령당하고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하자 파타니는 독립을 선포하고 잠시 독립국이 되었으나, 곧이어 새로 들어선 짜끄리 왕조라마 1세가 1785년 파타니 지역을 다시 평정하고 시암의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짜끄리 왕조의 시암은 1810년부터 파타니 지역을 일곱 개의 말레이 소왕국(파타니, 르만Reman, 르게Legeh, 농칙Nongchick, 사이부리Saiburi[13], 얄라Yala, 야링Yaring)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다.

5.3. 크다 술탄국


크다 술탄국은 북부 변경 지역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하며 믈라카–조호르 세력과 거리를 두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먼 과거에 크다는 인접한 랑카수카 왕국처럼 힌두–불교 왕국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슬람의 전파에 따라 크다의 군주가 15세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던 것으로 보이며[14], 이후 크다의 군주는 술탄위를 칭했다. 크다 지역에서는 15세기 후반부터 교역이 본격적으로 체제를 갖추고 번성하기 시작하였으며 16세기 전반에는 독자 주화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크다 치하의 랑카위에서는 후추 플랜테이션이 번성하였는데, 17세기 전반 전성기를 맞아 말라카 해협에서 패권을 획득한 아체 술탄국은 말라카 해협의 후추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랑카위를 공격하여 후추 플랜테이션을 파괴하였다. 크다는 아체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포르투갈 세력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쿠알라바항(Kota Kuala Bahang) 지역에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1619년 아체가 쿠알라바항을 공격하여 크다와 포르투갈 수비군을 내쫓고 요새를 파괴하였다. 동년 아체는 크다를 점령하였고, 크다 술탄 술라이만 샤 2세(Sulaiman Shah II, 재위 1602–1626)를 아체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크다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아체의 강한 통제를 받지 않았고, 술라이만 샤 2세의 아들인 다음 술탄 리잘루딘 무하맛 샤(Rijaluddin Muhammad Shah, 재위 1626–1652)는 아체의 패권에 대응하기 위해 시암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친선 관계를 구축하려 시도하였다. 리잘루딘 무하맛 샤의 치세에 믈라카의 고전 성문법전(Undang-Undang Melaka, 15세기 전반)[15]을 본따 크다에서도 본격적인 성문법을 기록한 문서가 작성되었다.
17세기 후반 무히딘 만수르 샤(Muhyiddin Mansur Shah, 재위 1652–1662)의 치세에, 크다는 인접한 파타니 왕국처럼 시암(아유타야 왕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1660년 9월 시암에 대한 신종의 상징인 붕아 마스(Bunga Mas, 금꽃)가 처음으로 크다에서 시암으로 보내졌다. 18세기 무하맛 지와 자이날 아딜린 2세(Muhammad Jiwa Zainal Adilin II, 재위 1710–1778)의 치세인 1735년에 오늘날 크다의 주도인 알로르스타르가 건설되었다.
18세기 후반, 압둘라 무카람 샤(Abdullah Mukarram Shah, 재위 1778–1797)의 치세 초기에는 버마의 침공으로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하고, 버마와의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 시암에 톤부리 왕국이 들어섰다가 다시 1782년에 짜끄리 왕조 라따나꼬신 왕국이 개창되는 다소 혼란스런 상태가 이어졌다. 압둘라 무카람 샤는 이를 시암에 대한 종속을 끊어낼 기회로 보고 붕아 마스를 보내지 않으면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힘을 빌려 시암에 대항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압둘라 무카람 샤는 영국의 탐험가 프랜시스 라이트(Francis Light)와 교섭하여 페낭에 영국군 주둔을 허용하는 대신 시암이 침공하면 영국 동인도 회사가 크다를 보호하도록 하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가 크다를 무시하여, 크다는 페낭만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크다는 영국인들의 협잡에 당했음에도 시암을 견제하려면 영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압둘라 무카람 샤를 계승한 지아딘 무카람 샤 2세(Dziaddin Mukarram Shah II, 재위 1797–1803)는 1800년, 페낭의 섬 지역뿐만 아니라 인접한 말레이 반도의 작은 영토 스브랑프라이(Seberang Perai) 지역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에 넘기는 대가로 영국 동인도 회사와 친선 관계를 맺었다. 이와 같은 크다의 노력도 무색하게 크다에 대한 시암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고, 지아딘 무카람 샤 2세는 시암의 압력으로 퇴위해야만 했다.
지아딘 2세를 이어 시암의 인정을 받아 즉위한 아맛 타주딘 할림 샤 2세(Ahmad Tajuddin Halim Shah II, 재위 1803–1821, 1842–1845)는 시암의 작위와 종속적 위치를 받아들이는 듯 보였으나, 시암은 크다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파타니와 유사한 방식으로 크다를 쪼개 과거 북부 지역에 스툴(Setul)과 프를리스라는 시암 종주권을 인정하는 별도의 라자(Raja)가 통치하는 속국들을 창설하였다. 아맛 타주딘 샤 2세는 이에 시암에 대한 불만을 누적시키다가 1820년 버마가 시암을 침공하려 계획하자 매년 보내던 붕아 마스를 끊고 버마에 시암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타진하였다. 분노한 시암은 1821년 11월 크다를 침공해 점령하였고 크다 술탄은 영국령으로 도피하였으며, 시암은 크다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크다 점령으로 인해 말레이인들이 영국 영향권으로 피란을 가자, 영국 세력도 이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1826년 영국과 시암 간 버니 조약(Burney Treaty)이 체결되었는데, 시암은 당시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영국의 동맹이었던 관계로 양국 간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며, 조약에서는 구 크다 지역(스툴, 프를리스, 크다)과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북부 2개 주(클란탄, 트렝가누) 및 파타니 왕국 지역에 대한 시암의 종주권이 인정되었다.
1842년, 시암은 크다를 다시 술탄에 의한 간접 통치 체제로 되돌렸고 쫓겨난 크다 술탄 아맛 타주딘 2세가 시암의 양해를 구하여 다시 크다 술탄이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툴과 프를리스 외에 남은 크다령의 북부 지역에 쿠방파수(Kubang Pasu, 1839–1864)라는 속국을 하나 더 창설하였다. 쿠방파수는 1864년 결국 다시 크다와 합쳐졌지만, 스툴과 프를리스는 분리된 채로 존속하였다.

5.4. 19세기와 20세기의 북부 변경


19세기에 분할된 파타니계 말레이 소왕국 가운데 르만 왕국(말레이어: Kerajaan Reman, 영어: Reman Kingdom, 1810–1902)은 특히 유명한데, 이 나라는 근대 말레이시아사와 페락과 19세기에 1826년의 페락–르만 전쟁 이래 여러 차례의 국경 분쟁을 벌인 것으로 직접적인 접점이 있다. 1826년의 페락–르만 전쟁에서는 페락이 일시적으로 승리하였으나, 그 이후 여러 차례의 국경 충돌에서는 대체로 르만이 우위를 점했다. 1882년, 마침내 페락–르만 국경에 대해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져 분쟁이 종료되었고, 1899년 국경을 확정하기 위한 경계석이 세워졌다. 이 국경 분쟁은 궁극적으로 이 지역에서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국경을 확정[16]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르만 왕국을 비롯한 말레이 소왕국들과 크다 지역(스툴, 프를리스, 크다)에서 말레이 민족주의가 점차 득세하였고, 문화가 다른 시암으로부터 말레이/파타니 지역의 완전한 자치 또는 독립을 확보해야 한다는 분리주의가 지역 지식인들과 지배층 사이에서 세를 얻어 갔다. 방콕 중앙 정부는 이를 경계하여 탄압을 시작하였고, 1902년 파타니를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하여 분리주의 운동을 억누르고 파타니 소왕국들의 자치권을 회수하였다. 1906년에는 구 파타니와 구 크다 지역을 중앙 정부 관할의 4개 주(짱왓; 빠따니[17], 얄라[18], 나라티왓[19], 사이부리[20])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를 지배한 식민 열강 영국은 이 지역의 말레이계 국가들이 영국령 말라야에 속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영국과 시암 간의 교섭으로 1909년 영국–시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사이부리주는 영국령 말라야로 새로 편입된 크다프를리스가 빠져나와 해체되고, 남은 스툴(Setul) 지역만이 사뚠주로 시암령에 남았다.[21]
이상에 열거한 파타니 7왕국, 크다, 프를리스, 스툴 외에도 19세기에는 말레이 국가들 가운데 클란탄트렝가누 역시 시암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으나, 이 둘은 그 이전부터 시암 영향권에 있던 다른 북부 변경 지역의 말레이 국가들보다 시암의 영향력이 약한 곳이었다. 이 두 국가 역시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으로 시암의 영향권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시암의 영향권에 속했던 북부 4개 주(크다, 프를리스, 클란탄, 트렝가누)는 조호르를 제외한 말레이 반도의 영국 산하 국가들이 연합하여 결성하였던 말레이 연방(Federated Malay States, 1895–1942, 영국이 연방을 총괄하는 통감Resident General을 두는 식민지)에 새로 가입하지 않고, 남부의 조호르주와 함께 다섯 말레이 비연방주(Unfederated Malay States)를 구성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 제국이 영국령 말라야를 점령한 후 태국을 일본의 동맹으로 끌어들일 때 1943년 10월 18일 점령한 북부 4개 주를 태국으로 양도하였으며, 이때 태국은 북부 4개 주를 통치하며 크다와 프를리스 지역에 사이부리주를 잠깐 부활시키기도 했다. 북부 4개 주는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2일 다시 영국령 말라야로 반환되었다.

6. 영국의 지배



6.1. 해협 식민지


네덜란드가 17세기에 말라카, 마나도, 암본 등지에서 포르투갈스페인의 세력권을 잠식하고 자바에도 거점 바타비아를 확보하자, 라이벌 해양 강국 영국도 뒤따라 도서부 동남아시아에 진입하려 했으나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강력한 진입 방해로 식민지나 상관을 거의 확보하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일시적으로 진입에 성공하여 상관을 설치한 여러 지역에서도 네덜란드의 간섭으로 손을 털고 나와야 했고, 그나마 영국 동인도 회사가 18세기 말까지 네덜란드를 피해 안정적으로 획득한 곳은 경제적·지리적으로 비교적 매력이 떨어지는 수마트라 서남부의 븡쿨루(British Bencoolen, 1685–1824) 정도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식민 제국은 18세기 중반부터 인도양에서 세력이 정체되었고, 영국 동인도 회사는 반대로 인도 여러 지역에서 식민지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인도를 교두보로 삼은 영국 세력은 동남아시아를 중국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계지로 고려하게 되었다.
최초로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영국령이 된 것은 페낭이었다. 1786년에 프랜시스 라이트 장군은 크다 술탄에게 페낭에 영국군 주둔을 허용받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1786년 대신 크다와 라이트는 크다가 침공받으면 영국 동인도 회사가 크다 측에 군사 원조를 제공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마침 남하한 시암 세력이 파타니를 점령하고 크다를 위협하자 크다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약속한 군사 원조를 요청했으나 동인도 회사는 거부하였다. 거부 사유는 군사 원조는 크다와 프랜시스 라이트 간의 약속이지 크다와 동인도 회사 간의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크다 술탄은 어처구니없는 협잡에 당한 것을 알고 시악, 리아우, 슬랑오르 등의 도움을 받아 페낭에서 영국인들을 축출할 해군 함대를 준비하였으나, 1791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크다를 선제 공격하여 술탄을 굴복시키고 화평 조약으로 페낭을 공식적으로 합병하였다.
18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급진전했다. 네덜란드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하고, 왕은 영국으로 망명해 큐 서한(Kew letters)으로 아시아 지역에서의 네덜란드 식민지 지배권을 모두 영국에 위임했다(1795). 이에 따라 네덜란드령 인도, 네덜란드령 수마트라, 네덜란드령 말라카, 암본은 영국령이 되었다. 자바 등 일부 지역에서는 한동안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며 큐 서한 이후에도 프랑스 치하에서 네덜란드 통치 체제가 존속했으나,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식민지 경영에 착수하여 19세기 초 결국 마나도(1810)와 자바(1811)를 침공해 접수했으며, 나아가 향료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영국은 이때 독립국이었던 아체 술탄국에서도 정치 공작을 벌여 친영파 술탄을 잠시 집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 후 영국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기존 네덜란드령을 네덜란드로 돌려주었으며, 아체의 내정 개입을 포기하고 친영파 술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여 아체에서는 곧 기존 술탄이 복위하였다.
이 시기 영국은 페낭을 거점으로 1819년엔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의 주도로 싱가포르를 건설하기까지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해 갔다. 동남아시아에서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의 세력권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의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었고, 말레이 반도에도 네덜란드령(말라카)이, 수마트라에도 영국령(븡쿨루)이 있는 상태였으므로 양 식민 제국의 세력권은 충돌의 여지가 많았다. 결국 양국의 협상으로 1824년 런던 협약이 체결되어 수마트라, 자바 섬 등 현재의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영국이 관할하기로 결정되었고,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는 영국으로 양도되었으며 수마트라의 븡쿨루는 네덜란드로 양도되었다.
영국은 1826년에 말레이 반도에서 보유한 세 식민지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를 한데 묶어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아직 말레이 반도의 토착 국가를 직접 지배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 영국의 관심은 무역로 장악이었을 뿐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중국으로의 길' 이었다. 해로상의 거점을 장악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당시까지는 말레이 반도에서 수익성 높은 자원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6.2. 보르네오


영국계 세력의 직접 지배는 해협 식민지를 제외하면 말레이 반도보다 보르네오 북부에서 조금 빨리 시작되었는데, 1841년에 영국인 모험가 제임스 브룩 선장이 사라왁에서 터진 다약인의 반란을 진압하여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라자' 칭호를 받아 사라왁을 통치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라왁 왕국은 공식적으로 영국 보호령이 된 1888년 이전에도 1860년대부터는 영국 영향권 하에 있었다.[22] 이후 영국은 보르네오 북부에 차츰 주목하기 시작하여 1846년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라부안(Labuan)을 취득해 왕령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아직 보르네오 북동부(오늘날의 사바주)는 브루나이 및 술루 술탄국의 영토였다. 이 지역에 최초로 토지를 획득한 서구인은 미국인들이었는데, 브루나이에 주재하던 미국 영사 찰스 리 모지스(Charles Lee Moses)는 1865년 8월 브루나이 술탄에게서 보르네오 북동부(이하 북보르네오) 일부 지역을 10년간 조차받는 데 성공하였다. 북보르네오의 조차지는 여러 광물과 후추 등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보였고, 이에 미국인 조지프 윌리엄 토리(Joseph William Torrey)와 토머스 브래들리 해리스(Thomas Bradley Harris) 및 이들의 동업자인 중국인 투자자 리 아싱(Lee Assing), 퐁 암퐁(Pong Ampong)은 보르네오 아메리카 무역 회사(American Trading Company of Borneo)를 설립하고, 1865년 10월 오늘날 사바 키마니스(Kimanis) 지역에 본격적인 식민지 '엘레나'(Ellena)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865년 11월, 브루나이 술탄은 공식적으로 보르네오 아메리카 무역 회사의 사장 토리를 '암봉(Ambong)과 마루두(Marudu)의 라자'로 봉하였다.
그러나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은 잘 되지 않았다. 회사는 미국인들이 자주 왕래하던 홍콩상하이에서 북보르네오에 대한 투자자를 더 모집하려고 했지만 지역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설상가상으로 회사의 창립자 중 하나인 해리스가 1866년 5월 22일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엘레나 식민지는 아무도 찾지 않아 곧 황폐화되었으며, '라자'였던 토리는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얻은 권리를 매각할 사람을 십 년간 찾아다녀야 했다. 마침내 토리는 새로운 투자자 오스트리아 사업가 구스타프 오버베크(Gustav Overbeck, 1830–1894)를 홍콩에서 만나, 오버베크에게 보르네오 아메리카 무역 회사가 취득한 북보르네오에 대한 권리를 1876년 1월 1만 5천 달러에 전부 매각하였다. 토리는 북보르네오에서 손을 떼고 시암에 주재하는 미국 부영사(vice-consul)가 되었다.
1877–1878년 오버베크는 브루나이 술탄 및 술루 술탄과 협상하여 보르네오 아메리카 무역 회사의 것을 포함해 많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영국은 사바 지역을 직접 영유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오버베크에게 오히려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오버베크가 관심을 끌려 했던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는 북보르네오의 벽지에 흥미가 없었고, 실망한 오버베크는 1879년 북보르네오 문제에서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던 영국인 사업가 앨프리드 덴트(Alfred Dent, 1844–1927)에게 자신이 취득한 북보르네오에 대한 권리를 양도하고 떠났다.
앨프리드 덴트는 1881년 북보르네오의 경영을 위해 영국 외교관 러더퍼드 올콕(Rutherford Alcock, 1809–1897) 등 많은 영국인들의 협조를 얻어 북보르네오 협회(North Borneo Provisional Association Ltd.)를 창설하고 지역 경영에 열의를 보였으며,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1881년 11월 1일 칙허(royal charter)도 획득하였다. 1882년, 덴트와 올콕의 북보르네오 협회는 공식적으로 북보르네오 칙허 회사(North Borneo Chartered Company)로 개칭하고 사바 지역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후 북보르네오 칙허 회사는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더 많은 영토를 받아내었다.
1870년대 말과 1881년까지 영국 관리들은 사바 지역을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취득했다는 인식이 별로 없었고, 사바 경영을 덴트와 올콕 등 개인의 민간 사업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여왕의 칙허가 수여되자, 인접한 스페인령 필리핀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보유한 식민 제국 스페인네덜란드는 위협을 느꼈고, 특히 술루 술탄국의 영토가 북보르네오에 있었던 것으로 직접 관련이 있는 스페인과 영국 간 군사적 긴장이 생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885년 영국, 스페인, 독일 제국 간 마드리드 의정서(Madrid Protocol)가 합의되어, 북보르네오(사바 전체)를 영국 세력의 관할로, 술루 제도를 스페인 세력의 관할로 확정하게 되었다. 뒤이은 1888년, 북보르네오(사바)는 공식적으로 대영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네덜란드도 보르네오 북동부에서 1880년대부터 팽창 정책을 펼쳐 사바 바로 아래의 불룽안 술탄국 지역을 네덜란드령으로 편입하였다. 영국령 북보르네오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국경선은 1915년에 확정되었다.

6.3. 말레이 반도


영국은 19세기 전반에도 말레이 반도의 토착 왕국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해협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1870년 이전까지 토착 국가들 간의 문제에 불간섭 정책을 유지하며 직접 지배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19세기 후반,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의 시대가 되자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의 세력 확장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 계기가 된 것은 여러 토착 왕국들의 내전과 혼란이었다.
파항조호르 술탄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반독립적인 라자(Raja Bendahara)가 통치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파항의 라자 툰 알리(Tun Ali, 재위 1806–1857)가 리아우링가 술탄국의 분리 등으로 인한 조호르의 약화를 틈타 1853년 조호르의 종주권을 거부하고 파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조호르는 이에 당장 파항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1857년 툰 알리가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한 툰 알리의 아들 툰 무타히르(Tun Mutahir, 재위 1858–1863)와 툰 무타히르의 동생 완 아맛(Wan Ahmad)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분쟁은 파항 내전(1857–1863)으로 발전하였고, 인접한 여러 세력은 이해 관계에 따라 두 왕자 중 하나를 지지하였다. 조호르는 툰 무타히르를 지지하였고, 트렝가누짜끄리 왕조 시암은 완 아맛을 지지하였으며 영국 세력은 초기에 양편을 중재하려다 실패하자 툰 무타히르를 지지하였는데, 전개 과정에서 트렝가누가 1862년 파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는 등 전쟁은 격렬하였다. 영국은 전쟁 후반까지 군사적으로 크게 간섭하지 않았으나 외국의 간섭은 견제하여 포함으로 트렝가누의 수도 쿠알라트렝가누와 쿠알라트렝가누에 정박한 시암 군함을 포격하여 트렝가누군과 시암군을 조금 물러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1863년 툰 무타히르가 사망한 후, 내전은 완 아맛의 승리로 끝나고 완 아맛은 파항의 라자(파항 라자 재위 1863–1881, 이후 파항 술탄[개칭] 재위 1881–1909)가 되었으나, 파항은 국력을 크게 소모하여 피폐해졌다. 완 아맛은 전쟁 도중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으며, 영국 세력도 결국 완 아맛의 승리와 조호르에 대한 파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페락 지역에서는 1861년부터 1874년까지 화인 비밀결사 간에 '라룻 전쟁'(Larut Wars)이라 불리는 네 차례의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나며 페락 술탄과 영국 세력도 이권에 따라 개입하는 혼란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1873–1874년의 제4차 라룻 전쟁은 영국 세력이 개입한 페락 술탄국의 계승 전쟁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874년, 영국 세력의 동맹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페락 술탄 압둘라 2세(Abdullah II, 재위 1874–1877)가 되었는데, 압둘라 2세는 영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영국에 페락의 보호국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874년, 압둘라 2세가 페락 술탄위를 계승하고 영국인 페락 통감(Resident of Perak)이 페락 궁정에서 술탄의 협조를 받아 자문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팡코르 조약(Pangkor Treaty)이 영국과 페락 간에 체결되어 페락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팡코르 조약은 영국이 본격적으로 말레이 반도 국가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하는 역사적 기점이 되었다. 페락 일부 지방에서는 영국의 간섭에 반발하여 페락 전쟁(Perak War, 1875–1876)이 발발하였으나 영국군은 어렵지 않게 승리하였다.
슬랑오르에서도 술탄 압둘 사맛(Abdul Samad, 재위 1857–1898) 치세에 내전 '클랑 전쟁'(Klang War, 1867–1874)이 벌어졌다. 술탄 압둘 사맛은 치세 초기에 내분으로 슬랑오르 영토의 일부만을 통치하고 있었고, 이때 슬랑오르 지역은 술탄 외에도 여러 명의 지방 군벌이 분점하는 형세였다. 이때 술탄위 계승권 경쟁에서 탈락한 데 불만을 품은 압둘 사맛의 종손자 라자 마디(Raja Mahdi)는 더 많은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클랑 지역의 통치자 라자 압둘라(Raja Abdullah)와 라자 압둘라를 지지하는 술탄 압둘 사맛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기에 라자 마디는 성공을 거두어 라자 압둘라의 세력 중심 클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도망친 라자 압둘라는 전쟁을 계속하였고, 전쟁은 슬랑오르 지역의 군벌들과 화인 비밀결사가 양편으로 갈려 서로 싸우고 파항은 라자 압둘라를 지원하는 등 난전이 되었다. 전황은 라자 압둘라 편에서 참전한 두 지휘관, 라자 압둘라의 아들 라자 이스마일(Raja Ismail)과 슬랑오르 술탄가와 결혼으로 맺어진 크다의 왕자 틍쿠 쿠딘(Tengku Kudin)의 활약으로 반전되었다. 라자 이스마일과 틍쿠 쿠딘은 1870년 클랑을 탈환하는 등 전황을 뒤집고 공세로 전환하였다. 영국은 전쟁 전반에는 중립을 지켰지만, 라자 마디의 편에서 지역 항구를 약탈하던 해적이 영국의 해협 식민지 지역을 공격하였고, 영국은 이에 결국 전쟁에 개입하여 1871년 라자 마디의 당시 세력 중심 쿠알라슬랑오르를 공격해 점령하고 도시를 틍쿠 쿠딘에게 넘겼다. 결과적으로 파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틍쿠 쿠딘은 전쟁을 1874년까지 승리로 종결지었다.[23]
파항 내전, 라룻 전쟁, 클랑 전쟁은 영국 세력이 불간섭 정책을 재고하는 직접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내전이나 계승 분쟁은 아직 중앙집권 체제가 강고하지 못하고 계승권이 잘 정리되지 않은 말레이 문화권[24]의 국가들에서는 역사적으로 흔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말레이 반도가 안정되지 않은 채 이렇게 격렬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지역에서 영국 세력의 경제적·정치적 이권이 안전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팡코르 조약으로 페락을 보호국화한 직후 슬랑오르에도 개입하여, 술탄 압둘 사맛을 설득해 1875년 슬랑오르에도 영국 통감을 두고 슬랑오르를 보호국화하였다. 영국은 1873년 이권 보호를 위해 느그리슴빌란의 내전에도 개입하였고, 느그리슴빌란의 여러 지역을 1873년부터 1895년까지 모두 보호령으로 삼았다. 1879년 조호르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영국은 이번에도 빠르게 개입하여 술탄 편에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호르는 즉시 보호국이 되지는 않았으나, 점차 강해지는 영국의 영향력을 받아들여야 했다.
말레이 국가 가운데 파항과 조호르는 1880년대 초까지도 영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유지하였으나, 결국 1885년 조호르도, 1886년 파항도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영국 세력은 이처럼 새로 보호령으로 만든 말레이 국가들(파항, 페락, 슬랑오르, 느그리슴빌란)을 묶어서 영국이 연방을 총괄하는 통감(Resident General)을 두는 식민지 말레이 연방(Federated Malay States, 1895–1942)을 창설하고 수도를 당시 슬랑오르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두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강한 조호르 지역은 말레이 연방에 가입하지 않았고, 다른 말레이 보호국들보다 조금 폭넓은 자치를 유지하였다. 조호르의 술탄 아부 바카르(Abu Bakar)는 1895년 4월 14일, 말레이 반도의 토착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조호르의 헌법(Undang-undang Tubuh Negeri Johor)을 반포하였다. 조호르 헌법은 점차 불붙기 시작하는 말레이 민족주의와 자치 운동의 구심점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오늘날 서말레이시아 북부의 4개 주(프를리스, 크다, 클란탄, 트렝가누)는 19세기에 짜끄리 왕조 시암의 영향권 하에 있었으며, 이들은 1909년 영국–시암 조약으로 시암의 영향권에서 빠져나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새로 영국령 말라야에 편입된 북부 4개 주는 조호르와 함께 다섯 말레이 비연방주(Unfederated Malay States)를 구성하였다.

6.4. 주석과 고무


영국이 말레이 반도에 19세기 후반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경제적으로 지역의 주석을 획득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주석을 이용한 함석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것이다.
주석 광산의 운영에는 세 집단이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주석 광산을 보유한 술탄이었고, 둘째는 그것을 운영하는 영국의 자본가들이었으며, 셋째는 바로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렇게 말레이 반도로 건너온 중국인들이 뛰어난 교육열과 부지런함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의 중간 공무원들이 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기도 하면서 소외된 말레이계 사람들과 점점 반목하게 된다.[25] 당시 영국인들은 말레이 계열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단순하고 게으르고, 중국인들은 능력있지만 영악하다고 평가했다.[26] 화교의 급증으로 원주민인 말레이인들은 농어촌으로 밀려났고, 이에 따라 민족 분열이 점차 싹텄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한 고무 플랜테이션 역시 말라야의 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가 되면 고무가 말라야의 주 수출품목으로서 주석과 경쟁하게 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 면적이 전 세계 고무 농장 면적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 주석의 생산을 주로 중국계 광산 노동자들이 담당했다면, 고무 생산은 주로 계약이민으로 넘어온 인도인, 특히 남인도 출신 타밀족 농장 노동자들이 담당하였다. 20세기 초 고무 산업의 급성장에 발맞추어 말라야의 인도계 이민자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고무 농장은 주로 페락, 슬랑오르, 크다, 조호르, 느그리슴빌란 5개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6.5. 인구 증가


말레이 반도는 역사적으로 19세기 후반부터 빠르게 인구가 증가한 지역이다. 19세기 전반에는 해협 식민지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정확한 인구 통계 자료를 구하기 어려우나, 여러 방식으로 추산은 가능하다. 1830년대 말레이 반도(오늘날 태국령 제외)의 인구는 도합 약 7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27]
19세기 말, 전란이 종식되고 영국 지배하에서 안정된 말레이 반도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전체에 걸쳐서는 지역 전체에서 신뢰도 높은 인구 통계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며, 1901년 서말레이시아(싱가포르 제외)의 인구는 1,733,674명이었고, 1901년 싱가포르의 인구는 228,555명이었으므로 두 지역을 아울러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1830년대에 비해 2~3배 증가하였다. 20세기에 말레이 반도에서는 두 지역 모두에서 인구가 10배 이상 증가하였는데, 특히 오늘날 서말레이시아 지역의 2000년 인구는 18,523,632명이었다.[28]
동말레이시아에서는 사라왁보다 사바의 인구가 더 빠르게 증가하였다. 1900년 무렵 사라왁의 인구는 약 50만, 영국령 북보르네오(사바)의 인구는 약 30만으로 추산된다. 2000년, 말레이시아 정부 통계에 따르면 사라왁의 인구는 2,071,506명, 사바의 인구는 2,603,485명으로 사바의 인구가 사라왁의 인구를 역전하여 약 26% 많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2010년대 후반까지 사바의 인구는 사라왁의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하는 편이다.

7. 현대



7.1. 독립


1930년대부터 민족별로 각자의 정치조직이 만들어졌는데, 말레이인은 범이슬람조직을 만든 반면 화교들은 본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1930년에 '말레이 공산당'을 조직하는가 하면 인도계도 본국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반영 조직을 만들었다. 1941년 12월 8일에 일본군태평양 전쟁을 진행하여 소수 병력으로 영국군을 빠르게 무력화해 군정 체제를 수립했다. 일제는 민족 이간정책을 실시해 말레이인들에게 민족주의를 선동했으나 먹혀들지 않았고, 화교들을 혹독히 탄압하여 민족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이에 화교들은 좌익 무장투쟁을 한 반면, 인도계는 일본과 손을 잡았다.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항복하자 영국이 돌아왔으나 말레이인들은 오히려 자치, 나아가 독립을 더 크게 요구했다. 1946년에 말레이계 각 정파가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을 결성하자 인도계는 동년도에 '말레이시아인도회의(MIC)'를, 화교들은 1949년에 '말레이시아화인협회(MCA)'를 각각 결성했다.
1948년 2월 1일에 말라야 연방이 수립되긴 했으나 말레이 공산당은 1948년부터 좌익혁명을 일으켜 공산화하려 했다. 이에 영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모든 집회/시위와 공산당 활동을 억눌렀으며, 1957년 8월 31일에는 UMNO와 MCA, MIC 3개 정당을 주축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1960년에 비상조치가 해제된 후 1963년 9월 16일에 영국 보호령인 브루나이가 불참한 가운데 말레이시아 정부가 수립됐다.
영국은 말라야의 여러 술탄국들이 한 나라가 되어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가 같이 말라야인으로서 살게 된다는 이상을 가지고 독립을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말레이인들은 불만을 품었다. 굴러들어온 돌이나 다름없는 중국계가 말레이시아의 경제를 점령하게 되니 말레이인들은 당연히 참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 말레이계, 중국계 지도자들의 합심으로 독립은 해냈다. 말레이계가 군인경찰, 공무원 쪽을 차지하게 되고, 국교는 이슬람에 공용어는 말레이어로, 교육과 경제정책은 말레이 계열을 우대하는 한편,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나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도 말라야 국민으로서 그대로 말라야에서 살 수 있었다. 거기에 경제적 기득권도 빼앗지 않고 계속 인정해 준다는 것이 요지이다. 또 국왕은 9개 지역 술탄들이 왕을 5년씩 선출토록 하고 국정 시스템은 영국식 내각제를 따랐다.

7.2. 싱가포르 축출


싱가포르보르네오 섬의 사라왁, 사바 지역은 영국에서 독립한 후 말라야 가입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싱가포르가 특히 문제였는데 싱가포르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화교가 압도적 다수였고 거기다가 싱가포르는 식민지 시절부터 말레이 반도의 압도적인 경제 중심지였기 때문에 말라야는 중국인이 다수인 싱가포르 사람들이 들어와서 경제를 휘어잡을까 우려했다. 어쨌든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와 잠시 합쳤다. 말라야에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가 편입, 나라가 확대, 개편되면서 나라 이름도 말레이시아로 고쳤다.
당시 싱가포르 주의 총리였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인들의 말레이시아(Malaysian Malaysia)'''를 주창했다. 인종에 상관없이 '말레이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모든 말레이시아인에게는 똑같은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말레이계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경제나 학업면에서 말레이계가 너무 뒤쳐져 있으니 이대로 똑같이 평등하다면 말레이계는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물론 리콴유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의 주장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중국계라고는 해도 몇대째 말레이시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런 치열한 국가관의 차이는 신생 독립국의 존립을 흔드는 위험한 문제였다. 결국 1965년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주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쫓아내기로 한다. 그리고 싱가포르 주의 총리 리콴유는 울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저에겐, 싱가포르의 독립은 아픔의 순간입니다. 저는 말레이와 싱가포르가 통합되어 말레이시아라는 한 나라가 될 거라고 평생을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7.3. 부미푸트라 정책


성립 이래 말레이계 최대정당 UMNO는 굴러들어온 중국계(인구 25%), 인도계(인구 10%)에게 시민권을 준 대신 말레이인들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고, 중국인과 인도인들는 차별로 느낄 만한 강력한 정책을 시작하였다. 이것을 부미푸트라 정책이라고 한다. 1969년 당시 말레이인의 인구는 60%였지만 경제에서 말레이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은 '''4%'''일 정도로 취약했기 때문. 덕분에 1969년 총선에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심 정당이 약진했을 때 말레이계는 분노와 두려움에 5월 31일부터 반화교 폭동을 일으켜 중국인들의 상점과 집을 불태우고 사흘 간 수백 명을 살해했다. 이에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부와 국가, 국교에 대한 비판과 토론을 금지하여 민주주의를 사실상 말살했다.
이 때부터 정부는 말레이인 우대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게 부미푸트라 정책으로 이어졌다.
우선 교육이 문제인데, 워낙 교육열이 높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계속해서 사회 엘리트 지위를 점했기 때문에 말레이계의 교육수준을 높임과 동시에 중국계 학생을 불리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대학입학시험은 마인어로만 보게 하거나 가장 인기가 많은 공립대학에서 학생들을 뽑을 때 말레이계는 60%, 중국계는 30%, 인도계는 10% 이런 식으로 비율을 정해 말레이계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줬다. 심지어는 대학 강의조차도 대부분이 말레이어다. 요즘은 이런 낯간지러운 배당은 폐지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서 공립대학 들어갈 때의 여러 방법 중 가장 쉬운 matriculation 를 뽑을 때 말레이 계열을 90% 뽑게 해놔서 눈가리고 아웅이다. 대학 입학시험 때도 알음알음 말레이 계열에게 더 점수를 준다는 말도 있다. 위키나 인터넷에서 돌아다녀보면 입시제도에 대한 불만으로 사자후를 토하는 중국계 학생들의 좌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모국을 등지고 근처 싱가포르홍콩으로 떠나는 중국계 젊은이들도 꽤 된다. 홍콩에서 말레이시아 출신 중국인을 꽤 많이 볼 수 있는 게 이 때문이다. 그리고 호주로 이민간 중국계도 많아서 호주인 중에 중국계 호주인들은 말레이시아 출신이나 브루나이 출신들이 많으며 이들은 대개 개신교를 믿는다.
1970년부터 취임한 2대 총리 압둘 라작1990년까지 인종화합과 빈곤 퇴치 달성을 목표로 한 신경제정책(NEP)을 세워 국가가 기업활동과 사회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말레이계 중산층을 밀어주며 중국계와 인도계를 괄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말레이 사람들은 차나 집을 살 때 말레이계는 10% 더 싸게 살 수 있었고, 정부가 자동차 회사 프로톤이나 페트로나스 같은 석유대기업을 만들면서 말레이인들이 취직하기 훨 유리하도록 하였다. 공무원 뽑을 때도 마찬가지며, 기업을 설립할 때 말레이인의 지분이 30% 이상이어야 한다는 법 등도 마찬가지다.
농업 면에서 농촌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산업 면에서도 농업에서 프로톤 등을 중심으로 한 자동차, 석유, 광물정제공업 등 중공업으로의 전환을 꾀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투자를 받은 가전제품, 반도체 제조업도 성공적이었다.
말레이시아의 정책은 일단은 성공했다. 신경제정책이 실시된 19년간 한해 경제성장률이 6.8%나 됐으며 국민소득도 380달러에서 2천 달러까지 올라 한국의 '''한강의 기적'''에 버금가는 광속 성장률을 보였다. 1981년부터 부임한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총리는 헌법을 고쳐가며 국왕의 권한을 점차 축소했고, 안와르 이브라힘 등 정적들을 탄압해 사실상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다른 한편 1991년부터 신개발정책(NDP)을 실시해 산업/상업 발전과 빈곤 퇴치를 시행했으며,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외국계 헤지펀드까지 규제하며 경제위기 악화를 막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2003년에는 국제화 시대에 대비해 영어를 공용어로 쓰기 시작했다.
독립 당시 대부분의 말레이인들은 가난한 농부였지만, 지금은 말레이계 중산층이 튼튼해졌고, 빈곤율도 60%에서 10%으로 낮아졌다. 구매력 환산 GDP는 2018년 현재는 $30,860.[29] 동남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브루나이를 제외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튼튼한 중산층에 시골에서도 한국 시골의 1990년대 수준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프로톤이나 페트로나스 같은 대기업에 쿠알라룸푸르페낭, 조호르바루 같은 매력적인 도시도 생겨났다.
좀 가혹한 중국계, 인도계 차별정책도 결과적으로 보면 나름대로 성공이었다는 평이다. 미국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역설적으로 말레이시아에 인도네시아 같은 반화교 폭동도 없고, 여전히 잘 나가는 경제를 생각해보면 말레이 특혜정책은 올바른 정책이었다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물론 중국계와 인도계는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중국계와 인도계를 언제까지 2등급 시민으로 취급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나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들은 돈이 잘 벌리거나 사회에서 실력으로만 판가름나는 학문으로 다 돌아서서 의과대학생들이나 로스쿨, 그리고 상공업 관련 학과를 보면 말레이 학생들은 적고 죄다 중국계 학생들뿐이다. 아무리 성적을 나쁘게 줘봤자 사회에 나와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면 그냥 공부 열심히 한 말레이계 학생들보다는 '''지옥을 뚫고 올라온''' 중국계 학생들이 대체로 실력이 좋다. 또한 2000년대 이후로는 차별에 실망한 중국계와 인도계 인재들의 유출이 심해지고 있다. 특히 중국계의 인구 유출이 심각해서 싱가포르홍콩으로 취업나가는 중국계 젊은 층 고학력자들과 호주로 이주하는 중국계들이 워낙 흔해 국부 및 두뇌유출로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점을 말레이 계열의 지도자들도 알아서 1기 집권시에 말레이계 특혜 정책을 강력 추진하던 마하티르 전 총리도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말레이 학생에게 쉽게 대학 가서 쉬운 이슬람법 따위 공부하지 말고, 제발 공학이나 의학 같이 어려워도 쓸모 있는 거 공부하라고 호소하기도 했고, 직접 부마푸트라 정책의 문제점을 강변하기도 했다. 나집 라작 총리 대부터는 사투 말레이시아(Satu Malaysia), 한국어로 하나된 말레이시아라는 모토 하에 말레이계 특혜를 점차 줄여나가려는 모양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중국계는 공학 쪽이나 의학, 법학, 경영학 등 쓸모있는 학문 쪽으로 진출을 많이 해뒀으며 이것은 말 그대로 '''실력만 믿고 가는 학문'''이기 때문에 정부조차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학점받기 쉬운 이슬람법이나 이슬람 문화를 공부하는 말레이계 학생들이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며 현실은 중국계가 경제에서 계속 두각을 나타내는 판이다.[30]
하지만 부마푸트라 정책이 말레이계 표심에는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나잡 라작도 부패 의혹에 시달린 이후로는 다시금 부마푸트라 정책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고[31] 사실 말레이계 입장에서 본다면 말레이계면 성적이 중간 정도라도 대학에 갈 수 있게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부마푸트라 정책이 축소된다는 것은 경쟁률이 크게 올라간다는 말이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하기가 쉽지가 않다.
어쨌든 이러한 가운데 부미푸트라 정책 하에서 '''2등 국민'''으로 취급되어 온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과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들의 반발이 심해져서 중국계는 극우 민족주의 정당이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페낭 주지사인 림관엥이 대표적이다. 중국계 가수 나미위 역시 극도의 자민족주의자 극우이다.

8. 참고 문헌


  • 다뚝 자이날 아비딘 빈 압둘 와히드. 1998. 말레이시아史. 서울: 오름.
  • 양승윤. 2005. 인도네시아사. 서울: 대한교과서.
  • 이원복. 2018.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김영사. p133~150.
  • Baker, Jim. 2020. Crossroads: a Popular History of Malaysia and Singapore. Singapore: Marshall Cavendish International Asia Private Limited.
  • Cœdès, George. 1968.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Hawaii: University of Hawaii Press.
  • Munoz, Paul Michel. 2006.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Singapore: Editions Didier Millet.
  • Shaffer, Lynda Norene. 1996. Maritime Southeast Asia to 1500. London: ME Sharpe Armonk.
  • Stuart-Fox, Martin. 2003. A Short History of China and Southeast Asia: Tribute, Trade, and Influence. London: Allen and Un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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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랑우탄"이라는 말 자체가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탐험했던 카르타고인들도 고릴라를 특이한 원시부족으로 여겼던 경우도 있긴 했다. 어차피 서로 언어가 안 통한다는 점에서 비슷해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2] 한자 표기는 출전에 따라 '랑가수郎伽戍', '릉아사가凌牙斯加', '룡아서각龍牙犀角', '랑서가狼西加' 등 다양하다. 이후 랑카수카가 존재하던 위치에는 파타니 왕국이 세워졌다. 6세기 전반 양나라양직공도에 랑카수카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등, 말레이 반도 지역 고대 왕국 가운데 그나마 관련 문헌 기록이 많은 편이다. 말레이시아가 독립할 때 국호를 정하는 논의에서도 '랑카수카'를 신생국의 국호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3]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지배층은 몬크메르계였던 것으로 보이며, '적토'는 단순 음차가 아니라 정말로 '나라의 땅이 붉다'는 의미로 쓰였다. 클란탄 지역의 기록과 대조해볼 때 락타마리티카(Raktamaritika, 산스크리트어 명칭)와 동일시된다.[4] Andaua 2001: 22[5] 인도와 중국을 잇는 무역로에서는 말레이 반도 아래를 돌아가는 해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말레이 반도 북서부에 해로로 도달한 후 크라 지협을 육로로 가로질러 말레이 반도 북동부에서 다시 해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로를 이용하든 말레이 반도 북서부를 경유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6] 출처: 최병욱, 『동남아시아사』와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 17권 p133.[7] 파사이는 13세기에 군주가 개종하였는데, 아체 지역의 일부 소규모 국가는 12세기에 군주가 개종한 경우도 있었을 수 있다. 말레이 반도에서는 크다의 군주가 12세기에 개종하였다는 지역 연대기 기록이 있지만 이는 주변 기록과 교차 검증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크다 군주의 개종은 15세기로 본다. 말레이 반도에서 가장 이른 믿을 만한 군주의 개종 기록은 14세기의 트렝가누 비문으로 입증되는 트렝가누의 것이다.[8] 다르마스라야 왕국의 귀족 닐라 우타마(Sang Nila Utama)가 싱가포르 지역에 세운 왕국으로, 닐라 우타마는 공식적으로 현재 말레이시아의 페락, 파항, 클란탄, 트렝가누에서 현임 술탄의 선조로 인정되고 있다. 닐라 우타마가 스리위자야의 왕자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불확실하며 일반적으로는 미낭카바우 지역의 영주였거나 빈탄섬(Bintan)의 영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9] 《말레이 연대기》(Sejarah Melayu)에 따르면, 파라메스와라의 후궁 하나가 간통 혐의를 샀고, 파라메스와라는 그 후궁에게 나체를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내보이는 징벌을 내렸다. 이에 후궁의 아버지 라주나 타파(Sang Rajuna Tapa)가 파라메스와라에게 앙심을 품고 마자파힛의 위크라마와르다나에게 싱아푸라의 침공을 의뢰하였다고 한다.[10] 당시 믈라카 내부의 화인(중국인)과 힌두교도 공동체는 포르투갈인들을 지원하였다.[11] 'Malaca'라는 표기는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확립되었으며, 16세기 전반 일부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멜라카Melaca', '멜레쿠아Melequa'로 기록하기도 했다.[12] 파타니 지역의 파타니 말레이어클란탄 말레이어와 가까운 방언권에 속하며, 파타니와 클란탄의 전통 문화는 상당히 유사하다.[13] 이때의 '사이부리'는 크다를 지칭하는 옛 시암식 명칭이 아니라 오늘날 빠따니주 동부 사이부리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14] 크다의 연대기에는 12세기로 기록되어 있으나, 아체 등 주변 지역의 기록에서는 15세기로 보고 있다.[15] 이 믈라카 법전은 전통 시대에 믈라카의 후계 국가 조호르, 페락 등뿐만 아니라 말레이 문화권의 인접 국가 아체, 파타니, 브루나이에서도 그대로 혹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사용되었다.[16] 영국은 르만 지역의 지하 자원을 아쉬워했으며, 국경 문제에 확실하게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1909년 시암과 영국 간의 합의를 통해서였다.[17] 파타니, 농칙, 야링 및 사이부리 북부[18] 얄라, 르만[19] 르게, 사이부리 남부[20] 크다, 프를리스, 스툴[21] 원래 영국은 스툴 지역 역시 영국령 말라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철회되었다.[22] 초대 사라왁 라자 제임스 브룩은 유럽 세력들로부터 가능한 한 독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려 했다. 그러나 제임스 브룩 사후 사라왁의 2대 라자가 된 제임스 브룩의 조카 찰스 브룩(Charles Brooke, 1829–1917, 재위 1868–1917)은 중립 정책을 폐기하고 영국에 사라왁의 보호를 요청하여, 결국 1888년 사라왁은 사바와 함께 공식적으로 대영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23] 여담으로, 술탄 압둘 사맛 측에서 클랑 전쟁 승리의 일등 공신인 틍쿠 쿠딘은 전쟁이 끝나자 슬랑오르의 부왕으로서 독자 세력을 거느렸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슬랑오르 술탄에게 당한다. 여기에는 틍쿠 쿠딘의 책임도 일부 있는데, 전쟁 과정에서 틍쿠 쿠딘이 거느렸던 파항 지원군이 전후 파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슬랑오르 영내에 눌러앉으려 했기 때문이다. 틍쿠 쿠딘은 전후 영국인과 슬랑오르인 일부의 지지를 얻기는 했지만, 결국 술탄과 슬랑오르 정부의 냉대에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1876년 슬랑오르를 떠나 크다로 돌아갔고, 이어 1878년 공식적으로 슬랑오르 부왕직도 포기하였다.[24] 말레이 반도, 남부 람풍 지역, 북서부 바탁 지역을 제외한 수마트라, 보르네오 해안 지대[25] 주석 광산이 운영되던 초창기에는 중국인 이주 노동자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말레이인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프라나칸 가정을 이루고 말레이인에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으나,(이 때문에 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은 인도네시아인에 비해 외양이 동아시아인에 더 가까운 편이다.) 이후 반목이 심해지면서, 중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고향에서 가족들을 데려오고 말레이인들과 더 거리를 두게 되었다.[26] 사실 이러한 편향적인 말레이계-중국계 고정관념동남아시아에선 아직도 통한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통한다. 영국인 지주들은 말레이계 사람들을 하인으로 삼아 집안일을 시켰고 중국계를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아직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 통계 작성시에 '기타' 항목이 아닌 별도 항목으로 작성될 정도로 숫자가 많다.[27] Dodge, Nicholas N. 1980. "Population Estimates for the Malay Peninsula in the Nineteenth Century,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East Coast States." ''Population Studies'' 34 (3): 437-475.[28] Economic History Malaya: Population Data[29] 명목 GDP는 2018년 기준 $11,137이나 된다.[30] 이처럼 인문학, 예체능 계열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 추세이다. 하물며 대학 가는데 혜택까지 줬더니 인문학으로 몰리는 걸 보면 답답할 만도 하다. 법대의 경우만 해도 거의 중국계가 진학하고 말레이계는 드문 편이니 분통이 터질 만 하다.[31] 재집권한 마하타르 총리도 국가 경쟁력 향상과 인종간 화합을 위해서 부마푸트라 정책을 점차적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역시 말레이계 중산층과 빈곤층의 반발을 사면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