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금

 

長今
생몰년도 미상
1. 소개
2. 역사서에 등장하는 장금
3. 대장금이라는 호칭에 대해
4. 기타 매체에서의 장금


1. 소개


조선 중종 시대의 의녀.
중종의 총애를 받아 주치의 역할을 했다. 장금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의녀다. 그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대장금. 여기서는 서장금으로 등장한다.

2. 역사서에 등장하는 장금


장금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종 10년(1515년) 3월 8일 기사다. 이날 사헌부에서는,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그해 2월 25일에 원자(훗날의 인종)을 생산하고 3월 2일 사망한 것에 대해서 치료를 담당했던 의원 하종해를 의금부에 가둬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중종은 '하종해는 마음대로 지어 올린 것이 아니라 의녀가 말하는 증상에 따라 조제한 것이므로 하종해를 의금부에서 심문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이때 중종이 말한 의녀 중에 장금이 포함되어 있다.
사헌부에서는 장금이 왕비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중종은 3월 22일에 장금은 원자를 생산하는데 큰 공을 세웠기에 반드시 상을 내려야 하는데 상을 내리지 못할 망정 형장을 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 대간들은 장금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고 다시 주장했지만 중종은 끝까지 장금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1]

"대저 사람의 사생이 어찌 의약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에 속하게 함은 원래 전례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인 장금은 호산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중종실록>> 10년 3월 21일

장금은 7년 후인 1522년 8월 15일 기사에 다시 등장한다. 이날 중종은 대비가 중풍 증세에 감기를 앓고 있다면서 의녀에게 치료하게 했으나 미진하여 의원 하종해와 김순몽이 치료에 가세하도록 했다. 9월 5일 자순대비의 병세가 호전되자, 왕은 대비를 치료한 의원 하종해와 김순몽, 의녀 신비와 장금에게 상을 내렸다. 이때 신비와 장금은 각각 쌀과 콩 10석 씩을 받았다.
1524년 2월 15일에 장금은 체아직을 받았으며, 중종의 간병을 전담하게 되었다.

의녀의 요식에는 전체아(급료의 전부를 받는 체아직)가 있고, 반체아가 있는데, 요즘 전체아에 빈자리가 있어도 그것을 받을 자를 아뢰지 않으니, 아래에서 아뢰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에 출입하며 간병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중종실록>> 19년 12월 15일

중종 27년(1532년) 10월 21일에 내의원 제조 장순손과 김안로는 중종의 병이 의녀에게만 맡겨서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면서, 의원을 들여보낼 것은 간청했고 중종은 그 말을 받아들여 의원 하종해와 홍침을 불러 진맥하게 했다. 이 때의 병은 종기였던 것 같다. 중종의 종기는 수개월 동안 낫지 않았지만 1533년 1월 9일에 중종은 자신의 병에 대해서 해명을 했고 장금으로 하여금 다시 진찰하여 약을 쓰게 했다. 한달 뒤에 병이 나아서, 중종은 의원 하종해와 의녀 대장금, 계금에게 상을 주었으며, 장금과 계금에게 각각 쌀과 콩 15석 씩을 하사했다.
중종 39년(1544년) 2월 3일에 중종은 심하게 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중종은 이 때 소소한 약에 관한 의논은 의녀를 통해 전해줄 테니 상의하라는 말을 남겨서, 자신의 병을 장금에게 맡겨두었다는 뜻을 드러냈다. 며칠 뒤인 2월 7일에 다시 내의원 제조가 중종을 문안했고, 중종은 증세가 나아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틀 뒤에 회복되어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한 의녀 장금과 은비에게 상을 내렸다.
하지만 중종의 병은 완치되지 않아서 한기가 들거나 대소변이 원활하지 않은 증세가 계속되다가 10월쯤에는 중병이 되었다. 장금이 진맥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큰 차도가 없자 10월 24일에는 내의원 제조 홍언필이 박세거에게 진맥하게 하라는 진언을 올렸고, 10월 25일에는 중종은 장금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자신의 증세에 대해서 설명하게 하기도 했다. 어의들의 처방을 받은 다음 10월 29일에 중종은 7일만에 대변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병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여러 차례 의원이 들어갔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11월 12일 아침에는 다시 장금이 대전에서 나와 중종의 병증을 설명했고 처방을 올렸는 말을 했다. 이에 의원 박세거가 들어가 진찰하고 다시 약을 올렸으며, 정오에는 다시 장금이 나와 왕의 상태를 설명했다. 저녁에도 다시 박세거가 들어가 진찰하고 약을 올렸다.
11월 15일 어두워질 쯤에는 장금이 밖으로 나와 중종의 용태가 위급하다는 말을 했으며, 얼마후 중종은 승하했다. 이후로 장금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중종이 장금을 총애했고 인종이 지독한 효자이며 거식증 증세를 가지다시피 한 환자인 점과 인종 사후 소윤의 숙청이 있던 걸 감안하고, 이미 오래 전부터 임금의 죽음이 예상되었던 만큼 장금에게 벌을 주었을 가능성은 적었다. [2] 나름 네임드였는데 죽였다거나 귀양보냈다는 기록이 없으니 중종 사후 궁에서 나와 편안히 노후를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3. 대장금이라는 호칭에 대해


의녀 장금을 왜 대장금으로 호칭했는지는 크게 두 가지 추측이 있다. 중종이 그녀를 매우 총애하여 치하하는 뜻에서 크고 위대하다는 大자를 붙여 불렀다는 설과, 장금이라는 의녀가 두 명 이상 있어 구분하기 위해 키가 크거나 나이가 많은 의녀에게 大자를 붙여 구분해 불렀다는 설이다. 일단 학계에서는 후자 쪽이 정설이나 드라마 탓에 일반적인 인식은 대부분 전자다.

4. 기타 매체에서의 장금


드라마 대장금 외에도 애니메이션 장금이의 꿈이란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중국의 게임제작사 이펀에서 제작한 스마트폰 게임인 <미라쥬 메모리얼>이란 작품에서 A랭크 원거리 공격형 캐릭터로 등장한다. 역시 A랭크 캐릭터인 진덕여왕과 함께 흔치않은 한반도 국가 출신의 캐릭터로, 아무래도 제작사가 중국계 회사라 그런지 어지간해선 한국인 캐릭터는 등장시키지 않는 일본 게임사들과는 달리 역사적 위인의 미소녀화/TS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등장하게 된 듯 하며 역시 위의 드라마의 영향이 컷을 것으로 추측된다.[3] 거기에 단군도 등장한다.

[1] 그래도 아주 죄를 안 줄 수는 없었는지 장을 속바치게(받아야 할 벌만큼 벌금을 내게) 했다.[2] 조선이 나름 법과 제도를 갖춘 나라였는데 죽을 사람이 죽었다고 의관을 벌주면 누가 임금을 돌보겠는가? 효종을 죽게 한 신가귀 같이 확실히 의료사고를 낸 자가 아니면(그나마도 신가귀에게 문제가 있긴 한데 효종이 그걸 알면서도 썼다는 것이 감안되어 교형으로 끝났다.) 체면치레 정도의 솜방망이 처벌만 하거나 벌하지 않았다. 사직을 하더라도 금방 복직되었기 때문에 '휴가' 개념이라고 봐도 좋았다.[3] 게임상 대사등을 봐도 의녀로서의 모습 보다는 음식과 요리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