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기

 

1.1. 개요
1.2. 한국 역사 속 왕들의 천적
1.3. 엉덩이 종기
1.4. 치료
1.5. 관련 문서
2. 終期
2.1. 관련 문서


1. 질병



1.1. 개요


腫氣(furuncle)
피하감염으로 고름이 형성되는 질환이다. 종기가 악화되면 피부 염증으로 끝나지 않고 발열, 오한 등 전신에 걸친 증상을 나타낸다. 정말 드물게는 패혈증으로까지 진행되어 생명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확실한 절개 배농법과 항생제가 없었던 과거에는 종기로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재도 당뇨병, AIDS, 간경변, 환자들과 같이 면역이 억제되는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질환이다. 종기가 농익었을 때 툭 짜면 퍽 하고 고름이 쏟아지는데, 증세가 심하다면 가만있는데도 고름이 제멋대로 터져서 우수수 쏟아진다.
모낭(털구멍)의 염증이 가장 흔한 원인이나 피하에 작은 낭종이 형성되어 감염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보다 더 깊은 범위의 감염일 경우에는 종기라고 칭하지 않는다.[1]
보통 종기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비위생적인 생활습관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면역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질환이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피부의 세균 감염을 쉽게 처치하지 못하고 점점 악화되는 것. 당뇨 등 만성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종기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발생하는 것도 이와 연관한다. 물론 나이와도 관련이 있어서, 면역력이 좋은 젊은 시절에는 종기로 인해 죽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이러한 생활 패턴과 나이로 인한 면역력 악화가 겹치면 순식간에 간단한 질병에서 난치병으로 돌변한다. 그래서 한국에선 조선왕들이 젊을 때 걸리면 끙끙거리며 버티다가 나이가 들면 죽고는 했다.
현대에는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여드름처럼 가벼운 피부 질환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조선시대에만 해도 치료가 쉽지 않은 난치병이었다. 왜냐면 조선시대에는 종기 치료에 꼭 필요한 항생제 및 상처 소독 기술이 미비하다보니 종기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외과수술을 하는데 필요한 소독기술과 항생제가 부족했다.[2] 특히 환자가 왕인 경우는 소독을 안 하고 시술했다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외과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

1.2. 한국 역사 속 왕들의 천적


한국 역사상 수많은 왕들의 직접적인 사인이다. 사실상 왕들의 언더테이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견훤도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등에 난 종기인 등창이 악화되어 죽었고[3] 조선왕조실록에도 종기 이야기가 줄기차게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조선 왕조의 역대 왕들은 종기를 일종의 직업병처럼 여길만큼 많은 왕들이 이를 앓았다. 문종[4], 정조[5]가 종기로 목숨을 잃었고, 세조[6], 광해군, 효종[7], 현종 등 27명의 왕 중 무려 12명이 종기로 고생했을 정도로 사례가 많다.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이부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

정조실록 정조 24년(1800) 6월 25일

여기 나오는 6월 25일은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8월 15일인데, 그 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처음에야 피재길이 만든 고약으로 종기를 치료했지만 생활 습관의 문제로 결국 재발했고[8], 고약도 내성이 생긴데다가 다른 합병증까지 겹쳐 약효를 받지못한채로 결국 승하했다.
조선의 국왕들이 종기에 자주 앓았던 것은 현대에 비하면 덜 위생적인 환경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로운동 부족 등 면역력이 약해지기 쉬운 요인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당시의 최신 의료 혜택을 누구보다 먼저 받을 수 있고, 기록으로 남는 왕들도 저 정도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 받기도 어려운 민간 에서도 널리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종기가 악화되어 숨진 사람들도 수두룩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이야 막말로 소독한 바늘 같은 걸로 쿡 찌르고 쭈욱 짜 낸 다음 거기다 씻고 소독하고 뜨거운방에서 자면 나아 버리는 게 종기겠지만 바늘 소독도 안 되고 상수도가 없으니 씻기도 어렵고 처치 후 소독하기도 어려웠는데다 왕쯤 되면 초기 치료도 어려웠을테니 염증이 커져서 병이 커졌을 것이다. 거기다 주요 장기와 먼 엉덩이 종기라면 모를까 등허리에 종기가 나서 커지기까지 했다면...

1.3. 엉덩이 종기


엉덩이 종기는 곪은 상태에서도 안 터지고 앉을 때마다 굉장히 아픈 경우가 있는데 겪어본 사람만 안다. '''엄청 아프다. 정말 엄청나게 아프다.''' 이럴 땐 그냥 시원하게 터트려서 고름을 쭉 짜버린 후 소독해주는 게 편할 때도 있다. 괜히 그냥 있다간 자기도 모르게 터져서 속옷이 더러워질 수 있다. 검은 피와 함께 새카맣거나 회색인 고름이 쏟아져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엉덩이에서 고름이 흐른다고 이게 다 종기는 아닐 수 있다.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플 수 있는 질환은 치질의 일종인 치루인데 실제 염증은 직장에서 발생했지만 이 염증에서 생긴 고름이 직장의 환부에 쌓여가다가 마침내 혈관 같은 우회로를 만드는 식으로 무작정 고름의 파이프라인이 몸 속을 파고 들어가다가 엉덩이로 튀어나오는 터널이 뚫려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특별한 치료 없이는 직장에서 엉덩이로 흐르는 이 지옥의 송유관은 철거할 방법도 없다. 고약도, 항생제도 힘들고 수술대에 오르는 것 밖에 답이 없어진다.

1.4. 치료


이렇듯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종기로 고생한 조선시대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침이나 칼로 외과적 시술을 하거나 민간요법으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뱉거나''' 하는 식의 치료를 했다.[9] 정조는 종기의 치료를 위해 신하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고, 인삼과 육화탕이 들어간 탕약을 먹었다고 한다. 정조본인은 자신과 인삼이 맞지 않다고 싫어했지만, 신하들은 기어이 인삼이 들어간 약을 먹였다. 많은 치료법이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소독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시술 도구의 살균처리는 고사하고 물론이고 환부를 물로 씻지도 않은데다[10], 제대로 된 비누나 샤워라는 개념이 등장하지도 않은 시절이라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그래서 외과적 치료를 시행해서 고름을 빼내도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치료법은 그저 종기의 고름만 제거할 뿐, 근원적으로 고름을 만드는 조직을 제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재발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이런 상황은 조선 후기에 들어 고약이 개발된 후에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고약이 종기 속의 고름을 배출해 줌과 동시에 상처 소독까지 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약은 20세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정 상비약의 자리에 올랐지만, 의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국내 위생수준도 상승하면서 바르기 간편한 연고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이제는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는 상황이다.
Dr. Pimple Popp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종기 수술 영상으로 유명한 유튜버이자 피부과 의사인 산드라 리 박사의 수술영상을 보면(클릭 주의) 고름을 뽑아낸 이후 고름을 만들어내는 조직 자체를 끄집어내서 전부 떼어내버리는걸 볼 수 있다.[11][12] 고름을 뽑아내기만 하는걸로 수술을 끝내면 높은 확률로 재발하는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세균 감염으로 발생된 모낭염인 경우가 많으므로 향균 비누 (Dial, Hibiclens등)를 이용해 온 몸과 종기가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씻는 방법이 있다. 교차 감염을 막으려면 속옷, 옷은 물론 침대 시트나 이불 그리고 수건등을 주기적으로 빠는 것이 좋다. AHA와 같은 화학적 각질 제거 성분이 함유된 로션 등을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환부를 깨끗히 관리해주면 보통은 2 ~ 3주 정도면 사라진다.
속옷의 원단이 부드럽지 못한 합성섬유일 경우 피부 간 마찰을 증가시켜 더욱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어 면으로 된 부드러운 재질의 속옷을 입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앞서 언급한 고약을 사용해 볼 수도 있다. 상처 부위에 붙이기만 하면 고름을 쭉쭉 잘 뽑아낸다. 직접 짜는 것보다 훨씬 덜 아프고 간편하다. 요즘은 쓰기 편하게 밴드 형태로 출시되는 고약도 있다. 다만 고약으로 종기 치료 하려다가 종기가 더욱 악화되어서# 안 붙이는 것만 못 한 상황으로 갈 수도 있고 장기간 사용시 납중독이 우려되며 흉이 진다는 말도 있으니 신중하게 고려하여 사용하자.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으면 웬만하면 고약은 추천하지 않는다.
화농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경우 항생제 복용만으로 좋아지만, 심한 종기가 났을 경우에는 외과를 방문하여서 제거하기를 추천한다. 혼자서 해결하려 했다간 소독이 올바로 되지 않아 또 고름이 생기며 아파진다. 사태가 심각해지면 항문 외과에서 치료를 해야하며, 치료라는 것이 마취 주사를 놓고 피지낭종을 제거하고 주변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거즈를 쑤셔넣고 향후를 지켜보면서 염증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거즈를 교체해가면서 고름을 짜낸다.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을 경우에는 아예 염증이 나는 살 부분을 완전히 도려내는 대수술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피부에 탁구공의 절반만큼의 구멍이 생기는 거다. 당연히 치료 과정은 더 괴로워지고, 흉터도 크게 남는다. 그러니 귀찮다고 냅두지 말고 종기가 좀 심해진다 싶으면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선시대의 명의 백광현, 피재길이 종기를 잘 고치기로 유명했다. 백광현은 현대에도 소설 마의 백광현과 드라마 마의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고, 피재길은 웅담 고약으로 정조의 종기 치료에 참여했던 의원이다.[13]

1.5. 관련 문서




2. 終期


법률 용어로 어떤 일이 끝나는 시기를 뜻한다. 부관 종류 중에서도 기한(期限)의 한 종류이다.

2.1. 관련 문서



3. 무협소설겁난유세》의 등장인물




[1] 사실 조선시대에는 봉와직염과 단독(erysipelas)도 종기의 일종으로 취급했다[2] 사실 당시 조선의 의학에도 외과시술은 있었고, 실제로 시행된 경우도 많았지만 소독기술의 부족으로 위험성이 높았다. 이는 조선 뿐만 아니라 조선보다 수술기술이 더 발달된 유럽에서도 소독기술의 부족으로 수술하다가 사망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19세기 까지 이어져서 피뭍은 앞치마가 의사의 상징이 되기까지 했으며 환자를 돌보고 다른 환자를 돌보기 전에 손을 씻게하는것만으로 병자의 사망률이 엄청 낮아질 정도였다.[3] 후삼국시대를 소재로 한 태조 왕건에서도 견훤이 점점 등창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4] 등에 난 종기의 크기가 무려 30cm였다고 한다.[5] 등과 머리에 수 많은 종기가 났다고 한다.[6]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자신에게 침을 뱉었는데, 그 다음부터 종기가 생겼다고 한다.[7] 얼굴에 악성 종기가 나서 침으로 땄다가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8] 평소에 업무 과다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또한 담배를 열심히(...)했다. 현대에도 이렇게 살다가 장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당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것이다.[9] 물론 현대 의학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 치료법이다. 아무리 양치질을 열심히 해도 기본적으로 입 안에는 각종 세균들이 많이 번식하고 있어서 감염 위험성이 크다. 시술자 입장에서도 고름과 타인의 피가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좋을 리가 없다.[10] 이때는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 개천이나 온천과 가까운 곳에 살지 않는 이상은 물을 길러 나르는 것이 귀찮고 번거롭기 그지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세수는 매일같이 했기에 위생 관념이 아예 없던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럴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11] 비위가 약한 사람들을 위해 수술 과정을 글로 설명하자면, 환자는 왼쪽 볼에 종기가 있어 절개 수술을 받고 있다. 볼을 () 모양으로 조금 절개하니 엄청난 양의 고름이 쏟아져 나오는데, 쭉쭉 짜서(...) 고름을 다 제거하고 환부를 헤집으며 종기의 원인이 되는 조직을 잘라낸다. 그리고 봉합하는데, 국소 마취를 한 것인지 산드라 리 박사가 환자와 대화를 하기도 한다.[12] 수술 자체는 짧지만, 환자가 조선시대 왕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조선시대에는 현대보다 마취 기술도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종기로 고생하던 왕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면서 화타에게 팔을 맡긴 관우 마냥 술을 마시고 수술에 들어간다고 해도, 옥체(특히 용안)에 직접 칼을 댈 깡을 가진 의사가 있긴 했을까...[13] 《이계집》(耳溪集)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 (홍양호 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