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조선)

 


'''인종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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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2대 국왕
인종 | 仁宗'''

[image]
인종 효릉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인종(仁宗)'''
'''시호'''
'''조선'''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
영정(榮靖)
'''출생'''
1515년 3월 10일 (음력 2월 25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즉위'''
1544년 12월 4일 (음력 11월 20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명정전
'''사망'''
1545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 묘시
(30년 4개월 28일 / 1만 1108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
'''능묘'''
효릉(孝陵)
'''재위'''
'''조선 왕세자'''
1520년 5월 8일 ~ 1544년 12월 4일
(음력 1520년 4월 22일 ~ 1544년 11월 20일)
'''조선 국왕'''
1544년 12월 4일 ~ 1545년 8월 7일
(음력 1544년 11월 20일 ~ 1545년 7월 1일)
(8개월 3일 / 24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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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호(峼)
''''''
천윤(天胤)
'''전호'''
영모전(永慕殿)
'''부모'''
부왕 중종, 모후 장경왕후
'''부인'''
인성왕후

1. 개요
2. 왕세자 시절과 즉위
3. 죽음
4. 그 외
5. 다른 매체에서의 모습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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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2대 국왕.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1][2]이며, 휘는 호(峼), 자는 천윤(天胤)이다.
중종과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 윤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3] 동복형제로는 누나인 효혜공주가 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은 약 8개월로 조선 왕조 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인지도가 떨어지는 군주이며, 조선시대에 국한하여도 존재감이 약하다.[4]

2. 왕세자 시절과 즉위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임신했을 때 을 꿨는데 아기의 이름을 '억명'으로 지으라는 것이었다. 이후 인종을 낳은 뒤 위독해지자 꿈이 어떤 계시로 생각되었는지 중종에게 이름을 '억'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원자의 성명은 '이억'이 된다. 하지만 세자에 책봉되면서 피휘를 위해 '호'로 개명했다.[5]
3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는 등 어려서부터 엄친아의 기상을 풍겼으나[6] 태어난지 며칠만에 장경왕후 윤씨가 산후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세자 시절 상당한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어릴 때는 남곤의 보호를 받았고, 남곤이 죽고도 아버지 중종이 각별히 아끼는 아들이었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자신의 소생이자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을 왕으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던 경빈 박씨의 견제 때문이었다. 작서의 변으로 경빈 박씨가 몰락한 뒤에는 세자를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권세를 휘두르는 김안로가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가 세자의 후원자를 자처한 덕에 세자의 지위는 안정될 수 있었다.
김안로가 몰락한 뒤에 조정의 권력은 그의 외숙인 윤임, 의붓어머니이자 사촌누나인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의 손에 넘어갔다. 흔히들 말하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갈등이 이 시기에 있었다. 문정왕후는 먼 친척이기도 하고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필요에 의해서 세자를 감쌌지만[7] 경원대군을 낳게 된 뒤에는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인종을 죽일 듯이 견제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세자궁(동궁)에 의문의 화재 사건이 일어나 인종이 죽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이 때 불이 나자 야사의 이야기로 당시 인종이 ''어머니가 나의 죽음을 원하시니 그에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겠는가" 라며 자리에 앉아 불에 타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밖에서 중종이 나타나 그의 아명인 백돌을 애타게 부르자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에게는 효가 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나아가 "불충")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증거는 없었으나 세간에선 문정왕후가 세자를 죽이려고 벌인 짓이란 소문이 떠돌았으니 문정왕후와 세자(인종)의 관계에 갈등이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의 기록에선 인종이 자고있는데 동궁에 불이나 자고있던 세자를 세자빈이 깨워서 구출해낸 이야기이다.[8]
중종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올라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유학에 바탕을 둔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 등 중종 때 좌절된 도학 정치를 재현하려 노력했다. 실제로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압박받던 사림들이 환호했다. 또한 사간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관이 자신을 기록하는 사초(실록의 원본)에 이름을 써넣지 않아도 된다는 옛 규정을 부활시켰다.
다만 몸이 약했고 문정왕후의 도를 넘은 압박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야사 등에선 문정왕후가 인종을 늘 괴롭혔다고 하는데 경원대군과 함께 편전에 들어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거냐. 죽이려거든 지금 죽여라."라고 포악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작 그는 문정왕후를 극진히 우대했고, 나이 차이가 거의 아들뻘인 이복 동생 경원대군과도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3. 죽음


결국 9개월도 다 채우지 못하고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독살설이 나돌았다. 인종에게 포악스럽게 굴던 문정왕후가 어느 날은 아주 친절한 모습으로 인종에게 오색떡을 권했는데 오색떡을 먹다가 그날 쓰러져서 즉사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야사의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거식증으로 죽은 것을 문정왕후를 비난하기 위해 독살설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정사에서도 음식뿐 아니라 약까지 거부하는 모습으로 보아 독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이 병에 걸려 앓아 누웠을 때 침식(寢食, 자는 것과 먹는 것)을 거르며 간호에 몰두했고 즉위 이후에도 5개월 동안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단식한 뒤 곧바로 제사니 사신 접대니 하는 일정을 강행했다. 걱정이 된 신하들이 말렸을 정도. 이러니 몸이 남아날 턱이 없었다. 죽기 1달 전인 6월 4일부터 실록에 기록이 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으나 걱정이 되어 찾아온 신하들에게 괜찮으니 진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한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단, 신하들이 인종에게 고기를 먹도록 권하자 인종은 문정왕후께서도 고기를 드시지 않는데 어찌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느냐고 거부했고, 신하들이 문정왕후에게 가서 인종께 고기를 드시라고 권해드려 달라고 부탁하자 문정왕후는 그러겠다고 하고는 실제로는 견제때문에 고기를 권하지 않았다. 즉, 문정왕후는 인종의 사망을 방조, 방관한 미필적 고의는 충분하다.
사실 이 내용은 야사에 기반한 추측성의 이야기이며 실록의 기록은 좀 다르다. 실록에서는 정승 이하 신하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육선을 권했고, 세종대왕마저도 상중에 육선을 먹었다고 외쳤다. 그리고 모후인 문정왕후도 권해서 육선이 수라상에 올라갔는데 계속 그대로 나왔다는 기록이 수시로 보인다. 시일이 지나서 어의 진찰이라도 받으라 했지만 거부하다가 받아봤더니 '이미 고기 먹은들 소화도 안될거고 우유라도 드셔요' 라고 진단이 나왔다. 그러나 이마저도 거부... 사실 본인이 그러니 방법이 없는 상황이 됐다.
다만 사관의 논평에 따르면 고기를 먹으라는 신하들의 권고가 진정성이 없었을 수도 있음은 배제할 수 없다. '이 지경인데 신하놈들이 억지로라도 먹여야지 아닌걸 보면 뭔가 있는거 같음???' 하는 사관 논평이 있다.
독살설을 배제하더라도 문정왕후의 압박이 인종의 건강을 해쳤을 개연성 또한 있다. 조선은 '효(孝)'를 숭상하고, 인종은 특히 매우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인종이 문정왕후의 압박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불효 때문이라며 자책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역덕들 사이에서는 농담으로 "한국사 역대 처음으로 '''굶어죽은 왕(...)'''"이라는 드립도 간간히 나돈다. 더더욱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영조 역시 소식가로 유명했으며, 꿩고기 외엔 거의 입에 대지 않고[9] 잡곡밥과 나물으로 조금씩만 먹는[10] 영조의 식습관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당뇨와 고혈압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 영조의 장수 비결로 꼽힌다. 즉, '''가장 짧게 재위한 왕은 고기 안 먹어서 죽었고, 가장 길게 재위한 왕은 고기 안 먹어서 장수했다는(...)'''이야기.
이 사건을 그 동안 '''이일역월제(異日逆月制)''', 하루를 한 달로 치면서 3년상을 하는 편법으로 국정의 안정과 실용성을 꾀하던 조선 왕실이 점차 성리학적 예법을 신봉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평하기도 한다.
죽기 직전에야 조광조의 억울한 누명을 신원하라는 명과 함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분부를 내리고 승하했고 선조 대에서 신원되었다.

3.1. 왕릉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효릉이다. 현재 유일하게 비공개 능이다.
서삼릉 문서 참고.

4. 그 외


야사에는 명나라사신이 인종을 보고, "'''조선의 왕은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다. 그런데 조선은 땅이 좁아 성인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니 곧 얼마 안 가 왕은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비슷한 야사로 인종은 세자 시절에 병풍에다 사람 이름을 적어놓고 '이 사람은 이 관직이 좋겠지, 저 사람은 저 관직이 좋겠지' 했는데 누군지 모르는 사람 뿐이라 궁금해진 신하들이 그들을 수소문하고 다녔는데 알아보니 모두 재야에 묻혀있는 재사, 현인으로 이름난 사람들 뿐이었다고 한다. 또, 한 신하가 우연히 선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세자는 신선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했다 한다. 임금님 띄워주기일수도 있지만, 유독 인종에게만 이런 선담류의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당대에도 보통 사람과 다른 사람으로 여겨졌던 듯하다.[11]

어진 성격에 대한 일화는 또 있는데, 세자 시절에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희생양이 된 복성군의 가족들이 가엾다며 그들을 복권해 줄 것을 요청하고, 위에 언급된 화재 사건에 대해서도 아랫 사람들을 벌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천벌이라고 자책하는 글을 남겼다. 똑같이 어질 인(仁) 자를 썼던 인조와는 달리, 정말로 어질 인 자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묘호는 물론이고 능호(효도 효 : 孝)까지도 정말 그답다.
언젠가 세자의 옥대 등이 도둑맞은 적이 있었는데, 주변을 추궁하라는 권유에도 물건은 놔두면 진짜 주인에게 돌아온다고 거부했고, 머지 않아 암시장을 통해 옥대 등은 돌아왔다. 그리고 암시장을 통해 추적해본 결과 궁궐을 수리하던 일꾼이 범인임이 드러났다.
세자로 오랜 기간 머무르고 있다가 왕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승하했고, 선비들로부터 성군의 자질이 있다고 칭송받은 점 등 여러모로 조선의 5대 왕인 문종[12]과 닮았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궁궐에서 발견된 타다 만 어진을 두고 그 어진이 문종의 어진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에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어진일 것이라 생각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생김새까지도 비슷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종이 자식이 없는 이유는, 이복 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아서라고 한다. 하지만 이건 구라일 가능성이 높은 게, 일단 근거라곤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유교에선 자식을 못 낳는 것도 불효이므로, 효자로 소문난 인종이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을리 만무하다. 정말로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았다 해도, 그러한 의사를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위 기간이 8개월[13]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인종실록은 다음 왕인 명종 때 중종실록과 같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죽은지 얼마 안되어 을사사화로 친인종파인 대윤이 박살나면서 그 반대파인 소윤에 의해 일방적인 편찬이 이뤄졌기에 기록에 왜곡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고, 그나마 즉위 초기 2개월의 기록은 중종실록에 편입되어 기록되었기에 인종실록에 기록된 기록은 7개월 분량 2권 1책(1책은 부록이다.)에 불과하다. 안습.
중종 시기에 일어난 괴수 출현 소동은 인종이 즉위한 후에도 일어났다.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 항목 참고.
인종의 짧은 재위 기간과 취약한 입지는 부인인 인성왕후 박씨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명종 즉위 후 왕대비가 되고 문정왕후 사후에는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는데, 정작 명종의 후계자는 손아래 동서인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가 결정했고, 선조 즉위 초의 수렴청정도 인순왕후가 담당했다. 하지만 이는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들어와 대를 이은 것을 생각한다면, 왕통상 큰어머니인 인성왕후보다 양어머니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인성왕후와 인순왕후는 각각 인종과 명종의 왕비로 동서지간, 즉 같은 세대였다. 또한 이보다 전에 성종 - 연산군 때의 인수대비안순왕후도 동서지간으로 성종 때에는 왕대비로, 연산군 때는 둘 다 대왕대비로 받들어진 전례가 있다.

5. 다른 매체에서의 모습


SBS의 대하사극 여인천하에서는 아역 배우 권오민[14]이 원자 시절의 인종 역을 맡아 어린 나이에도 사리분별이 확실하고 효성스러운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역사고증은 저 멀리 가버려서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덕흥군은 물론이고 다른 후궁의 소생들보다 한참 어리게 나온다. 그래도 성인 역인 정태우도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화재 사건의 경우 정난정이 계획했고, 사건 후 정난정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정왕후가 이를 묵인한걸로 표현되었다.
2008 전설의 고향 4화 <귀서> 편에서는 문정왕후에게 독살당하고 귀신이 되어 궁궐에 나타나는 인종이 나왔다.
인종 독살설을 다룬 KBS의 사극 천명에서도 세자 시절부터 등장했으며 배우는 성인역은 임슬옹, 아역은 함원진.
최달수 화백의 '우리나라 좋은나라'라는 학습만화에서는 짧은 기간동안 왕위에 있다가 급사했기 때문에 "내가 왜 죽었지?"라는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는 드립을 쳤다.
겁스 무한세계의 '조선-2'에서는 문정왕후가 급사했고 인종은 '''51세까지''' 장수했다. 인종은 세조 시절부터 쌓여왔던 권신들을 숙청하고 조정을 쇄신했으며 그 후손들도 인종의 개혁 정치를 계승했다. 그리고 그덕에 이순신이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여 왜군을 부산포에서 조기 요격하여 임진왜란에도 이기고,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원하고 그 보답으로 나가사키를 할양받고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며 서구 열강과의 개방을 시작하게 되었다.[15] 그야말로 일본과 조선이 뒤바뀐 세계.
마섹남-마술하는 섹시한 남자에서는 남주인공 마마성의 전생으로 나온다. 왕세자 시절 갑자기 동궁전에 나타난 의문의 소녀[16]에게 천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총애했으며, 동궁전에 불이 나자 천동을 미래로 피신시키고 남아서 삶을 마감했다. 그 뒤 마성에 의해 다시 조선시대에 온 천동에 의해 목숨을 건졌으며, 즉위하고 천동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천동을 그리워하다 재위한 지 아홉달만에 숨을 거뒀다.
조선공주실록에서는 여왕 수련윤임 사이의 아들인 윤천윤이 등장. 수련이 중종을 모델로 삼은 캐릭터이고 인종의 호가 실제로도 천윤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인종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6. 관련 문서


[1] 여기서 보이는 '~효대왕'이 인종만의 특별한 시호는 아니다. '효'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가 강한 군주들인 태종과 세조 역시 각각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이다. '~효대왕'은 조선의 대부분의 왕 시호 끝에 붙는 말이라서 이걸 가지고 '흠효 대왕'이 인종의 효성을 찬양했다고 보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인종이 조선 시대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 군주 또는 후계자 중에서 손에 꼽을만큼 효성스러웠기에 생기기 쉬운 오해 중 하나.[2] 정확히 말하면 왕에게 시호로 붙는 '효'자는 선왕의 위업을 잘 이어서 '효도했다'는 의미. 그래서 중국 황제들도 보면 시호가 2글자이던 초기에는 창업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효~황제였다. 한 문제는 태종 효문황제, 한경제는 효경황제, 한무제는 세종 효무황제 하는 식으로. 조선에서 시호 받은 왕 중에 '효대왕'이 아닌 왕은 개국군주 태조, 그리고 묘호 때문에 대신 덕(德)을 넣은 '''"효"'''종 두 사람뿐이다.[3] 태어나기는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 소생인 복성군 이미가 먼저 태어났다. 따라서 장남이 아니라서 형제 순서는 밀리지만 조선 시대는 적서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중전에게서 태어난 적자인 인종이 왕위를 이은 것. 적통의 대군이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왕위 계승에서 후궁 소생보다 우선이었다. 예외는 너무 늦게 태어나서 어쩔 도리가 없었던 영창대군 정도. 물론 적장자가 없을 경우에는 후궁 소생 중 장남이 왕위를 계승했다. 조선 왕조 처음으로 왕비 소생이 아닌데 왕이 된 사람은 선조(인종의 이복동생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4] 대한민국 교과서에도 조선의 인종은 언급되지 않고 생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5] 억이라는 이름이 많이 쓰는 한자였기 때문이다.[6] 현대에 와서는 3살 아기가 책을 읽는 일이 비교적 흔한 일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동화책이나 그림책과 같은 아동용 도서가 없었으며 있는 서책이라고는 거의 외국어 - 한자로 쓰여진 철학 서적 - 유교 경서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7] 혹시나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로 중종이 죽어버리면 왕으로 즉위할 세자를 같은 편으로 만들어 등에 업기 위해서였다.[8] 헌데 이 내용도 참 한심한게 동궁에 불이 나 있는데 승지와 사관들이 멸화군을 모아놨더니만 우왕좌왕하며 아무것도 못 했고 심지어 영의정이 세자께서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대답하는 등 가관이었다. 정작 세자는 나중에 알아보니 중종과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결국 이 말은 불 꺼야 하는 멸화군 세자 데려와야 할 승지나 사관은 아무것도 안 했고 세자는 중종이 직접 데려왔다는 것이다.[9] 그 외에야 생복(살아있는 전복), 고추장 정도[10] 물론 중년기부터만 그랬다. 팔팔하고 젊을 때는 젊은이 입맛이었는지 나름 고기(닭고기라든지 소고기, 돼지고기, 심지어 양고기까지)도 잘 먹었다.[11] 다른 버전에는 재위에 오르면 내정할 차기 삼정승감을 병풍 뒤에 적어놓았다고 한다. 영의정에 피장, 좌의정에 화담 서경덕, 우의정에 북창 정염. 셋다 선가, 도가와 연관이 깊은 인물들로, 피장은 말그대로 갖바치, 가죽 장인이란 뜻이며, 성명은 불명이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어린 조광조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임혁이 분한 역이며, 홍명희 임꺽정에서는 갖바치 양주팔, 즉 병해대사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정염은 도가에서 정북창으로 알려진 인물로, 어려서 학문에 통달했으며, 특히 점복에 능해 여러 기이한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부친 정순붕이 윤원형의 심복으로 사화를 일으킨 탓에 환멸을 느껴 잠적 후 생을 마쳤다.[12] 문종과 인종은 종고조부할아버지 종증손자의 관계다[13] 8개월하고도 4일이다. '''조선 임금 중 가장 짧게 재위했다(...)'''[14] 후에는 이산에서 박대수를 연기 하였다.[15] 무한 그룹에서는 갑작스러운 개방을 센트럼의 영향이라 추정하고 있다.[16] 그 소녀의 정체는 바로 마성의 첫사랑 해리. 그녀의 부친인 마진태를 피해 동궁전까지 온 마성의 해리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해리를 조선시대로 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