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진(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소진은 1886년 9월 26일 경기도 남양도호부 우정면 칠동(현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3일 주곡리 광장에 갔다가 차희식으로부터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전해듣고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차희식, 차병한, 차인범 등 시위 주동자들이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몽둥이를 가지고 장안면 사무소로 모일 것을 전했을 때, 그는 석포리에 살고 있던 이영쇠에게 이 계획을 전하고 즉시 장안면 사무소로 달려갔다. 당시 면사무소에서는 면장 김현묵(金賢默)이 200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했다. 연설이 끝나자, 장소진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했다.
이후 군중의 숫자가 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그는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게 했다. 이어서 차인범 등의 동지와 함께 2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달려가 면사무소 건물과 집기, 공문서를 파괴했다. 이후 그는 같은 면내인 화수리에 있는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 투석하고 불을 질렀다. 이때 일본인 순사 카와바타 토요타로(川端豊太郞)가 도주하면서 권총을 발사해 시위군중 1명이 맞아 죽자, 그는 차희식, 정서송, 이순모(李順模), 장제덕, 차인범, 차병한 등과 함께 추격하여 붙잡은 뒤 쳐 죽였다.
이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 살인, 방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모진 고문으로 인해 중병에 걸리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결국 1924년 12월 7일에 자택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소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