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황후 이씨

 


'''북송의 추존 황후
章懿皇后 | 장의황후
'''
'''시호'''
장의황후(章懿皇后)
''''''
이(李)
'''출생'''
987년
'''사망'''
1032년
'''부군'''
진종
'''부친'''
이인덕(李仁德)
1. 개요
2. 생애
3. 사후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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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의 제3대 황제인 진종의 황후. 생전의 신분은 신비(宸妃)였으며, 제4대 황제인 인종의 생모이다.

2. 생애


987년에 이인덕(李仁德)의 딸로 태어났다. 조부인 이연사(李延嗣)는 오월의 관원이었으며, 이인덕은 좌반전직을 지냈다. 이씨는 입궁한 뒤에 진종의 후궁인 덕비 유씨의 시녀가 되었고 진종의 침실을 모셨다. 입궁할 당시 진종은 덕비 유씨를 총애하였지만, 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없었고 대신들이 반발하여 황후로 세우지는 못하였다. 진종은 이전에 첫번째 황후였던 장목황후 곽씨는 태자 조우를 낳았지만 조우는 이미 1003년에 요절했기 때문에 진종에게 황자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덕비 유씨는 자신이 황후가 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로 한다.
이런 와중에, 1010년 이씨가 황자 조수익(趙受益)을 낳았고 이씨는 재인(才人)을 거쳐 완의(婉儀)가 되었다. 덕비 유씨는 이씨로부터 황자 조수익을 빼앗아 주변 인물들에게 입단속을 시켰고, 진종의 묵인 하에 조수익을 자신의 소생이라고 선포하였다. 유씨는 숙비 양씨에게 조수익을 잘 보살피라고 부탁하였고, 한편 진종은 유씨를 황후로 책봉할 명분을 얻어, 마침내 1012년에 황후로 삼았으니, 이가 장헌명숙황후 유씨이다. 이씨는 아들인 조수익을 낳고 이외에 딸을 1명 낳았지만 이후에는 자식을 아예 낳지 못하였다. 이후 1022년 진종이 세상을 떠나고, 이씨의 소생인 조수익이 황제로 즉위하니, 바로 제4대 황제인 인종이 된다. 이씨는 인종이 즉위하고 신분이 순용(順容)이 되었다. 이후 1032년에는 신비로 진봉되었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사후 추존


인종이 태어난 뒤, 장헌명숙황후 유씨가 주변에 입단속을 철저하게 했기 때문에, 인종은 즉위하고 줄곧 자신의 친어머니가 신비 이씨가 아닌 장헌명숙황후 유씨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032년에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헌명숙황후 유씨는 인종의 출생의 비밀이 누설될 것이 두려워, 이씨의 장례를 궁인의 예로 치르고자 하였다. 그러자 승상(丞相) 여이간(呂夷簡)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거행하야 한다고 주장하여, 유씨는 여이간의 주청에 따라 이씨의 시신에 황후의 옷을 입히고 수은으로 봉하여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준다.
1033년 장헌명숙황후가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친정을 시작했는데, 인종의 숙부인 연왕 조원엄이 인종을 찾아와, 인종의 생모가 장헌명숙황후 유씨가 아닌 진종의 후궁 이씨였고, 이씨가 비명에 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종은 숙부의 말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고, 진상을 확인하고자 이씨의 관을 열었는데, 이씨의 시신은 황후의 옷이 입혀졌고 수은으로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다. 인종은 장헌명숙황후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유씨의 대우를 더욱 두텁게 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생모인 이씨를 인종의 친모 자격으로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하고 경령궁(景靈宮)에 신어전(神御殿)을 세워, 광효전(廣孝殿)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황후의 아우인 이용화를 창신군(彰信軍) 절도사, 검교시중(檢校侍中)으로 임명하고, 이용화의 집안을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인종의 장녀인 복강공주를 이용화의 아들인 이위(李瑋)에게 시집보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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