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원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진원은 1900년생이며 평안북도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그 외의 신원에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15살 때가 돼서야 보통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가난했다고 하며,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적극 가담했다. 1920년 3월 학교를 졸업하고 면서기(面書記)로 일하고 있을 때 압록강 이북에서 군자금 모집차 들어온 독립군을 따라서 간도에 들어가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가입했다. 이후 1921년 5월 최재경(崔在京), 박일권(朴日權)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고, 1922년 6월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800원을 모금하였다. 또한 학업을 위해 광둥의 광둥대학에 입학하려 했지만 반영운동이 격화되고 분규가 심하자 포기했다.
1925년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세한 그는 1926년 1월 1일 최병선·고준택(高俊澤)·강창제와 함께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했다. 이후 최병선, 김광선(金光善)[1] 등과 함께 상해 일본총영사관(日本總領事館)의 통역으로 위장한 그는 독립운동가를 밀고하던 박제건(朴濟乾)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1926년 2월 1일, 장진원은 2명의 동지와 함께 야채시장에서 박제건을 암살하고 곳을 순시하던 중국 순경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와 그를 체포하려 하자 급히 몸을 피하면서 권총을 발사하여 사살한 후 잠시 몸을 숨기면서 다음 거사로 상해의 일본영사관을 폭파하기로 계획했다.
1926년 4월 8일 그와 동지들은 자동차를 타고 상해 공동조계 황포탄로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지만 벽돌담과 유리창만 파손되었을 뿐 완전 파괴에는 실패했다. 또한 그와 최병선, 김광선 등은 1926년 순종 황제의 인산날을 맞이해 국내로 잡입해서 행사장에 모일 국내외의 고관들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1926년 6월 1일 여객선 순천호에 승선하여 한국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 영국 관헌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 영사관에 인도된 그는 나가사키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열린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에 그는 공소했고, 최종적으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그곳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망년도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진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