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포(후한)

 



'''張酺
장포
'''
'''최종직위'''
사도(司徒)
'''성씨'''
(張)
''''''
(酺)
''''''
맹후(孟侯)
'''조부'''
장충(張充)
'''생몰 기간'''
음력:?년 ~ 104년 8월 22일
양력:?년 ~ 104년 9월 28일
'''고향'''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세양현(細陽縣)
'''재임기간'''
'''태위 재임기간'''
93년 11월 6일 ~ 100년 9월 9일
'''사도 재임기간'''
104년 7월 13일 ~ 104년 8월 22일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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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명신. 자는 맹후(孟侯), 여남군 세양현 출신, 조상은 초한쟁패기 때 활약했던 장이(張耳)의 후손이다.

2. 생애


어렸을적 조부인 장충으로 부터 상서(尙書)를 배웠고, 저명한 유학자였던 태상(太常)을 지낸 환영(桓榮)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66년 사성소후(四姓小侯)[1]에게 상서를 가르쳤다. 후에 낭으로 임명되어 입궁해 황태자 유달(劉炟)을 가르쳤다.
75년 한장제가 즉위하자 시중(侍中) 겸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몇개월 후에는 동군태수(東郡太守)가 되었다. 이때 장포는 한장제와 친하였으면서도 장제의 뜻을 알지 못하여 불쾌해하면서 거부하였지만, 장제는 30만전을 주면서 억지로 동군태수로 부임시켰다.
장포는 선비이면서도 강직하여 부임하고 바로 의용병을 뽑았고, 도적들과 싸웠는데 관리 중 하나가 도적을 죽였는데 장포는 그 관리를 조사하여 처벌하게 하였는데, 그러면서 "현령과 현장조차 장물을 받으면서도 죽을 죄를 치르지 않았는데 어찌 굶주린 도적들을 극형으로 처벌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85년 한장제가 순수(巡狩)하면서 동군에 들렸는데 한장제는 장포에게 상서를 말하도록 하였다. 이에 상서령인 왕유(王鮪)는 장포와 함께 논박하였는데 이에 장제가 크게 기뻐해 특별한 상을 내렸다.
89년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새롭게 부임되자 동군(東郡)을 떠나게 되는데 장포가 떠나는 것을 보는 동군의 백성들은 길을 가득 메웠다.
얼마안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었다.
92년 두헌이 자살하자 장포는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로 인해 두씨들 중에서 유일하게 두괴만은 죽지 않았다.
93년 태복(太仆)으로 임명된다. 11월 6일 윤목의 뒤를 이어 태위가 된다.
장포는 여러차례 병을 이유로 사퇴를 요청하였고, 위군태수(魏郡太守) 서방(徐防)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한화제는 여러번 거절하였고, 중황문(中黃門)을 보내어 병세를 묻고 진미를 하사하게 한다. 덤으로 30만전도 준다.
100년 9월 9일 궁중에서 크게 소리를 지른 이유로 탄핵되었다.
103년 광록훈(光祿勳)에 임명되었다.
104년 7월 13일 사도가 되었지만, 한달후 사망하였고, 유언대로 검소한 장례가 치뤄졌다.

[1] 명제시기 외척인 번(樊)씨, 곽(郭)씨, 음(陰)씨, 마(馬)씨가문의 자제를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