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수기는 1896년 4월 24일 경상북도 경주군 내서면 수룡동(현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수룡마을)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영남 유림의 원로인 김창숙과 연락하여 구국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후 1922년 8월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 고문인 김창숙을 찾아갔으며, 당시 김창숙과 함께 만주·내몽골 지방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이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서, 그는 1923년 2월 손후익과 함께 비밀리에 귀국했다.
그는 1923년 4월부터 경상북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창숙에게 보냈으며, 1925년 7월 비밀리에 경성부에 온 김창숙을 다시 만나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집계획을 지시받고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 음력 8월, 대구에서 김화식(金華植)에게 김창숙의 취지문을 제시하고 협력을 구하는 한편, 서울 남산공원에서 손후익(孫厚翼)·이재락(李在洛)·이동흠(李棟欽)·김동진(金東鎭) 등과 함께 자금 마련을 위해 수차례 접촉하였으며, 조속한 시일 내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담하기로 하여 정수기 자신은 안동·영주·봉화 지방을 맡고 활동하였고, 김창숙은 모금된 군자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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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7년 6월 18일 김창숙이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으며, 그는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그해 8월에 입국하여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 1928년 8월 6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1월 28일 대구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36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