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후익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손후익은 1888년 11월 25일 경상도 안강현 오금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 금호마을)에서 부친 손진수(孫晉洙)와 모친 여강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0대 무렵에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입압리로 이주했다. 그는 5살 때 조부 손최수(孫最秀)에게 한문을 수학했으며, 이후로 이병호(李炳鎬)에게 <효경(孝經)>을 배웠고, 이만규(李晩煃)에게 시경을 배웠다. 1914년엔 장석영의 문인이 되어 운도재(雲陶齋)에서 수학했으며, 곽종석에게도 자주 찾아가서 한문 작법에 대해 교육받았다.
1905년 영남 유림의 을사조약 폐기 상소에 연명으로 참가했으며, 1917년 작은 아버지 손진형(孫晉衡)이 독립운동을 한 죄로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자 뒷바라지를 했다. 1919년 이중업, 곽종석, 장석영 등이 김창숙을 유림 대표로 선발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해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게 하는 한편, 손진형을 국민대표로 선정해 상하이로 보냈다. 이때 손후익은 작은 아버지를 벽진까지 따라가서 전송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끝내 작은 아버지의 일을 실토하지 않았다.
1920년 유교진흥회(儒敎振興會)로부터 가입해달라는 제의를 받자 일제에 협조하는 단체로 규정하고 거부했으며, 1922년 김창숙이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구할 때 협조를 약속하고 울산, 양산, 동래 방면의 군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그러나 모금한 금액이 예정했던 20만원에 미치지 못하자, 그는 1926년 3월 17일 동래군 범어사(梵魚寺)에서 김창숙·정수기·이재락(李在洛) 등과 회합을 갖고 군자금 헌납에 불응하는 자와 소액 헌납자를 암살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의열단과 교섭하여 폭탄 및 권총을 입수하기로 하고, 김창숙은 그해 4월 11일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의 김원봉, 유우근(柳友根), 한봉근과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했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부친 손진수와 함께 체포되었고,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곽종석 문집과 장석영 문집을 잇달아 간행했으며, 입암리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 1953년 3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후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