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정씨

 



[image]}}} '''{{{#000 慶州 鄭氏 (月城 鄭氏)
경주 정씨 (월성 정씨)'''
}}}
<colbgcolor=#b9062f> '''관향'''
경상북도 경주시
'''비조'''
지백호(智伯虎)
'''시조'''
정진후(鄭珍厚)
'''집성촌'''
전라남도 순천시, 고흥군, 신안군, 장성군
전라북도 임실군
경상북도 청송군, 김천시
경상남도 남해군, 통영시
경기도 연천군
충청남도 금산군
함경남도 영흥군
'''인구'''
350,587명(2015년)
1. 개요
2. 시조
3. 유래
4. 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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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신라 6성의 하나. 신라 6성은 경주 이씨, 경주 최씨, 경주 정씨, 경주 손씨, 배씨[1], 경주 설씨[2]를 말한다

2. 시조


<경주정씨대관>에 보면 "경주정씨는 우리나라 성씨의 대종으로서 가장 오랜 유래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신라를 구성한 진한국(辰韓國) 사로(斯盧) 6촌장의 하나인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뒤에 本彼部가 됨) 촌장인 지백호공(智伯虎公; 신라 좌명공신)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고 하였고, 또 "지백호공이 서기전 117년(한무제/漢 武帝 원수/元狩 6년) 경주 화산(花山)에 강림하여 부족국가이던 사로의 여섯 고을 중 자산진지촌을 다스렸으며, 그 뒤 서기전 69년 3월 초하루 다른 다섯 촌장과 함께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임금을 세울 것을 논의 하다가 이 때 나정(蘿井) 곁에서 난생아(卵生兒;알에서 나온 아이)인 혁거세(赫居世)를 얻어 거슳한(居瑟邯 또는 居西干)으로 추대하고, 서기전57년 그를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로써 경주정씨는 기원전 117년(한나라 무제 6년)에 경주 화산에 강림하여 자산진지촌의 촌장이 되신 지백호 할아버지를 시조로 옹립하고, 그 뒤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사성(賜姓)을 받았으며, 또한 지백호 할아버지가 다른 5촌장과 함께 신라 건국의 공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주정씨대관>의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경지> 등에 나오는 '신라건국설화'와 '진신전기'(縉紳傳記)를 인용한 것이다. 이들 문헌은 고려 중기 이후에 저술되었고,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도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그 진의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이는 실제적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단군신화 처럼 하나의 설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백호 할아버지의 '강림설(降臨說;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이나 박혁거세의 '난생설(卵生說;알에서 나왔다는 설)'은 모두 그들의 탄생을 일반사람들의 '태생(胎生;태에서 나옴)'과 달리하여 신격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로써 우리는 후대 어느 씨족이 지백호를 시조로 추대하고 그 계통을 이루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 씨족이 바로 경주 정씨이다. 그런데 지백호를 시조로 모신 것은 경주정씨뿐만 아니라 영일, 동래, 온양, 하동, 진주 등 30여 성씨도 그들 씨족의 시조로 지백호를 추대하고 성을 정(鄭)으로 하였다. 그러다 그 뒤 지금의 본관을 가졌다.
이는 제일 먼저 경주정씨가 성을 가지면서 지백호 할아버지를 시조로 옹립했고, 그 뒤 영일, 동래, 온양 등으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처음에는 모두 자산진지촌(경주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 촌장인 지백호를 추대하며 살다가 지역을 옮겨 다른 곳에 살게 되면서 그곳 지역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유래


그러면 경주정씨가 '성씨(姓氏)'를 가진 것은 언제일까? 역시 <경주정씨대관>에 보면, "서기 32년(유리이사 금 9)봄에 그의 현손대(玄孫代;東沖)에 와서 사로 6촌의 촌장들과 사성(賜姓)할 때,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개칭하면서 낙랑후(樂浪侯) 봉훈(封勳)과 함께 정씨(鄭氏)로 사성(賜姓)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유리시금'은 신라 3대 유리왕(儒理王, 재위 24-34)을 말하는 것이고, '동충(東沖)'은 시조 낙랑후 지백호 할아버지의 현손이며 대장군 빈(彬)의 아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서기 32년(유리왕 9년)에 유리왕이 시조 지백호의 현손이며 대장군 빈의 아들인 동충 때에 자산진지촌을 본피부로개칭하고 시조 지백호 할아버지에게 낙랑후란 봉훈과 함께 정씨 성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성제도가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넘어가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경주정씨가 처음으로 성을 가지게된때는 신라 유리왕 9년, 서기 32년이며, 또한 이때 지백호 할아버지를 시조로 삼았다.
그 뒤 지백호 할아버지는 신라를 세운 공훈으로 서기 516년(법흥왕 3)에 문화(文和)로 시호(諡號)를 받았고, 이어 656년(태종무열왕 3)에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되었다. 그 뒤 시조를 지백호로 추대하고 성을 정씨, 본관을 경주로 한 경주정씨는 고려 때 문정공(文正公) 매포(梅圃) 정진후(鄭珍厚)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현재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4파로 분파되어 있으며, 시조를
지백호로 하고 성을 정씨로 하였으나 본관이 다른 정씨로는 영일(迎日), 동래(東萊), 온양(溫陽), 초계(草溪), 하동(河東), 진주(晉州) 등 30여 성씨로 우리나라 모든 정씨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현재 경주정씨 중앙종친회에서는 1996년 지금의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를 지백호의 강림지라 여기고 이곳에 강림기적비를 세워 경주정씨의 발원지로 정하였으며, 또한 옛 부터 전해내려오는 그곳의 산소를 지백호 시조 산소라 보고 주위에 추경사(追敬祠)를 짓고, 매년 음력 10월1일 시제를 모시고 있다.

4. 항렬



'''문헌공파'''
'''양경공파'''
'''월성위공파'''
'''평장공파'''
'''66세'''
영(永)○
○해(海)
○식植
○순淳 / ○영永
'''67세'''
○조(朝)
동(東)○
헌憲○
상相○ / 조朝○
'''68세'''
병(炳)○
○훈(薰)
○수壽
○열烈 / ○병炳
'''69세'''
○균(均)
지(址)○
용鎔○
재載○ / 균均○
'''70세'''
종(鍾)○
○호(鎬)
○준準
○흠欽 / ○용鎔
'''71세'''
○(洙)수
택(澤)○
병秉○
수洙○ / 홍洪○
'''72세'''
낙(樂)○
○(稙)직
○환煥
○식植 / ○주柱
'''73세'''
○섭(燮)
원(愿)○
○훈薰
연然○ / 훈薰○
'''74세'''
경(坰)○
○채(埰)
규奎○
○봉琫
'''75세'''
○옥(鈺)
일(鎰)○
○석錫
호鎬○ / 용鏞○
'''76세'''
순(淳)○
○구(求)
문汶○

'''77세'''
○권(權)
락(樂)○


'''78세'''
경(炅)○
○욱(煜)


'''79세'''
○기(基)
준(埈)○



[1] 현재의 경주 배씨인지는 확인 불가. 유리 이사금 때 배씨 성을 하사 받았으나 경주 배씨의 시조인 배현경은 본래 성이 없던 사람으로, 고려 태조에게서 하사 받은 성이다.[2] 현재는 순창 설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