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호(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인호'''
'''鄭寅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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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69년 10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지도면 목현리
(현재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color=#fff> '''사망'''
1945년 1월 21일
경기도 양주군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인호는 1869년 10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지도면 목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궁내부 감중관과 청도군수를 지냈지만 을사조약 체결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08년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최신초등소학(最新初等小學)> 등 여러 교과서를 저술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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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8월 19일, 그는 통감부 특허국에 특허 제133호로 말총모자 특허를 등록했다. 이는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이 특허를 등록받은 것이었다. 1909년 8월 24일에는 대한매일신보에 특허 말총모자에 관련 광고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회에도 말총 핸드팩, 말총 토수, 말총 셔츠 등 다양한 말총제품을 제작해 일본, 중국 등에 수출하며 상당한 자산을 축적했다.
정인호는 이렇게 모은 재산을 토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3월, 그는 장두철(張斗徹)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뒤 장두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자신은 서울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3월 장두철이 상해로부터 파견한 이종만(李鍾萬)과 더불어 구국단(救國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동단의 단장을 맡았다.
이들은 임시정부 의정원의 사령서(辭令書)를 인쇄하여 윤용구(尹容求)·한규설 등 백여명의 국내인사들에게 원로(元老)·상원(上院)·중의원(中議院)의 각 의원에 추천되었음을 통지하였으며 홍긍섭(洪肯燮) 등 23명에게는 피선서(被選書)를 우송하는 등 임시정부의 지원활동을 폈다. 또한 새로이 김두형(金斗衡)·서병두·이종한(李琮漢) 등 수십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납입명령서, 임시정부 재무부 인장, 임시정부의 국민의회 의원선임장 용지 등을 인쇄하여 전국의 부호에게 이를 배포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이후 독립운동 자금의 모집에 힘을 쏟았는데 1920년 4월에는 김두형·권영만#s-1이 모의 권총을 소지하고 충남 논산군의 부호 윤일병(尹一炳)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 5백원을 모금하였다. 또한 그는 김두형과 함께 동년 12월(음력) 충남 익산군의 부호 임병철(林秉喆)에게 군자금 납입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22년 5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7호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1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인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