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만
1. 영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권영만
권영만은 1877년 3월 15일 경상묵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나 영양군 입암면 병곡리에서 거주했다. 그는 일찍부터 진보향교(眞寶鄕校)를 드나들었고, 1922년경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이주했다. 그의 조부는 권수명(權秀明)으로 진보면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된 바 있다. 그리고 부친은 권인환(權寅煥)으로 역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고 알려졌다.
권영만은 18세 때 연락병으로서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의병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 행적은 1915년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우재룡, 양제안, 김한종(金漢鍾), 엄정섭, 김경태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에 박상진, 지휘장에 우재룡을 선임했다. 이어 8도에 지부를 두고 경상도에 채기중, 충청도에 김한종, 황해도에 이관구(李觀求) 등을 각도의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광복회는 국내 민족운동세력들을 규합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던 혁명단체다.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 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해 혁명기지로 삼았으며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강령이 행동지침이었다. 이는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총독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1915년 12월, 권영만은 우재룡 등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경북 경주에서 영덕·영일 방면의 우편차를 습격, 일제가 수탈한 세금 8천 7백원을 탈취하여 대한광복회의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비밀활동을 수행하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의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자, 그는 우재룡, 한훈 등과 함께 만주로 탈출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방면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해 가며 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제 고관의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귀국한 그는 1919년 음력 8~9월경 우재룡·소진형·이재환(李載煥)과 함께 안종운(安鍾雲)의 집에 모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및 독립군정서 명의의 군자금모집 요구장 19통을 작성하여 논산군의 호들에게 우송하였으며 권영만은 논산의 부호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그후 이들은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1920년 음력 2월 동지인 장응규(張應圭)를 상하이에 파견했다.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국내에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할 것을 의뢰받고 귀국하여 동년 음력 6월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교정에서 심영택을 단장으로 주비단을 결성하였다. 권영만도 이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했다.
주비단은 북로군정서의 밀명을 받고 총독부 수뇌부의 암살을 계획했다. 마침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의원단에게 보여주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 등 일본 고관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도중에 발각되고 말았고, 권영만은 폭탄과 화약을 소지한 채로 체포되었다. 1922년 4월 13일, 권영만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 7호 위반 및 강도, 공갈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종교에 입교한 권영만은 8.15 광복 후 대한광복회 재건을 위해 활동했으며, 1947년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독립당의 결성에도 참여했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4년 10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권영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77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선열묘역에 안장했다.
2. 영덕군 출신 독립운동가, 권영만
권영만은 1877년 3월 15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아버지 권상교(權相敎)와 어머니 영양 남씨 남효원(南孝源)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영해읍에서 김세영(金世榮)과 권태원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오후 1시경 3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주재소로 행진했다. 이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권영만은 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 행진해 평소 일제의 정책을 극찬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일본인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후 군중은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했다. 이때 영덕경찰서에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했다. 그러자 권영만은 군중과 함께 그들을 포위해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 세례를 가하면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 여관에 감금했다.
만세시위는 이튿날에도 지속되다가 오후 5시경 대구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해 헌병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권영만은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에 의해 체포되어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죄, 공무집행 방해죄, 건조물 손괴죄, 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4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영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