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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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호종은 1901년 2월 9일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감전리(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의 학생 대표로서3월 7일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학생 대표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동창생 김귀룡, 엄진영, 고영건 등과 함께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3월 10일 동래고보 선배로서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다니던 곽상훈이 기미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수학교사 이 환(李環)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보 학생의거의 배후 참모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그는 주동 학생들과 함께 하숙방을 전전하면서 협의한 끝에 동래읍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태극기·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5백여매의 독립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그리고 수백매의 태극기와 고종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 그는 김귀룡 등과 함께 동래군청 앞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인쇄물을 공중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꾼들까지도 점차 이에 가담하여 읍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 광경을 보고 감격한 어떤 조선인 경찰은 제복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떤 조선인 헌병보조원도 정복을 벗어 던지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나 50여명의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야만적인 발포를 하며 닥치는 대로 시위군중을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부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1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정호종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