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원
1. 개요
제석원은 제석 신앙에 기반해 불교의 신 '제석(帝釋)'을 모시는 절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부처보단 여러 부처를 모시는 사찰과는 다르게 제석천 한 신을 모신다는게 특별한 점이다. 보통 제석원, 제석사(帝釋寺)로 불린다.
2. 한국의 제석원
고대 한국은 전통적인 하늘 숭배 신앙과 불교의 천신 신앙을 결합하여 수용하였다. 신라가 바로 그 대표. 고려는 불교 국가 답게 왕실에서 주도해서 지은 사찰이 주를 이루었고 호국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조선은 성리학 국가였던 만큼 개인이 소소하게 믿는 신앙과 가내신 신앙으로서 발전하였다.
2.1. 고려
고려시대엔 내제석원, 외제석원 두 왕립 제석 사찰이 있었다. 모두 건국군주 태조 신성왕이 지었으며 각자 만월대 안에 한 곳, 만월대 밖에 한 곳이 있어 각각 내제석원(內帝釋院), 외제석원(外帝釋院)이라고 나눠서 불렀다.
내제석원은 고려시대 제석신앙의 대표적인 사당이기도 하다. 태조가 개경에 직접 지은 10개 사찰 중 하나이다. 궁궐 내에 절을 두는 것은 조선시대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친불교 국가였던 고려이니 가능한 일. 제3대 군주 정종 문명왕이 만 27살의 나이로 이 곳에서 붕어했다. 왕립 사찰 내제석원은 오랫동안 살아남았고, 폐원된 날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22일 기축 2번째기사에 따르면 내제석원은 폐사되어 창고로 쓰이도록 했다고 한다. 이를 보아 내제석원은 918년에 창건되어 온갖 다사다난한 일을 겪고 1394년에 폐원된 것으로 보인다.
외제석원은 개경 개성부에 위치했다. 외제석원은 문종의 제정으로 절일날 왕실이 기상영복도량(祈祥迎福道場)을 여는 사원으로 정해졌다.[1] 또한 외제석원엔 헌란(軒欄)이란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외제석원은 고려 멸망 후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몽골의 침입과 홍건적의 난을 견뎌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제석천(帝釋天)은 도리천의 최고 군주로 천하의 지배자이다. 고려는 왕실이 그에게 제사 지내며 국가 평안, 나라 수호, 강병(强兵)을 기원했다. 즉 고려의 제석 신앙은 호국 신앙과 연결되었는데, 고종 대까지 제석 도량, 제석천 도량, 천제석 도량, 천병신중 도량이 국왕이 주도하여 치뤄졌다.
제석천 제사는 천제(天祭) 성격도 띄었는데 원구단[2] , 초제[3] 같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거리낌 없이 해왔던 고려의 특성이 드러난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안화사에 제석상(帝釋像)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