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왕내제

 

1. 개요
2. 사례
2.1. 한국
2.1.2.1. 봉작
2.1.2.2. 다른 나라의 대우
2.1.2.3. 왕실 예법
2.1.2.4. 천손 사상
2.1.2.5. 기타
2.1.3.1. 봉작
2.1.3.2. 왕실 예법
2.1.4.1. 봉작
2.1.4.2. 왕실 예법
2.1.4.3. 묘호 사용
2.1.4.4. 대외적 표현
2.1.4.5. 기타
2.1.5.1. 연호
2.1.5.2. 왕실 예법
2.1.5.3. 봉작
2.1.6. 후삼국
2.1.7.1. 왕실 예법
2.1.7.2. 제사
2.1.7.3. 의복
2.1.7.4. 기타
2.1.8.1. 국왕
2.1.8.2. 왕실 예법
2.1.8.3. 봉작
2.1.8.4. 의복
2.1.8.5. 제사
2.1.8.6. 기타
2.2. 외국
3. 유사 사례
3.1. 한자문화권
3.2. 서양 기독교권
4. 내왕외제
5. 대중매체에서
6. 같이보기


1. 개요


外王內帝
대외적으로는 자국의 군주를 으로 칭하지만 속내는 황제로 내세우는 체제이다. 뒤집어서 '''내제외왕'''(內帝外王)이라고도 한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같은 화이론이 강한 국가의 체제를 따르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거나 황제에 준하는 칭호나 체제를 갖추는 것을 뜻한다. 이런 특이한 체제가 등장한 이유는 중국 대륙의 국가와 다투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는 군주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서이다. 본래 황제라는 호칭이 중국에서 먼저 쓰던 호칭이었고, 중국은 주나라때부터 제후국이 있었을 당시 자신만이 천자국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교역할 때엔 다른 국가들이 자신의 군주를 제후왕으로 불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이나 건국 초의 청을 제외한다면 조공 무역은 오히려 조공을 바치는 쪽이 꽤나 짭짤한 거래였다. 중국에선 제국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조공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선물로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공국은 조공을 더 하려고 하고 이를 중국이 되려 막으려 하기도 했다.[1] 중국대륙을 장악한 왕조는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을 명목상의 제후국으로 책봉하여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명분을 챙기고, 조공국은 중국을 치켜세워주면서 중국 왕조가 내리는 막대한 하사품으로 실리를 챙기는 미묘한 계약관계였다. [2]
사실 외왕내제라는 게 어떤 확고한 시스템 같은 건 아니고, 우리나라가 중국 못지 않다는 자존심을 내세운 것이다. 대표적으로 당나라 이전의 이민족 국가들이 그러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여러 이민족 왕조들은 군호(君號)가 '황제'였다가 '천왕(天王)'이었다가 '왕'이었다가 했고, 황제가 아니라 왕이라면서도 연호를 제정하고 황제식 용어를 사용하는 등 뒤죽박죽이었다. 한국의 경우 발해가 자국의 임금을 왕(王)이라고 칭하면서도 자국만의 연호를 사용하고 신하가 왕을 부를 때 '황상(皇上)'이라는 황제에게만 쓰는 존칭을 사용했는데 외왕내제 체제를 고수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북방 유목민 국가의 경우와 같이 유교식 예법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고구려 등 삼국시대 한국문명권의 나라에서 칭한 걸로 여겨지는 왕은 본래의 뜻[3]대로, 중국 주나라때의 용례와 마찬가지로 "천자"를 의미했던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왕이라는 칭호외에 태왕 등 한국말로 '''임금'''을 뜻하는 한자어가 여러 가지로 중복되어 사용되고, 또한 연호를 같이 사용했기 때문이다.[4]
제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이 제국에서 쓰는 체제를 갖다 쓴다는 사실을 중국이 알고 있는 경우도 많긴 했는데 대개는 못 본 체를 했다. 어쨌건 우방국인데 이런 쓸 데 없는 명분 문제 하나로 잃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리도 멀어서 태클 걸기도 뭣하고…실제로 문제가 되어 외왕내제를 폐지한 경우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사실상 속국이 되었던 고려 정도이다.
사실 외왕내제의 가장 큰 의의는 당시 강대국이던 중국 중심의 질서에 편입하면서도, 다른 세계관을 가진 나름대로의 자주의식을 지켜나가서, 중국에 조공을 바치긴 했지만 사신을 보낸게 아주 뜸했던 일본[5]과 근대에 와서 독립한 몽골[6]을 제외한다면, 현대에 와서 존재하는 독립국은 한국베트남 뿐이라는 것이다. 청 이전까지 중화천하를 위협하며 동등한 위치에서 칭제건원을 하며 황제국의 지위를 누렸던 여러 국가들과 가한국들 그리고 송나라같은 한족 국가들도 지금은 전부 만주족에 휩쓸려 중국에 편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 사례



2.1. 한국



2.1.1. 고조선


삼국지 위략에 따르면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연나라가 왕을 자칭하자 조선후도 왕을 자칭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진시황이 황제라는 단어를 만들기 전이었으므로 황제라는 단어가 없었다. 은주역성혁명부터 춘추전국시대 전반까지는 주나라 만이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제후들은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사용했다. 즉 당시 고조선은 스스로를 천자의 국가로 칭한 것이다.
단군조선 이후의 위만조선에서는 국왕의 후계자를 황제의 후계자를 칭하는 용어인 태자라고 불렀고[7] "비왕(裨王)"이라는 제후왕 혹은 왕작(王爵)이 존재했다.

2.1.2. 고구려


중국 측의 기록을 제외하고 봐도 내부적으로 중국의 연호를 빌려쓰거나 사대한 흔적이 어느정도 남아있는 다른 시대와 달리 고구려는 철저하게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겼고 외부적으로도 대국임을 자처했으며 도량형, 연호 등 여러 면에서 그러한 흔적이 남아있다. 사실 고구려는 어엿한 제국으로 분류해도 무방한 국가로 고구려사 관련 주요 학자들이 고구려를 제국으로 보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도 인용한 북위의 사서 위서는 자국 중심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 고구려인이 글을 적은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고구려는 외부적으로도 "천제의 아들"(天帝之子)라고 쓰여있듯이 천자를 칭하였고 독자적인 연호를 썼으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왕(太王)' 같은 높은 칭호와 "영락(永樂)" 같은 연호를 쓰고 신하를 왕이나 제후로 봉하는 등 황제국의 모습을 표방하였다. 건국 초에는 군주호로 부족장을 통칭하는 몇 가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세한 점은 군주의 칭호 문서로.
단, 중국과의 교류에서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왕조들은 자국 외부의 다른 국가들을 동일한 천자국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8] 때문에 외왕내제적인 면모도 보이고 있는데, 실제 외교관계에서는 거의 대등한, 최소한 별개의 권역을 관장하는 패권국 취급을 받았다.

2.1.2.1. 봉작

초대 임금 동명성왕은 비류국의 왕 송양을 '다물국 왕'으로 봉했고,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송씨(松氏)이니, 다물국(多勿國) 왕 송양(松讓)의 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제3대 임금 대무신왕부여를 공략해 임금 대소왕을 죽이고 그의 동생에게 '낙(絡)'씨 성을 주어 왕으로 봉하였다.

(대소(帶素)의 종제(從弟)가) 고구려에 투항(投降)하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두었으며,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다고 하여 낙씨(絡氏)란 성(姓)을 내렸다.

ㅡ동국통감 삼국기 대무신왕 5년 가을 7월

제20대 임금 장수왕중원고구려비에서 태자 '공'과 함께 신라마립간[9]에게 옷을 내려주고 신하로 봉해 고구려의 일부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장수왕은 삼국사기에서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의 왕을 '노객(奴客)'으로 삼아 신하로 두고 역시 고구려의 일부로 삼았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5세기에도 덕흥리 고분에서 후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7세기 고성문 묘지명에서도 가문의 중시조가 모용선비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왕에 책봉한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장수왕이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을 '용성왕 풍군' 으로 낮춰 부른 용례가 확인된다.[10]

26년(서기 438) 봄 3월, 처음 연나라왕 풍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임금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용성왕 풍군(馮君)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풍홍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꾸짖었다.

二十六年 春三月 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十八 高句麗本紀 第六) 장수왕(長壽王)


이후 풍홍은 유송으로 도망치려 했고, 그것을 눈치챈 장수왕이 군사를 보내 죽여버린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작성된 신찬성씨록은 고구려에 제후왕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 고려국 원라군 저왕(元羅郡 杵王)의 9세손 연노왕(延孥王)

  • 고려국 안류왕(安劉王)

  • 고려국 능기왕(能祁王)

  • 고려 안악상왕(安岳上王)

  • 고려국 장왕 주(長王 周[11])

  • 고려국 구사기왕(久斯祁王)

  • 고려국주 추모왕의 20세손 여안기왕(汝安祁王)

  • 고려국 복귀왕 일사(福貴王 溢士[12])

  • 고려 대방국주 지한법사(高麗 帶方國主 氏韓法史[13])

  • 고려국 보륜왕(寶輪王)

  • 고려국 수모기왕(須牟祁王)

등이 신찬성씨록에 적혀져 있는데, 고구려의 제후국이나 왕족의 이름이 보인다.


2.1.2.2. 다른 나라의 대우

동국통감과 삼국사기에선 신라가 고구려를 '대국(大國)'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다.[14]

...박제상이 말하기를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大國)로서 임금 또한 어질어서”...(이하 생략)

-동국통감 삼국기 눌지왕 2년 가을

. .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한 뱀과 돼지처럼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병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 .

. .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軼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 .

- 삼국사기 신라본기


2.1.2.3. 왕실 예법

임금의 정처를 '''후(后)'''라 불렀고 어머니를 '''태후(太后)'''라고 불렀다.[15] 그 대표적인 예로 동천왕의 사례가 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천왕의 친모인 후녀는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고, 동천왕은 산상왕의 첫째 왕후 우씨를 '''왕태후'''로 책봉했다.
그 밖에 "성상" 등의 제국의 황실에서 사용하는 예법 용어도 사용한걸로 보인다. 일단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헌 기록에 고구려 사람들이 왕을 일컫어 '성상' 이라 칭했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대행렬도에 그려진 깃발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음을 통해 당시 고구려인들이 왕을 높여 부르며 성상이라 불렀을 것이라 여기는 추측이 존재한다.[16] 성상이란 용어는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왕을 높여 부르며 성상이라 부른 사례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본래 성상이란 용어는 제후국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칭호이다.
고구려는 또한 동맹, 수신, 교제(郊祭) 등 여러 천제[17]를 지냈는데, 천제는 황제국만 할 수 있던 것이었다.

2.1.2.4. 천손 사상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같은 고서나 광개토대왕비 같은 비석, 모두루 묘지명같은 고구려인들의 무덤에는 고구려 임금을 '황천지자(皇天之子)'나 '일월지자(日月之子)', '하백지손(河泊之孫)'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각각 하늘의 아들, 해와 달의 아들, 물의 신 하백의 손자라는 뜻으로 모두 고구려의 군주가 하늘의 화신(化神)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미칭들로 고구려가 하늘의 후손을 자처했다는 걸 알 수 있다. [18] 중국왕조의 천자라는 개념과 비교해 보자면, 중국의 천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권위를 받은 대리자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천손 사상은 말 그대로 하늘이라는 절대적 존재와 혈연적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주몽이) 강을 향해 말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

생각컨대, 옛날 시조 추모왕(始祖 鄒牟王)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으니, 출자는 북부여인데,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이요, 그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부수고 세상에 강림하셨으니, 태어나면서 성스러움이 있었다. …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부여 엄리대수를 지나치게 되었다. 왕이 나룻터에서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皇天之子)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추모왕이다....

- 광개토왕릉비 제 1면 비문 중 발췌

(생략)...하박(하백)의 손자(河泊之孫)요, 해와 달의 아들(日月之子)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나셨다. 천하사방이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결락)

모두루 묘지명에서 발췌


2.1.2.5. 기타

고구려가 나당동맹에 패한 후 당나라에 자발적으로 간 몇몇이 있는 반면, 고을덕처럼 고구려의 존재를 잊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고을덕의 묘지명을 해석해 보면 고구려의 관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를 서조(西朝)라고 부르는 문구에서 고구려의 자주성을 볼 수 있다. 당나라를 서조라고 부른 것은 당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수서 고려전에는 고국원왕이 '소열제'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은 '위서'의 내용을 오독하여 잘못 베낀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라서 외왕내제의 예로 인정하지 않는다. 소열제라는 칭호는 유명한 그 삼국지의 '한소열제' 유비를 뜻하는 것이다.

2.1.3. 백제



2.1.3.1. 봉작

중국과 조공 책봉 관계를 맺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처럼 왕족이나 공을 세운 신하들을 제후인 왕과 후로 봉하기도 했다. 우리 측 사서엔 기록된 것이 없지만 중국 24사송서, 위서, 남제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왕이나 후로 봉작받은 자들 중 (부)여씨 성[19]이 많은데, 이는 백제 왕이 왕족들을 통해 귀족을 누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 관군장군(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 정로장군(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
이상 송서 이만열전 백제조에 나오는 제후왕들이다.
  •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 >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도한왕(都漢王)
  •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 > 영삭장군(寧朔將軍) 아착왕(阿錯王)
  •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歷) >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로왕(邁盧王)
  •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 > 건위장군(建威將軍) 불사후(弗斯侯)
  • 사법명(沙法名) >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
  • 찬수류(贊首流) > 안국장군(安國將軍) 벽중왕(辟中王)
  • 해례곤(解禮昆) > 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
  • 목간나(木干那) >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
이상 남제서 만동남이열전 백제국조에 나오는 진작된 제후왕들이다.

2.1.3.2. 왕실 예법

미륵사 사리함기에는 백제 무왕이 신하들로부터 "대왕 폐하(大王 陛下)"라고 불려진 것과 국왕의 정실을 '왕후(王后)'라고 불렀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열병식 때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기록과 개로왕 등 여러 임금을 대왕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무령왕릉매지석에서는 무령왕의 죽음을 황제의 죽음을 비유하는 단어인 "붕(崩)"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 한편으론 "어라하", "건길지" 등의 백제만의 왕칭도 같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인 예군묘지명(彌軍墓誌銘)을 보면 백제 의자왕이 "참제(僭帝)[20]하였다."고 쓰여 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인 오우치 가문의 족보에는 백제 국왕을 '백제국 마한 황제 제왕(百濟國 馬韓 皇帝 濟王)'이라 부르고 있다.
백제는 또한 고구려, 신라와 비슷하게 천자국만이 할 수 있었던 천제(天祭)를 지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매년마다 오제와 시조신(동명왕)에게 제사지내고 하늘과 땅에 제사 지냈다고 한다.

2.1.4. 신라


법흥왕대부터 진덕여왕대까지 10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 7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신라는 발해 다음으로 연호를 가장 오래 쓴 한국 왕조다. 또한 고려와 같이 왕의 후계자에게 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진덕여왕 때 당나라와 나당동맹을 맺을 때 당나라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여 연호를 폐지하게 된다.
태종 무열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황제 묘호를 올렸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묘호는 시조를 태조로 추숭한 사례 외에는 태종 무열왕 밖에 없는데, 이는 태종 무열왕의 묘호가 당나라와의 외교 분쟁을 야기했기 때문이었다. 692년 당나라 중종은 신라 신문왕에게 태종 무열왕에게 올린 태종이라는 황제 묘호를 고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태종 무열왕의 덕과 업적이 크기 때문에 태종의 묘호가 합당하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했고, 당나라는 이후 더 이상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나라가 신라가 황제 묘호를 사용하지 말도록 요구한 것이 아니라 태종이라는 묘호가 당나라에서도 정관의 치로 추앙받는 당태종 이세민의 묘호와 같았기 때문에 다른 묘호로 고치라고 요구한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 신라가 못고치겠다고 하자 더이상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이 사건 때문에 무열왕의 태종 묘호는 삼국사기에 기록되게 되었다.

2.1.4.1. 봉작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안승검모잠과 손잡고 당에 대항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할때 신라에 의해 고구려왕에 봉해졌으며 신라로 도망쳤을 때에는 괴뢰국 "보덕국"을 만들어 그 나라의 왕으로 책봉하였으며, 원성왕김주원을 "명주군국"의 "명주군왕"으로 책봉하는 등 자국 휘하에 제후국을 둔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다.[21]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는 법흥왕대에 화백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귀족들을 왕이라고 불러서 신라 국왕 아래에 제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국왕 아래에는 갈문왕이라는 특수한 작위가 있었다.
탐라국, 우산국도 신라에 입조하였다.

2.1.4.2. 왕실 예법

"대왕"이나 "태왕" 같은 호칭을 사용하여 대부분 군주들이 대왕이라고 불렸고, 법흥왕진흥왕이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당시 자국만의 천하관을 지닌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하였다.
백제와 같이 왕을 폐하라고 불렀으며 임금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칭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제2대 유리 차차웅 때부터 '''짐'''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후의 왕들도 모두 짐이라는 자칭을 쓴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과 신문왕이 각각 동생과 신하에게 폐하라는 존칭을 받는다. 문무왕은 삼국유사에서 무령왕과 같이 ''붕''이란 존칭으로 죽음이 묘사된다.
삼국사기에 있는 문성왕의 유언에는 헌안왕을 '선황(先皇)의 영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의 선황(先皇)은 원성왕으로 추정된다.
갈항사석탑기(葛項寺石塔記)에는 원성왕의 어머니를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로 기록하고 있고, 원성왕 본인을 "경신태왕(敬信太王)"으로 칭하고 있다.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에는 경문왕의 왕비 문의왕후를 '문의황후'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문명왕후가 문명황후로 기록돼 있는 등 왕비를 왕후가 아니라 '황후'로 기록한 경우가 종종 보인다.[22]
월광사원랑선사비를 보면 경문왕이 재위 시절에 황제와 왕의 복합어인 황왕(皇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4.3. 묘호 사용

신라는 유교를 수입하면서 오악을 정하고 유교식 제사인 종묘를 세웠는데, 종묘의 제도는 비록 제후가 사용하는 오묘제를 썻지만 모순되게도 태조, 태종과 같은 황제의 묘호를 사용했다.[23][24]

제문에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ㆍ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25]

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이하 생략)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

이 제문에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라 태조#s-1.2가 등장한다. 이 외 흥덕왕릉비 등 금석문에서도 신라의 '태조 성한'이 등장한다. 성한왕 문서로.
신라에서 일부 왕에게 내제의 상징인 묘호를 올렸고, 실체가 모호한 태조의 존재 기록을 볼 때 태조와 태종 이외에도 기록에서 누락된 묘호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조선에서는 폐위된 왕을 제외한 모든 왕에게 묘호를 올렸지만, 원래 중국에서도 수당시대 이전까지는 업적이 많은 주요 왕에게만 묘호를 올리는 게 보통이었다. 예를 들면 전한 문서의 역대 황제 목록을 봐도 묘호가 있는 건 초대, 5대, 7대, 10대, 11대, 12대, 14대 뿐이다. 신라가 묘호를 사용했더라도 고려나 조선과 달리 일부 중요한 왕에만 묘호를 올렸을 가능성은 있다

2.1.4.4. 대외적 표현

삼국통일 이후에도 당나라와의 사대적 외교 때문에 소극적으로 바뀌지만 외왕내제 체제를 계속 유지했고, 나당전쟁 승리이후 발해일본을 자신의 번국 취급하기도 했다.
대조영을 신라의 관직인 '대아찬'으로 봉하고, 일본에 보내는 사신은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칭했다. 왕성국의 의미는 서경, 주례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서는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 측은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 버렸다.
당나라는 신라의 묘호 사용을 모르지 않아서 당 중종 때 신문왕에게 구두로 묘호를 쓰지 말라고 조칙을 내렸었지만 신문왕은 조칙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에서 신문왕은 태종 무열왕흥무대왕과 함께 삼국 통일을 이뤘으므로 그 공이 너무 커 묘호를 썼으니 당나라가 양보해달라고 전했고, 신라를 무시할 수 없던 당은 그걸 받아들인 것이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2.1.4.5. 기타

위에 적힌 것들 말고도 신라 외왕내제 체제의 증거들을 더 알고 싶다면 해당 링크로.#
후삼국시대 왕건견훤이 왕이라고 자칭했음에도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 같은 관직을 사용해 신라 왕실의 신하를 자처한 것은 이러한 신라의 외왕내제 체제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2.1.5. 발해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3성 6부제를 실시했다. 한국 왕조 중 가장 큰 영토(고구려와 막상막하)를 가졌으며 당의 문화를 수용했지만 고구려의 문화 역시 보존하여 발해만의 문화를 만든 국가이다.

2.1.5.1. 연호

시기가 명확히 확인되는 연호 사용례가 가장 많이 발견된다.[26] 대외적으로는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건국 초기부터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했다. 제2대 임금 무왕부터 제11대 왕 대이진이 사용한 연호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초대 임금 고왕(高王) 대조영의 연호는 '천통(天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사에는 없고, 태씨 족보에만 남아있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2.1.5.2. 왕실 예법

정혜공주 묘비와 정효공주 묘비에서 당시 국왕이었던 문왕을 '황상(皇上)'이라고 칭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신하들과 황족들이 황제를 부를 때 쓰던 용어이다.
2005년에 중국 길림성에서 발견된 유적에서는 발해 국왕의 정실아내가 황후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3대 임금 문왕의 정처 '효의황후(孝懿皇后)', 제9대 임금 간왕의 정처 '순목황후(順穆皇后)'이다.
발해의 부흥국들이 부흥 운동 시 한결 같이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 칭한 것을 보아 발해의 국왕은 내부적으로 '성왕', '가독부(可毒夫)', '기하(基下)'[27] 외에' 황제 폐하'라고도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28]

2.1.5.3. 봉작

대이진 임금이 일본에 보낸 "함화[29]11년중대성첩사본"에서는 '''문리현의개국남(聞理縣擬開國男) 하수겸(賀守謙)''', '''안풍현개국공(安豊縣開國公) 대건황(大虔晃)'''이라는 이름과 작위가 발견되어 백제와 고려처럼 오등작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함화 4년명 불상"에는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이 기록돼있는 것으로 보아 발해왕이 황제처럼 '허왕'이라는 제후왕을 봉했음을 알 수 있다.

2.1.6. 후삼국


  • 태봉 - 임금이 황제처럼 연호를 사용했다.
  • 후백제 - 국왕연호를 사용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자료에는 기록이 없고 전북 남원 실상사 인근의 조계암 터에 있는 편운 화상 부도에 '정개(正開)'라는 연호가 적혀 있다. 당시 그 어떤 나라도 이 연호를 쓰지 않았기에 의 연호라는 것이 확실하다.

2.1.7. 고려


한국 역사상 외왕내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왕조이다. '''해동천자'''를 자처했다. 고려사 악지 풍입송조에서 그 예가 나오는데, 풍입송은 원래 송나라의 노래인데 고려가 수입해서 가락은 바꾸지 않되 가사는 고려인이 개사한 노래이다.[30]

해동의 천자(海東天子)께선

당금의 제불(當今帝佛)로

하늘을 보좌하여 조화를 펼치러 오셨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은혜의 깊음은

고금(古今)을 살펴봐도 드물다.

외국(外國)이 허리 숙여 귀의(歸依)하니

사경(四境)이 안녕하고 깨끗해져 창과 깃발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성덕(盛德)이 요와 탕 임금도 견주기 어려우시네.

그리하여 즐겁고 태평한 시대를 만나

이곳은 악기소리가 들리고 솥에서 물이 끓는다.

겸하여 음악이 가득하고

집집마다 기쁘게 비느라고

옥 향을 뽑아 향을 피우네.

오로지 우리 임금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비니

산악(山嶽)과 천제(天際)와 같길 바라네.

사해(四海)가 승평(昇平)[31]

하고 덕을 지니셨으니

모두 요 임금 때보다 낫다.

변정(邊庭)[32]

엔 아무 일도 없으니

장군은 보검을 다시 휘두르지 않네.

남만북적(南蠻北狄)이 스스로 내조(來朝)하여

백보(百寶)를 우리 천지(天墀)[33]

에 바치네.

금계(金階)와 옥전(玉殿)에서 만세(萬歲)를 외치니

우리 주(主)께서 오래 보위(寶位)에 계시길 바란다.

이러한 태평시절(太平時節)을 만나

음악과 노래 소리가 아름답다.

주(主)께선 거룩(聖)하고 신(臣)은 현명(賢)하니

강이 맑아지고 바다는 잔치를 연다.

이원(梨園)의 제자가

백옥서(白玉簫)로 아황(我皇) 앞에서 노랠 부른다.

신선의 음악이 모두 음률에 맞으니

군신(君臣)이 같이 태평정(太平筵)에서 취하니

제의(帝意)[34]

가 기쁘니

오늘은 전보를 재촉하여 전하지 말라.

문무관료(文武官寮)들이 절하며 축하 드리고

모두 황령(皇齡)을 축하한다.

하늘(天)께서 옥련(玉輦)을 타고 돌아가시면

금궐(金闕)과 벽각(碧閣)에 상서로운 기운이 돈다.

수천 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줄을 맟춰 기다리니

음악은 맑고 밝아 모두 신선과 같다.

환궁악사(還宮樂詞)[35]

를 다투어 노래하여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알려 주네.

이 노래는 고려국왕을 과장되게 찬양하고 있으며 고려의 황제국 체제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2.1.7.1. 왕실 예법

기본적으로 신하의 국왕에 대한 정식 호칭은 "성상 폐하(聖上陛下)"였다. 성상이라는 표현은 본래라면 제후국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는 호칭이다.또한 왕자를 태자라고 불렀다.이는 황제의 아들이 쓰는 표현이다.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에선 태조의 죽음을 "천붕(天崩)"으로 표현하고 있고 광종을 "우리 황제 폐하(我皇帝陛下)"라고 서술했다.[36] 숙종의 딸인 복령궁주의 묘지명에는 궁주를 "천자지녀(天子之女)"라고 서술하고 그녀의 고향 개성을 "제향(帝鄕)"으로 표현했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에선 광종의 등극을 "입황극(立皇極)"이라 표현 했고 현종의 명령은 "조(詔)", 자칭을 짐(朕)이라 했다. 현종의 별칭을 "만승(萬乘)"이라 했고 의지는 "천심(天心)", 은혜를 "제택(帝澤)"이라 했다.
왕을 종(宗)이라 칭했으며 폐하(陛下), 태후(太后), 태자(太子), 절일(節日) 등의 황실 예법을 사용했다. 또한 고려국왕의 절일에 요, 금에서 생신사를 파견하여 고려국왕의 생일을 축해해주었다. 이는 요나 금이라는 국가가 황제의 생일을 뜻하는 절일을 고려가 사용하는 것을 묵인했다는 뜻이다.
또한 사신의 의례로 천자국의 사신이 북쪽에 서고 제후국이 남쪽에 서는것이 의례다. 한편 양국이 대등한 입장이라면 사신이 손님의 위치인 동쪽에, 해당 국가의 왕은 서쪽에 서는 것이 의례다. 고려같은 경우 요, 금의 사신은 북쪽에 섰지만, 고려 국왕은 제후국의 신하 입장에서 남쪽에 서는 것이 아닌 주인입장에서 손님을 대하는 서쪽에 선다.
고려시대 비석문과 사료에는 "황상", "황후" 등의 호칭이 매우 많이 나온다. 조선 성종 시절에 편찬된 동문선의 고려 시대 작품 속에서도 "황상 폐하", "왕태자 전하", "황자(皇子)", "천자(天子)" "영공 전하" [37], "영공 저하" [38], "영공 각하" [39] 등의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국왕은 신하에게 조칙(詔勅)[40]이나 제(制)[41]를 내렸고, 신하들은 왕에게 표문(表文)[42]을 올리고, 왕태자에게 전문(箋文)[43]을 올렸다.
고려사에 따르면 인종은 재위 16년 2월 때 자신에게 "신성제왕"이라 칭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는데, 그 말은 고려의 임금은 그전까지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 불러왔다는 이야기이다.
고려는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 '황기(皇畿)', '제도(帝都)', '제향(帝鄕)' 이라고 불렀다. 고려인의 묘지명에서도 그 사례가 나온다.
고려 인종 시책에서 개경을 '제향(帝鄕)' 이라고 기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왕족이자 현종의 아버지인 왕욱은 자신이 지은 시에 '''황기(皇畿)'''[44], '''제성(帝城)'''[45]과 같은 단어를 집어 넣었다.
궁성인 만월대 내에 있는 만월대 내 별궁들에 고려 이전 한반도 국가들의 이름인 계림, 낙랑, 조선, 금관 등의 이름을 붙여 고려 국왕이 이들 국가들을 거느린 황제임을 뜻했다.
황제국의 제도인 봉작제를 시행했고[46] [47] [48] [49] 궁궐의 대문을 5개로 만든 것도 황제국의 예법이다.
대신 고려는 임금이 죽은 뒤 왕에게 올리는 시호에는 '황제(皇帝)'가 아니라 '대왕(大王)'이라고 했다.
현재 남아있는 태조 왕건의 초상화들을 고려 황제국 체제의 증거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초상화들은 고려 당대가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외왕내제의 모습은 원 간섭기 이후 고려원나라의 심각한 간섭을 받게됨에 따라 묘호 사용 금지와 충(忠)자돌림의 사용, 기타 왕실용어의 격하에 따라 고려중기 이후 부터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아래의 내용은 원 간섭기 당시 원나라고려외왕내제 마저도 완전히 '''금지'''한다고 통보한 글이다.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甲申 達魯花赤詰之曰, “稱宣旨·稱朕·稱赦, 何僭也?” 王使僉議中贊金方慶·左承宣朴恒, 解之曰, “非敢僭也, 但循祖宗相傳之舊耳, 敢不改焉.” 於是, 改宣旨曰王旨, 朕曰孤, 赦曰宥, 奏曰呈.

갑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해명하기를, “감히 참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옛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히 고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로, 짐을 고(孤)로, 사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쳤다.'''

고려사 권제28 충렬왕(忠烈王) 2년(1276년) 3월 19일(음) 갑신(甲申)년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또한 원은 고려에 대하여 묘호 사용도 완전히 금지하고 반원개혁을 단행한 공민왕 이전까지 계속 '''충(忠)'''자돌림만을 시호로 내려주기도 하였다.

원이 왕에게 시호를 내려주다

忠宣王二年, 元賜謚忠烈, 恭愍王六年, 加景孝.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원(元)이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는 경효(景孝)를 덧붙였다.

고려사 권제32 충렬왕(忠烈王) 34년(1308년) 7월 13일(음) 기사(己巳)년 원이 왕에게 시호를 내려주다

이탓에 고려는 충렬왕 이후 공양왕때 나라가 완전히 망할때까지 약 120여 년 동안 외왕내제 천자국으로서의 핵심이었던 묘호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2.1.7.2. 제사

종묘엔 두 가지 제도가 있는데 천자의 칠묘제, 제후의 오묘제가 있고 묘호는 천자의 종묘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고려 성종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오묘제를 택했지만 종묘에 안치된 임금들에게 묘호를 올렸고, 이후 의종 때 칠묘제로 바꾸면서 완전한 천자의 종묘를 세운다.
고려는 성종 때 유교의 진흥을 위해 왕실에서 유교적 제사를 장려했는데, 이 중 황제국에서만 지내던 제사인 원구단(圜丘壇)을 설치하고, 토지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방택(方澤)을 실행하였다. 이 중 원구단은 고려국왕이 하늘의 신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50], 건국군주 태조 신성왕(太祖 神聖王)에게 제사 지내는 것으로 그 격이 아주 높은 제사다.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불교식 행사를 통해 하늘, , , 오악, 산천의 신에게 제사지냈고, 이러한 국가적 행사를 통해 국왕을 황제와 동일시 하였다.
그 뒤,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고려는 제후국의 체제를 따르기 위해 위처럼 팔관회를 고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고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려의 외왕내제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예로 고려사 예지에 보면 충렬왕이 1275년 11월 때 본궐(本闕)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열었는데 궁전 마당에 설치한 편액에 쓰인 "'''성수만년(聖壽萬年)'''"를 "경력천추(慶曆千秋)"라고 고치고 "'''만세(萬歲)'''"라 외치던 것을 "천세(千歲)"로 고쳐 외치게 하고 임금이 타는 가마가 가는 길을 황토(黃土)로 포장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또한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온 우주가 조정에 오며 천하가 태평해진다.(其一人有慶, 八表來庭, 天下太平)'''" 같은 글자를 바꿨다고 한다.

(생략)...신하들이 사사로히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51]

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하고, 유경내(宥境內)[52]를 대사천하(大赦天下)[53][54]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생략)

- '동인지문사륙' 서문 중.

1388년 여말 우왕 치세에 만들어진 서적 동인지문사륙엔 고려가 충렬왕 대 관제 격하를 당하기 전의 모습이 나온다.

2.1.7.3. 의복

고려 국왕은 노랑색 단령을 입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대왕이 마치 중국 왕조처럼 천하의 중심에 서 있다는 뜻을 표출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는 '''자황포(柘黃袍)'''를 제정하여 사용하였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오며, 문종 대에는 문종이 임금에 걸맞는 색깔의 의복을 묻자 신하는 지금 입는 홍색과 황색 의복 말고는 없다며 답하는 기사가 있다.

2.1.7.4. 기타

고려개창 초기인 후삼국시대 태조왕건시절에 신라왕으로 부터 대왕으로 인정받아 신라를 아래로 두었으며 다른 외왕내제 국가인 발해는 형제로 칭했다.
윤언이묘지명에는 금나라가 고려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라고 요구해오자 "본디 여진은 우리 왕조(我朝) 사람이고 그 자손이 옛부터 신복으로서 계속 조천(朝天)해 왔고 국경 근처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 왕조의 호적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냐."며 분노했다는 구절이 있다.[55] 강해진 여진을 본 고려인들이 원래 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1992년 북한의 현릉에서 발굴된 고려 태조 왕건 동상의 모자는 황제만이 착용한다는 "통천관(統天冠)"이다. 제왕운기에서는 '대금황제가 고려황제에게...'라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고려에게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한 초기에는 고려왕을 황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황제국을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초중기에는 여진 부족과 탐라에서 조공사절이 오기도 하는 등 한반도 내에서는 천자국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때 칭제건원하자는 주장은 대외적으로도 황제라 하고 연호를 정하자는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고려 초기에 이렇게 황제국 체제를 표방한 것은 단순한 자존심 이상의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과 적대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거란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표방하여 한반도 북부의 여진 부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황제를 자처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 내부적으로는 거란황제나 금황제를 국주(國主)라고 하였다. 국주란 오대십국시기에 십국의 군주가 오대왕조에 항복했을때 스스로를 낮춰 자칭했던 표현으로 고려가 북방왕조와 어떻게 바라보았고 자신들의 위치를 어디에 두었는지 엿볼수있다
이 외왕내제 체제는 중국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초중기에는 송나라-거란(-서하)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던 데다가 현종 때에는 고려가 송나라도 쩔쩔매는 거란을 처발라버린 사례가 있기에 동아시아 외교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매우 높아서, 송나라나 거란은 이를 알고도 그냥 못 본 척 하고 넘어갔다. 송 휘종, 고려 인종 때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기행문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절에 걸린 기원문에서 '황상 폐하'라는 글을 보고 고려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라곤 생각 못하고 송 휘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한 기록은 있다.
금나라는 고려와 군신관계를 맺었지만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는 존중해 주었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원 간섭기)로 참람한 칭호를 쓸 수 없다 하여 충렬왕 2년에 모든 칭호가 제후국에 걸맞게 격하되어 없어졌다. 이후 충선왕이 문종대의 제도를 복구하려했지만 이것을 빌미로 폐위당하였다. 그리고 이후 복위하였을때 제후국의 오묘제를 실시했지만 교묘하게 작은 제실 2개를 만들어 사실상 천자의 칠묘제를 하는등 구제복원을 위한 이런저런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충숙왕이후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구제복원에 관심을 둘수없었다.
이후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할 당시 외왕내제 체제를 살리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문종의 오등봉작제와 황제국식 관제 부활, 12장 면류복 제정, 신하들이 공민왕을 "주상 폐하(主上 陛下)"라고 부르는 등의 조치다. 그러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긴 했어도 필요 이상으로 원나라나 명나라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여 취소했다. 이상 위 두 단락은 고려사에 나온다.
황태자가 아닌 왕태자라던가 조서와 교서를 혼용한다던가 국왕의 1인칭을 짐과 과인을 혼용했다는 점에서 고려가 완전히 황제국 체제를 실시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의 경우 고려와 같이 황제국과 제후국의 용어를 함께 사용하지 않고 철저히 내부에서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고려는 현종대 송으로부터 황제를 칭해도 될 것을 허락 받는다던가 금나라로 부터 고려국 황제라 불리는 점, 서긍이 고려 국왕를 황제라 칭한 것은 베트남이 오랜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으며 국왕이 아닌 군왕으로 봉해지면서 거의 중국 내지로 취급받았다는 부분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고려는 북쪽의 여진과 발해유민 및 발해부흥세력, 남쪽의 탐라,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 서해도의 관리들에게 조공을 받은 것을 생각해 본다면 베트남이 시행했던 "외왕"정책이 "내제"정책에 영향을 주는것을 막기 위해 중국사신에게 절하는 것을 피한다던가, 자신이 아닌 아들을 중국의 관직인 정해절도사에 임명해 대신 대중국외교를 시행했다는 것은 외왕과 내제를 철저히 구분했던 베트남에 비해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황제와 제후체제를 혼용했던것으로 보인다.

2.1.8. 조선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외왕내제를 완전히 행하지는 않았으나 황제가 쓰는 묘호를 사용했다.

2.1.8.1. 국왕

조선에서 신하가 왕을 부르는 명칭엔 주상, 금상, 성상 군상(君上) 등이 있었는데 그 뜻이 황제를 부를 때와 그 의미가 비슷하다.
주상(主上) - 조선에서 신하들이 조선 왕에게 주상 전하라고 호칭해서 주상이란 용어를 왕한테만 사용하는 용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주상 또한 금상, 성상처럼 황제에게도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 예로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主上)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경위(傾危-형세가 위태로워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촉서 법정전

소정방이 정지절에게 말하였다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도적을 토벌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마침내 스스로 지키면서 앉아서 스스로 곤혹스럽게 지치고 있으니 만약에 도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나약하고 겁을 먹은 것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공로를 세웁니까? 또한 '''주상'''(당 고종)은 공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금 군부를 파견하여서 그 호령을 오로지할 수가 있겠으며...

자치통감 당기 16 고종 현경 원년(656)

완안광이 '남조(南朝, 송나라)에서 그자(한탁주)를 쫓아내는게 가능하겠나?'라고 물었다.왕남이 답하기를 '''주상'''(主上)의 영단(英斷)으로 어찌 어렵겠습니까?'라고 하자, 완안광이 도리어 웃었으며 비로소 강화가 성립되었고 왕남이 돌아오면서 한탁주의 수급을 금나라로 보냈다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3권

여진주(女眞主아골타)가 무리를 모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하는 말이 비로소 너희들과 기병(起兵)하니 글단(契丹/거란,계단)이 잔인함이 오래 되어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지금 주상(主上/요 천조제)이 친정하니, 어찌 하겠는가? 사람이 죽음으로써 싸우지 않는다면, 능히 당해낼 수가 없다. 만약 나의 일족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너희들은 항복하고 영접하여, 전화위복(轉禍為福)하라

요사(遼史)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 (1115년) 국역

지금 '''주상'''(主上/ 금 애종)이 채주(蔡州)에서 수위(受圍/포위를 받음)하니, 공창(鞏昌)으로 천도(遷都)를 의(擬/헤아림)하는 것이다.

금사 곽하마(郭蝦蟆) 열전 국역

왕년에 우리 주상(主上고종)께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상에 복을 입을 때에, 은혜와 의리를 작량하여 재단해서 단연코 이를 기년복으로 결정하여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예(禮)요, 그 주장은 이천(伊川)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실천은 우리 주상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니, 참으로 만세의 바꿀 수 없는 전범(典範)인 것이다

수당집 제4권 왕석천(王錫闡)과 혜사기(惠士奇)의절기설(絶朞說)을 논박함

세상에 만약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 같은 임금이 있다면 이와 같은 것들을 어찌 그냥 놓아두고 섬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상(主上)의 위(位)가 아직 바뀌지 않았으며 인민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각국 공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고, 조약을 맺은 문서가 다행히 폐하의 윤허와 참정의 인가(認可)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믿는 것은 다만 역신들이 강제로 조인한 헛조약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먼저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머리를 베어서 나라 팔아넘긴 죄를 밝히고, 외부 장관(外部長官)을 갈아 세워 일본 공관(公館)에 조회(照會)하여 거짓 맹약의 문서를 없애 버리도록 하고, 또 각국 공관에도 급히 공문을 통해 모두 회합한 다음, 일본이 강국임을 믿고 약소국을 겁박한 죄를 성명(聲名)할 것입니다.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연보(年譜)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나라 황제를 금상황제(今上皇帝)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다 21세기 일본에서도 천황을 지칭할때는 금상(今上)을 쓴다.
성상(聖上) - 집권 중인 황제나 왕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조선을 모함할 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과 왕에게 성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또 태조·세조·열조(列祖)의 성상(聖上)을 참칭(僭稱)하여 감히 천조의 칭조(稱祖)·존상(尊上)과 같이하였으니, 저들이 2백년 간 공순(恭順)한 의리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조실록 104권, 선조 31년 9월 21일 계묘 3번째 기사 해당기사

이렇게 조선에서도 황제에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고 묘호도 사용하여 황제국을 미약하게나마 표방했다.
게다가 왕의 무덤을 묘(墓)나 원(園)이 아니라 능(陵)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天子) 및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였는데 왕의 무덤을 능이라고 했다.
왕의 죽음에 훙(薨)과 붕(崩), 승하(昇遐), 빈천(賓天), 안가(晏駕)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붕(崩)과 승하(昇遐), 빈천(賓天), 안가(晏駕)는 천자의 죽음을 의미하고 제후의 죽음은 훙(薨)이라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조선은 훙을 써야 맞지만 훙이 주로 쓰이긴 하나 붕과 안가, 빈천, 승하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에서 왕의 명령서를 성지(聖旨)라고도 했는데, 성지는 황제의 명령서를 가리키는 말인데도 조선에서 성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56]

허적이 아뢰기를 ‘전후의 성지(聖旨)가 간절하신데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종실록 12권, 현종 7년 6월 21일 경오 3번째기사 해당기사

연호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연호를 썼지만, 의외로 '우리 전하 즉위 XX년', '금상전하 즉위 XX년' '상(上)[57]의 XX년' 식의 변칙 연호도 꽤 많이 보인다. 사실 이건 중국에서 한 무제 때 처음 연호를 제정하기 전에는 천자의 재위년 수를 적어서 연도를 표기했는데 조선의 관행은 이것과 유사하다.

2.1.8.2. 왕실 예법

또한 왕비의 경우, 황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인 중궁(中宮)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시호에는 생전에 쓰던 비(妃)가 아닌, 제후국에서 쓸 수 없는 후(后)를 붙여 왕후라는 시호를 사용했다.
조선에선 왕과 왕세자의 첩을 후궁이라고 하였는데 후궁이란 원래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도록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었을 때, 청나라에서 왕비 책봉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가 제후국에서 후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청나라 사람이 주문(奏文) 가운데서 ‘후궁(後宮)’ 두 글자는 제후(諸侯)는 쓰지 못한다고 하며, 또 ‘현(玄)’ 자(字)가 있는데 그것은 휘(諱)하는 바를 범하였다고[58]

매우 꾸짖으면서 속금(贖金)의 벌(罰)까지 있었습니다."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12월 19일 신사 2번째기사 해당기사

조선에서는 왕세자에게 동궁(東宮) 춘궁(春宮), 춘저 (春邸), 이극(貳極), 원량 (元良) 저궁(儲宮), 저군(儲君), 저사(儲嗣) 저부(儲副) 저위(儲位)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중국 왕조에서도 황태자에게 동궁, 춘궁, 춘저, 이극, 원량, 저궁, 저군, 저사, 저부, 저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라'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중국에서는 황태자에게만 동궁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세자에게는 동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약로는 말하기를, ‘삼가 《주례》를 상고하건대 공(公)은 환규(桓圭) 9촌(寸)이요, 후(候)는 신규(信圭), 백(伯)은 궁규(躬圭)인데 모두 7촌이며, 자남(子男)의 곡벽·포벽은 모두 경(經)이 5촌이며 명(明)나라의 규제(圭制)는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 황태자(皇太子)에서부터 군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9촌의 규를 사용하였으나 특별히 분수(分數)의 구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26년 12월 19일 무자 1번째 기사해당기사

또 왕의 적녀를 공주로 봉하였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딸만을 공주로 봉하지, 친왕(親王)의 딸은 군주(郡主)로, 군왕(郡王)의 딸은 현주(縣主)로 봉한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이등체강의 원칙에 따라 친왕대우(황제-태자-친왕 순)인 조선국왕의 적녀는 친왕(親王)의 딸인 군주(郡主)로 봉하는 것이 맞다.
조선에선 왕의 사위에게 의빈과 부마(駙馬)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사실 부마의 칭호는 황제의 사위를 뜻하는 용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맹사성이 "부마의 명칭은 제후국에서는 쓸 것이 아니온데, 단지 전조(前朝)의 구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고치지 않은 것이오니, 의당 그 칭호는 고쳐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한다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2일 정축 3번째기사해당기사


2.1.8.3. 봉작

신하들도 생전에는 군(君)이라는 제후국의 작위를 주었지만 죽고나서 시호를 내릴 때는 일괄적으로 공(公)의 작위를 내려 봉작제도 일부 시행했다. 애초에 태조 때 오등작 중 공(公), 후(侯), 백(伯)을 썼다가 태종 때 폐지하고 군호로 바꾼 것이다.
세종때 2품이상의 고위관리를 일컫는 영공(令公)이라는 말을 재상으로 변경했는데, 의례 영공이라고 칭하였다.

2.1.8.4. 의복

왕의 곤룡포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인 오조룡(五爪龍)을 사용하였다. 당장 중국의 제후왕 곤룡포에는 사조룡을 사용하였다.
황제의 곤룡포에 칠조룡을 사용하고 왕의 곤룡포에 오조룡을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경복궁 근정전#s-3에 있는 천장의 장식만 그러한 것이고, 대한제국 황제의 황룡포를 보면 명나라의 황제와 같은 오조룡이었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 초상화나 채용신의 고종 어진의 용보를 보면 오조룡의 용보를 사용하였다 .

2.1.8.5. 제사

조선 초기엔 제후는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태조 이성계환구단의 명칭을 원단으로 고치고 명나라 몰래 천제(天祭)를 지내다가 세조 대에 이르러 다시 환구단으로 고치고 제사를 지내며 소격서를 설치해 도교식 천제도 지내다가 중종 시기에 전부 없어진다.

2.1.8.6. 기타

그리고 조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조선에 조공을 바칠 때 조선의 임금을 가리켜 황제 폐하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 초중기에 일본에서 남북조시대전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사실상의 중앙정부였던 무로마치 막부를 쌩까고 주변국을 향해 조공 무역을 하던 몇몇 다이묘들도 이렇게 하기도 했다.[59]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명분 상의 이유로 외왕내제를 하지 못하던 터라서 한동안은 주변국들이 이렇게해도 모른 체하거나, 주의를 주는 척만 했다. 어차피 실무적 측면에서는 '나는 천자요'라고만 안 했을 뿐, 할 건 다했지만.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후기에 주위의 민족을 외부로 조선을 중앙으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자 영조 때에 황제 칭호를 쓰자는 상소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60]
고종 시기에 있던 갑오개혁, 을미개혁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제후국 용어인 '전하'라는 호칭을 버리고 황제국 용어인 '폐하'도 사용하기 시작했다[61]. 다만 이 때는 아직 완전한 황제국을 표방한 건 아니라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라는 애매한 호칭을 사용했다. 이후 대한제국이 개창되면서 고종이 칭제건원하여 완전한 황제국 체제를 사용한다.

2.2. 외국



2.2.1. 일본


외부에서는 일본 국왕이라는 호칭으로 교역을 했고, 내부에서는 천황이라는 황제의 호칭이 있었다. 단, 명-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사용된 '일본 국왕'은 천황이 아니라 막부쇼군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며, 때문에 천황을 따로 왜황(倭皇)이나 위황(僞皇)[62] 등으로 호칭하였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도 역대 천황과 그들의 연호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대상은 결국 실권자인 쇼군(조선 측에선 '일본국 대군'[63] 혹은 '일본 국왕')인지라 이에 대해서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쇼군이 타도되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상황을 예견하여 "저쪽은 황제이고 우리는 왕이니 장차 어떻게 대처하려는가?"라며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고, 실제로 운요호 사건 직전에 일본은 조선에 '천황'이라는 이름으로 국서를 보내서 문제가 된 바 있다.
삼국전쟁 말기에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왕실 인사에게 '백제왕'이라는 성씨(작위나 신분이 아니라 이름 맞다. 백제왕철수, 백제왕영희 등))를 주어 일본이 '왕'이 섬기는 국가(즉 왕보다 높은 국가)로 만들기도 했다.
한편 외왕내제 비슷하게 대마도주들도 대마도 정벌 이래로 조선에 신하를 칭하여 명목상 조선의 고위 관직(예조 참의 급)을 제수 받기도 했다. 일본 막부 휘하의 다이묘이면서 조선 왕의 신하라는 투잡을 뛴 것. 에도 막부까지는 조선과의 외교를 위해 이것을 용인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로 대마도주가 조선에 칭신하는 것을 금지하여 이 관행은 사라진다.

2.2.2. 류큐


류큐는 국력의 약세 탓인지 외왕내제에 해당하는 행위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명나라가 망한 뒤 '''왕관을 명나라 황제보다 더 격이 높게 바꾸었다'''(관련 글). 본래 류큐국 중산왕(삼산시대 이래 류큐 국왕의 칭호)은 명나라의 군왕(郡王)급으로 취급돼 명나라로부터 군왕의 복식을 받아 왔다. 국왕이 머리에 쓰던 피변관(皮弁冠)에 달던 옥은 본래 명나라 군왕급인 일곱 줄이었으나 황제와 같은 열두 줄로 늘리고, 옥 자체의 개수는 명나라 황제가 쓰던 것보다 더 많이 달았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그랬듯이 제후국의 복식에 일일이 간섭을 안 했으므로 류큐에서는 그 틈에 국왕에게 슬그머니 황제보다 더한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2.2.3. 베트남


외부에서는 안남왕, 내부에서는 대월국 '''황제'''로 전형적인 외왕내제를 갖추었다.[64][65]
베트남은 외부적으로는 중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내부적으로는 완전한 황제국을 칭했다. 대월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쓰면 안되기 때문에 중국 왕조를 부를 이름을 따로 만들고, 중국과의 외교도 대월황제로 외교문서를 중국에게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아들들을 안남태수로 삼아 안남태수 명의로 외교문서를 보내는 등 철저한 외왕내제를 하였다
명나라 멸망 전까지는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황제 칭호를 쓰는 데 조심스러웠지만, 명나라 멸망 이후 청나라가 들어서자 외국인들은 이민족시하고 베트남은 중앙으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면서 대내적으로 공공연하게 쓰게 되었다.

또한, 중세 이후 베트남이란 국가 형성 과정은 '''정치적으로는 중국에서 철저한 독립을 추구하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오히려 중화 사상의 내재화'''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국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베트남은 한반도의 왕조들보다 더 철저한 중화 사상을 내세워 국내용 칭호나 문서에서는 아예 대놓고 베트남 조정을 베이징을 비롯한 명나라의 수도와 대비되는 '''남조'''라 칭했고, 참파크메르 같은 인근 나라들을 정벌하며 유교를 비롯한 베트남 식의 중화 문화(베트남이 중화이고 외부는 이민족)를 명분으로 삼았다. 과거 제도종묘사직에 지내는 제사 또한 일찍부터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자신들이 복속시킨 참파나 크메르 쪽에 대충 끼워 맞춘(...) 중국식 작위를 내리며 외왕내제식 통치를 했다.
고려시대부터 활동 범위가 한반도로 제한되고, 조선 초기 사군 육진 개척 이후 국경이 고정되었던 한반도와 달리 이쪽은 근대까지 베트남이 다른 민족을 몰아내며 남진을 계속 했으니 이들을 흡수하고 지배할 중화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할 근거와 여건이 마련되었던 셈이다.


2.2.4. 동오


손권이 초기에는 조위에 명목상 칭신하고 오왕으로 책봉되었지만, 내부적으로 자체 연호인 황무(黃武, 222년 ~ 229년)를 쓰고 태자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는 조위의 요구를 거절하며 군사적으로 대치했다. 연호를 쓰는 것은 천자만이 쓰는 것이니 외왕내제의 범주를 넓게 잡으면 이것도 외왕내제라 할 수 있겠다. 바로 아래에 적은 오월의 사례와 더불어 한족 국가들 중 외왕내제를 한 희귀 사례로 볼 수 있다. 손권은 229년 황제로 즉위하여 완전한 제국으로 이행한다.

2.2.5. 오월#s-1.1


왕을 칭하고 오대(五代)의 황제에게 칭신했지만 내부적으로 황제와 같은 묘호, 연호, 능호가 사용되었다. 황제를 칭한 건 아니지만 거의 외왕내제라고 볼 수 있다. 한족 국가들 중 외왕내제를 한 희귀한 사례로 볼 수 있다.

2.2.6. 서하


서하의 왕은 원래 , 에 의해 하국왕으로 봉해졌다. 송과 서하간의 전쟁이후 에게도 칭신하고 하국왕으로 봉해지는 대신 공물 을 받 았다.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역시 칭제건원한 상태였다.

2.2.7. 대리국


베트남과 같이 개봉에서 원정거리가 멀었던 대리국 역시 송태종때 [운남팔국도왕]으로 봉해졌고, 송휘종때는 [금자광록대부검교사공운남절도사상주국대리국왕]으로 봉해졌지만, 여전히 내부에서는 칭제건원을 계속 하고 있었다.

3. 유사 사례



3.1. 한자문화권


오호십육국 시대 천왕이라는 칭호가 애용되었으나 이건 외왕내제라 보기 어렵다. 굳이 남에게 숙이기 위해 황제 칭호 대신 천왕 칭호를 쓴 건 아니었기 때문. 자세한 건 천왕 문서를 참고할 것. 다만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천자의 격식을 사용하는 방식'은 고구려 등 주변국의 외왕내제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있겠다.
일반적인 외왕내제와는 차이가 있으나, 송나라(조송)는 국력의 약세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자국의 황제가 천하의 지존으로 군림할 수가 없었다. 북송 황제는 전연의 맹에 따라 요나라 황제와 의형제 관계를 맺었다. 남송 때는 상황이 더 심각해져 소흥화의(紹興和議)에 따라 남송 황제가 금나라 황제에게 표문(表文)[66]을 올리고 칭신(稱臣)[67]하게 되었고 금나라 황제는 남송 황제를 '''책봉'''해주게 된다. 즉 금나라는 황제가 '''제후황제'''를 책봉하는 전무후무한 관행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전한흉노에게 동생의 예를 맺은 이후 두번째로 중원의 통일왕조가 이민족 국가의 군주보다 아래의 관계가 된 사건이었다.[68]
격이 조금 낮기는 해도 춘추시대에는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자국에서는 왕호를 칭하면서 중원에서는 자, 백으로 지칭되기도 했다.[69]

3.2. 서양 기독교권


서방에서는 동로마 제국이 곧 로마 제국이었던 고로, 황제를 자칭해도 일단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앞에서는 자세를 낮추었다. 대신 동로마의 황제가 바실레우스(임페라토르) 칭호를 허락하는 등 좀 더 유연했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필요에 의해서 황제를 여러명 두는 경우가 있었다. 사두정치 시기엔 4명의 황제를 두었으며 국정효율을 위해 로마를 동서로 나누고 한쪽의 제위가 비어있을경우 반대쪽에서 황제를 임명하기도 하였으며 종종 공동 황제란 제도를 통해 황제를 2명 두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실레우스 칭호 허락은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이다. 동로마 제국은 대체로[70] 유럽 국가들에게 대접을 받아왔으며 주변국들은 제국에게 황제 칭호를 수여받기를 열망했다. 중세에도 제후들 사이에서는 로마 제국만이 유일한 제국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여기에 열등감을 느낀 서유럽 군주들이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들의 제국'이라고 깐 적도 있긴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도 동로마의 황제가 바실레우스 호칭을 허락한 다음에야 자신 있게 제국을 칭할 수 있었던 경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공국이라는 체제는 사실상 독립국이면서도 의 호칭을 쓰기 힘들어서 만들어진 국가 형태이다.
프로이센은 급이 낮아서[71], 대외적으로 König '''in''' Preußen(King '''in''' Prussia)의 호칭을 사용했으나,[72] 제국 내에서는 선제후의 호칭을 사용했고,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후 König '''von''' Preußen(King '''of''' Prussia)의 호칭을 사용했다. 사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동군연합 상태인 프로이센을 흡수 합병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명목상으로는 프로이센이 거꾸로 브란덴부르크를 흡수하고 왕국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었는데[73], 이는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원래의 프로이센이 신성로마제국 밖에 있었어서 왕을 칭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질 시기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하여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라틴어 Rex imperator in regno suo!)라는 식의 왕권신수설적 이론을 펼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되, 자기 나라에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막아낸 사례도 있다.
카스티야-레온알폰소 6세는 스페인 황제(Imperator totius Hispaniae)로 칭제했지만 당연히 스페인 밖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러시아의 경우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으로 바뀌면서 차르의 호칭을 사용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는 외국에서는 차르의 호칭을 인정받지 못하고 모스크바 대공으로 불렸던 적이 있다.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등극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고려한 외왕내제는 사라져서 유럽에서 좀 힘 센 나라의 왕이다 싶으면 너도나도 황제를 칭했다.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나폴레옹 1세프랑크 왕국 시절을 구실로 황제로 등극했고,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도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냈으며, 영국포르투갈은 각각 식민지인 인도브라질을 이용해 인도 황제, 브라질 황제라는 자리를 만들어 황제 호칭을 얻었다.
근대 불가리아 왕국 국왕은 불가리아 제국이 사용하던 '차르', 그리스 왕국 국왕은 동로마 제국이 사용하던 '바실레우스'(Βασιλεὺς) 칭호를 사용했으나, 이들 모두 영어로는 King이라 번역된다.
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던 오스만 제국술탄도 로마황제를 칭했으나 유럽에선 받아주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오스만 제국 황제를 황제 취급해주긴 했지만, 이슬람 국가이므로 로마 제국의 후계자나 서양 기독교 수호자로서의 황제로 인정한 건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중동 이슬람 문화권을 제패한 강대국의 파디샤로 인정했을 뿐이다.
청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은 서양 국가들도 억지로 청나라 황제한테 숙여야 했다. 영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시절 건륭제에게 파견된 조지 매카트니가 건륭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할 것을 강요받았다. 매카트니는 영국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여 논쟁이 났다가, 결국 건륭제 뒤에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한쪽 무릎만을 굽히고 손에 입맞춤하는 영국식 의례를 취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이게 왜 그랬냐면 청나라는 황제가 다스리는 황국이고, 영국은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이기 때문에 황국>왕국 이 법칙이 성립되어 결국 청나라>영국 이 법칙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황제의 존엄에 대한 경외심에 압도돼 결국 고두를 했다"고 정신승리를 하였고 영국은 굴욕으로 여기게 된다.[74] 결국 영국은 어거지로 중국식 조공 책봉 체제에 편입된 꼴이 되었다. 물론 아편전쟁 이후로는 그런 거 없었다.


4. 내왕외제


외왕내제와는 정반대로 국내에서는 왕이지만 대외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꼼수도 있었다. 대영제국인도 제국을 만든 뒤 영국 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게 해서 영국 국내에서는 왕이지만 영국 바깥에서는 인도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이런 영국의 꼼수에 필받은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 제국을 점령한 뒤 이탈리아 왕이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해서 역시 이탈리아 안에서는 왕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에티오피아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물론 프랑스 제국독일 제국의 경우 프랑스 황제와 독일 황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외왕내제는 있을 수 있었어도 내왕외제는 있을 수 없었다.[75]
사실 이런 내왕외제의 원조는 원래 공국이나 공작이 왕을 칭하는 방법으로 써먹은게 먼저다. 노르망디 공국은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 왕을 겸해서 프랑스 내에서는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의 봉신이지만 프랑스 바깥에서는 잉글랜드 왕을 칭할수 있었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왕을 칭할수 없었지만 브란덴부르크와 동군연합으로 맺어진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로마황제의 봉신이 아니었기 때문에[76] 프로이센 공국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시킨 후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는 황제의 봉신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었지만 제국 바깥에서는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으로 행세할 수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신성로마황제의 봉신이라 왕을 칭할수 없었던 사보이아 공국사르데냐 왕국을 할양받은 후 사보이 공작이 사르데냐 왕을 겸하여 공국 내부에서는 공작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왕을 칭할수 있었다
이런 희한한 모습을 보인 것은 로마 제국과도 연관이 있다.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제국과 뭔 수를 써서라도 연관이 있음을 밝혀야 했는데 영국이나 이탈리아는 그런 게 없었다. 이탈리아가 의외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탈리아의 왕가인 사보이 왕조는 로마와는 연관이 없었다. 로마가 발흥한 땅에서 일어난 국가란 의의는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인정을 받을리가.
물론 로마와 연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교황에게 로마의 후예인정받으면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강제로 합병하면서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교황과의 관계가 험악했기 때문에, 교황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국왕이 파문당해버렸다. 여기서 교황을 협박해서 파문을 취소시키고 대관식을 받을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다른 가톨릭 국가들의 압박을 받아 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후 무솔리니집권한 후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탈리아와 교황의 화해가 이루어졌으나, 그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데 중점을 두었기에, 국왕로마 황제로 추대하지 않는 대신 식민지인 에티오피아의 황제를 겸하게 했다.

5. 대중매체에서


창작물에서는 묵향에서 크라레스가 원래는 제국이었지만 동맹국인 코린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쪼그라들어 외부적으로는 왕국이라고 불렸으나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제국이라 자처하며 왕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썼다.

6. 같이보기


[1]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조공횟수를 두고 조선은 일년에 최소 세 번, 명은 삼년에 한 번을 주장해서 의견충돌이 심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가 유지되는 동안 조선은 온갖 명분을 내세워서 한번이라도 더 하겠다고 수선을 피웠다.[2] 송나라 때처럼 중국보다 주변 국가들이 더 강성한 경우에는 중국이 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어거지로 제후국으로 책봉하는 적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송나라가 거란에 대해서 자신을 형의 나라로 불러줄 것을 요구하되 막대한양의 답례품을 거란으로 보내야 했다. 또한 송나라는 오늘날 강족의 조상격인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에게도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지만 답례로 군주의 나라답지 않게 서하의 조공에 비해 막대한 양의 답례품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송나라의 막대한 세금은 거란과 서하로 빠져나갔다. [3] 원래는 천자를 왕이라고 했다. 제후는 공(公)이라고 했고. 진시황이 자신은 여태까지의 왕과는 차원이 다른 임금이므로 왕을 대신하여 자신을 칭할 새로운 이름을 만들라고 하기 전까진 본래 왕의 의미가 천자였다. 제(帝)는 현대 중국어의 상제(上帝, 기독교의 하나님)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 본래 신(神)을 뜻하던 말이었는데 진시황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로 황(皇)이라는 글자와 합쳐 사용하면서 의미가 변질된 것이다.[4] 도올 김용옥의 '중국일기' 서적으로.[5] 중국이 선진문물을 수입할 창구 중 하나였고 사신을 보낼때 외왕내제를 내세웠다. 에도 시대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는 국수주의의 대두로 인해 이를 치욕으로 취급했다.[6] 실상 소련이 독립을 만들어준 것과 다름없다. 북원의 몰락이후 현재의 몽골 지역은 청나라의 일부였고, 이는 청을 계승한 중화민국의 과거 명목상의 영토에도 나타난다(단 현재는 헌법 해석을 바꾸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영토에서 몽골은 제외되었다). 특히 내몽골은 청나라 시절부터 꽤 동화가 되었기에, 티베트나 위구르처럼 격렬한 분리독립운동을 벌이는 것은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아무튼 현재도 중국내에 내몽골자치구가 있고 이 곳을 비롯한 중국 내 몽골족 인구도 독립국인 몽골의 인구보다 많다.[7] 단 당시는 아직 천자의 후계자=태자, 제후의 후계자=세자라고 명확히 구분되기 전이다.[8] 그러면 강력한 군사력으로 쥐어패서라도 동일한 천자국으로 인정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역사상 중원국가를 쥐어패서 천자국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한 나라는 송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쫓아낸 금나라나 아예 천하를 통일했던 원나라와 청나라 이 외엔 없다. 무슨 말이냐면 화북에 진주하는데 성공한 요나라 정도 되는 패권국조차 실패했다는 소리다.[9] 다른 용어로는 ‘매금’이라고도 부른다.[10] 용성은 북연의 수도였다.[11] 장왕의 이름[12] 복귀왕의 이름[13] 대방국주의 이름[14] '대국(大國)'은 보통 천자국을 지칭하는 다른 말이었다.[15] 제후국 국왕의 정실은 '비(妃)'라고 불러야 한다. 제후국의 국왕의 어머니는 왕대비(王大妃).[16] 해당 카페.[17] '''天祭''',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18]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나 이색부벽루를 통해 고려에서도 고구려 임금에 대한 찬양을 엿볼 수 있다.[19] 백제의 국성은 부여씨이다.[20] 사사로이 황제라고 칭함.[21] 삼국사기, 동국통감 문서로.[22] 사실 신라의 왕비들은 대부분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드물게 왕후나 황후로 기록된 경우가 발견되긴 하지만.[23] 묘호는 천자의 종묘에서만 쓰는 것이다.[24] 종묘의 제도에 있어 고려는 황제국이 사용하는 칠묘제를 사용했고, 조선은 세종대왕 시기에 조선의 고유한 방식을 만들었고 대한 제국의 칠묘제가 섞어 들어갔다. 그게 지금 존재하는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이다.[25] 김춘추의 아버지[26] 고구려도 사용례가 많지만 사용시기가 명확히 확인된 연호가 거의 없다.[27] '폐하(陛下)'나 '전하(殿下)'처럼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 쓰던 용어로 추정한다.[28] 가독부, 기하, 성왕 등 단어들은 유득공의 '발해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29] 대이진 임금의 연호.[30] 그래서 풍입송은 당악(중국왕조의 노래)가 아닌 속악(우리 왕조의 노래)로 기록돼 있다.[31] 높히 올라가다란 뜻. 고려 만월대 궁성의 정문 이름도 승평문이다.[32] 변경과 조정.[33] 천자의 궁궐을 의미함.[34] 황제의 기분.[35] 고려국왕이 정궁으로 돌아올 때 부르는 노래.[36] 광종 대에는 노골적으로 칭제건원을 했다.[37] 공작, 후작, 백작의 작위를 받은 왕족에 대한 경칭.[38] 공작, 후작의 작위를 받은 신하에 대한 경칭.[39] 백작의 작위를 받은 신하에 대한 경칭.[40] 조서(詔書)와 같은 말. 황제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41] 황제의 명령.[42] 표(表)와 같은 말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적어서 황제에게 올리는 글.[43] 제후, 태자에게 올리던 글.[44] 제국의 수도, 이 시에선 개경을 뜻함[45] '황제가 계시는 성'이라는 의미, 이 시에선 개경을 뜻한다.[46] 다만 고려는 오등작을 수여하기는 했지만 중국의 봉작제와는 다르게 왕작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는 진시황제가 황제의 작위를 만들기 이전 대왕이 최고 작위인 , 의 작위체계와 같다. 오등작을 사여받은 왕족들을 "제왕(諸王)"이라고 부르기도 해서 사실상 왕작을 내린 것과 같지 않냐는 의견이 있지만 임하필기와 이제현의 익재난고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에서 칭한 제왕은 여러 왕씨를 의미하는 것 뿐이다[47] 임하필기 제12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국가의 제도에서 종실을 제왕(諸王)이라고 하는 것은 한(漢)나라의 여러 유씨(劉氏)나 당(唐)나라의 여러 이씨(李氏)들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서, 다만 동성(同姓)임을 말하는 것일 뿐이요 이것이 관작은 아닌 것이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32A_0150_010_1490_2007_003_XML [48] 익재난고 제9권 종실전 서(宗室傳序) 국가의 제도에 종실(宗室)을 제왕(諸王)으로 칭한 것은 마치 한(漢)의 여러 유씨(劉氏)와 당(唐)의 여러 이씨(李氏)와 같으니, 동성(同姓)을 뜻한 것이지 벼슬이 아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011B_0110_020_0020_2000_002_XML [49] 다만 문원대왕과 정간왕 같이 사후에 왕작에 수여된 사례가 있기는 했다 [50] 오방신장(五方神將), 오제(五帝)라고도 하며, 동방의 천신으로 봄을 맡은 청제(靑帝), 남방의 천신으로 여름을 맡은 적제(赤帝), 중앙의 천신으로 땅을 맡은 황제(黃帝), 서방의 천신으로 가을을 담당하는 백제(白帝), 북방의 천신으로 겨울을 맡은 흑제(黑帝)를 말한다.[51] 주문왕의 자칭.[52] 제후가 자기 경역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53] 천자가 천하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사(赦)한다고 표현한다.[54] 이 대사천하란 표현은 고려사에서 최대한 과거의 표현을 직서하고자 한 세종대왕까지도 꺼려했다. 결국 뒤의 천하를 빼버려 직서의 한계를 드러냈다.[55] 고려사에는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오직 척준경과 이자겸만이 찬성했다고 한다.[56] 실제로 고려사 충렬왕 원년 10월의 기록을 보면 원나라 황제가 내린 조서에 고려는 이제 왕위 후계자는 태자가 아니라 세자라 하고 국왕의 명령을 예전에는 성지(聖旨)라 하였으나 이제는 선지(宣旨)라 하니 관직의 명칭도 우리 조정(원나라)과 같은 것은 고쳐야 한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해 성지는 황제의 명령서만을 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당 기사[57] 임금을 뜻한다.[58] 강희제의 이름 현엽을 말한 것이다.[59] 이들은 무역 이익을 노리고 막부#s-3쇼군이나, 조정#s-4천황도 씹고선 중국천자에게도 칭신하던 자들이니, 이들에게 누가 황제국이고 하는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60] 이상 모든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문서로.[61] 고종실록 1894년 12월 17일(기미) 1번째 기사[62] 가짜 황제라는 뜻.[63]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大君(타이쿤)이 군주의 칭호로 쓰였기 때문에 쇼군이 이것을 대외 칭호로 쓰기도 하였다. 서구에도 이 칭호가 알려져서 영어 단어 tycoon의 어원이 된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대군이 왕자의 칭호이므로 일본 쇼군이 조선 왕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로 의도적으로 곡해하기도 하였다.[64] 대월 같은 大+한 글자 국호는 중국에서 황제국만 쓸 수 있었다. 고려는 외왕내제를 해도 국호를 한 글자로 줄이진 않았는데 베트남은 아예 대내적으로 한 글자 국호를 써서 완벽하게 황제국의 격식을 갖춘 것이다. 참고로 조선이 제국이 될 때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것도 大+한 글자 국호라는 황제국 형식을 완벽히 갖추려는 의도도 있었다.[65]응우옌 왕조청나라와의 교섭 끝에 현재와 같은 월남(越南)을 대외 국호로 채택하고 대내적으로는 대남(大南)이라는 국호를 썼다.[66] 제후 등 신하가 천자에게 올리는 글.[67]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함.[68] 이런 굴욕적인 대우는 금나라 기준으로 금세종 송나라 기준으로는 송효종때 개선되는데 금나라 사정이 급박해지자 송나라와 타협하여 군신관계를 숙질관계로 바꾸고 세공이라는 명칭을 세폐로 바꾸고 바치는 양도 줄였다.[69] 이는 주나라가 왕호를 사용하기 때문, 당시에는 황제 칭호는 없었고(황제는 진시황 떄에 생겨난 칭호다.) 왕이 황제의 자리나 다름없었기에 이렇게 된거다.[70] 800년 프랑크 제국의 성립과 800년대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변에서의 동로마-프랑크 전쟁, 962년 신성로마제국의 성립, 968년 신성로마제국 오토 대제의 사자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와 동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2세 간의 동로마-신성로마 간의 관계 및 호칭 설정에 대한 기싸움, 1,2,3차 십자군 내내 일어났던 제국과 서유럽 귀족, 기사들의 밀땅, 12세기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 결정적으로 1204년 4차 십자군 등 예외가 많은데? 라고 할 수 있지만, 일단은 이렇다.[71] 프로이센의 군주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선제후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겸했다. 물론, 선제후의 권위와 특권은 국왕들에 준하는 수준이었지만, 유럽 내에서의 공식적인 왕국들과 비교하기엔 급이 낮았다.[72] 위트레흐트 조약문 등을 참고할 것. 대충 해석하면 '프로이센에서의 왕'(안에서는 왕, 밖에서는 제후)[73] 기업으로 따지면 역합병이나 우회상장과 유사하다.[74] 이 고두에서 탄생한 영단어가 kowtow인데 '굽실거리다'라는 뜻.[75] 과거 중세시대에는 프랑스와 독일도 영국과 동일하게 왕이 다스렸다. 그러나 근대시대가 도래하자 프랑스와 독일은 영국보다 국력을 격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존의 왕을 황제로 격상시켜 황제가 다스리는 황국으로 등극하게 된다.[76] 사실 프로이센 공국은 신성로마황제의 봉신은 아니었지만 폴란드 왕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폴란드가 약해지자 봉신 관계를 끊고 왕국을 선포한다. 그것도 모자라 훗날 프로이센은 한때 자신의 상전이었던 폴란드를 분할해서 먹어치워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