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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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왕조의 창업 군주이자 초대 임금.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신성대왕(神聖大王), 성은 왕(王), 휘는 건(建), 자는 약천(若天). 신라 문무왕에 이어 두번째로 한반도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지도자.[10][11]
877년 송악(오늘날 개성)에서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장수로서 후백제의 해상 요충지 나주를 점령하고 나주 호족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후백제는 이후 전략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고 후고구려의 영토는 대폭 넓어졌으며 곳곳에서 왕건은 공로를 세웠다. 궁예와 호형호제를 허락받았으며 913년 37세의 나이에 2인자 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등 궁예의 총애를 받았다.
918년 궁예가 폭정으로 인심을 잃자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다. 궁예를 축출하고 제위에 올라 연호를 천수(天授), 국호를 고려(高麗)라 했으나 아직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아니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자웅을 계속 겨뤘고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시키자 직접 원정을 갔다. 공산 전투에서 명장 신숭겸을 잃고 목숨을 잃을뻔 했으나 견훤의 장남 견신검의 반란으로 쫓겨난 견훤이 귀순하고 신라에서는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대업은 모두 준비가 됐다. 936년 견훤을 데리고 후삼국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이겨 삼한을 통일한다.
신라가 경주 중심의 골품제를 유지하며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을 동화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반면 고려는 골품제를 혁파하고 이들을 결속했다.[12] 아울러 중국 대륙의 분열을 뛰어난 외교력으로 헤쳐나가 중국이 고려를 무시하지 못했으며 드디어 한반도인들이 단일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됐다.
2. 묘호 및 시호
공식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존경의 의미로 '성조(聖祖)', '열조(烈祖)'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13] 고종은 재위 41년에 몽골을 막아달라고 신령들에게 제사지낼 때 태조 왕건을 '용조(龍祖)'라 칭했다. 공민왕 재위 20년에 성균관의 학도들이 공민왕에게 송가를 바쳤는데 여기선 태조를 '황조(皇祖)'라 했다.
시호는:
-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 고려사 태조 세가 마지막 조:
- 용열인용장효대정광열원명신성대왕(勇烈仁勇章孝大定光烈元明神聖大王)
그래서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땐 태조 신성대왕(太祖 神聖大王), 줄여서 태조 신성왕(太祖 神聖王)이라 부른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은 승려 도선이 태어나기 전 태조를 '성자(聖子)'라고 부르고 '미래통합삼한지주 대원군자(未來統合三韓之主 大原君子) 족하(足下)'라 칭했다. 태조는 천자를 자처하며 연호를 '천수(天授)'[14] 라 했다. 고려시대 저서 보한집 권상에는 경순왕이 태조 왕건을 '천자(天子)'로 표현하고 있다. 태조의 자는 '약천(若天)', '하늘과 같다.'란 뜻이며 그가 태자(정윤) 왕무에게 지어준 자도 '승건(承乾)', '하늘을 잇다.'란 뜻이다. 태조가 지은 만월대의 정전 이름도 '천덕전(天德殿)', '하늘의 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발굴된 태조 청동상도 천자가 쓰는 금색[15]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다. 태조가 일리천 전투에서 조직한 부대 이름도 지천군(支天軍), 천무군(天武軍), 우천군(佑天軍), 간천군(杆天軍), 보천군(補天軍)이다.
3. 생애
3.1. 건국 이전
3.2. 집안 내력과 초기
성씨는 개성 왕씨로, 왕건의 족보에 대해서는 의종 대에 김관의가 저술한 <편년통록>에 전설들이 적혀 있다.
우선 왕건의 먼 조상은 패서 지역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추정된다. 왕건의 출신지인 송악군은 장수왕의 475년 한성 함락 사건 이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가 거의 이백 여년 영토로 경영했던, 동비홀(冬比忽), 부소갑(扶蘇岬)을 합친 군이다. 고구려가 망한 뒤로도 732년까진 신라가 당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직접 지배하는 군현으로 편재하지 못한 지역이었고, 이후엔 군현을 편성하지만 초중기 고려보다도 밀도 높은 지방 지배를 자랑하던 통일신라가 유독 황해도 일대만 그렇게 못했기에 해당 지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도 정치적 자율성과 고구려 정체성 보존에 더욱 수월한 환경'''에 있게 된다. 왕건의 외7대조 호경은 모두 고구려 영토였던 백두산에서 송악으로 내려와 '성골장군'이라 자칭하며 세를 잡았다.[16] 다만 왕건 같은 경우 그 조상이 일부러 백두산에서 내려왔다는 전승이나, 송악군을 둘러싼 황해도 일대에 유독 '백산'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았던 점, 대조영 집단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이 일시 끌려갔던 당나라 영주에 역시 이후 '백산'이란 지명이 몇군데 남게 되는 점을 미뤄봤을 때, 왕건 집안의 뿌리는 고구려가 망할 당시 대조영의 속말 말갈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가 탈주한 백산 말갈 고구려인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고구려 유민이 집단 탈주했을 당시 고구려인 정체성을 가진 속말 말갈인 및 백산 말갈인들 또한 고구려의 고토로 복귀했었으나, 백산 말갈인들은 대조영 집단과는 달리 당나라와 목숨 건 전쟁을 또 한 차례 벌이기보다는 당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그 일대에 잔류한 고구려인들과 함께 신라의 간접적 영향력 아래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고구려의 옛 수도권으로 복귀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17] 또한 이후 들어서는, 고구려 유민이 많이 참여한 평로치청번진, 즉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와도 일정 부분 무역을 통한 관계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때문에 송악군이 속해 있는 패서 지역의 호족은 거의 모두 고구려계였으며 평산(평주)[18] 호족인 박직윤[19] 은 스스로 '대모달(大毛達)'이라 칭했다.[20]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궁예에게 ''''조선'''', ''''숙신'''', 변한의 땅을 차지하려면 왕건을 중용하라는 말을 전했다.[21]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에 시간이 흘렀어도 고구려계로서의 의식은 여전했고, 이들을 통합한 일목대왕 궁예는 그들을 우대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했다.[22] 오히려 대놓고 국가 꼴이라도 갖춘 보덕국은 신라의 철저한 탄압과 그 유민의 집단화를 경계한 조치 때문에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및 원신라 지역으로 흩어져 강제사민당한 탓에 고구려 유민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에 비교하면, 이러한 특수한 정치적, 지리적 환경이 훗날의 고려 성립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때문에 오히려 신라와의 관계도 더욱 원만할 수 있었는데, 신라 같은 경우 옛 백제 지역은 밀도 높게 직접 지배하던 지역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고 후백제 같은 경우 그 시초 구성원 전원이 통일신라 체제에서 벼슬하던 자들이었기에 신라 입장에선 '''반군 중의 반군'''이라고 여길 정황이 충분했다. 하지만 패서 일대는 통일신라가 가장 강성할 때도 그다지 무리하게 직접 지배를 시도한 바 없었고 자치도 어느 정도 보장해주었던지라 신라말 혼란기 특유의 막장 지방민 착취도 정작 이들과는 영 상관 없는 얘기였고, 고려 건국 세력은 때문에 의외로 신라와 그렇게 원수질 일이 그다지 없었다.[23]
해서 왕건의 먼 조상이 옛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사서 상의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24] , 모든 정황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가리키고 있다.[25]
3.3. 호경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
왕건의 조상 중 고려사에 이름이 남은 자는 호경이다. 고려사 고려세계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외가 쪽 시조인 호경이 아들 강충을 낳고, 강충이 아들 보육을 낳고, 보육이 딸 진의를 낳고, 그 진의가 고려로 온 당숙종과 결혼해 아들 작제건을 낳았고, 그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 저민의와 혼인해 왕건의 아버지 용건을 낳았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왕건이 후삼국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른 뒤 정통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설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왕건의 탄생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세계에 도선 대사의 유명한 예언이 있어 원문 그대로를 소개하면 이렇다.
송악의 호족인 왕건의 가문은 대대로 돈을 많이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강충은 집에 천만 금을 쌓아 놓았을 정도.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왕건의 선대에 대해 고구려 유민[28] 으로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 세력가였다고 추정한다.[29]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당시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왔다.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알려주자 세조가 급히 좇아가 만나보고는 마치 진작부터 안 듯 친밀해졌다.
그리고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조사하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은 임방[26]
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그리고는 봉인한 봉투를 만들고 그 겉봉에다가,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 그 때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27]
3년 4월이었다.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물론 왕건의 조상을 포함한 패서 호족들이 완전히 순혈인 고구려 출신들로만 구성되는 건 불가능하며 다름아닌 삼국 시대 때도 그런 일은 없었고, 이들이 분명히 고구려 정체성을 가진 고구려 유민으로서 연속성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신라 치하에서 다른 신라 지역들과는 달리 패서 지역은 꽤 자치적인 분위기였고 신라도 이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 행위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어도, 여하튼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건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이들이 신라의 간접 지배 아래 있었기에 당나라나 발해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서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확보했던 것 또한 직시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망할 당시 한반도 북부 고구려인들의 중심지였던 평양이 고구려 멸망과 동시에 폐허가 되었고 그때까지도 복구되지 못했다고, 그 일대의 고구려인들이 다 없어졌을 거란 생각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억측이다. 신라가 패강진을 개척하면서 신라인들을 사민하는 정책을 폈지만 그 시기는 고구려가 망한지 50년도 더 지나는 732년 이후의 일이었고, 패강진보다 훨씬 더 크게 원신라인들의 사민이 이뤄졌던 옛 백제 지역도 결국 그 정체성을 잃지 않은 걸 보면, 패강진 개척으로 고구려성이 없어졌다곤 전혀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전 시기에 발해가 건국될 시점에서 오히려, 백산 말갈을 포함하여 당나라에 끌려간 옛 고구려인들의 탈주가 보다 규모가 컸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이들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에, 왕륭-왕건의 시기에 패서 호족들이 신라의 관직들을 받아오거나 자칭했고, 이름 작명도 고구려보다 신라식에 가까웠다는 건 사실이다. 이는 독자적이고 강력한 중앙 조직이 없었기에 통치를 위해선 신라 중앙 정부의 권위가 필요했다는 증거기에, 신라의 큰 영향력을 아주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신라의 영향력이 당과 발해의 영향력을 차단하면서, 이들의 고구려 정체성과 독자성을 일정부분 지켜내는 방패기도 했음'''은 인정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 있었던 왕건의 아버지는 송악 지방의 대호족이었던 왕륭이었고, 나중에 후고구려의 궁예 왕이 초창기의 라이벌이었던 양길에 대항해 세력을 키우며 명성을 떨칠 적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젊은 나이일 때부터 공을 세우며 벼슬도 한찬[30] 을 넘어 계속 승진했다. 아버지인 왕륭이 송악의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왕건 개인의 능력도 상당했다.
다만 고려측 사료에서는 왕건을 얻자마자 궁예가 이상할 정도로 일선의 군사 지휘에서 바로 물러나며 젊은 왕건에게 총사령관을 위임한듯이 묘사되는데, 이것은 정황상 개연성이 떨어지다보니 왕건을 부풀리기 위해 고려측의 역사 조작[31] 이 어느 정도 가미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견훤은 노환으로 제대로 전투 지휘를 할 수 없는 60대 후반 말년까지도 직접 전장에 나섰고, 궁예 또한 왕건을 얻기 직전까진 자신이 계속 전장에 나서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민심을 얻었다. 어느 나라나 건국 직후에는 군주의 통치 명분과 정통성이 부족하기에, 대부분 군주가 일선에서 전투를 총지휘하며 다른 장군이 군부 내에 카리스마와 사적 인프라를 갖는걸 방지한다. 그런데 왕건을 얻자마자 무한한 신뢰를 주면서 모든 군권을 위임해 흡사 왕건이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킬 기반을 궁예 자신이 처음부터 알아서 만들어주는듯한 사료 상의 모습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유능하고 믿음도 가는 왕건에게 점점 군권을 위임하다가 결국 나중에 모두 위임했을 수는 있지만, 최소한 사료에 나오는 것보다는 이후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왕륭의 송악 세력은 패서 일대의 평주, 정주, 황주 등지의 다른 호족들을 압도할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어느 틈엔가 왕건이 호족 세력의 수장격이 되었다는 것은 왕륭과 왕건의 능력과 지략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는 왕건 사후 혜종이 호족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정종, 광종이 대숙청을 벌이는 것으로 증명된다. 호족들은 통일이 된 후에도 엄청난 세력을 보유할 정도로 강했고, 태조는 결혼 외교에도 크게 의존하긴 했지만 상당 부분은 개인적인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호족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후백제와 싸울 때에 '견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중요 지역인 무진주의 바로 아래에 있는 해안가 금성 지역을 점령했던 일은 신하 시절 최고의 공적이었다. 이 금성이 바로 지금의 나주다.
3.4. 상주 전투에서의 공과 출세
훗날 견훤이 탈환하기는 하였지만, 나주를 통하여 백제의 도읍을 바로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 동안 후고구려와 고려가 (후)백제를 압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왕건이 무역을 통해 세력을 기른 호족 집안 출신이기에 본래 바다에 밝았던 반면, 견훤은 제해권의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대처를 소홀히 했던 데에 있었다.[32]
이후에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견훤의 출신지'''인 '상주' 전투에서 견훤과 여러차례 싸운 끝에 승리한 것을 필두로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궁예로부터 왕에 다음 가는 지위인 파진찬 겸 시중 벼슬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파격승진을 받은 셈이다. 시중이 되고 나서 왕건의 인기는 정점을 찍었는데, 태조 왕건에서 나왔던 유명한 아지태 일화가 이때 등장한다. 아지태가 궁예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입전, 신방, 관서 등을 반역죄로 모함하여 그들이 하옥되자, 왕건이 이를 재조사하여 진상을 밝혀 궁예에게 알리니, 세 사람은 무죄석방되고 아지태는 도로 쫓겨났다고 한다.
3.5. 궁예의 의심과 도주
그러나 궁예의 막장 행보[33] 가 더더욱 거세지고, 심지어 궁예가 서서히 자신에게까지 의심을 가질 낌새를 보이기 시작하자 위험을 직감했다.
결국 시중 벼슬에 연연하지 말고 일단 멀리 떨어지는 게 상책이라 판단, 근래에 나주 쪽의 정국이 불안하니 과거 나주를 빼앗았던 자기가 가서 지키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시중 자리를 스스로 내놓은 후 나주로 가 궁예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3.6. 궁예의 숙청에서 벗어나다
후에 궁예가 중앙 집권화를 위해 큰 세력을 가진 호족들을 숙청하면서 뜬금없이 관심법으로 왕건의 마음을 꿰뚫어 역적 모의를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며 왕건을 압박한 일이 있었는데[34] 이때 궁예의 옆에 있던 최응이 옆의 탁자를 슬쩍 걷어차고는 붓이 바닥에 떨어져 줍는 척 하면서 왕건에게 괜히 부인하지 말고 순순히 복종할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이에 왕건은 스스로 역적 모의를 인정하고 죄를 빌자 궁예는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란 칭찬과 함께 처단한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화 중 황금 안장과 황금 굴레를 하사하면서 용서하였다.
이러한 궁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들이 엇갈린다. 대체적으로 궁예가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왕건을 타겟으로 하여 무언의 경고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심지어는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부인인 강비와 그 소생의 왕자들까지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강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패서 호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긴 하다. 왕건도 (내 위세에 눌려서) 역심을 실토했으니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라는 것. 궁예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중 벼슬에 있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 리도 없고, 게다가 역적 모의를 시인했음에도 정직하다는 칭찬과 함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왕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궁예의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저 다음의 궁예와 왕건의 대화는, 요약하자면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니가 주장한 해군 증강 계획 말인데, 니가 맡아서 해라" 쯤 된다. 사실상 새로이 증강된 해군은 왕건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되므로 궁예는 그 전에 미리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했던 것.
3.7. 생존을 위해 찬탈을 결심하다
그러나 이 일로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일단 그 자신이 시중 벼슬에 있으면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자신도 궁예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던 상황에 고려의 4대 개국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찾아와 '지금의 왕은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시중이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왕건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아내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했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다.
3.8. 고려 건국
'''결국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6월 15일, 철원성 포정전에서 고려 건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인 불혹을 약간 넘긴 42세였다. 이듬해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천도하고 자신의 잠저 자리를 본궐로 증축했다. 정전을 '천덕전(天德殿)'이라 하고[35] 자신이 지은 발어참성을 도성으로 둘렀다.[36]
사군(四郡)[38] 의 땅(土)이 붕괴(崩)하던 시기(時)에 구적(寇賊)을 없애 봉강(封疆)을 늘렸다. 그러나 아직 해내(海內)[39] 를 합치치 못했는데 민중(衆)을 차갑고 난폭하게 다루니 간사함를 도리로 삼고 모욕함을 기술로 삼았다.단, 이때 태조 왕건(王建)은 고려왕을 곧바로 칭하지는 못하고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이 이후로 고려와 조선시대 국왕들은 보통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정식으로 알린 뒤 승인을 받아야만 왕호를 사용할 수는 일종의 국제 관례가 만들어졌다. 이는 고려시대 기록들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링크번뇌를 주고 부담을 늘리니 사람은 지쳐가고 땅은 허해졌다. 그런데도 궁실(宮室)을 늘리고 싶어하고 제도(制度)를 거치지 않으니, 노역이 멈추질 않고 원성이 뒤따라 커졌다. 계속하여 연호를 훔치고(竊號) 존호를 칭했으며(稱尊), 처를 죽이고 아들을 죽였도다. 천지(天地)가 용납하지 않고 신인(神人)이 분노하니 궐서(厥緖)[40]
가 무너졌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짐(朕)은 군공(群公)의 정성스런 마음(心) 덕분에 구오통림(九五統臨)의 극(極)[41]
에 올랐다.''' 풍속을 옮기고 부드럽게 할것이며 다같이 새로움을 추구할 것이다. 개철지규(改轍之規)를 지킬 것이며 벌가지칙(伐柯之則)을 깊히 지킬 것이다. 군신(君臣)이 어수지환(魚水之歡)처럼 지낼 것이며 하해(河海)[42] 와 안청지경(晏淸之慶)을 지낼 것이니라.'''이로써 내외군서(內外群庶)들은 짐(朕)의 마음을 알지어다!'''
3.9. 후백제와의 대결
고려를 재개국하는 동시에 왕위에 오른 왕건은 집권 초기부터 큰 난관에 부딪혔다. 자신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들이 꽤 컸던 것. 일단 이들을 잘 회유시켜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던 왕건은 적국인 후백제의 왕 견훤과 화친을 맺고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의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조물성에서 무력 충돌을 감행한다. 그러나 양 측의 힘이 비등하여 승부를 내기가 힘들어지자 서로 간에 인질을 교환하여 다시 화친을 맺었다.[43]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조카가 갑작스레 병사하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견훤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다져진 노련한 전술과 상당한 실력으로 왕건을 벼랑 끝까지 몰아 붙였다. 왕건은 견훤에게 수 차례 패하며 수세에 몰렸는데,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1만 명, 연구에 따라 2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개국 공신이었던 신숭겸마저 전사하는 등 참담한 피해를 입어야 했으며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의 희생으로 황급히 도망가면서 대구의 많은 지역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 도주 루트를 따라 대구시가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팔공산 왕건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3.9.1. 서라벌에서의 전투
본래 공산 전투 당시에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목 하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하였다. 이때 견훤은 왕건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물렸는데 왕건은 견훤의 군사가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겁을 먹고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는 여세를 몰아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계략으로 급히 추격해오던 왕건의 군대를 매복술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하지만 반대로 왕건이 견훤을 팔공산으로 유인하기 위해 싸우다가 거짓으로 도주하는 작전을 쓰자, 이걸 사전에 예상한 견훤과 후백제 측은 팔공산 안에 있던 왕건의 매복군 바깥에 역매복군을 둔 다음 거짓으로 왕건의 작전에 말려들어가 추격하는 모양새를 취하다가 왕건군이 팔공산 안에 모두 들어가자 역매복군과 추격군이 기습적으로 역습을 가해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44]
3.9.2. 수세에 몰린 왕건
여기에 고려 건국 후 국내 상황 역시 왕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단 궁예를 따르던 몇몇 성주들과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후백제에 귀부하는 일이 발생한 것. 다행히 고려 건국 직후 친궁예적인 호족들과 장군들의 반란들은 신속히 진압되어 명주의 김순식과 옛 백제 지역의 공직이나 운주 근처의 여러 고을들이 후백제에 넘어간 것을 제외하면 신속하고 원만히 해결이 되었으나 공산 전투 대패 후에는 고려의 불리함을 보고 투항하는 사태들이 생겨났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928년 11월 오어곡성의 일로, 이때 양지, 명식 등 장군 6인이 후백제에게 투항한 사건이다. 이때 왕건은 후백제의 공격으로 투항한 오어곡성의 장군 양지, 명식 등 6인의 가족들을 체포해 궁궐에서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조리돌린 후 이들을 저자거리에 끌어내 모두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서거정의 동국통감과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 적혀 있다.[45] 다만 왕건의 인덕과 뛰어난 호족 관리술 덕분에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 후의 후백제의 경우처럼 호족들과 관리들의 대규모 투항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공산 전투 패배 이후 왕건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후백제와 국운을 건 전투를 수 차례 벌였으나 공산 전투에서 입은 왕건의 피해가 워낙에 컸기에 이 피해는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아 929년 12월에 벌어진 고창 전투의 서막인 저수봉 전투의 대승리 이전까지 3년여간을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46] 이외에도 자신이 친정에 나서지 않은 전투들인 오어곡성과 나주 함락, 의성부 함락 등의 패전들을 계속해서 겪었다.
3.9.3. 고창 전투에서의 역전
그러나 견훤의 이 상승세는 결국 929년 12월~930년 1월에 안동에서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크게 꺾여 왕건과 고려는 후백제의 군대를 연파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기록에서도 나오지만 대패로 인해 후백제는 전사자만 8천여명을 내어 후백제가 멸망한 전투인 일리천 전투의 사망자 5천7백여명을 훨씬 능가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 후백제는 고창 전투 패배 직후 견훤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해 후백제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순주를 습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한 뒤 순주를 약탈하고 돌아간 사건과 932년 9월과 10월에 상귀와 상애 등의 장군들을 시켜 대규모의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수도 개성 근방과 황해도, 평안남도 일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약탈하고 이후 왕만세가 이끄는 고려 정규 해군을 대파해 고려에 큰 피해들을 준 사건을 제외하면 모든 전투들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고창 전투의 경우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동 지역의 세 호족 가문이 왕건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중 하나였는데 왕건 특유의 넓은 포용력과 친호족 정책이 그들의 호감을 끌었던 듯하다. 승리 후에 왕건은 안동의 호족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 왕건에게 벼슬을 받았던 김선평, 권행[47] , 장정필이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안동 삼태사'라 부른다. 이때 하사한 안동김씨는 시조가 다른 기존의 안동김씨와 구별하여 '신(新) 안동김씨'로 분류되고 있다.
하지만 흔히 이들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이렇게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이야기가 되나 고려사에는 이들의 독립된 열전이 전혀 없고[48] 다만 고려사 지의 경상도 안동부의 설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패배시켰을 때 이들이 전공을 세워서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왕건의 경우 유금필,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최응 등의 중앙 조정에서 일하는 자신의 관리들보다 지방 호족들에게 더 쉽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상부로 부르는 면이 많았다. 일례로 왕건은 몽웅역 전투에서 그 지방의 아전인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의 도움에 힘입어 승리했다는 그 한 가지의 이유로 그 사람에게 대광의 벼슬을 내린 반면 박수경의 경우 고려 건국 초창기에 왕건의 명으로 견훤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지키는데 파견되어 견훤의 군대로부터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조물성 전투에서는 다른 장군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어 이후 유금필이 왕건을 구원하러 도착할때까지 왕건군이 버틸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발성 전투에서는 왕건이 견훤군에게 포위를 당해 위기에 처하자 사력을 다해 싸워 왕건을 구하고 이후 일리천 전투에 투입되어 후백제 멸망에 공을 세워 한씨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는 많은 공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왕건 생전에 대광으로 승진한 적이 없다.
이는 최응도 마찬가지로 그는 왕건 정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문신이어서 왕건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뛰어난 신하들도 최응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극찬을 했고 고려 현종 때 왕건의 신하들 중 문신으로서는 유일하게 태조 왕건의 공신으로 공신각에 배향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살아생전에 왕건에게 대광 벼슬을 받은 적이 없었고 죽은 직후에 '원보'(元甫)로 추증하고 이후로 계속 추증해 결국 대광의 직까지 올라갔을 뿐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고창 전투의 승리는 그들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고 무조건 단정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왕건은 고창 전투에서의 상승세와 매곡성의 성주인 공직의 투항으로 인해 충청남도 남부 지역의 정보를 잘 알 수 있게 되자 공직의 안내로 932년 7월 '일모산성' 공격에 직접 나섰고 견훤은 불리해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왕건이 일모산성 공격에 직접 나선 틈을 타 932년 9월과 10월 부하 장수 상귀와 상애 등으로 하여금 개경 근방과 황해도, 평안남도 일대를 공격해 파괴하고 왕만세가 이끄는 고려 정규 해군을 대파하여 왕건은 고려 건국 후 처음으로 해전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왕건이 비록 바닷가에서 태어나 물에 익어 해전에 능했다고는 하나 견훤도 나주를 빼앗긴 후에 절치부심하여 열심히 해군력을 길러 왔던 것이다.
그러나 1년 전에 참소로 인해 곡도(지금의 백령도)로 귀양갔던 유금필이 자신의 귀양지인 곡도와 인근의 포을도 등 2개 섬에 배치되어 있던 해군들을 급히 수습해 이들 후백제 정규 해군을 대파하자 기세가 완전히 꺾이게 된다.[49] 유금필이 이때 이 2개 섬의 해군만으로 후백제 정규 해군을 대파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이후 후백제 해군이 다시 고려의 영토와 바다를 침략해 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935년 4월(동국통감의 기록.) 왕건의 명령으로 유금필이 929년에 고려가 빼앗겼던 나주, 목포, 진도와 인근 섬들을 다시 재탈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역습까지 가능한 상황으로 수군을 재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모산성 공격에 나선 왕건은 5개월만인 같은 해 11월인 932년 11월에 일모산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3.9.4. 견훤의 경순왕 옹립
견훤은 이미 927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함락시킨 후 신라 내에 친백제 정권 수립을 위해 경순왕을 옹립했지만, 경순왕은 견훤의 뜻과 다르게 여전히 친고려적인 성향을 계속해 보였고 이에 분노해 아들 견신검을 시켜 933년 5월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기습적으로 침략해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켜 강제 병탄하려 시도했다. 고려는 927년과는 달리 뒤늦게나마 이 사실을 알고 당시 신라의 의성부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시켜 신라를 구원하도록 했고 이때 유금필은 사정이 급박했던 관계로 장사 80명을 선발해 결사대를 조직해 신라 수도 경주를 지키러 출발했다. 양측은 사탄에서 부닥치게 되었지만 유금필과 부대원들의 위용에 눌린 신검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으며 이후 유금필이 돌아가는 길에 자도에서 신검의 군대와 맞붙었지만 유금필 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후백제 군은 금달, 환궁 등 장군 7명이 포로로 잡힌 것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극찬했다. 이후 개선한 유금필을 맞이한 왕건은 옥좌에서 내려와 유금필의 손을 잡으며 '그대가 세운 전공은 옛적에도 드물었으니 내가 이것을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에 유금필은' 나라의 어려움에 자신을 잊고, 나라의 위급함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당연한 도리인데, 성상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라고 왕건의 극찬을 물렸으며, 이에 왕건은 유금필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50]
3.9.5. 고토 수복과 후백제의 내분
이와 같은 상승세를 힘입어 고려는 934년 9월 후백제에게 빼앗겼던 운주를 다시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왕건이 친정했다. 이에 견훤은 이를 막기 위해 5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친정에 나섰으나 930년 고창 전투 이후 몇 년 동안 대부분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사기충천해진 고려군과 이미 후백제군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 된 백전백승의 후삼국시대 최대의 명장 유금필[51] 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견훤은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눈치채 왕건에게 여기서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서로 화친할 것을 제의했지만 견훤의 약세를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의 허락을 얻어 강한 기병들을 동원해 후백제군이 진을 치기도 전에 돌격해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후백제는 후백제 최고의 용장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상달, 최필과 책사 종훈, 견훤의 어의(御醫)로 추정되는 의사 훈겸이 사로잡히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퇴각했으며 이 전투 이후 웅진 이북의 30여 군이 일제히 고려에 투항하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견훤은 68세에 이른 고령의 나이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체감하고 자신이 정한 후계자에게 후백제의 제위를 물려줄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견훤은 후계자 선정 작업에 치밀하지 못한 처신으로 맏아들이었던 견신검에게 황위를 강탈당하고 유폐되었던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였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대인배의 면모를 드러내어 민심을 얻고 이를 후백제와의 결전에서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간파한다. 이후 후백제를 칠 때 견훤도 동행했는데 견훤이 있는 것을 본 후백제 장수 중 일부가 "어? 저기 우리 폐하께서 계시네?" 하고는 그대로 항복했다. 이는 후백제 내에서 인망은 신검보다 견훤이 한 수 위라는 사실.
3.9.6. 견훤의 투항과 삼국 통일
왕건은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진다. 상보라는 호칭을 처음 쓴 것은 인질을 교환해 화친을 한 후로, 이때는 손위의 큰형님이나 작은 숙부 정도로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헌데 귀순 후에는 표면적인 호칭을 상보라 했을 뿐, 진짜 적국의 전왕 + 신라인에게는 천하의 개쌍놈 + 빈털터리에 아무 힘도 없는 거지노인인 견훤에게 재산을 풍족히 베풀어 주고 궁을 집으로 삼아 살게 하는 등 숫제 태상황급 취급을 해 주었다.
상보란 한자로 尙父로 쓰며, 이때는 아비부가 아닌 어르신보로 새겨읽으므로 상부가 아닌 상보가 정확하다. 왕이 손위의 권신에게 사여하는 존칭으로서, "그대는 우리 아버지(즉 선왕)보다 못하지 않음" 정도의 뉘앙스. 이렇게 견훤마저도 왕건에게 큰 대접을 받자 견훤은 감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견훤마저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결국 천년왕조 신라도 고려에 투항해왔다.
'본국(本國)은 오래 화란(禍亂)을 겪어, 역수(曆數)가 이미 다했습니다. 다행히 천자의 빛(天子之光)을 보게되었으니 부디 정신의 예(庭臣之禮)를 차리고자 합니다.'
- 신라 경순왕의 상서(上書). 보한집 권상 기록.
3.9.7. 대광현의 귀순
발해가 멸망한 후 태자 대광현이 10만 명이 넘는 유민들을 이끌고 망명하자 광현에게 왕계(王繼)[52] 란 이름을 주어 백주[53] 에 거주하게 해주니, 이 시점에서 고려의 국력은 이미 후백제를 압도하였다.[54]
3.10. 후삼국 통일과 말년
이 때에 견신검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몇 개월만에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라 왕건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936년 왕건이 발해계 세력과 북방의 이민족, 그리고 견훤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대의 세력을 아우른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자 후백제는 망했어요... 후백제의 병력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후백제 또한 성에 의지하는 등 방어적으로 임하지 않고 고려군을 요격하러 국경지대에서 야전에 나선걸로 봐서, 병력을 고려군과 비슷한 규모로 동원해 자신들에게도 승산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던듯 하다. 다만 견훤이 선봉에 서서 장졸들을 호령하자 백제군이 저절로 항복해오며 붕괴했기 때문에 병력의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마침내 후삼국시대를 50년만에 종결시켜 삼국 통일을 이루는 대업을 이루었다.
후삼국의 통일 사업을 완수한 후에는 국가의 체계와 기틀을 다잡는 한편 장남이었던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왕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은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이었으나 그 외가 쪽 가문의 세력이 무척 한미하였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호족들로부터 얻은 아들들이 왕위를 탐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신검(神劎)이 스스로 멸망한 것은, 그의 죄가 천지에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왕(羅王)이 스스로 손님이 되어 복종한 것은, 성덕이 멀리까지 퍼졌기 때문입니다. (생략)[55]
지방(智邦)의 벼슬아치들이 상국(上國)에 모이고, 역자(逆子)의 병사들은 남방(南方)에서 와해되었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이웃의 다급함을 듣고 구하러 가셨으니 인용(仁勇)입니다. 인왕(隣王)[56]
이 와 붙으니 친족처럼 대하셨으니 지신(智信)입니다. 훤(萱)의 소심함과 혐오스러움을 잊으시고 은혜와 믿음을 주셨으니 관인(寬仁)입니다. 모든 역자를 주살하시고 남은 백성을 품으셨으니 의명(義明)이요 인합(仁洽)입니다.이를 대대로 전해지는 제왕(帝王)의 규범으로 삼으면, 어떠한 자손이 만세를 전하지 않겠습니까?' (생략)
- 보한집 권상 중 발췌. 최원(崔遠)의 표(表). 후삼국 통일 후 당대에 올려진 표 중 유일하게 내용이 남아있는 표문.
왕건이 이렇게 장남을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이 덕분에 본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장남 왕무가 훗날에 왕건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왕건은 최후에 자신이 크게 중용했던 재상 박술희와 왕규를 불러들여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고 그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고려의 왕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데 참고해야 할 훈요 10조를 남기고 943년 사망하였다.[57]
3.11. 붕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왕건의 붕어를 매우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재위 26년째인 서기 943년 5월 정유일, 재신(宰臣) 염상(廉相)과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하였다."한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 '대개 생명이 있는 천하 만물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며 만물의 자연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것이 있으랴.'
하였으니, 전고(前古)의 명철한 군주는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에 걸린 지 이미 20일이 지나 죽음을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도성 안팎의 중요한 일은 경들이 태자 무(武)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
며칠 후인 병오일. 이 날 죽기 직전에 왕건은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에게 유조(遺詔)[58] 를 적게 했다. 유조에는 내외의 모든 관료들은 다 태자의 명령을 따르도록 할 것이며,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나라 문제와 위나라 문제의 고사에 의거하여 검소하게 지내라고 지시했다. 이 유조를 다 불러 주고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말이 없던 왕건이 갑자기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난세의 영웅은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웃더니 잠시 후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59]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라고 하고 말을 마친 후 잠시 뒤에 훙서하였다. 왕위에 있은지 26년이며 나이는 67세였다.
<<고려사>> <세가> 태조 26년 5월 29일
3.11.1. 장례식
고려사 지 국상조와 고려사절요엔 태조 붕어 후 정윤 혜종이 치른 장례가 기록되있다.
5월 29일, 태조가 신덕전(神德殿)[60] 에서 붕어하자 태자(太子), 제왕(諸王), 종실(宗室), 근신(近臣)들은 땅을 치며 울었다. 이후 개경의 모든 관료들은 내의성(內議省)[61] 대문 앞에 모였고 그들 앞에서 대상(大相) 왕규(王規)가 유명(遺命)을 발표했다. 유명은:
5월 30일, 유명에 따라 혜종이 즉위한 뒤, 백관과 함께 슬퍼하였다."내외서료(內外庶僚)들은 모두 동궁(東宮)의 처분을 따르라."
6월 무신일, 상정전(詳政殿)[62] 에서 태조의 천붕을 선포하고 학사(學士) 김악(金岳)[63] 이 유조(遺詔)를 선포했다.
6월 기유일, 상정전에 재궁(梓宮)을 안치하고 서쪽 계단에 빈전(殯殿)을 세웠다.
6월 경오일, 상정전에서 마지막 제사를 거행했다. 태상경(太常卿)[64] 이 시책(諡冊)을 올려 시호를 ''''신성대왕(神聖大王)'''', 묘호를 ''''태조(太祖)''''라 했다. 제물을 바칠 때 행예빈령(行禮賓令) 왕인택(王仁澤)이 소, 양, 돼지를 바쳤다.
6월 임신일, 왕릉에 안장되었으며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왕릉의 제도는 유조에 따라 검소하게 만들어졌으며 먼저 죽었던 신혜왕후 유씨가 같이 합장되었다.[65]
4.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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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66] 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로서 당시 대당무역의 거점이었던 예성강 주변(패서)이 가문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장보고가 죽고 청해진이 폐쇄된지 60여년이 지나 농업 위주의 영지가 되어버린 백제 지역이나, 지정학적으로 외국과 직접 교역이 불가능한 영동/영남 지역의 호족들에 비해 상업적인 능력과 국제 정세 이해, 중국 문물 수용, 타 지역에 대한 정보력에 있어 우위에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궁예가 직접 한찬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게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년 동안 시달렸는데 궁예 휘하에서 꽤나 젊은 나이에 시중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공들 덕이었다.
육전 지휘력은 다소 애매한데, 초반에는 궁예 휘하의 무장으로서 경기, 충청, 패서 일대의 도적을 토벌하고 호족세력을 포섭하는 다수의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대규모 육군을 지휘할 때는 가끔씩 약한 모습을 보인다. 후삼국 정립 이후 공산 전투에서는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탈탈 털려서 신숭겸, 김락 등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 했고, 쿠데타 직후 귀순한 세력들이 많았다고는 하나 공주, 청주의 호족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지속하다 후삼국시대 중반에는 견훤에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고려군 병력이 우세했던 조물성 전투나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견훤이 친히 지휘하던 후백제군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거나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결정적 전투에서는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명철한 결단력과 빠른 행동력, 상인 가문 특유의 외교력과 궁극의 화친 능력을 들 수 있다.
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관심법을 썼다며 역모를 자백하라 억지부리는 궁예 앞에서 쿨하게 꾸미지도 않았던 반란을 모의했노라고 인정하는 모습, 말년의 궁예가 폭정을 휘두르자 부하들에 의해 쿠데타의 주역으로 추대되어 실행에 옮기는 모습이나, 태봉을 멸한 후 항거하던 궁예의 봉신들을 화전양면책으로 재빨리 수습한데서 그 능력을 엿볼 수 있다.[67]
또한 협상가로서 호족들을 포섭하는 외교력과 친화력도 탁월하다.
쿠데타 직후 친 궁예 세력과의 싸움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적국의 왕인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획득하고, 궁예를 따르다가 왕건의 쿠데타 직후 독립을 선언했던 명주(강릉)의 신라 왕족 김순식도 4년 뒤 스스로 왕건에 귀순하였다. 또한 견훤이 서라벌 정벌 후 직접 옹립한 경순왕도 고려에 귀순시켜 영동/영남지방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획득한다.
공산 전투 패배 이후 후백제보다 군사적, 정치적 입지가 불리해졌던 상황에서도 삼태사라 불리운 토착 호족 세력(권행, 장길, 김선평)을 끌어들여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켜 고창 전투에서 승리했다. 놀라운 수준의 포용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아, 외교적으로 후백제의 호족 세력들을 동요시켜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런 결과는 생전에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항우와 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물론 사료에서는 승리자를 예찬하고자 왕건의 이런 능력이 '천명', '인덕' 같은 단어로 포장되었으나 이러한 단어들만으로는 전란의 시대, 배반과 이합집산을 밥 먹듯이 하며 신라 왕실의 권위에도 반항하던 수많은 호족 세력들이 왜 왕건에게 포섭되었는가를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다. 때문에 약간의 추론을 보태자면 상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왕건은 서로 간의 이권이 첨예하게 얽혀있던 각 지역 호족들의 각기 다른 목적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는 현실적인 대안(부/명예/권력)을 제시할 수 있는 정보력과 외교/교섭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강원도 일대에서 잘 나가긴 했지만 당시엔 고작 양길 휘하 일개 무장이던 궁예에게서 야심을 읽고 본거지인 송악을 통째로 바쳐 송악을 태봉의 첫 수도로 만들어 낸 왕융이나, 그렇게 얻어낸 궁예의 무력을 이용하여 이전에는 압도하지 못했던 황주/해주/평주/정주 등 패서 일대 호족을 단번에 제압한 왕건의 행동을 보면 당시 송악 왕씨 가문의 정보력과 교섭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후 궁예 휘하에서의 왕건의 행보와 호족들에 대한 포섭 과정을 보면 왕건 스스로도 대세를 읽고 상대가 원하는 바를 제시할 수 있는 상인 가문의 기질을 상당 부분 섭렵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아래 항목에 후술하겠지만, 왕건의 호족 포용책의 일환이었던 정략결혼은 그의 치세 중에는 지방 성주들과 화합을 도모하며 신흥 왕조 중앙집권의 기반을 다지기에 필요불가결한 정책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다만 태자인 혜종은 고려 내에서 기반이 약한 나주 오씨 소생이었다.[68] 게다가 왕건이 임종 직전 태자의 보필을 부탁하며 유훈을 맡긴 박술희는 궁예 휘하 일개무장으로 시작해서 왕건의 최측근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패서의 상업 호족, 호남/상주의 부농 호족, 영동/영남의 토착 신라계 귀족에 비해 가문의 기반은 미약했다. 통일 후 지방성주와 호족들을 아우르는데 그쳐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하고 왕권쟁탈전의 불씨를 남기고 떠나게 된 건 결과론적으로 왕건 생전의 명철한 판단력과 기민한 행동력을 생각해보면 분명 아쉬운 부분.
정훈이 만화: 왕건, 통일의 기술
5. 정치 스타일
5.1. 호족 처우
고려의 통일 이후 왕건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게 다가온 현안은 바로 호족들과 관련한 처우 문제였다. 호족들은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공신이 되었지만, 그대로 놔둘 경우 최소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반기를 들거나 거진 내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왕건부터가 고려의 전신인 태봉의 건국 공신 중에서도 핵심 인물이자 호족 연맹체 국가에 가까웠던 태봉의 대표적인 대호족 세력 중 한 명이었다. 일개 태봉의 신하에서 역성 혁명(관점에 따라선 군사 쿠데타)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임금 자리에 오른 매우 휼륭한 선례가 바로 자신인만큼 왕건 입장에서는 제2, 제3의 자신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야만 했다. 따라서 왕건은 회유책과 강경책을 같이 써가며 호족들의 충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견제하는 모션을 취하게 된다.
우선, 회유책으로는 정략결혼, 사성 정책, 역분전 정책을 들 수 있다. 정략 결혼은 이 항목에 들어올 위키러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 정략결혼이다. 그런데 호족들이 상당히 많은지라 왕비 역시 수가 엄청 불어난 것이 문제였다. 왕후만 6명에, 부인도 23명. 정략결혼으로 위 아더 패밀리를 강조하는 동시에 호족이 반란을 일으키면 그 호족의 딸은 바로 폐서인-처형크리를 타기 때문에 호족들이 딴생각을 품는 것을 스스로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략 결혼에는 당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보완하고자 마련한 것이 바로 사성정책이었다. 사성(賜姓)이란 글자 그대로 '성을 주다'라는 뜻으로, 고려 건국 및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그들의 충성을 얻어내는 것이다. 또한 지방 호족들에게 땅을 지급하는 역분전 정책도 같이 썼다. 그리고 지방마다 일부러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호족들이 기존에 누리던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모습도 보였다.
강경책으로는 기인 제도, 사심관 제도를 사용했다. 상수리 제도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기인 제도는 호족의 자제들을 개경에 머물게 하며 사실상 인질로 삼아 호족들의 이탈 및 반란을 막는 정책이었다. 피 같은 자식들의 목숨이 왕건 손바닥 안에 있었으니 호족들은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제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호족의 자녀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심관 제도는 중앙 정부에서 지방마다 지방관을 보내지 않고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만큼, 자신의 지방에서 자치(정확히는 지방에 준 행정, 치안상의 특권. 즉, 기득권)가 막장일 경우 곧, 반란이나 봉기가 일어나게 한다던가 아니면 지방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정치를 펼처서 중앙 정부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린다던가 하는 경우에 연대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였다. 또한 삼국 통일 이후에 공신들에게 녹읍을 최대한 주지 않아 경제적 기반이 커지는 것 또한 막으려 하였다.
5.2. 숭불정책
한편 대내적으로 숭불정책을 실시했으며, 이러한 친불교 성향은 신라 하대 지방 호족이라는 출신 성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 왕조를 창업한 왕건으로서는 신라의 국교가 불교였던지라, 국민의 대다수인 불교 신자와 충돌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훈요 10조에서도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불교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불교 행사가 지나치게 화려해진 탓에 불교 행사들이 민중고를 일으켜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몇십년간 폐지시킨 적은 있다. 하지만 불교만 선호한 게 아니라 토속신앙 행사인 팔관회를 열고 산신령 소문으로 산의 이름을 바꾸는 등 도교와 여러 토속신앙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5.3. 훈요 10조
덤으로 훈요 10조에 차현 이남 공주강(금강) 밖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말을 남겼다. 자세한 내용은 훈요 10조 문서로.
5.4. 반 거란 정책
그리고 거란과는 대놓고 적대적인 관계를 표명했다. 우선 왕건 이전의 궁예는 거란과 친교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사 이외국기 고려편에 보면 915년 10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보검을 진상한 기록이 있으며 918년에도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는 궁예의 집권 시기였다. 후삼국 통일 7년 후인 942년 10월 거란의 태종이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사신과 선물을 보내 통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왕건은 거란이 동맹국인 발해를 통수친 것도 모자라 멸망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보내고 선물로 왔던 낙타 56마리를 개성에 있는 만부교 다리 밑에 묶은 뒤 굶겨 죽였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만부교 사건이다.
왕건이 이러한 反 거란 정책을 철저히 펼친 이유는 발해의 멸망과도 관련이 깊은데 발해가 과거 거란과 친하게 지내다가 역으로 관광당해 결국 무너졌고, 발해 유민들이 고려 내부로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정치적인 면에서라도 거란을 적대시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컸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했고 이에 발해 유민들은 왕건과 고려에게 있어 꽤 중요한 존재로 다가왔기 때문.
그러나 당장에 발해 유민 수십만 명보다는 당시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거란을 적대시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방금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고려는 이제 막 삼한을 통일하고 분열을 수습한 시점이라,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과 국가를 되살리고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제도들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시점에서 당대 동아시아의 최강으로 떠오른 거란과 적대하는 것은 당장의 이익만 따지면 그야말로 미친 정책이었다고 평할 만 한 것.
하지만, 왕건은 절대 당장의 이익만을 가장 우선시하는 속물적인 정치인이 절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펼친 대 북방 관련 정책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왕건은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재건해 서경으로 승격시킨 후 장래에 평양으로 천도하려고 하였고, 이는 당연히 고구려 계승 의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동시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의 기상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고려 왕조의 문을 직접 닫은 정도전조차 왕건의 이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으로 칭송했을 정도.
경은 빛나는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하늘로부터 상서로운 조짐을 받아 동쪽의 땅을 영토로 차지했으며 해외 여러 나라의 영웅 가운데 으뜸이 되었다. 사대부들은 어루만져 돌보아줌에 감동했으며 평민들은 다들 은혜로운 보살핌을 찬양했다. 또한 큰 나라를 섬기는 정성이 굳건했고 이웃나라를 원조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말을 잘 먹이고 무기를 잘 별러 전쟁준비를 착실히 함으로써 견훤의 무리를 꺾었고 옷을 나누고 밥을 덜어서 발해 사람들을 구제했다. - 고려사 933년 3월 기사 후당의 조서 中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洲(현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 고려사 934년 7월 기사 中
발해는 이미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고 나서 홀한忽汗이 멸망할 때에 그 세자 대광현大光顯 등이 우리 국가가 의義로 일어난 나라라 하여 그 남은 무리의 수만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두 배로 재촉하여 도망쳐오니, 태조께서 더욱 깊이 가엾게 여기고 그를 맞아 매우 후하게 대접하며 성명姓名까지 내려주고 또 종적宗籍에게 붙여서 그 본국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며 그 문무참좌 이하 또한 모두 넉넉히 작명의 은전을 입었으니 망한 나라를 보존해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는 데 급하며 먼 곳의 사람이 와서 복조하게 함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 고려사절요 982년 6월 기사 최승로의 봉사 中
5.5. 발해 관련
발해 태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왕건에게 투항한 시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데, 고려사는 934년 7월의 일로,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의 일로, 동국통감은 926년 1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공식적인 발해 멸망은 926년 1월로, 이에 따라서 대다수의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광현이 수만명, 혹은 수만 가구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고려로 투항한 년도는 926년 1월 이후로 보고 있어 동국통감의 기록이 가장 사실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왕건이 발해를 나의 나라로 친근하게 대하면서 발해를 침공해 멸망시킨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을 보면 그는 후백제 견훤과의 수많은 전쟁 도중에도 늘 틈틈히 서경을 순행해 북진의 의지를 굳게 다졌고,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짓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염두에 두고 개성과 평양, 두 곳에 탑을 쌓아 통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고려 국민들의 사기 진작에도 힘썼는데, 이때 왕건은 개성에는 7층탑을, 서경에는 황룡사 9층탑과 같은 9층탑을 지어[69] 개경보다 서경을 더 중시했고, 장래 수도로 삼을 계획을 내비쳤다. 932년 5월에는 아예 공개적으로 장래에 서경으로 천도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하기도 했다.발해는 본디 우리의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 속통전續通典 中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입니다. - 자치통감 中
여기에 대해 목은 이색의 스승이자 고려 후기와 말기 최고의 대유학자이자, 대정치가였던 익제 이제현은 고려 태조의 일생에 대한 논평에서 왕건의 북진 정책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쉬운 건 결과적으로는 거란을 적대시함으로써 길고 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도 자신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건의 선택을 비판하고 이에 반해 금나라에 사대정책을 취한 인종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송나라 태조는 강남 이씨(江南李氏)를 남의 침상에서 코를 골고 잠자는 자에 비교했으니 석경당(石敬塘)의 후진(後晋)이 거란에게 뇌물로 준 산후(山後)의 16주도 보배처럼 소중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北漢)을 수복한 후 먼 곳까지 진격해 진한(秦漢)의 옛 땅을 평정했다. 우리 태조께서는 즉위한 후, 김부(金傅)가 아직 복속해 오지 않고 견훤이 아직도 항복해오기 전이었는데도 자주 서도(西都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국경지역을 순시하셨다. 그 뜻도 또한 고구려 동명왕의 옛 땅을 내 집에 대대로 전해온 보배[靑氈]로 생각하고서 반드시 석권하여 차지하려 한 것이니, 결코 닭이나 오리같이 하찮은 것을 얻는데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면, 비록 나라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더라도 두 태조의 국량과 인격은 이른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더라도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5.6. 중원왕조 관련
천복 연간에 서역西域의 중 말라襪羅가 진에 와서 조회朝會하였는데 화복火卜을 잘하였다. 얼마 후 고조高祖에게 하직하고 고려에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 왕건은 그를 심히 예우하였다. 이때 거란이 발해의 지역을 병탄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왕건이 조용히 말라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본디 우리의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내가 중국 조정을 위하여 거란을 쳐서 그 지역을 취하고 또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니, 대사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말해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습격하게 해달라.” 하였다. 이에 말라가 돌아가서 낱낱이 아뢰었으나 고조는 회답하지 아니했다.
속통전續通典 中
다만 중국 기록에 따르면 왕건은 오대십국시대 후진後晉의 초대 황제 석경당에게 거란을 협공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이를 보면 어떤 대척 없이 무조건 주장한 건 아니고 중국과의 협공 등을 활용해 최대한 성공 가능성을 높여보려고 한 듯하다. 다만 왕건이 삼국통일하고 강대해졌다는 중국의 기술을 보면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는 왕건의 야심을 보고 경계심을 가졌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고구려와 중국의 역사적인 갈등을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이름을 자칭하는 왕건의 세력이 강해지는 건 중국 입장에서 마냥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처음 고려 왕건이 군사를 써서 이웃나라를 멸망시키고 자못 강대해졌다. 호승胡僧 말라襪羅를 통하여 고조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입니다. 그의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정과 함게 그들을 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회보하지 않았다.
자치통감 中
하지만 이후 거란이 쳐들어오자 석경당은 요태종 야율덕광에게 연운 16주를 넘겨[70] 수백 년 동안 중국을 고생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걸 생각하면 진짜 별 생각없이 무시한 것일 지도.
6. 평가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정[71]
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는 군신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 고려사절요 1권 태조 신성대왕 편 중에서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긍정적이다.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1945년 남,북한 분단 직전까지 천 년이 넘게 이어지는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외세에 의존했던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했고, 궁예, 견훤과 마찬가지로 능력과 세력이 있으면 어느 지방의 사람이라도 고위 관리가 될 수 있는 이른바 중앙과 지방 간 기회의 평등을 나눌 수 있는 시대를 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72]"어진 사람을 좋아하시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하셨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키셨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셨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셨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셨다. …(중략)…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우셨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으셨다."
- 최승로의 시무 28조 중에서
신라의 경우 통일 이전은 물론이고, 통일 이후에도 수도 경주에 거주하는 소수의 진골 귀족들만 고위 관리를 독차지하는 골품제를 그대로 유지해 진골 귀족 이외의 신라 본토인들은 물론이고, 새로 신라에 속하게 된 고구려와 백제계 주민들이 신라에 대한 진정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고, 또 새롭게 신라의 백성이 된 고구려와 백제계 주민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의지와 정책들의 부재로 인해 이후 2백여년이 넘어 신라 중앙정부가 내부의 권력 다툼과 잇다른 실정으로 인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자, 옛 고구려, 백제 계열 주민들이 신라에서 이탈해 궁예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를 건국하게 되는 중대한 원인을 제공했다.
적극적인 민족 포용책을 썼고, 적국에 대해 매우 관대한 면도 그렇고, 무신정권 시절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을 기치로 내세운 반란 세력들이 있긴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 고려 왕조 내에서 완전한 민족의 정서적 통일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단일한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일부 학자는 고려 무신 정권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왕건의 민족융합정책이 매우 불완전했다고 폄하하지만, 이는 근거가 대단히 부족한 주장이다. 결론은, 고려 무신 정권기 고구려, 백제, 신라 부흥운동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언급하면서 지역을 초월해 삼한의 사람들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심어지면서 이후로는 더 이상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운동을 기치로 한 반란이나 민란은 사라졌다는 사실이기 때문.[73]
그리고 고려 무신 정권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 운동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이 단순히 당시 고려 조정의 반란 진압 능력이 신라 말기보다 훨씬 뛰어나고, 또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의 역량이 후삼국시대의 궁예와 견훤에 비해 훨씬 떨어졌기 때문만이라고만 할 순 없다. 당연히 왕건과 그 후 고려왕들의 민족융합정책의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우선 고려는 수도 경주에 거주하는 소수 진골귀족에게만 고위 관직을 허용하고 그 외 신라 본토인들과 고구려, 백제 계열 주민들을 철저하게 차별한 신라와 달리, 나라의 전 지역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서 과거제도와 음서제를 통해 지방민이라도 실력과 세력이 있으면 천민과 노비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무신 정권기에서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났어도, 해당 지역들에서 과거제도와 음서제를 통해 고려의 관리와 고위 관리가 되어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옛 삼국 출신의 고위 관리들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자신에게 크게 기여한 각 지방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것이 후대 고려 왕조와 임금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경우들이 당연히 있었다. 그래서 고려 전기의 현종은 제 2차 여요전쟁때 수도인 개성이 함락되자 왕건이 궁예 정권 시절 가장 크게 활약한 전장이고, 평양과 더불어 왕건의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나주로 피난을 간 것이고, 또 고려의 대몽항쟁때 전라도 지역에서 옛 백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며 민란을 일으켰던 이연년 형제의 난을, 박서와 더불어 귀주성 대첩의 영웅으로 백성들과 조정 신료들의 인망을 크게 얻었던 김경손이 나주 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진압했던 것이고, 고려말의 공민왕 당시 제 2차 홍건적 침입의 전반부에 홍건적의 공격으로 대패한 공민왕이 수도인 개성을 떠나 고창 전투로[74] 고려 왕조에게는 매우 뜻깊은 지역인 안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여기서 전열을 재정비해 이듬해 20만 대군을 집결시켜 수도인 개성탈환작전을 성공시켜 홍건적을 대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임금들과 신료들 당시 당연히 나주와 안동은 고려 왕조와의 역사적인 깊은 인연과 이들 지역에 대해 고려 태조 왕건과 후대의 고려 왕조가 극진한 혜택을 준 이유들로 인해 고려왕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 당시 태조 왕건 사망 이후 후대의 고려의 임금들과 신료들이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이후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언급하면서 지역을 초월해 삼한의 사람들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심어지면서 이후로는 더 이상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운동을 기치로 한 반란이나 민란은 사라졌고, 오히려 이후 고려가 멸망할 당시 목숨을 걸고 고려 왕조를 위해 충성을 다한 사람들은 대개가 옛 백제와 신라계 사람들이었다. 최영[75] , 이색[76] , 정몽주[77] , 이숭인[78] , 정지[79] 같은 옛 백제, 신라계 인물들이 고구려계 인물들을 제치고 고려말에 고려왕조 사수에 가장 앞장섰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왕조의 민족융합정책이 성공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단순히 고려 무신 정권기에 부흥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왕건의 민족융합정책이 매우 불완전해 사실상 실패에 가깝다는 식의 이야기는 완전히 틀린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왕건의 후삼국통일과 그 과정에서의 어질고 후덕했던 면, 그리고 왕건의 삼한통일 이후 조선왕조 멸망때와 그 이후의 일제시대까지 1000년이 넘도록 다시는 한반도가 갈라지지 않도록 여러가지 좋은 정책들을 실시한 면들 때문에 심지어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조선 왕조에서도 왕건은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심지어 성종실록, 성종 24년 12월 22일 임오 4번째기사 '시독관 유호인이 기자묘의 수리를 아뢰다'라는 기사를 보면 성종과 당시 신료중 하나였던 유호인은 왕건의 공적에 대해 역대 우리나라의 임금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 23년후 발해가 건국되어 남북국시대가 열렸으며, 뿌리 깊은 골품제와 고구려와 백제계 백성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제도 정책들과 포용 의지 부재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 출신인 귀족과 백성들에게 신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옛 고구려와 백제 영토에 살던 백성들은 그대로 고구려와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갔고 2백여년이 넘어 신라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흔들리자 궁예의 고려와 견훤의 백제를 탄생시켰다. 이를 재통일하고 다시는 갈라지지 않도록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들을 성공적으로 마련한 인물이 왕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을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통일의 시조로 본다.
6.1. 비판과 반론
그러나 일정 부분에서는 비판을 받는 점도 간혹 있는 편.
예를 들면 위기에 처한 발해 및 발해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탓에 한국사에서 만주가 아예 떨어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있다. 926년 1월 발해가 멸망했을 당시 고려가 여유가 없었다지만, 후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정안국이나 흥료국 같은 발해 후속국들이 지원을 요청해오면 일정 부분 거리를 두는 정책을 펴는가 하면, 단지 귀순해오는 일부 유민만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걸로 비판하는 것은 현대의 민족주의 사고방식을 가져와서 지나치게 대입하는 것으로 발해와 고려는 현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름만 다를 뿐 하나의 같은 한 민족 국가이며, 따라서 어느 한 쪽이 위험하면 당연히 도와줘야 하는 민족주의적인 관계가 아닌 엄연히 서로 다른 이웃 국가 관계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근대의 국가관계에서 이웃 국가가 다른 나라에 의해 무너진다면 가장 좋은 부분은 멸망한 나라의 유민이나 영토 일부를 흡수하는 식의 어부지리 식의 이득을 얻는 것이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멸망시킨 나라와 갈등을 빚어 자국에 불똥이 튀는 것을 막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따라서 거란과 싸움이 안 된다고 여겨질 때 발해를 돕지 않은 것은 고려의 군왕으로서 당연한 판단이었다. 발해 부흥국들은 거란을 적대하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기에 이들을 돕게 되면 엄연히 당대 동아시아 최강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강국 거란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취적인 건국 초기라지만 거란 역시 건국 초기의 폭발적인 성장 동력을 뿜어내고 있었던 터라 그 아무리 전쟁 방면으로 잔뼈가 굵었던 왕건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일전을 불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왕건 재위 시기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걸 보면 좀 미묘하긴 하다만, 고구려를 잇는다는 고려의 입장에서 정통성 면에서도 발해가 망한 이후 그 일정 부분을 흡수하는 게 정치적으로도 더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거란이 고려에게 대놓고 시비 걸며 서경 이북을 내놓으라던 성종 시기 고려의 조정은 서희가 나서기 전까지 바짝 쫄아 서경 이북을 내놓기로 결정하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왕건의 재위 당시 고려는 건국 초기인 데다가 밑에는 후백제라는 강적이 존재했음은 물론 시조인 왕건이 견훤에게 참패한 뒤 죽을 뻔하는 등 위기가 있었고 게다가 왕건 사후에도 혜종, 정종 등 연달아 왕들의 미심쩍은 죽음을 겪고 왕건의 호족우대정책으로 호족들의 힘이 원체 강했고 중앙제도나 군사제도 등이 정비되지 않아 그야말로 어수선한 시기였기 때문에 애초에 군사들의 파병은 힘들었다.
또한 왕건이 적극적인 혼인 정책으로 호족들을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확인된 부인만 29명[80] 으로, 이쯤 되면 혼인의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꼭 필요한 가문과 결혼한 것도 아니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부친 오다련은 나주 호족이긴 했으나 당시 행정 구역상으로만 나주인 목포에 있던 인물이었고 고려사에서는 대놓고 오씨를 원나잇 상대로 하려 했으나 오씨가 임신하려고 왕건의 정액을 자신의 음부에 부어넣는 등의 노력해 성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결론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그가 건드렸다가 덜컥 임신한 사람들을 많이 들였다는게 된다. 서전원부인의 경우 그나마도 가문도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부친이 관직을 가지지도 않았다. 혼인 정책이 이렇게 막장이 되자 그 가치의 인플레를 막기 위해서 왕가와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을 정하기도 했고 후유증으로 근친혼이 성행하게 된다.
그러나 왕건이 인물은 인물인지라 김행파의 일화와 같이 호족이 시침으로 딸들을 왕건에게 제공하는 경우가 있었다. 김행파의 딸들이 동침 이후에 왕건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출가하자 왕건이 그대로 환속 못 하게 절에 못박아버리고 결혼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결혼이 꼭 왕건쪽에서 제안한 것이 아니라 호족측에서 제안하기도 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또 극단적인 왕건의 자식들의 성비를 보면 왕건이 건드린 여자 중에서 딸만 낳았거나 자식이 없을 경우 왕건이 책임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 여파로 왕족들의 성씨를 정하는 제도도 펼치게 되는데 이것도 특이한 방식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왕씨와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왕씨 성을 따르지만 딸을 낳으면 모계의 성을 따른다. 가령 드라마화로 인지도가 있는 천추태후의 경우 왕건의 친손녀이지만 성씨는 할머니 신정왕태후 황보씨에서 따 온 황보씨였다. 보통 어머니의 성씨를 잇는 경우가 많았지만 천추태후 자매는 일찍 부모를 잃고 할머니 신정왕태후가 양육해서 할머니의 성씨와 패서호족 세력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인 경종과 근친혼을 하게 된다. 즉, 왕족이 딸을 낳아도 그 딸은 모계의 성씨를 따르게 되며 이리되면 왕건 대부터 시작한 유력한 호족 가문과 지속적으로 혼인동맹을 맺을 수 있고 지위의 인플레도 막을 수 있긴 하다. 문제는 이게 당대 가치관으로 봐도 정상적이지 않다는 거다.
근친혼이 고려시대보다 더했던 신라 왕실에서는[81] 혁거세 거서간의 박씨와 박 성姓의 안에 씨氏의 지파로 편입된 탈해 이사금의 석씨, 태조 성한왕의 김씨, 구 금관가야 왕실인 新 김씨끼리만 혼인하고 신라 중추를 이루던 6부인 이씨, 최씨, 손씨, 배씨, 정씨, 설씨는 정황상 혼인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에 나오지도 않을 만큼 성스러운 혈통을 따져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新 김씨도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고 신라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태종 무열왕통의 양대조상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신라의 철저한 족내혼 풍습은 외부 세력을 유입시키지 않고 왕통의 신성성을 유지하면서 역성혁명 여지를 없애는[82] 데 용이했지만 왕건 시절 고려는 호족연합으로 이루어진 半 봉건국가였기에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과정에서 호족들의 개입여지를 준 이상 별다른 방법이 없던 것도 사실이다.
후계 구도를 엉성하게 잡아서 아들 혜종의 위치를 위태롭게 한 것도 비판을 듣는다. 후견인이라고 붙여준 인물이 박술희인데 박술희는 왕건이 아끼던 인물이긴 했으되 세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계 쪽이 세력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상기했듯 오다련은 진짜 나주 호족도 아니고 세력을 가질만큼 강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돈 가문이라도 세력 있는 가문을 들여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혜종의 아내 의화왕후 임씨는 진천 임씨로 대광 임희의 딸이지만 충주 유씨나 황주 황보씨 같은 집안보다는 격이 내려갔다.
당시 건국 초이고 호족 세력이 강한만큼 황주 및 개경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해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충주나 청주, 광주, 경주 같은 패서지방이 아닌 타 지역에 기반을 둔 유력한 호족과 맺어주어 개경 세력을 견제하도록 해줬어야 했다. 다만 충주나 황주와 같은 유력호족 가문같은 경우에는 당시 그들이 미는 장성한 황자들이 이미 존재했던 만큼 굳이 혜종을 지지할 필요가 없었고, 그 점을 왕건도 알았기에 일찌감치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졌다.[83]
다만 고려사를 보면, 왕건이 승하 직전 당시 옆에 있던 재상이었던 왕규, 염상, 박수문에게 안팎의 중요한 일들 중 오랫동안 결정짓지 못한 것은 경들이 태자(혜종)와 함께 처결한 후 보고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록이 있는데, 만약 이들이 다른 이들의 입김이 아닌 왕건의 의도대로 재상에 임명된 것이라면, 거기에 이들이 박술희와 같은 고명대신이었다면, 당시의 왕건으로써는 나름 괜찮은 방법을 취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왕규는 광주 호족이자 태조 제15비 광주원부인 왕씨廣州院夫人 王氏, 제16비 소광주원부인 왕씨小廣州院夫人 王氏, 혜종 제2비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 王氏의 아버지로 태조와 혜종 모두의 장인이자 왕씨 성을 받을 정도로 나름 능력있는 문신이었고,[84] 염상은 축성 쪽으로 많은 활약을 한 무장 출신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 당시 거의 대부분 사망한 개국 1등 공신들의 다음 서열인 2등 공신이었고, 박수문은 패서 호족인 평주의 호족이자 제27비 월경원부인 박씨月鏡院夫人 朴氏의 아버지로 외척이며 아버지 박지윤은 제25비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 朴氏, 박수경은 제28비 몽량원부인 박씨夢良院夫人 朴氏의 아버지였다. 즉 만일 일들이 왕건이 정한 혜종의 후견세력이라면 중앙의 패서 호족과 지방 호족은 물론 개국 공신이나 외척에 문무 신료까지 모두를 어느 정도 적절하게 아우르기 때문에 정종-광종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쁘지는 않은 조합이었다.
혜종의 혼인도 나름대로 신경을 쓴 편이었다. 태조가 딸 둘을 들인 광주 호족인 왕규의 딸을 혜종 제2비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 王氏으로 삼게 하고 제3비 청주원부인 김씨淸州院夫人 金氏의 집안 청주 김씨淸州 金氏는 건국시절 반란을 종종 일으켜 왕건이 직접 민심수습을 했으며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충주 유씨忠州 劉氏와 더불어 호서의 유력 집단이다. 당장 조선시대 이후의 지명이기는 하지만,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 일대에서 따온 명칭이라는 점에서 호서지역 내에서의 세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정종 제3비 청주남원부인 김씨淸州南院夫人 金氏와 자매관계로 정종과 인척으로 엮이게 만들었다. 제4비 궁인 연씨宮人 連氏는 신라계의 중심지인 경주 호족의 딸로 후광주원부인을 통해 혜종의 후견을 공고히 하는 것과 동시에 청주원부인으로 충주 유씨와 정종을 견제하고 궁인 연씨는 유력세력인 신라계의 포섭에 사용했다.
태조 사후 일찍 사망한 것인지 아니면 왕규의 난에 동반으로 휩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의 기록 이후로 행적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염상을 제외하더라도, 왕규는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혜종과 박술희와 갈등을 벌이다가 빈틈을 보임으로써 결국 혜종이 몰락할 계기를 제공하며 자신 역시도 정종과 왕식렴에 의해 살해당했고, 박수문은 혜종 혹은 왕규나 박술희 등에 대해 불만이 있어 반대편에 합류한 것인지 아니면 누이와 딸, 조카 등을 왕건의 부인으로 들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데다 왕식렴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패서 호족 출신이어서 제거가 안 된 것인지는 몰라도 정종이 즉위한 후에도 동생인 박수경과 축성 작업을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음으로써 혜종 사후에도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니... 결국 어떤 식으로든 간에 장남 혜종의 왕통으로 승계하려고 한 왕건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의 업적과 이후 한국사의 흐름에 미친 영향은 분명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으나 현대 한국인들에게 왕건의 인기는 한국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몇몇 위인들[85] 보다는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듯 하다.[86]
문명 시리즈에서도 두 차례 한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왔지만 한국 유저들은 왕건이 좀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세종대왕이나 광개토대왕을 등장시키라는 반응이 많았고 결국 잘렸다. 그 외에 고액권 지폐 인물 선정 등 일종의 인기 투표가 있을 때도 1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드라마 태조 왕건 하나가 대히트했었지만 그 외에 왕건이 높은 비중으로 등장한 드라마도 하나도 없었고, 은근히 존재감이 부족하다.
7. 숭배
왕건은 사후 종묘[87] , 경령전(景靈殿)[88] , 성용전(聖容殿)[89] , 효사관[90] 에서 1순위로 숭배 받는 대상이 되었고 환구단, 초제[91] 에선 '배제(配帝)'[92] 로써 하늘의 신들과 동급의 제사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 예지 원구단 부분엔 국왕이 하늘의 상제에게 제사 지낼 때 오방제와 태조를 같이 제사 지내는데 이 때 매번 태조의 현릉에 사신을 보내 태조를 환구단에 모시겠다고 알려야 한다고 되있다. 그러고 나면 태조의 신위는 제단의 동쪽에 배치돼 청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둔다.
고려사 악지 중 속악 부분이 있다. 속악은 향악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가락과 우리 말로 만들어진 노래를 말한다. 고려사는 유명한 고려의 '풍입송'이나 고대 삼국의 노래는 전부 속악으로 분류해놨다.
여하간 이 기록된 속악 중 '장단(長湍)'이란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성조(聖祖)[93] 가 백성을 사랑했던 전례를 따라야 한다고 후대의 임금들을 훈계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정확한 가사는 알 수 없는데 고려사의 편찬자들이 우리말로 된 노래는 내용만 적고 실 가사는 빼버렸기 때문. 제목은 고려 장단현, 현 한국 경기도 장단군에서 따왔는데 후대의 군주 중 누군가가 장단현에 갔을 때 그 곳의 악사들이 이 노래를 지어 바쳤다고 제목이 장단이다.
또 속악 중 '송산(松山)'이란 노래도 있는데 이 노래의 내용은 태조가 송산에 자리잡아 개경을 도읍하니 국가가 세대를 거쳐 내려옴을 찬양하는 노래다. 송산은 송악산인데 고구려 이름인 부소산 등으로 불려왔다. 나름 건국군주 답게 태조에 관한 노래가 2개나 있다.
7.1. 왕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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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북한 개성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 10년 8월 1일에 나주에서 발견된 고려 태조의 어진과 동상을 능 곁에 묻었다고 하는데 그 동상으로 보인다.
머리엔 천자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 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동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탓에 사라졌다.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 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 청동상에 입힐 비단 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된다.
위의 상에는 성기가 매우 작게 표현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마음장상이라고 하며 성인으로서 성욕을 초탈. 모습을 표현한 불교적 표현이다.[94] 이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국보 전시회에서는 중요 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나체 상에 옷을 입히는 형태의 상은 토속신앙의 조각상의 양식이라고 한다.#
천안 목천읍에서도, 왕건의 동상으로 추정되는 청동상의 일부(머리부분)이 발굴되었다.# 그 모습이 개성의 왕건 상과 매우 유사하고, 고려초기 양식이라는 점, 익선관에 임금 왕자가 쓰여있다는 점, 왕건과 연관성이 깊은 천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때문에,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사실상 왕건의 동상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8. 태묘 악장, 옥책문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구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이를 통틀어 '구실등가(九室登歌)'라고 한다. 또한 예종 세가엔 이 구실등가를 바치면서 각 방에 서도(西都)에서 찾은 백옥으로 만든 도자기 그릇을 올렸다고 한다.[95]
예종 대 태조 왕건의 찬가 제목은 "태정(太定)"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공민왕 12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하늘의 영부(靈符)[96]
를 받아, 많은 땅을 사랑하고 위로해주셨습니다.그리하여 덕이 삼무(三無)에 맞으시고, 공이 백왕(百王)을 넘으셨습니다.
그 기쁨이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니, 오래 승계되고 누적되었습니다.
그러니 만년동안 삼가, 사사(祀事)[97]
를 받들겠습니다.하늘에 응해 기업(基)[98]
을 여시니, 넓은 계획이 극히 창성하였습니다.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위대하며 당당합니다.
흐르는 빛을 이어받아 두텁게하니, 자손이 천억(千億)이 넘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사를 치루는 것이, 영원히 끝이 없을 겁니다.
공민왕 20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우리 황태조(皇太祖)[99]
께선 경명(景命)[100] 을 가슴에 품으셨으니,삼한(三韓)을 가져 인정(仁政)이 내려지고 얽혔습니다.
허나 후사(後嗣)가 못나서 때때로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부디 음식을 드시고 좋은 일을 당겨오셔서 영원히 계승되게 해주십시오.
고종 안효왕 2년, 태조 왕건에게 시호 용렬(勇烈)을 추가로 올리면서 태묘에 옥책(玉冊)을 같이 올렸다고 한다. 옥책문은:오호라, 황왕(皇王)이시여! 천명을 받아 장수를 부리셨습니다.
그리하여 황량했던 대동(大東)이, 사방(四方)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개국하시어 질서를 세우시니, 다음 황(皇)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니 만년동안 삼가, 복을 내리시고 끝없이 이어주소서.
우리 (태조의) 무예를 펼치셨습니다.
흥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제가 그 위대함을 논하지도 못하며,
어떤 이름도 그 위대함을 담지 못합니다.
9.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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