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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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ird Man (1949)
1. 개요
실제로 스파이로 일한적이 있는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1904~1991)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국 영화로 1949년작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했다. 제작사는 런던 필름스. 배급사는 브리티시 라이언 필름스.
감독은 캐럴 리드(1906~1976).[1]
2. 줄거리
2차대전 후 미국 소설가인 홀리 마틴스(조셉 코튼,1905~1994)는 친구 해리(오슨 웰스)의 연락을 받고 빈에 도착하나, 해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친구의 죽음에 '''가짜 페니실린을 밀매하는 조직'''과 관련된 무언가의 음모가 있다는걸 눈치채지만, 그 음모의 주인공이 친구 해리였던줄은 몰랐다. 주인공은 캘러웨이 소령(트레버 하워드,1913~1988)에게 협조하는데...
결말은 궁지에 몰리는 해리가 '''죽고 싶다'''는걸 간접적으로 알려주자, 주인공이 살해한다
영화 속에서 유명한 씬은 빈의 관람차를 주인공과 해리가 같이 타는 부분으로, 여기서 오슨 웰스가 직접 썼다는 해리의 대사가 유명하다.
다만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이, 스위스 또한 수차례의 외부의 침입과 내전으로 신음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근대 이전의 스위스 연방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기에도 곤란한 편. 더불어 뻐꾸기 시계는 독일이 원조다(...)'''"이탈리아는 30년간 보르자 가문의 압제를 겪었지. 그들은 전쟁, 테러, 살인, 피바람을 겪었지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를 만들어냈어. 스위스는 형제애가 있었지. 민주주의와 평화를 누리며 500년을 보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게 뭐가 있나? 뻐꾸기 시계뿐이지."'''
또한 관람차 속에서 가짜 페니실린을 유통하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던 해리를 향해 그 가짜 페니실린으로 인해 사람이 죽지 않겠느냐며 홀리가 힐난하자, 그에 대한 대답으로 해리가 밑의 점처럼 작게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하는 대사도 유명하다.
"저 밑의 점 중 하나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해보게. 동작을 멈추는 점 한 개당 2만 파운드씩을 벌 수 있다면, 이보게, 자네는 정말 돈을 갖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점들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계산해보겠는가? 소득세도 없는 돈일세. 소득세도 없다고."
3.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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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가로수들이 펼쳐진 길에서 해리의 애인이던 애너(아리다 발리,1921~2006)가 그녀를 기다리던 홀리를 무시하고 말없이 지나가는 이 장면은 영화속 명장면으로 유명하다.[2][3] 원래는 홀리가 해리의 장례식장에서 애너의 손을 잡고 나가는 해피엔딩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캐럴 리드가 거부하고 만든 엔딩이라고 한다. 또한 홀리가 담배를 무는 장면은 배우의 애드리브로, 애너가 홀리를 지나쳤는데도 감독이 컷 사인을 내리지 않자 홀리 역의 조지프 코튼이 담배를 물어 태웠고, 그제서야 컷 사인이 떨어졌다고 한다.
1998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에서 역대 최고 미국 영화 걸작 100에 넣었는데 영국에서는 엄청 분노하고 곧이어 영국 영화연구소(BFI)에서도 1999년 뒤늦게 역대 최고 영국영화 걸작 100에 이 영화를 넣으면서 왜 멋대로 남의 나라 영화를 미국 영화로 선정하냐고 불쾌하게 여기고 미국 영화 연구소에 항의하며 당장 미국 영화 걸작 100에서 빼라고 논쟁을 벌였다. 이 영화는 미국자본과 상관없는 영국자본으로 만들어졌고 판권도 영국 영화사가 가지고 있는 영국 영화이기에 그렇다.
4. OST
안톤 카라스가 작곡하고 치터로 연주한 메인 음악
더불어 술집 악사로 벌어먹기도 하던 오스트리아인 안톤 카라스(1906~1985)가 맡은 음악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년도 안돼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박인 OST 음반이 50만장이 팔렸다.
카라스는 가난한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0대때부터 기계 수습공으로 일하며 살아갔지만 어릴적부터 오스트리아 전통 악기인 치터(Zither)를잘 연주해 빈 음악원까지 졸업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거리 악사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던 그는 1948년 리드 감독이 오스트리아에 있는 Heuriger라는 술집에 들러 한잔하다가 이 술집에서 연주하고 있던 카라스의 연주를 듣고 음악을 의뢰하게 된 것.이 음악 하나로 카라스는 이름을 알리게 된다. 교황인 비오 12세 앞에서 연주도 하고 네덜란드 및 영국, 일본 등까지 해외 공연까지 가며 큰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카라스는 이 음악이 너무 알려지는 바람에 이후로 다른 음악에서 빛을 못보고 1960년대에 은퇴하여 카페에서 치터 연주를 하며 살아갔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 맥주 에비스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었고, 이에 따라 철도역 에비스역의 발차 멜로디로도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