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치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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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2. 연주 스타일과 테크닉
3. 기타 동영상


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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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죄르지,게오르크) 치프라
(헝가리어: Cziffra György[1] / 프랑스어: Georges Cziffra[2])
1921년 11월 5일 ~ 1994년 1월 15일
헝가리/프랑스의 피아니스트. 1968년 프랑스 시민권을 받았다.
매우 강인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가정형편도 어려웠고 출생시부터 계속 병약하여 피아노에 관심을 보였음에도 5세가 되어서야 침발롬 연주자[3]였던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워 연습을 시작했다. 물론 악보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부모가 불러주는 여러 가지 선율, 오페라와 오페레타의 아리아 등을 듣고 왼손의 반주를 만들어 연주하는 수밖에 없었다.[4]
그러다 1년간 음악교사의 지도하에 리스트음악원 오디션을 준비, 9세에 오디션에 응시하였고 당시 치프라의 연주에 매료된 도흐나니는 학칙을 바꿔 가며 입학시켰다. 이후 12세의 나이로 국내에서 첫 독주회를 열고, 13세 때는 연주모습이 TV에 방영되는가 하면, 이후 18세까지는 네덜란드와 스칸디나비아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던 피아니스트였으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헝가리에도 나치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여 헝가리 군대에서 음악원의 학생들에게도 나치 사상을 따르는 군대에 들어갈 것을 종용했었으나 치프라는 단호히 거부했다.
21세 때, 아내 Soleilka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참 골때리는 것이, 첫눈에 반한 나머지 만난 지 며칠만에 부모의 신분증을 '''훔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는데... 우크라이나 부근에서 주둔하던 중, 1년 넘게 피아노를 만져보지도 못했건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독일군 장교들 앞에서 연주를 요구받았다. 슈트라우스, 바그너의 오페라를 주제로 즉흥연주를 했더니, 우연하게도 그곳에 베를린음악원 출신 장교가 있어 "부조니보다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내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소개장을 써 줬다...지만 치프라는 집시혈통인데다 아내가 이집트 출신이기도 했고, 베를린으로 가면 죽음뿐임을 직감하여 장교들을 태우고 온 기차를 돌려 소련으로 몰고 가는 무모한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곧 잡혀 포로가 되었다.
제대 이후, 공산주의 헝가리에서 소련의 피아니스트를 우대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려 국외 탈출을 결심했으나, 또 걸려서 정치범으로 투옥, 대학 건설을 위해 강제 노역을 했는데 이때 일의 강도가, 매일 10시간동안 60kg의 대리석을 운반하도록 하여 오른손 손목의 인대가 늘어나 남은 평생동안 오른손 손목에 밴드를 하고 연주했다.[5] 도망치다가 철조망에 상처를 입어서라고도 한다
이렇게 4년간 피아노를 또다시 만지지도 못하였지만 출소 이후 부다페스트에서 4개월동안 특훈을 실시, 또다시 일자리를 찾았고, 이번에는 그 명성이 문화부 장관의 귀에 들어가 '국가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훙가르톤에서 녹음을 시작하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스위스 투어, 1955년에 작곡가 이외의 음악가로는 처음으로 '''프란츠 리스트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1956년에는 모스크바, 런던, 파리에 투어를 계획하였으나, 10월에 발발한 헝가리 혁명으로 모두 취소되는데...
사실, 혁명 전야에 치프라는 버르토크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심지어 대타로 준비해서 단 6주만에 연주'''(!!!!)'''한 것으로, 치프라가 이후 회고하길 연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연주 후에는 청중이 국가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혁명이 발발하여 대내외적으로 혼란하던 시기에도, 이미 세번의 탈출 실패 경험이 있는 치프라는 탈출을 망설였지만 아내가 설득하여 국경을 넘어 도보로 빈으로 이동하였다.
그가 쓰던 피아노는 가보와 스타인웨이였는데, 70년대 후반부터는 야마하로 바뀐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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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라와 아들.
1942년생인 그의 아들 조르주 치프라 주니어[6]는 1981년 (유서가 발견되어 자살로 추정되는) 아파트 화재로 4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치프라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아, 이후 회고하길 몇년동안 보드카와 와인의 나날을 보냈으며 오케스트라와의 협주는 더이상 하지 않았다. 또한 피아노에 대한 의욕도 떨어져 이후 테크닉이 급격히 퇴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말년에는 급성으로 진행된 폐 소세포암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1994년에 타계하게 된다. 향년 73세.

2. 연주 스타일과 테크닉


치프라는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라 불릴 정도로 현재까지 프란츠 리스트 곡의 레코딩에 있어서 독보적이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도 연주하기 어려워하는 리스트 곡을 매우 빠르고 화려하고 깔끔하게 연주하는 것이 그의 연주 특징이다. 따라서 피아노 기교나 테크닉으로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7] 그의 팬들은 오죽하면 “프란츠 리스트의 환생, 리스트의 영혼이 들어갔다”라고 칭송할 정도. 심지어 리스트와 치프라 모두 같은 국적인 헝가리의 피아니스트다.
음이 뭉개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댐퍼 페달 사용을 매우 자제한다. 손에 매우 무리가 가는 스타일인데, 이 사람은 20세기의 그 기라성 같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손꼽히는 테크니션이다. 손 사이즈가 9~10도 정도로 피아니스트 치고는 특출나게 큰 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로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없이 엄청난 기교를 보여주는데, 굳이 동영상으로 보지 않아도 들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테크닉이 즐비하다.
리스트곡의 레코드는 물론 그 밖의 작곡가의 음반도 많이 있다. 쇼팽의 곡도 많이 연주했지만 호불호는 많이 갈리는 편.[8] 슈만의 연주도 좋은 평가를 얻었다.

그의 전성기에 녹음된 리스트 에튀드 '난쟁이 춤' 연주.
기교적 난이도만 본다면 별로 어려운 곡은 아니다. 순례연보 같은 테크닉적으로 쉬운 작품들을 제외한 리스트의 다른 작품들에 비교했을 때 난이도가 한없이 낮다. 하지만 차원이 다른 예술성과 테크닉적 완벽함으로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것'과 '잘 치는 것'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여준다.[9]
이외에도 유명한 반음계적 대 갤럽## 연주에서 왼손의 엄청난 공간여행과, 전성기가 지난 70년대의 연주지만 즉흥성이 강조되고 4-5번 트릴이 인상적인 라 캄파넬라# (11:34부근, 9분부터 시작), 또한 역시 70년대 연주의 도흐나니의 카프리치오 #에서는 아첼레란도의 끝을 보여주기도 했다.
후반부의 옥타브 구절로 악명높은 헝가리 광시곡 6번#에서는 동음연타를 4-5 손가락을 번갈아하면서 동시에 왼손의 도약을 미친듯이 하는 부분이 이 영상의 백미.(왼손으로 옥타브 연타하는 부분에서도 4-5번 손가락을 번갈아 한다. 참고로, 연주 자체는 다른 실황연주가 더 좋다.)
영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화면으로 느끼기에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리스트의 에스테장의 분수#와 같은 곡에서는 투명한 울림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예상할 수 없는 극한까지 가는 아첼레란도와 크레센도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데뷔 초기에는 페달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면서도 깔끔한 텍스쳐를 만들어내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리스트의 연주에 특히 뛰어나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릴 정도이며, 그의 현란한 기교 중에서도 엄청난 속도의 도약과 옥타브 난사는 그의 대표적인 장기이기도 하다. 극도로 개성적이고 즉흥적인 연주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도 했지만, 독특한 피아니즘의 형성과 시대에 반하는 낭만주의적인 해석이 음악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또한 치프라는 여러 작곡가의 작품들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아람 하차투리안의 《칼 춤》(Sabre Dance)의 편곡이다. 대중적으로도 워낙 많이 쓰인 유명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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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초반부터 미친 왼손 도약과 더불어 자비없는 주 멜로디 선율이 나온다. 이후 오른손 음형 반복과 함께 왼손 멜로디가 나오면서 곡 분위기가 잔잔해지나 싶더니 중반부에서 후반부(재현부)로 넘어갈 때쯤 또다시 미친 테크닉이 시작된다. 처음과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다가 코다로 넘어가는데, 미친 화음 연타에 이어 C# - D# - F# - G# - A# - C# - D# - F#의 옥타브 전개, 끝으로 9도 글리산도로 곡이 마무리된다. 원본과 비교해보자.(오케스트라)

치프라카 재편곡한 왕벌의 비행.
흔히 유자 왕 등 '''괴물같은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를 아예 때려부수듯이 하면서 손이 안 보이는 테크닉을 과시하고 있으면''' 그 곡은 치프라의 편곡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도프스키 같은 케이스는 본인이 직접 많은 편곡을 하기도 하지만... 하여간 이 사람들의 아버지뻘 되는 선배 비르투오소라고 봐도 될 듯하다.
참고로 치프라가 편곡했다는 곡의 악보를 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항간에 떠도는 치프라 에디션은 그의 연주를 '''청음'''해서 옮겨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 악보 중 대부분이 '''미스나 잡음까지 청음'''해서 적힌 바람에 불협화음 떡칠된 악보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부는 보통 버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청음을 반복해서 빼야 할 음을 알아내곤 한다.
빌헬름 텔 서곡의 편곡을 예로 들어보자. 원래는 이렇게 들려야 하지만, 너무 더럽게 청음되는 바람에 악보에는 불협화음이 가득해졌고, 이를 그대로 연주하면 이런 대참사가 벌어진다. 그래서 알캉 전문 NWC 사보 유튜버로 유명한 한국의 Mendes라는 유튜버가 2010년대 초반에 노가다를 감행한 결과, 4악장뿐이지만 실제 녹음과 근접한 버전을 내놓았다.

3. 기타 동영상



아버지는 피아노, 아들은 지휘

연습하는 치프라
여기까지 많이 참고한 글들 2

[1] 치프러 죄르지[2] 조르주 치프라[3] 집시들이 공연에서 사용하던 타현악기[4] 즉, 귀에 의존해서 음악을 익혀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음감 단련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5] 그의 밴드를 보고 스타일리시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6] 아버지는 피아니스트로서 키우고 싶어했지만 주니어는 지휘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부자끼리 자주 오케스트라를 협연했다[7] 기교 외적인 표현력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8] 너무 거칠다거나, 쇼팽으로 유명한 다른 연주자들(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마우리치오 폴리니,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등)과 해석 차이가 심하다거나 등의 이유.[9] 비슷한 다른 예시: 어렸을 때 친 소나티네를 피아니스트가 낸 음반으로 다시 접했을 때[10] 더 정확한 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