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혁명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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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이 파괴한 소련군의 T-34-85 전차. 1956년 10월 부다페스트의 모리츠 지그몬드 광장(Móricz Zsigmond körtér)에서 촬영
헝가리어: 1956-os forradalom
영어: Hungarian Revolution of 1956
러시아어: Венгерское восстание 1956 года(1956년 헝가리 봉기)
독일어: Ungarischer Volksaufstand(헝가리 인민봉기)
폴란드어: Powstanie węgierskie 1956(1956년 헝가리 봉기)
1956년 10월 23일부터 11월 10일까지 17일간 '''공산당 일당독재에 저항하여 노동자, 지식인 그리고 시민들이 일으킨 헝가리민주화 운동이다.'''[1] 냉전 시기 동구권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 중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헝가리는 소련의 몰락이 가시화되던 198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산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루어낸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인 1946년 소련에 의해 헝가리는 공산화되고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2]스탈린주의에 입각한 폭압통치를 펼친다. '소 스탈린' 으로 불리던 라코시는 자신을 '''스탈린의 수제자'''로 자칭하면서 당 내의 반대파들을 티토주의자로 몰아 대규모 숙청을 벌였으며 최소 7000여명에 이르는 당원들이 라코시의 통치 기간동안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라코시는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련의 숙청과 산업 시설 국유화 및 농업 집단화를 강제로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헝가리는 극도의 궁핍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고 공산권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 라코시는 힘을 급속도로 잃게 되고 실질적인 권력을 개혁주의자인 너지 임레(Nagy Imre)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코시는 당서기 직함을 계속 가지고 있었으며 1955년 4월에 이르자 라코시는 너지의 개혁을 훼방하려는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공산화 초기부터 라코시의 정책과 숙청 작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헝가리인들은 이러한 라코시의 움직임에 분노하기 시작했으며 헝가리 내의 긴장감은 고조되기 시작한다.
1956년이 되자 헝가리를 위시한 공산권과 서방간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압력에 의해 라코시는 7월 '형식적으로' 사임하지만 얼마 안 가서 복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에 학생, 작가,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당시 불던 해빙 분위기에 한껏 고무되어 페퇴피(Petőfi)[3] 서클이라는 포럼을 만들어 공산당의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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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혁명 30주년을 기념하여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Cry Hungary: A Revolution Remembered'. 10년 후인 1996년 40주년을 기념하여 후속편이 제작되었는데 민주화 이후 체제 전환 과정에 있던 헝가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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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가운데에 난 구멍은 시민군이 저항의 의미에서 공산당의 상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 가운데에 구멍이 난 헝가리 국기는 이후 혁명의 상징이 되고 해마다 헝가리에서는 10월 23일이 되면 이 국기를 혁명 기념 공식 행사에서 게양한다. 이렇게 국기에 공산당의 상징을 잘라내는 행위는 33년 후 동유럽 각국에서 공산당 독재 정권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재현된다.

1956년 10월 6일에 1949년 라코시 정권에 의해 처형된 러이크 라즐로(Rajk László)[4][5]의 이장식이 열리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기 시작한다. 운명의 10월 23일 오후 부다페스트에서 2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스탈린의 동상이 철거되고 시민들은 스탈린 동상의 머리를 깨부수어 거리에 끌고 다닌다. 같은 날 밤 8시 경 라코시 파 중의 하나인 제1서기장 게뢰 에르뇌 (Gerő Ernő)는 시위대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고 1시간 반이 지난 후 시위대는 위와 같은 내용의 방송이 나간 라디오 부다페스트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총에 맞았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매우 악화된다.
마침내 보안군(ÁVH)에 의해 최루 가스와 기관총을 동반한 유혈 진압이 이뤄지면서 첫 사망자가 발생하고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혁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시민들에 의해 보안군 대원들이 맞아 죽고 다음날 라디오 방송국이 점거된다. 10월 24일 헝가리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입하면서 시민군과 소련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 일부가 시민군에 편입하면서 봉기는 격화된다. 10월 25일에 들어서면서 봉기는 부다페스트뿐만 아니라 헝가리 주요 도시로 번지고 다음날 의사당이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면서 라코시, 게뢰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소련으로 도망가고 너지 임레를 중심으로 한 신정부가 들어선다.
10월 28일부터 11월 4일까지 전투가 일시 중지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신정부는 일당제 폐지,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소련군의 헝가리 철군 요구를 골자로 한 개혁 정책을 발표한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하고 11월 4일 이반 코네프 휘하의 대규모의 소련군을 헝가리에 투입시킨다. 이미 그 전인 11월 3일에는 혁명 정부의 신임 국방장관 말레테르 팔(Maléter Pál)이 휘하 사절들과 함께 부다페스트 근교의 퇴쾰(Tököl)에서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4일 오전 3시에 부다페스트 방면에 소련군 기갑부대가 투입되었으며, 뒤이어 이들은 부다페스트를 조각내어 버리고 모든 교두보를 장악했다. 소련군 전차와 대포에서 뿜어져나오는 포성이 부다페스트 전역을 뒤덮었다. 이날 오전 5시 20분에는 너지가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유 헝가리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헝가리와 전 세계에 알렸다.
헝가리 전역에서 헝가리군이 소련군에 무장해제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에 의하면 9일까지 헝가리군 12개 사단과 2개 기갑연대, 헝가리 공군 전체가 무장해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 군은 종종 저항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헝가리군은 대부분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혁명 진압에 참여하는 것은 거부하며 탈영했으며, 소수는 시민군 사이로 스며들어 소련군과 전투를 벌인다.
부다페스트의 시민군은 몰로토프 칵테일 등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11월 11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약 2주 간에 걸친 혁명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끝나게 된다. 약 3,000여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으며 부상자는 1만 3천에서 2만여명에 달했으며 민간인 희생자는 1569명이었다. 사망자 중 53%는 노동자였고, 사상자의 절반 이상이 30살 미만이었다. 격렬한 저항에 소련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어 699명이 사망하고 1,450명이 부상, 51명이 실종되었다.[6]
너지 임레는 이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대사관을 잠시 나오던 중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루마니아로 압송되고 1958년 6월 16일 비밀리에 처형당한다. 전(前) 헝가리 외무장관 예센스키 게저(Jeszenszky Géza)에 의하면 너지처럼 혁명 이후에 처형된 헝가리인의 숫자는 350명이 넘었다.
너지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고 공산 정권이 붕괴되던 1989년 정식으로 복권되어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서 31년만에 정식으로 장례식이 열려 안장된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명의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운집했고 이는 혁명 발발 이후 33년만에야 이루어진 헝가리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4. 기타


  • 1848년 혁명 당시의 헝가리 독립 봉기도 헝가리 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 서방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소련을 크게 비난했지만 이미 냉전이 굳어진 뒤여서 개입은 하지 않았다. 자칫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 소련이 헝가리에서 이런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데는 서방의 묵인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상황은 12년 뒤 프라하의 봄에서도 반복된다.
  • 1956년 헝가리 혁명은 부다페스트의 봄이라고도 부르며, 헝가리 의거 이전의 폴란드 반소항쟁(바르샤바의 봄)과 더불어 훗날 1968년 프라하의 봄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 토트 일로나(Tóth Ilona)라는 여성 의사가 있었는데 헝가리 봉기때 저항을 하다가 소련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헝가리에서는 그녀를 헝가리의 잔 다르크라고 부른다. #
  • 먼스펠드 페테르(Mansfeld Péter)라는 학생은 17세의 나이로 친구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투옥되었고, 거기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18세 생일날 사형을 당했다. 이후 그는 헝가리 혁명의 상징이 된다.
  • 1956년 헝가리 반소항쟁 당시 북한인 유학생들도 헝가리 시민혁명을 도와줬다고 한다. # ###
  • 당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혁명 실패 이후 고국을 떠나야 했다. 그 중 유명한 사람들을 꼽자면 인텔 사장을 역임했던 앤드류 그로브와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인 크리슈토프 아고터(Kristóf Ágota), 유명 피아니스트 치프러 죄르지, 작곡가 리게티 죄르지 그리고 매직 마자르를 이끌었던 페렌츠 푸스카스[7] 등이 있다.

  •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폴란드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그 스스로도 스탈린주의의 희생자였던데다가 포즈난 항쟁으로 스탈린주의파를 몰아내고 집권했기는 했지만 일단 WTO탈퇴나 일당제 폐지, 소련군의 즉각 철수라는 구호를 내걸지는 않아서 소련의 의해 비토당하는 일 없이 이후로도 10여년을 잘 집권했다. 그러나 후에 차츰 독재적이면서도 무능한 지도자로 전락하게 되었고, 인민들로부터의 지지도가 확 떨어져서 결국 1970년 크리스마스의 항쟁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 당시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 8명이 헝가리의 자유화를 돕자고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8]을 조직해 헝가리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당시만해도 헝가리가 명백한 적성국가인만큼 당연히 정부의 제지로 실패했지만,[9] 당시 이 의용군 멤버였던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유재건 변호사는 훗날 헝가리가 민주화되자 헝가리 정부로부터 각기 '십자대훈장'과 '십자중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 시인 김춘수는 혁명 소식을 듣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로 추모했다. 당시 혁명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15세의 소녀병 셀레시 에리카(Szeles Erika)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렸던 헝가리 혁명 60년 기념 특별사진전에서는 그녀의 사진 옆에 김춘수가 당시에 쓴 시를 같이 전시했다.
  • 한 예술가가 이를 사진예술로 승화시킨 바가 있다. # 낫과 망치의 유무로 대조되는 세월이 느껴진다.
  • 혁명 60주년을 맞은 2016년, 헝가리 현지 보드게임 회사가 당시 혁명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미에서 특별히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제목은 분노의 날들 : 부다페스트 1956(Days of ire : budapest 1956).# 당시 혁명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 장소들을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 헝가리 혁명은 좌우세력 모두에게서 왜곡 받는 사건이기도 하다. 우익측에서는 사건을 반공 의거정도로 취급하며 시위대에서 노동계급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반대로 스탈린주의 좌익진영에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물든 반혁명 운동으로 매도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반스틸린 레닌주의)은 트로츠키주의적 입장에 의거한 반스탈린 봉기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당시 시위대는 스탈린의 동상을 파괴하고 침을 뱉기도 했지만, 레닌주의 저작들을 모아서 불태우기도 했다.
  • 혁명 당시 불렀던 'Avanti ragazzi di Buda(일어나라 부다)'라는 노래는 세리에 A 소속의 SS 라치오가 응원가로 사용하고 있다. K리그에서도 FC 서울포항 스틸러스가 원곡에서 음을 살짝 바꿔서 만들어서 쓰고 있다.

[1] 엄밀히 말하면 헝가리 혁명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은 2건이 더 있다. 1848년과 1919년에 발생했는데 현대에는 헝가리 혁명이라고 하면 보통 1848년과 1956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가리키며 1956년도의 사건이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참고로 2월 혁명의 여파를 틈타 일어난 1848년의 혁명도 당시 러시아 제국에 의해 진압되어 헝가리와 러시아의 질긴 악연을 보여주고 있다.[2] Rákosi가 성이고 Mátyás가 이름이다! 본 문서에서 페렌츠 푸스카스와 앤드류 그로브를 제외한 헝가리인들의 이름은 모두 헝가리식 작명 순서로 기록했다.[3] 19세기 헝가리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페퇴피 샨도르(Petőfi Sándor, 1823~1849)의 이름을 붙여 만들었다.[4] 전형적인 토사구팽... 의 표본격인 인물이었다. 비슷한 인물을 들자면 니콜라이 예조프.[5] 내무부 장관으로 있으며 비밀경찰을 만들고 우익과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여론 조작용 재판을 주도하였다. 후에 외무부 장관으로 영전하였다. 라코시 정권은 권력에 대한 위험으로 보고 티토주의자, 서방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였다.[6] 소련군 사망자는 722명, 부상자는 1,251명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7] 다만 푸스카스는 직접 혁명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스페인에 머무르던 중 혁명 소식을 듣고 스페인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8] "의용군"이라는 개념이 현대에는 낯선 단어지만, 2차대전 전후에는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국군 의용병처럼 타국의 지식인들이나 운동가들이 특정한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의용병으로 참전하는것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듯 하다. 학도의용병 이라고는 했지만 당시 대학생은 지식인의 일종이었으니...[9] 이당시 여권은 사회 고위층만 가지고 있었고, 해외로 출입국하는것 자체가 매우 통제되던 시기였다. 게다가 공산국가로 민주화 운동을 위해 총들고 싸우러 가는 행위가 정권의 눈에는 그다지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