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모 케냐타

 


[image]
'''이름'''
'''음제 조모 케냐타 (Mzee Jomo Kenyatta)'''
'''국적'''
'''[image] 영국령 케냐''' →'''[image] 케냐'''
'''출생'''
'''1897년 1월 1일, [image] 영국령 케냐 가툰두'''
'''사망'''
'''1978년 8월 22일, '''[image]'''케냐 몸바사'''
'''학력'''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인류학과'''
'''직업'''
'''정치인'''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케냐의 정치인이자 초대 대통령. 현재 케냐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으며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1년간 초대 총리를 지냈으며, 1964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14년 간 집권하였다.

2. 생애


케냐의 키쿠유 족(Kĩkũyũ tribe) 출신으로 현 나이로비 부근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 스코틀랜드 성공회에 입문하였고 요리사, 하인 등으로 전진하다 1934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대학에 입학하여 인류학을 전공했다.
1947년 귀국 후 케냐 아프리카 연합(Kenya African Union)이란 정당을 창당하여 초대 총재에 취임했다. 그러나 1953년 마우 마우 운동[1]을 이끌다 체포당하여 몇 년간 옥살이를 치뤄야 했다.
1961년 케냐 입법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3년 12월 12일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케냐 아프리카 국립 연합당(KANU)을 창당하여 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1964년 6월 1일 헌법 개정을 통해 케냐는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케냐식 대통령제를 채택, 이 헌법에 따라 케냐타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냐타는 야당인 케냐 인민 연합당(KPU)를 해산시키고 KANU 일당 독재의 길을 열었다. 1970년 대통령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74년에는 '''종신 대통령'''에 등극했다.
1978년 8월 22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대통령직은 당시 2인자였던 대니얼 아랍 모이 부통령이 승계하였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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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 중심지에 세워진 조모 케냐타 동상.
케냐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케냐의 여러 부족을 하나로 통합시키지 못한 점, 본인에서 시작하여 대니얼 아랍 모이로 이어지는 '''38년'''의 일당 독재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조모 케냐타 당시의 케냐의 경제성장률이 매년 6%를 기록했으니 케냐타 자신은 경제정책은 잘한 축에 든다 할수있지만 후임인 모이가 장기집권하면서 케냐의 경제를 말아먹다보니까 더더욱 그렇다. 다만 어디까지나 경제정책을 상대적으로 잘했다는것이지 따지고보면 도시화가 급진전되면서 도시 근교에 슬럼이 대규모로 조성된다거나 부패가 상당한 빈도로 벌어진다거나 하는식으로 문제가 없었던것은 아니었다.
케냐의 독립 당시부터 1980년까지 케냐 실링의 모든 주화와 지폐에는 케냐타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후 대니얼 아랍 모이의 독재가 끝난 이후인 2003년부터 다시 케냐타의 초상이 모든 화폐에 새겨지고 있다.
케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과 조모 케냐타 대학이 있다.
2013년 제 4대 케냐 대통령에 취임한 우후루 케냐타가 그의 아들이다.
미국의 락밴드 RATM톰 모렐로가 조모 케냐타의 종손자[2]이다.

[1] 1950년대 케냐의 독립 운동[2] 조카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