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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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슈 정벌(長州征伐)은 막부가 군사를 동원하여 조슈 번을 토벌하려던 사건을 말한다. 각각 1864년과 1866년에 일어난 제1차 조슈정벌과 제2차 조슈정벌로 구분한다.
2. 제1차 조슈정벌
시모노세키 전쟁, 금문의 변, 그리고 이케다야 사건까지 조슈는 여러 차례 막부의 전복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이런 여러 차례의 막부 전복 시도에 막부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1864년, 막부는 금문의 변 때 교토 황궁을 공격한 조적(朝敵)인 조슈 번을 토벌할 것을 명령한다.
9월 1일에 출병한 막부군은 지금의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조슈의 군사와 대치한다. 당연히 21개의 번들의 전력을 끌어왔고 명분까지 가진 막부의 정벌군과 이미 금문의 변과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전력 밑천이 탈탈 털려있을 뿐 더러 공공의 적 취급인 조슈의 패잔병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문제는 이 당시 막부의 전력도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 당시 동아시아의 대부분 전근대국가들이 그러하듯 하타모토와 고케닌도 가문 및 신분에 묶여있는 고인 군대였고, 각지의 번들 또한 사쓰마와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원정군을 편성하고 보내는 것 만으로도 안 그래도 쪼달리던 예산이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그 결과 조슈 토벌군의 구성원들은 이미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전의를 상실한 조슈를 멸족시킴으로서 막부만 좋은 일을 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진 지 오래였다.
그러던 중, 사쓰마 번[2] 가 나서서 막부와 조슈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기를 시도한다. 조슈는 막부군에게 금문의 변 당시의 책임자들을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화평을 요청했고, 당시 막부군을 이끌던 사이고 다카모리 또한 조슈를 상대로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수락한다.
그렇게 조슈로부터 금문의 변 당시의 책임자들을 넘겨받은 막부가 1864년 말에 군사를 물리면서 3개월에 걸친 양군의 대치는 종료된다.
2.1. 정벌 이후
이후 조슈는 무쿠나시 토타 주도로 좌막파가 자리잡으면서 도막파를 토벌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슈의 일방적인 항복으로 끝났고 바로 그 전인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도 큰 피해가 없었기에, 정작 조슈가 입은 군사적 피해는 금문의 변 당시의 '''사무라이 중심의 구식''' 에도 원정병력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도막파에 대한 숙청에 반대한 타카스기 신사쿠가 '''일반 백성도 훈련시킨 신식''' 키헤이타이 연합군대를 이끌고 쿠테타를 시도하게 되자 기존 좌막파가 역으로 숙청당하게 되버린다.
그럼 왜 그 동안 막부가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못했냐고 물어본다면 '''제 코가 석자였다.'''
당시 일본은 조슈 이외에도 존황양이로 인한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이 중에선 요시노부의 고향 번인 미토의 텐구당도 끼어 있었다. 거기다가 막부 내에서도 요시노부의 친 조정 정책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기도 했다. 심지어 시모노세키 전쟁에 따른 서양측이 요구한 3백만달러 배상금은 막부의 양이 포고문을 문제삼은 신사쿠덕분에 '실제로 지불여력이 있는' 막부측에 올라가 있었다.
물론 조슈의 추가적인 반란을 막기 위해 항복& 및 순종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을 놓았지만, 조슈 정권이 다시 도막파가 자리잡으며 이 모든 것을 거부하며 정면충돌하기 시작했다. 추가적으로 서양 상인으로 부터 군수물자를 지급받는 일을 막기 위해 철저히 조슈 측과의 거래를 틀어막았지만 사쓰마가 물 밑에서 조슈와 손 잡음으로서 이 조차 무력화 되어버렸다.
이것도 모자라서 서양 함대들이 안세이 5개국 조약에 텐노의 도장을 받기 위해 고베로 내항하는 일이 발생한다. 서양 공사 측은 시모노세키 전쟁과 같은 지속적인 양이파의 난동이 실은 개항에 반대하는 천황이 명분을 제공한 결과물이며, 이는 막부가 일본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 결과물이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덴노와 쇼군은 쌍으로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요시노부는 이 둘과 서양 사이를 중재하는데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소모해야 했다.
3. 제2차 조슈정벌
제1차 조슈정벌이 서로 간의 충돌 없이 대치로만 끝난 후, 막부는 여전히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던 조슈를 다시 한 번 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1865년 3월, 막부는 제2차 조슈정벌을 계획하고 1866년 6월 7일에 막부군의 해군이 야마구치 현의 스오오시마에 포격을 개시하면서 제2차 조슈 정벌의 전쟁의 막이 올라간다.
일단 자신있게 먼저 포문을 연 막부군이었지만, 사실 막부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애당초 이 정벌을 시작한 것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프랑스군으로부터 협조를 약속 받은 것이 계기로, 막부 자체적으로 조슈를 물리칠 자신이 있어서 조슈를 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막부군은 아주 일부만이 프랑스의 신식무기로 무장한 상태였고 교리 및 해당 무기를 통한 실전경험도 적었다. 또한 막부군의 구성은 막부 직속의 자체적인 군대가 아니라, 인근의 다른 다이묘들의 군사를 끌어온 것이었는데, 이 때 조슈 토벌에 동원된 병사들과 다이묘들은 1차 조슈정벌과 마찬가지로 전혀 싸울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조슈군은 번의 명운을 걸고 사쓰마를 중계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대부분이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이를 운용할 키헤이타이는 충실한 지휘부는 물론 시모노세키 전쟁과 속론파와의 전투에서 실전경험을 겪은 뒤었다. 그것도 모자라 조슈의 라이벌인 사츠마는 1차와는 달리 제2차 조슈정벌이 시작되기 직전인 1866년 3월에 막부군을 이탈한 뒤 물 밑에서 조슈를 지원해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막부군의 이른 안습한 상황에 비해 조슈군은 모두가 사기가 충전된 상태였기에, 사실 이 전쟁은 시작하기도 전에 결과가 나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창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죽으면서 막부군은 사실상 모든 전의를 상실하게 된다. 새로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곧바로 조슈군과 화평 협상을 시작하고, 결국 막부군이 조슈에서 아무런 수확 없이 철수하게 되면서 이 전쟁은 조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4. 결과
두 차례에 걸친 조슈 정벌은 사실상 막부의 힘이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 하지 못하였다. 첫번째 정벌 또한 일단은 조슈가 양보하는 형태로 막부가 군사를 물리기는 했지만, 결국은 원래의 전략적 목표인 조슈 제압을 달성하지 못한 막부군의 패배라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두번째 정벌 때 모든 역량을 기울인 막부군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일개 번인 조슈에게 각지에서 털리면서, 막부의 위신을 완전히 떨어뜨렸다. 이 두 차례에 걸친 정벌이 모두 실패하면서, 비단 조슈뿐만이 아니라, 막부는 다른 번들로부터도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고 이는 결국 대정봉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막부군은 이 두차례의 정벌의 실패를 계기로 군대의 근대화를 서두르게 된다. 요시노부의 동생인 아시타케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뒤, 막부군에 '''그제서야''' 신식복장과 무장이 도입되었다. 또한, 당시 일본 주재 프랑스군[3] 의 교관이 막부군을 훈련시키면서 막부군의 근대화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도 한참 늦었고, 이후의 전쟁에서 막부군은 패주만 거듭하다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이 때 근대화된 흔적은 일본군의 창설에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