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스기 신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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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杉晋作(たかすぎ しんさく)
텐포 10년 8월 20일(1839년 9월 27일) - 케이오 3년 4월 14일(1867년 5월 17일)
일본 막말기, 조슈 번의 존황양이 지사. 키헤이타이의 창설자이자 일본의 총리인 아베 신조가 존경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 야마구치현, 하기시 출생. 봉록 200석(현재 가치로 연수입 2천만 엔 정도)의 초슈 번에서 중역으로 일하는 상급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본명은 하루카제(春風)였고, 왜 신사쿠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을 썼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일본의 거의 모든 자료에서는 신사쿠로 통일하여 표기된다.
10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 한자 서당을 거쳐, 1852년 번교 명륜관에 다녔다. 1854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에도에 가서 미일화친조약을 위해 일본을 다시 찾아 온 페리 제독의 흑선(쿠로후네) 사건으로 혼돈에 휩싸인 일본 열도 국내 정세를 체험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에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일본을 외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막부를 무너뜨려도 된다는 과격 사상을 가르치는 쇼인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 서양의 외적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적대하기 보다 오히려 그들의 힘을 알고자 그 나라에 가서 살필 필요가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송하촌숙의 동문이자 죽마고우였던 쿠사카 겐즈이와는 쌍벽을 이루는 수재로 평가받았다. 요시다 쇼인의 평가하길 "식(識)의 타카스기 재(才)의 쿠사카". 두 사람은 라이벌이었는데 쿠사카는 180cm가 넘는 장신이었고, 타카스기는 키가 작은 것이 컴플렉스여서 서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1858년, 번의 명령으로 에도로 유학, 1859년, 스승 요시다 쇼인이 안세이 대옥으로 수감되자 옥중수발을 들었다. 번의 명령으로 초슈 번으로 돌아오는 도중 요시다 쇼인은 참수당했다. 타카스기 일당은 스승의 시체를 빼돌려 장례를 치른다(당연히 범죄). 이때 쇼군만 통행하도록 지정한 다리를 지나간다.
1860년 귀향 후 결혼. 집안에서 하도 날뛰는 타카스기를 안정시키려고 하기에서 가장 미인으로 소문난 마사라는 여인과 결혼시켰다고 한다.
1861년에는 번의 명령으로 해군 수련을 위해 에도로 유학, 토호쿠 지방을 여행하고, 사쿠마 쇼잔과도 교제했다.
1862년, 에도 막부의 시찰단의 모집에 뽑혀 두 달간 청나라 상하이에 가서 처음으로 외국 사정을 접하고,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의 식민지화가 되고 있는 중국의 실태와 태평천국의 난을 보고 귀국했다. 인생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본도 이대로라면 그 큰 중국이 당한 것 이상으로 서양 세력한테 농락당하리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한편, 이때 상하이에서 구입한 S&W 모델2 아미 33구경 6연발 권총을 훗날 사카모토 료마에게 호신용 선물로 준 일화가 있다. (허나 료마가 테라다야 사건에서 그 무기로 방화하였다가 분실하였음)
이즈음 초슈 번은 보수파가 실각하고 존황양이파가 대두한다.
초슈 번은 신사쿠를 강제소환했고, 신사쿠는 머리를 밀고 중이 되어 10년간 근신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1863년 5월,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하고, 타카스기는 애당초 시모노세키 포격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프랑스와 미국이 즉각 보복 공격을 가해오자 정규군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민을 모집해서 6월에 기병대(奇兵隊, 키헤이타이)[1] 를 창설한다. 기병대는 이전까지 사무라이 계급으로 구성된 군대라는 전통을 무시하고, 신분 계급을 가리지않고 일반 서민들도 받아들인 민병대였다. 무진전쟁에서는 신정부군의 일익으로 활약했고, 국민개병제의 원형이 되었다. 일본군 창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창기에는 문제가 많아 기병대가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패한 선봉대를 겁쟁이 무사라고 욕하는 등 대립하다 벌어진 1863년 쿄호지 사건으로 3개월간 기병대 총독에서 물러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병대는 훗날 조슈 번의 강력한 무력이 되었다. 일본군 초대 육군 총감 야마가타 아리토모 또한 기병대 출신이다.
1864년, 과격 존황양이파에 의해 교토에 쳐들어가야자는 움직임이 있을 때는 "지금은 국내에서 전쟁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 초슈 번의 부국강병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렸지만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금문의 변을 일으킨 쿠사카 겐즈이는 패하고 자결한다.
그해 8월에는 서양 연합 함대에 의해 시모노세키 보복 공격이 일어났고, 정전 교섭이 이루워지고, 전후처리의 강화회의에서는 초슈 번 책임자로 참석했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가 통역을 맡았는데, 히코시마를 홍콩처럼 차지하려고 하자, 타카스기는 뜬금없이 고사기를 줄줄 읆으면서 시간을 끌며 논점을 흐리고 없던 일이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 측 통역은 어네스트 사토였는데, 타카스기는 '루시펠같았다.'고 적었다.
1865년, 막부에 의한 제1차 초슈 정벌로 보수파가 정권을 잡고 양이파가 실권, 타카스기는 후쿠오카로 도망간다. 이윽고 양이파에 대해 숙청이 시작되자,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그해 3월 80명의 키헤이타이 연합부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파를 추출하고 실권을 쥔다.
처음에는 키헤이타이의 부대장들은 무모한 계획이라, 누구 한 명 타카스기 편에 서지 않았다. 유일하게 송하촌숙의 후배 이토 히로부미만이 30명의 력사대(스모 선수로 이루워진 키헤타이 소대)와 그의 친구, 훗날 하기의 난을 일으키는 마에바라 잇세이가 이끄는 50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와 함께 싸울 것을 궐기했다. 무기고를 털려고 쳐들어 갔더니 관리들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열쇠를 건네줬다. 이런 일이 세 차례 일어나자, 그동안 눈치만 보던 키헤이타이 부대장들이 합류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맨 나중에야 참여했다.
그리고, 초슈 번의 정치적 최고직 자리에 선배인 기도 다카요시를 불러 모신다. 그리고 군사의 최고 직위는 전략의 귀재 오무라 마스지로에게 맡긴다. 정작 본인은 시모노세키의 개항을 약속한 것과 쿠데타에 대한 보복으로 초슈 번의 양이파와 속론파(보수파)에 의한 암살 위협을 느끼고, 해외로 튈려고 나가사키의 영국인 무역상인 토마스 글로버와 접촉했지만 반대를 받아 좌절되고, 애첩 오우노와 함께 시코쿠로 도망가 두 달간 피신생활을 한다.
1866년 6월, 제2차 초슈 정벌에서는 초슈 번 해군총독으로 막부군의 함대와 싸웠다. 7월 20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고, 사실상 막부군은 패퇴했다.
이후 지병인 폐결핵으로 요양을 하다, 1867년 5월 17일 사망. 당시 29살.
병상에서 남겼다는 사세구 「おもしろき こともなき世を おもしろく」(재미난 일도 없는 세상을 재미있게)가 유명하다.
도도이츠[2] 「三千世界の鴉を殺し、主と添寝がしてみたい」(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고, 서방님과 늦잠[3] 을 자고 싶구나)를 지었다고도 알려져 있다.[4] 그러나 이 시는 타카스기 신사쿠가 아니라 기도 다카요시가 지었다는 설도 있어 확실한 건 알 수 없다.
샤미센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 악명높은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본래는 에도 막부와 싸우던 중 전사한 초슈 번 무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위령제를 거행하는 초혼장이라는 비석 같은걸 초슈 번의 16군데에 건립한게 시초인데, 이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초혼장을 도쿄에 세워 도쿄 초혼사로 출범하는데 이게 10년후 야스쿠니 신사로 이름이 개칭된다.
高杉晋作(たかすぎ しんさく)
텐포 10년 8월 20일(1839년 9월 27일) - 케이오 3년 4월 14일(1867년 5월 17일)
1. 개요
일본 막말기, 조슈 번의 존황양이 지사. 키헤이타이의 창설자이자 일본의 총리인 아베 신조가 존경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현 야마구치현, 하기시 출생. 봉록 200석(현재 가치로 연수입 2천만 엔 정도)의 초슈 번에서 중역으로 일하는 상급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본명은 하루카제(春風)였고, 왜 신사쿠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을 썼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일본의 거의 모든 자료에서는 신사쿠로 통일하여 표기된다.
10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 한자 서당을 거쳐, 1852년 번교 명륜관에 다녔다. 1854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에도에 가서 미일화친조약을 위해 일본을 다시 찾아 온 페리 제독의 흑선(쿠로후네) 사건으로 혼돈에 휩싸인 일본 열도 국내 정세를 체험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에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일본을 외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막부를 무너뜨려도 된다는 과격 사상을 가르치는 쇼인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 서양의 외적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적대하기 보다 오히려 그들의 힘을 알고자 그 나라에 가서 살필 필요가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송하촌숙의 동문이자 죽마고우였던 쿠사카 겐즈이와는 쌍벽을 이루는 수재로 평가받았다. 요시다 쇼인의 평가하길 "식(識)의 타카스기 재(才)의 쿠사카". 두 사람은 라이벌이었는데 쿠사카는 180cm가 넘는 장신이었고, 타카스기는 키가 작은 것이 컴플렉스여서 서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1858년, 번의 명령으로 에도로 유학, 1859년, 스승 요시다 쇼인이 안세이 대옥으로 수감되자 옥중수발을 들었다. 번의 명령으로 초슈 번으로 돌아오는 도중 요시다 쇼인은 참수당했다. 타카스기 일당은 스승의 시체를 빼돌려 장례를 치른다(당연히 범죄). 이때 쇼군만 통행하도록 지정한 다리를 지나간다.
1860년 귀향 후 결혼. 집안에서 하도 날뛰는 타카스기를 안정시키려고 하기에서 가장 미인으로 소문난 마사라는 여인과 결혼시켰다고 한다.
1861년에는 번의 명령으로 해군 수련을 위해 에도로 유학, 토호쿠 지방을 여행하고, 사쿠마 쇼잔과도 교제했다.
1862년, 에도 막부의 시찰단의 모집에 뽑혀 두 달간 청나라 상하이에 가서 처음으로 외국 사정을 접하고,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의 식민지화가 되고 있는 중국의 실태와 태평천국의 난을 보고 귀국했다. 인생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일본도 이대로라면 그 큰 중국이 당한 것 이상으로 서양 세력한테 농락당하리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한편, 이때 상하이에서 구입한 S&W 모델2 아미 33구경 6연발 권총을 훗날 사카모토 료마에게 호신용 선물로 준 일화가 있다. (허나 료마가 테라다야 사건에서 그 무기로 방화하였다가 분실하였음)
이즈음 초슈 번은 보수파가 실각하고 존황양이파가 대두한다.
- 초슈 번은 1838년부터 1863년까지 10차례의 정권 교체가 있었다. 양이파와 개국파의 정쟁으로, 양이파는 이대로는 일본이 망한다며 외세에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주의였고, 개국파는 어차피 서양세력한테는 힘으로 못 이기니까 개국하고 에도막부의 중앙 정치에도 관여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타카스기는 양이파를 '정의파(正義派)', 개국파는 속론파(俗論派)라고 지 맘대로 명명했다. 속론파는 따지고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주장을 했다. 다음해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깨박살이 난 후에야 서양 열국의 힘을 몸소 체험하고 개국 노선으로 돌아섰으니까.
초슈 번은 신사쿠를 강제소환했고, 신사쿠는 머리를 밀고 중이 되어 10년간 근신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1863년 5월,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하고, 타카스기는 애당초 시모노세키 포격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프랑스와 미국이 즉각 보복 공격을 가해오자 정규군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민을 모집해서 6월에 기병대(奇兵隊, 키헤이타이)[1] 를 창설한다. 기병대는 이전까지 사무라이 계급으로 구성된 군대라는 전통을 무시하고, 신분 계급을 가리지않고 일반 서민들도 받아들인 민병대였다. 무진전쟁에서는 신정부군의 일익으로 활약했고, 국민개병제의 원형이 되었다. 일본군 창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창기에는 문제가 많아 기병대가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패한 선봉대를 겁쟁이 무사라고 욕하는 등 대립하다 벌어진 1863년 쿄호지 사건으로 3개월간 기병대 총독에서 물러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병대는 훗날 조슈 번의 강력한 무력이 되었다. 일본군 초대 육군 총감 야마가타 아리토모 또한 기병대 출신이다.
1864년, 과격 존황양이파에 의해 교토에 쳐들어가야자는 움직임이 있을 때는 "지금은 국내에서 전쟁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 초슈 번의 부국강병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렸지만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금문의 변을 일으킨 쿠사카 겐즈이는 패하고 자결한다.
그해 8월에는 서양 연합 함대에 의해 시모노세키 보복 공격이 일어났고, 정전 교섭이 이루워지고, 전후처리의 강화회의에서는 초슈 번 책임자로 참석했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가 통역을 맡았는데, 히코시마를 홍콩처럼 차지하려고 하자, 타카스기는 뜬금없이 고사기를 줄줄 읆으면서 시간을 끌며 논점을 흐리고 없던 일이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 측 통역은 어네스트 사토였는데, 타카스기는 '루시펠같았다.'고 적었다.
1865년, 막부에 의한 제1차 초슈 정벌로 보수파가 정권을 잡고 양이파가 실권, 타카스기는 후쿠오카로 도망간다. 이윽고 양이파에 대해 숙청이 시작되자,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그해 3월 80명의 키헤이타이 연합부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파를 추출하고 실권을 쥔다.
처음에는 키헤이타이의 부대장들은 무모한 계획이라, 누구 한 명 타카스기 편에 서지 않았다. 유일하게 송하촌숙의 후배 이토 히로부미만이 30명의 력사대(스모 선수로 이루워진 키헤타이 소대)와 그의 친구, 훗날 하기의 난을 일으키는 마에바라 잇세이가 이끄는 50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와 함께 싸울 것을 궐기했다. 무기고를 털려고 쳐들어 갔더니 관리들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열쇠를 건네줬다. 이런 일이 세 차례 일어나자, 그동안 눈치만 보던 키헤이타이 부대장들이 합류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맨 나중에야 참여했다.
그리고, 초슈 번의 정치적 최고직 자리에 선배인 기도 다카요시를 불러 모신다. 그리고 군사의 최고 직위는 전략의 귀재 오무라 마스지로에게 맡긴다. 정작 본인은 시모노세키의 개항을 약속한 것과 쿠데타에 대한 보복으로 초슈 번의 양이파와 속론파(보수파)에 의한 암살 위협을 느끼고, 해외로 튈려고 나가사키의 영국인 무역상인 토마스 글로버와 접촉했지만 반대를 받아 좌절되고, 애첩 오우노와 함께 시코쿠로 도망가 두 달간 피신생활을 한다.
1866년 6월, 제2차 초슈 정벌에서는 초슈 번 해군총독으로 막부군의 함대와 싸웠다. 7월 20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고, 사실상 막부군은 패퇴했다.
이후 지병인 폐결핵으로 요양을 하다, 1867년 5월 17일 사망. 당시 29살.
병상에서 남겼다는 사세구 「おもしろき こともなき世を おもしろく」(재미난 일도 없는 세상을 재미있게)가 유명하다.
도도이츠[2] 「三千世界の鴉を殺し、主と添寝がしてみたい」(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고, 서방님과 늦잠[3] 을 자고 싶구나)를 지었다고도 알려져 있다.[4] 그러나 이 시는 타카스기 신사쿠가 아니라 기도 다카요시가 지었다는 설도 있어 확실한 건 알 수 없다.
샤미센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 악명높은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본래는 에도 막부와 싸우던 중 전사한 초슈 번 무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위령제를 거행하는 초혼장이라는 비석 같은걸 초슈 번의 16군데에 건립한게 시초인데, 이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초혼장을 도쿄에 세워 도쿄 초혼사로 출범하는데 이게 10년후 야스쿠니 신사로 이름이 개칭된다.
3. 미디어믹스
[1] 말타고 다니는 기병이 아니라 기이할 기자다. 그래서 이상한 부대, 기이한 부대라고 오해하는 해석이 있는데. 정확히는 기습공격('''奇'''襲攻撃)을 하는 부대. 게릴라라는 뜻이다[2] 都々逸(どどいつ). 구어조로 된 속곡. 가사는 7·7·7·5의 4구로 되었으며, 내용은 주로 남녀간의 애정에 관한 것임.[3] '아침잠'(寝寝)이라고도 함.[4] 이 시구는 은혼/낙양결전편 작중에서 타카스기 신스케의 입을 통해 언급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