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
1. 개요
'''幕府'''
중국과 일본의 무신정권을 지칭. 어원은 고대 중국의 사령관이 천막(幕)을 쳐서 진을 편데서 유래했다. 진을 펴고 전투 상황을 통제하는 곳을 부(府)라고 한다. 부(府-마을 부)는 관청, 관아를 나타내는 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일 모두 대체로 정권, 실권을 모두 거머쥔 무신정권을 뜻하는 말로 변했다. 그렇지만 고려 무신정권에는 막부란 단어를 대체로 쓰지 않는다.
2. 고대 중국의 막부
본래 장군은 상설직이 아닌 임시직이었다. 중앙의 필요에 따라 장군에게 특정 지역의 군사 징발권을 일정 기간 위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런데 전한 후기부터 위진남북조시대까지 내부 반란과 이민족의 침탈이 잦아지면서 자연히 장군의 임명도 빈번해지고 장기화되었다. 그 결과 장군은 점차 특정한 지역의 군사권을 위임하는 상설직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장군이 형성하게 되는 부(府)에는 업무를 보조하기 위한 관리들이 따라 붙게 되었다. 중앙보다 규모는 보잘 것 없지만 장군 휘하에 독자적인 행정 조직이 만들어졌다. 산하 조직이 커지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부를 열도록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 촉한의 경우 제갈량의 승상부 이외에는 부를 열고 있는 신하가 없었다. 황제가 깊이 신임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막부를 맡기지 않으려는 경향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전한 후기부터 어린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 보정대신(輔政大臣)이 임명되었다. 보정대신은 황제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정치권을 사실상 대리하였으며, 군사권을 전권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보정대신은 대장군 직을 겸했다. 이로 인해 보정대신은 자연히 막부를 거느리게 되었다. 보정대신의 막부는 군사와 정치의 실권을 쥐었다.
하지만 보정대신은 상당히 위험한 지위였다. 황제의 대리자인 보정대신이 옥좌를 찬탈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왕망, 조조, 사마씨 집단 등 보정을 맡았던 인사들이 제위를 찬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자연히 황제는 보정대신과 대립하였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는 외척이나 환관 등의 측근을 이용해 대권을 회복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측근 세력은 황제의 권위에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이 달려 있었으므로, 철저한 군현적 중앙 집권제를 통한 황제 1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이념적 기초로 하던 법가 이념을 추구했다. 당시에는 과거 제도 등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등용하는 체계가 미약했고, 관료들은 철저히 황제를 보좌해 실무를 수행하는 도필리(刀筆吏)로 구성되었다.
반면 보정대신은 유교 이념을 따르는 사대부 신료들과 이해 관계를 함께 했다. 사대부들은 환관과 외척 같은 측근 세력의 권위를 제약하고, 향거리선제 등을 통한 유가 경전의 이해 능력에 근거한 등용을 추구했다. 이들은 지방에서는 호족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방에서 자율권을 누리기 위해 황제권을 억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관료계에 진출하는 통로로 향거리선제를 마련했다. 한무제 대 처음 시행된 향거리선제는 지방에서의 명망을 통해 추천을 받아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였는데, '지방에서 명망이 있는 인물'은 자연히 호족, 사대부의 일원이었다. 명망을 통한 등용은 중앙 관료 사회에서는 많은 견제를 받았지만, 자신을 보좌할 폭넓은 세력이 필요했던 보정대신은 '명망'을 통한 등용을 선호했다.
즉 이러한 관계를 종합하면 '''황제 - 측근 세력(외척, 환관) - 법가 - 도필리 - 정규 관료제 - 황제권의 일원적 통치'''와 '''보정대신 - 호족 - 유가 - 사대부 - 막부의 막료 - 지방에 대한 자율권 보장'''의 대립 구도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실제 구도는 이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임조칭제[1] 를 하는 외척이 보정대신을 장악하거나, 외척 왕씨 집안의 왕망이 황제 지위를 찬탈하고 철저히 유가 원칙에 의거한 개혁을 행한 바도 있었다. 하지만 외척의 보정대신 직위 장악은 전자 세력이 후자 세력을 압도한 경우이고, 왕망의 신나라는 찬탈로 연결된 뒤 유가 근본주의에 따라 오히려 황제권의 강화를 시도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어쨌든 임조칭제를 하는 외척 세력에게나 일반 신료로서 보정대신을 맡은 세력에게나 장군직과 막부의 장악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두 세력은 전한 후기부터 후한 말기까지 끊임없이 충돌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당고의 화였다.
하지만 후한 말 당고의 화 이후 환관 세력이 사대부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통해 지방과 중앙을 격리시켜 버린 상황에서, 지방에서는 황건적의 난 등 농민 반란과 이민족의 침탈이 격심해졌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를 상당히 상실한 중앙에서는 이를 해결하지 못했고, 호족 세력이 무장해 군벌로 나아가는 군웅할거가 시작되었다. 후한 정부는 군벌들을 장군으로 임명하면서 지방의 군사적 통제를 맡겼고, 이를 통해 막부의 의미는 다시 변화하게 된다. 중앙의 명으로 군사권을 위임받던 장군이 후한 말 이후에는 지방의 군사권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 한동안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는 삼국지가 펼쳐졌다. 서진에 의해 혼란이 수습된 이후에도 보정대신의 직위는 한동안 중국에서 계속 사용되었고, 이민족들의 중국 침투가 심화되면서 장군직의 필요성은 계속 높아졌다. 그러던 것이 오호십육국시대 이후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전개되면서 장군은 더욱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과 중앙 행정의 무력화로 인해, 중앙과 장군과의 관계는 봉건제와 흡사하게 변화하였다. 이 시대의 장군은 오랜 기간 지방 주둔군을 이끌면서 막부를 통해 독자적인 행정을 집행하였다. 지방 책임자의 직위는 장군에서 점차 도독(都督)으로 변화하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장군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시직이던 장군직은 남북조시대에 위계를 가진 수백 가지의 장군직으로 분화되어 책봉에 이용되었다.
이는 한국, 일본 등 외국에도 적용되었다. 고구려왕은 '정동대장군', 백제왕은 '진동대장군'과 '영동대장군', 야마토의 왕은 '안동대장군' 직위를 받은 바 있다. 모두 동방의 군사권을 위임한다는 의미로, 다른 책봉직에 부수하는 의미이다. 책봉을 받은 나라들이 참군, 사마 등의 중국식 막부 관직도 마련한 바 있지만, 내치에서는 확인된 바 없어 외교용 임시직 혹은 격식을 갖추기 위한 허울뿐인 관직인 것으로 보인다.
3. 일본의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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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중세, 근세시대에 군주인 천황을 상징과 신앙적 존재로 두고, 국가 실권은 쇼군이 다스린 무사 정부체제.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에 존재한 무가(武家)정치의 시행정청(施行政廳) 및 정부를 말한다.
3.1. 개요
기본적으로 수도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막부를 펴고 쇼군[3] 이 대장이 된다. 이하 직역이란 나름의 품계(영외관)을 정해 쇼군의 방계들 혹은 창업 공신들을 앉히고 슈고 다이묘라는 임명직 영주를 각 지방에 보내 지방을 통솔하게 했다. 어떤 군대도 막부의 명령없이 사사로이 움직일 수 없다. 어기면 징벌.
반면 수도 교토는 천황 및 후지와라 씨의 쿠게들에게 수도 교토에 대한 통치권과 기존 율령품계를 인정해 줘 일본 중세, 근세 정치는 이원화된 정부 구성을 띄었다. 대중국, 대고려, 조선 외교를 할 때도 막부가 외교 서신을 썼지만 일황을 대신해 보낸다는 형식으로 상징적 국가원수는 천황으로 두었다.
정이대장군은 영외관의 최고이자 막부의 직역이고 교토 조정의 율령품계는 다른 것이라, 막부에 소속된 사람들은 율령 품계 역시 함께 주어졌다. 가마쿠라 막부의 장군 미나모토 씨는 아직 중앙 귀족으로부터 무신 정권으로 넘어가는 첫 과도기라 쇼군의 율령품계가 정2품 다이나곤 겸 종3품 우근위대장으로 최고위 품계는 아니었다. 중세 후기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은 종1품 좌대신 혹은 우대신까지 올라갔고, 근세 에도 막부의 장군은 정1품 태정대신에 이르게 된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를 시작으로 총 3번의 막정을 거쳤는데, 미나모토 씨와 그 방계 계열이 아니면 정이대장군 자리에 오를 수 없게끔 전통을 만들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씨(足利 氏) 역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씨(德川 氏) 역시 그랬다.[4]
중앙 귀족정을 경계했던 가마쿠라 막부는 동부 일본의 현 가마쿠라시에, 그리고 훗날 에도 막부는 에도에 막부를 차렸으나, 남북조 시대를 정리하고 천황 옹립에 공이 있었던 무로마치 막부는 천황이 있는 교토에 막부를 차렸다.
3.2. 역사적 변천
막부가 권위를 잃고 세력을 잃으면 고다이고 덴노 시대(1318 ~ 1339)처럼 천황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막부를 폐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황과 중앙 귀족이 다시 약해진 혼란기(남북조시대, 1336 ~ 1392)를 겪자 새 천황[5] 을 옹립한 무로마치 막부가 생겨났다.
1467년 경 오닌의 난으로 11년간 내전이 이어져 다시 막부가 권위를 잃자, 총 백 년간 내전을 하게 되었으며, 사무라이 봉건 영주들이 서로 하극상을 반복하는 전국시대가 왔다. 결국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하고 막부를 폐지 하면서 1575년 무로마치 막부가 망했다. 그러다 여러 과도기를 거쳐 다시 에도 막부가 들어서게 된다.
1800년대 중반, 외국 열강들이 압박해 들어오고 지방 세력들의 독자적 교역로 운영등으로 실력을 갖게 되자 막부의 위엄이 다시 떨어진다. 반대 세력들은 '다시 천황에게 정치 권력을 돌려주고 오랑캐들을 타도하자'는 존황양이의 기치를 걸고 막부에 도전했다. 당시 유력 번국(藩國)이었던 사츠마(薩摩)와 쵸슈(長州) 등이 연합해 대정봉환을 이뤘다(薩長, 삿초 동맹).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마지막으로 일본 역사의 막부는 완전히 소멸된다(1867년 11월 9일).
3.3. 유사사례
세계사에서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집권하여 통치한 권신은 많지만 그러한 권신 정권이 권신 자리에만 만족하며 막부처럼 대를 이어 세습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왜냐면 대를 이어 국가를 통치할 정도로 권력이 있는 가문이라면 2인자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얼마안가 그냥 왕위를 찬탈하거나 선양받아 본인 가문이 직접 군주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정도 권력이 없다면 그 권신의 정권도 1대만에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권신인 조조도 그 아들 조비 대에서 헌제에게서 선양을 받아 직접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막부처럼 3대이상 대를 이어 세습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실권자 가문이지만 명목상의 상위 군주는 그대로 놔두고 인정해주는 이런 체제는 흔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나라에도 역사적으로 이런 사례가 없지는 않았는데 한국사에는 고려 무신정권기의 최씨 정권이 있었고 네팔 왕국에는 군주인 샤 왕조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국가를 통치한 라나 가문이 있었다.[6] 후 레 왕조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통치한 찐씨 정권과 아바스 왕조 칼리프를 자신들의 수도인 카이로에 데려와서 허수아비로 옹립해놓고 명목상 칼리프에게서 술탄으로 임명받은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들도 이와 비슷하다. 가장 비슷한 체제는 인도의 마라타 제국인데 교토에 군주인 천황이 있으나 실제 통치는 에도의 정이대장군이 지방에 영주로서 할거한 고위 사무라이인 다이묘들을 통솔하는 형태인 막부 체제와 비교해보면 마라타 제국도 명목상 수도인 사타라에 있는 황제(차트라파티)가 명목상 군주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페슈와(재상)직을 독점하여 세습하는 실권자 바트 가문이 실질적 수도인 푸네의 재상궁에서 권신으로서 각 지방에서 사실상 봉건제후처럼 할거하고 있던 장군들의 가문들[7] 을 통솔하며 통치하는 형태의 체제를 가지고 있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막부와 마라타 제국 모두 말기에 가면 실권자 가문(쇼군, 페슈와)조차도 힘을 잃고 지방 영주 세력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는 것도 비슷하다.[8] 그외에 권신 피핀 가문이 궁재직을 세습했던 메로빙거 왕조 말기의 프랑크 왕국도 봉건제+세습권신 조합이라는 부분은 비슷하다. 다만 피핀 가문의 경우는 상술한 사례들과는 달리 궁재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결국에는 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3.4. 기타
-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지 않고 막부가 계속 집권하는 평행 세계(패러렐 월드)를 다루는 작품들도 종종 보인다(백화요란 사무라이 걸즈, 사무라이 가드, 은혼, 에도로 가자! 등).
[1] 황제에 대한 수렴청정[2] 일본의 막부를 부르는 영어 명칭[3] 원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란 헤이안 시대 일본열도의 동쪽(지금의 토호쿠 지방. 교토 일대가 일본의 중심이던 고대 일본에는 토호쿠 지방에 아이누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이민족이 있었다)으로 정벌가는 자에게 주는 호칭이었다.[4] 그래서 하급무사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일하고도 막부를 열어 쇼군이 되지 못하고 관백이라는 직위로 만족해야 했다.[5] 실제로 메이지 유신기에도 북조보다는 남조가 더 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남조 조정의 충신이었던 자들의 후손이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으로 인정받았다.[6] 라나 가문은 트리부반 왕이 왕정복고를 단행하여 왕권을 되찾아온 1950년까지 이런 식으로 통치했다. 일본 막부보다 거진 100년은 더 갔다(...)[7] 괄리오르의 신데 가문 세력, 구자라트의 바로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에크와드(가이크와드, 가이콰드) 가문의 세력, 인도르의 홀카르 가문 세력, 나그푸르의 본슬레 가문 세력 등등[8] 정치체제는 아니지만 일본의 막부 체제와 마라타 제국 둘다 종교적으로 다신교(힌두교, 신토) 체제였다는 것까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