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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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막부 말기 유항[1] 의 일원인 조슈 번이 칸몬 해협을 봉쇄하고 미국 및 유럽 상선에 포격을 가하면서 1863년과 64년에 걸쳐 촉발된 전쟁.
2. 배경
1863년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쿄토에 상경해서, 고메이 덴노에게 양이(외적을 물리칠 것)를 맹세했다. 언제부터 시작할 거냐고 조정의 양이파 세력은 추궁했고, 그 시작일은 5월 10일로 정하고 막부는 모든 번들에게 양이를 명했다. 그러나 이즈음 막부를 시작해 모든 번들은 지금의 일본의 국력으로 서양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조정도 그 사정은 알고 있었고 막부를 길들이기 위한 조정의 허울 뿐인 정치적 공세였다. 그래서 조슈 번 외에는 모든 번들은 아무도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다.
당시 존황양이 운동의 중심이었던 조슈 번은 정치력으로 조정의 양이파를 움직여서 고메이 덴노로부터 막부에게 양이 명령을 내리게 하는데 성공했고, 그 명령을 받들어 실행에 옮겼다.
조슈는 서양과 일본의 주요 무역로인 시모노세키 해협에 포대를 설치하고 병사 1000명과 증기선을 포함한 4척의 함선을 상주시켜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상선을 무차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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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프랑스 상선의 경우 영문도 모른 채 공격을 당하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기관과 선원 3명을 해안으로 보냈으나 모두 조슈군에 의해 사살 당했다. 네덜란드 상선은 자신들과 에도 막부가 우호관계에 있고 쇄국시에도 계속 교류를 했었던 사례가 있는만큼 공격 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조슈군은 상관없이 공격했고 결국 4명의 사상자와 선체에 큰 피해를 입은 채 겨우 빠져나와 도주했다.
이런 무차별 공격에는 과격한 존왕양이[2] 집단인 코메이지당이 참가했는데, 문제는 이 집단의 수장이 쿠게인 나카야마 타다미츠로 메이지 덴노의 외숙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쿠사카 겐즈이, 타케치 한페이타 같은 존왕양이론자들과 교류했고 그 결과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3. 1차 전투
1863년 6월 1일, 미국 공사관은 즉각 보복을 결의하고 요코하마에 기항하고 있던 전함 USS 와이오밍호를 시모노세키 해협으로 파견했다. 와이오밍호는 혼자서 시모노세키에 배치된 조슈군 함선 4척을 궤멸시키고 해안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 무쌍을 찍고 복귀한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수병 6명이 사망하고 4명의 부상자를 냈고, 조슈군은 사망자 8명, 부상자 7명의 피해를 냈다.[3]
사흘 후 프랑스 동양함대 소속 함선 2척이 시모노세키 해협에 들어와 맹포격으로 해안 포대를 재차 침묵 시키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점거했다. 그러나 조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포대를 복구하고 제멋대로 다른 번의 영지를 점령해 새로운 포대를 만드는 등 해안봉쇄를 이어갔다.
4. 조슈의 실각
이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다. 조정의 권위는 실추됐고 당황했다.
한편, 공무합체 운동을 추진하던 사쓰마는 사쓰에이 전쟁 이후, 영국과 협조관계를 맺고 영국의 최신 기술과 무기를 공급받아 부국강병 노선을 추진하고 있었다. 양이론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먼저 싸워 봤던 사쓰마번의 중론이었다.
1863년 8월 18일, 사쓰마는 조정과 막부를 조율해서 그동안 조슈 양이파에 의해 놀아났던 조정의 양이파와 조슈 세력을 교토에서 쫒아낸다.(8월 18일의 정변)
이에 반발한 조슈는 천황에게 직소하기 위해(고메이 덴노를 납치해서 조슈 번으로 데려가려고 했다고도 한다)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했지만 사츠마 번과 아이즈 번 등의 연합군대에게 압살당했다(금문의 변). 덤으로 감히 천황이 살고 있는 교토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조적(朝敵 - 조정의 적. 역적)으로 낙인찍힌다.
5. 2차 전투
1864년 7월, 조슈의 해안봉쇄로 인해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무역이 마비되어가고 일본의 양이 성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영국 공사관은 서양의 군사력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본보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에 조슈 응징을 위한 연합군 결성을 호소한다. 이에 따라 시코쿠에서 영국 9척, 프랑스 3척, 네덜란드 4척, 미국 1척 등 총 17척, 해병대 2000명 포함 총 병력 5000명으로 이루어진 4개국 연합함대가 편성되었고 총사령관으로는 사쓰에이 전쟁에 참전한 바 있었던 영국의 쿠퍼 제독이 임명되었다.
조슈는 전쟁을 각오했지만 교토에 주력을 보냈기에 수비병력도 2000명 내외로 소수였고 대포 수량도 모자라 나무로 대포 모형을 만들기도 할 만큼 비참했다. 8월 5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연합함대는 저항하는 조슈의 해안포대를 차례차례 분쇄하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철저하게 대포를 파괴했다. 또한 일부 부대는 내륙의 시모노세키 시내까지 진격해서 조슈의 수비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사흘 후인 8일, 조슈군은 패배했고 모든 해안포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칸몬 해협봉쇄의 핵심이던 히코섬까지 점령 당해 완전히 백기투항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자 숫자는 연합군이 더 컸다. 연합군은 72명의 사상자와 2척의 전함에 손실을 입은 반면 조슈는 47명의 사상자를 냈다.
6. 이후
정전 교섭이 이뤄졌고, 교섭의 책임자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맡았다. 조슈는 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받았는데, 우리들은 그런 거액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막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항변하여 이 배상금은 구경하고 있던 에도 막부가 지불하게 되었다(...).[4] 덤으로 시모노세키항구를 막부의 허가도 없이 개항하기로 했다. 이 항구의 개방 덕분에 외국과 자유로운 교역으로 조슈 번은 부국강병의 길을 걷는다.
1865년 7월, 에도 막부는 조적(역적)이 된 조슈 번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했고(제1차 초슈 정벌), 협상의 대표를 맡았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3명의 양이파 가로(家老)를 할복시키고 4명의 참정(參政)을 참수, 반막부파 세력을 제거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막부군을 철수시킨다. 이후 막부군이 철수하고 남은 세력에 대한 숙청이 이루워지자, 이대로는 조슈 번이 망할 것이라고 판단한 다카스기 신사쿠가 시모노세키에서 기헤이타이와 궐기군을 거병,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도막파가 조슈의 정권을 잡았다.
막부는 2차 토벌을 계획하고 다시 조슈에 군대를 보냈지만, 그 유명한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사쓰마와 삿초 동맹이 결성되어 막부군을 이기게 되고 이는 무진전쟁에 의한 에도 막부 멸망과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다.
여담으로 4개국 연합군 결성을 주도한 주일 영국 공사 러드퍼드 올콕[5] 은 일본에서의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훈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어 당시 영국 외무부 장관 존 러셀에 의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프랑스는 전리품으로 이 전쟁에서 얻은 대포 몇 기를 박물관에 갖다 놓았는데, 이후 일본이 시모노세키의 해안포대를 재현하면서 여기에 전시하고자 대포들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했었던 적이 있다. 물론 이는 거부되었고 결국 일본은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해야만 했다.
한편, 코메이지당 수령인 나카야마 타다미츠의 처분 때문에 에도 막부는 골치를 썩혀야 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 인간이 차기 천황의 외숙이니까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서 일단 유배를 보냈는데 그 곳 관리의 도움으로 탈옥, 또다시 존왕양이 운동을 벌이다 결국 1864년 막부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7. 같이 보기
[1] 웅번(雄藩). 막부를 제외한 다른 번들 중 특별히 강해서 시국에 상당한 영향을 준 번들을 말한다.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의 공통점은 막부의 개혁과 비슷한 타이밍에 개혁정책을 펴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는 점이다. 주로 재정난 타개, 식산흥업, 군사력 강화 등으로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하급 무사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여 막말의 혼란기에서 대활약하게 된다.[2] 천황을 받들고 서양을 멀리한다.[3] 함선이 4척이나 박살났음에도 조슈 측 사상자가 적은 이유는 정박 시켜 놓은 빈 배였기 때문이었다.[4] 사실 명목상으로 각 번에게 양이 명령을 내린건 막부였으니 덤탱이를 쓸 수밖에 없었다.[5] 이 사람은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최초로 일본의 공예품을 출품하여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때 출품된 물건은 유럽에 충격을 주어 자포니즘 사조가 일어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이를 보고 일본(막부)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이유는 두 가지로 첫째는 올콕이 소개한 물건이 일본 입장에선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점, 둘째는 그게 인기를 끌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